천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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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문방은 1684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설립된 천문 연구 기관으로, 7세기에 설립된 음양료의 역할을 계승했다. 조쿄력의 제작을 시작으로, 역법 개정, 천문 관측, 지도 제작, 서양 학문 연구 및 번역 등의 활동을 수행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도쿄 대학의 과학 연구의 전신이 되었다. 천문방은 세습되는 직책이었으나, 실력 있는 천문학자를 등용하여 운영되었으며, 간세이력 개발, 일본 최초의 근대 지도 제작 등 업적을 남겼다. 1869년 폐지되었으며, 역법에 관한 권한은 문부성으로 이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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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도 시대의 천문학 - 조쿄력
조쿄력은 시부카와 슌카이가 선명력의 오차를 보정하여 만든 일본의 역법으로, 에도 시대에 약 70년간 사용되었으며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에도 시대의 천문학자 - 시부카와 하루미
에도 시대의 바둑 기사이자 천문학자, 역학자인 시부카와 하루미는 안이 가문 출신으로 바둑 기사로 활동하다가 천문학과 역학에 몰두하여 일본 최초의 독자적인 역법인 조쿄력을 완성하고 막부 천문방에 임명되어 천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지구본과 천구의를 제작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 야마지가 - 야마지 아이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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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문방의 설립과 변천
전통적으로 천문 연구와 역법 개정은 7세기 덴무 천황에 의해 설립된 음양료에서 수행되었다. 1684년 도쿠가와 막부가 선명력에서 조쿄력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면서, 달력 발명가인 시부카와 슌카이가 책임자로 임명되어 천문방이 설립되었다.[1]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유럽의 현대 자연 과학을 흡수하기 위해 천문방에 많은 투자를 했고, 그 결과 뛰어난 학자, 수입된 자료 및 장비가 축적되었다. 간세이력은 1798년 타카하시 요시토키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그의 제자 이노 타다타카는 일본 최초의 포괄적인 근대 지도를 완성했다.[3]
천문학 책임자 직책은 공식적으로 세습되었지만, 실제로는 실력주의를 띠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천문방은 도쿄 대학 과학 연구의 직접적인 전신 중 하나가 되었다.[2]
분카 8년 (1811년) 다카하시 가게야스의 제안에 따라 외국 기관으로 만서화해어용이 설치되었고, 이는 안세이 3년 (1858년) 번서조소 설치로 이어졌다.
2. 1. 설립 배경
원래 편력(編暦) 작업은 조정의 음양료 관할이었고, 도미카도 가문이 담당했으나, 조쿄 원년 (1684년)에 시부카와 하루미가 조쿄력을 작성하여 기존의 선명력에서 전환되자, 막부는 사사 봉행 아래에 천문방을 설치하고, 같은 해 12월 1일 (1685년 1월 5일)에 하루미가 천문방(역직명으로는 '천문직'이라고도 함)에 취임했다. 이후 편력 작업의 실무는 막부로 넘어가 천문방에서 행해졌다. 처음에는 사사 봉행 아래에 위치했지만, 엔쿄 4년 1월 23일 (1747년 3월 4일)에 와카도시요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봉록은 100俵였으며, 그 외에 역료로 5~10인 부양분이 추가되었다.천문방은 세습제였지만, 때로는 천문학에 정통한 인물을 추가하거나 양자 입양하여 세습을 허용했기 때문에, 막말까지 시부카와 가문, 이카이 가문, 니시카와 가문, 야마지 가문, 요시다 가문, 오쿠무라 가문, 다카하시 가문, 아다치 가문의 8개 가문이 임명되었으며, 상황에 따라 우수한 인재가 등용되었다. 다만 가계가 단절된 가문도 있었고, 니시카와 죠켄(아들 마사야스가 도쿠가와 요시무네에 의해 천문방에 초빙됨)나 다카하시 요시토키의 자손도 막말까지 계승되지 못하여, 최종적으로는 시부카와 가문, 야마지 가문, 아다치 가문만이 존속했다.
2. 2. 위치와 시설
1685년 시부카와 하루미가 천문직으로 임명된 다음날, 우시고메(오늘날의 도쿄도 신주쿠구)에 '''사천대'''(司天台)를 설치했다. 사천대는 1689년(겐로쿠 2년) 혼쇼(오늘날의 도쿄 도 스미다구)로, 1701년(겐로쿠 14년) 간다스루가다이(오늘날의 도쿄 도 지요다구)로 이전했다. 하루미 사후인 1746년(엔쿄 3년) 간다사쿠마 정(오늘날의 도쿄 도 지요다 구), 1765년(메이와 2년) 우시고메후쿠로 정으로 옮기고 1782년(덴메이 2년) 아사쿠사(오늘날의 도쿄 도 다이토구)로 옮기면서 '''아사쿠사 천문대'''(浅草天文台)라고 부르게 되었다. "천문대"라는 호칭이 이 때 처음 사용되었다. 1842년(덴포 13년) 시부카와 히로나오의 노력으로 구단(오늘날의 도쿄 도 지요다 구)에 천문대를 하나 더 세워서 천체관측에 종사했다. 1869년(메이지 2년) 천문방, 아사쿠사 천문대, 구단 천문대가 모두 폐지되었다.
아사쿠사 천문대에서
2. 3. 관할 변화
조쿄 원년 (1684년) 시부카와 하루미가 조쿄력을 작성하여 기존의 선명력에서 전환되자, 막부는 사사 봉행 아래에 천문방을 설치하고, 같은 해 12월 1일 (1685년 1월 5일)에 하루미를 천문방(역직명으로는 '천문직'이라고도 함)에 임명했다. 이후 편력 작업의 실무는 막부로 넘어가 천문방에서 행해졌다. 처음에는 사사 봉행 아래에 있었지만, 엔쿄 4년 1월 23일 (1747년 3월 4일) 와카도시요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봉록은 100俵였으며, 그 외에 역료로 5~10인 부양분이 추가되었다.천문방은 세습제였으나, 때로는 천문학에 정통한 인물을 추가하거나 양자 입양을 통해 세습을 허용하기도 했다. 막말까지 시부카와 가문, 이카이 가문, 니시카와 가문, 야마지 가문, 요시다 가문, 오쿠무라 가문, 다카하시 가문, 아다치 가문의 8개 가문이 임명되었으며, 상황에 따라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기도 했다. 다만 가계가 단절된 가문도 있었고, 니시카와 죠켄(아들 마사야스가 도쿠가와 요시무네에 의해 천문방에 초빙됨)이나 다카하시 요시토키의 자손도 막말까지 계승되지 못하여, 최종적으로는 시부카와 가문, 야마지 가문, 아다치 가문만이 존속했다.
분카 8년 (1811년) 다카하시 가게야스의 제안에 따라 외국 기관으로 만서화해어용이 설치되어, 안세이 3년 (1858년) 번서조소 설치까지 이어졌다. 막말에는 편력 외에도 천문, 측량, 지지, 서양 서적 번역 등도 관장했다. 도쿄 대학의 기원 중 하나이다.
3. 천문방의 역할과 활동
천문방은 에도 시대에 천문 관측, 역법 제정, 지도 제작, 서양 학문 연구 및 번역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던 기관이다.
7세기 덴무 천황에 의해 설립된 음양료는 전통적으로 천문, 역법을 담당하던 기관이었으나, 1684년 도쿠가와 막부가 선명력에서 조쿄력으로 전환하면서 시부카와 하루미를 책임자로 임명하여 천문방을 설치하였다.[1]
천문방은 측량, 지지(地誌) 및 유럽 학술 서적 번역도 담당했다. 번역 부서(반쇼 와게고요, 蛮書和解御用)는 분리되어 반쇼 시라베쇼가 되었고, 이는 도쿄 대학 인문학 연구의 전신 중 하나가 되었다.[2]
8대 쇼군 요시무네는 유럽의 현대 자연 과학을 흡수하기 위해 천문방에 많은 투자를 하여 뛰어난 학자, 수입된 자료 및 장비가 축적되었다. 1798년 타카하시 요시토키가 간세이력을 개발하였고, 1821년 그의 제자 이노 타다타카가 일본 최초의 포괄적인 근대 지도를 완성했다.[3]
천문학 책임자는 세습되었지만, 뛰어난 천문학자들이 입양되기도 하여 실력주의를 띠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천문방은 도쿄 대학 과학 연구의 전신 중 하나가 되었다.[2]
3. 1. 천문 관측 및 역법 제정
덴무 천황이 설립한 음양료에서 전통적으로 천문 연구와 역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1684년, 도쿠가와 막부는 선명력에서 조쿄력으로 전환하며 시부카와 하루미를 책임자로 임명했다.[1]8대 쇼군 요시무네는 유럽의 자연 과학을 흡수하기 위해 연구소에 투자했고, 간세이력은 1798년 타카하시 요시토키에 의해 개발되었다.[3] 그의 제자 이노 타다타카는 일본 최초의 근대 지도를 완성했다.[3]

천문학 책임자는 세습되었지만, 실력 있는 천문학자들이 입양되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쿄 대학 과학 연구의 전신 중 하나가 되었다.[2]
조정의 음양료 관할이었던 편력(編暦) 작업은 1684년(조쿄 원년) 시부카와 하루미가 조쿄력을 작성하면서 막부 사사 봉행 아래 천문방이 설치되었고, 하루미가 천문방에 취임했다. 처음에는 사사 봉행 아래에 있었지만, 1747년(엔쿄 4년) 와카도시요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봉록은 100俵였으며, 역료로 5~10인 부양분이 추가되었다.
천문방은 세습제였지만, 천문학에 정통한 인물을 추가하거나 양자 입양하여 세습을 허용했기 때문에, 막말까지 시부카와 가문, 이카이 가문, 니시카와 가문, 야마지 가문, 요시다 가문, 오쿠무라 가문, 다카하시 가문, 아다치 가문의 8개 가문이 임명되었다. 1811년(분카 8년) 다카하시 가게야스의 제안으로 외국 기관 만서화해어용이 설치되어 번서조소 설치까지 이어졌다. 막말에는 편력 외에도 천문, 측량, 지지, 서양 서적 번역 등도 관장했다. 도쿄 대학의 기원 중 하나이다.
시부카와 하루미가 천문방에 임명된 다음 해인 1685년(조쿄 2년)에 우시고메 와라마치에 '''사천대'''를 설치했다. 1689년(겐로쿠 2년)에 혼조, 1701년(겐로쿠 14년)에 간다 스루가다이로 이전한다. 1746년(엔쿄 3년)에 칸다 사쿠마초, 1765년(메이와 2년)에 우시고메 후쿠로초로 옮겨 1782년(텐메이 2년)에 아사쿠사의 '''아사쿠사 천문대''' ('''반력소'''라고도 함)로 이전했다. 이때 처음으로 "천문대"라는 호칭이 채용되었다. 다카하시 요시토키와 하ザ間重富가 간세이 개력에 종사한 것은 우시고메 후쿠로초·아사쿠사 시대였으며, 이노 다다타카가 다카하시 요시토키 밑에서 천문학·측량학을 배운 것도 아사쿠사 천문대였다. 그 후, 1842년(덴포 13년)에 구단자카 위에도 천문대가 설치되었다. 1869년(메이지 2년)에 천문방과 함께 아사쿠사·구단의 양 천문대가 폐지되었다.
3. 2. 지도 제작
덴무 천황에 의해 7세기에 설립된 음양료는 전통적으로 천문 연구와 역법 개정을 담당했다. 1684년 도쿠가와 막부는 823년 동안 사용되어 오류가 누적된 선명력에서 조쿄력으로 전환하며, 시부카와 하루미를 책임자로 임명했다.[1]이 연구소는 측량, 지지(地誌) 및 유럽 학술 서적 번역도 담당했다. 번역 부서(蛮書和解御用, 반쇼 와게고요)는 분리되어 도쿄 대학 인문학 연구의 전신인 반쇼 시라베쇼를 형성했다.[2]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유럽의 현대 자연 과학을 흡수하기 위해 연구소에 투자하여 학자, 자료, 장비가 축적되었다. 간세이력은 1798년 타카하시 요시토키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태양과 달의 타원 궤도를 고려했다. 그의 제자 이노 타다타카와 그는 1821년에 일본 최초의 포괄적인 근대 지도를 완성했다.[3]
천문학 책임자 직책은 공식적으로 세습되었지만, 실제로는 실력주의를 띠었다.
3. 3. 서양 학문 연구 및 번역
덴무 천황에 의해 설립된 음양료에서 전통적으로 천문 연구와 역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1684년 도쿠가와 막부는 선명력에서 조쿄력으로 전환하며 시부카와 하루미를 책임자로 임명하여 천문방을 설립했다.[1]천문방은 측량, 지지(地誌) 및 유럽 학술 서적 번역도 담당했다. 번역 부서(반쇼 와게고요, 蛮書和解御用)는 분리되어 반쇼 시라베쇼가 되었고, 이는 도쿄 대학 인문학 연구의 전신 중 하나가 되었다.[2] 분카 8년 (1811년) 다카하시 가게야스의 제안으로 외국 기관인 만서화해어용이 설치되었고, 안세이 3년 (1858년) 번서조소 설치로 이어졌다.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유럽의 현대 자연 과학을 흡수하기 위해 천문방에 많은 투자를 했다. 간세이력은 1798년 타카하시 요시토키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그의 제자 이노 타다타카와 함께 1821년 일본 최초의 포괄적인 근대 지도를 완성했다.[3]
4. 천문방의 가문
1684년 시부카와 하루미가 조쿄력을 작성하여 천문방이 설치된 이후, 여러 가문이 천문방을 담당했다. 천문방은 세습제였지만, 천문학에 정통한 인물을 추가하거나 양자를 입양하여 세습을 허용하기도 했다. 막말까지 시부카와 가문, 이카이 가문, 니시카와 가문, 야마지 가문, 요시다 가문, 오쿠무라 가문, 다카하시 가문, 아다치 가문의 8개 가문이 천문직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가계가 단절된 가문도 있었고, 니시카와 조켄이나 다카하시 요시토키의 자손은 막말까지 계승되지 못하여 최종적으로는 시부카와 가문, 야마지 가문, 아다치 가문만이 존속했다.
4. 1. 주요 가문
- 시부카와 가문(渋川家)
시부카와 하루미의 역법 개혁 공적으로 1684년(조쿄 원년) 천문직에 임명되었다. 입양을 반복하면서도 막말까지 계승되었다.
| 순서 | 이름 |
|---|---|
| 1 | 시부카와 하루미 |
| 2 | 히사타다 |
| 3 | 히로타다 |
| 4 | 히로나리 |
| 5 | 노리요시 |
| 6 | 미쓰히로 |
| 7 | 마사키요 |
| 8 | 마사테루 |
| 9 | 가게스케 |
| 10 | 히로나오 |
| 11 | 스케카타 |
| 12 | 요시노리 |
- 이카이 가문(猪飼家)
이카이 마사이치가 1716년 시부카와 히로타다의 편력작업에 참여하고 1736년 천문직에 임명되었다. 1741년 마사이치가 사망하면서 후계 없이 단절되었다.
- 니시카와 가문(西川家)
나가사키의 천문가인 니시카와 조켄의 아들 니시카와 마사요시가 1724년 천문직에 임명되었다. 이후 2대 지속되었다.
| 순서 | 이름 |
|---|---|
| 1 | 니시카와 마사요시 |
| 2 | 주쿄 |
- 야마지 가문(山路家)
야마지 누시즈미가 호랴쿠력 역법개혁 때 시부카와 노리요시, 니시카와 마사요시를 도와 참여하고 1764년 천문직에 임명되었다. 2대인 유키요시는 천문직을 세습하지 않았지만 3대 요시쓰구 이후 막말까지 천문직을 세습했다. 요시쓰구의 현손이 역사학자 야마지 아이잔이다.
| 순서 | 이름 |
|---|---|
| 1 | 야마지 누시즈미 |
| 2 | 유키요시 |
| 3 | 요시쓰구 |
| 4 | 유키타카 |
| 5 | 아키쓰네 |
| 6 | 아키요시 |
| 7 | 아이잔 |
- 요시다 가문(吉田家)
사사키 나가히데(후에 요시다 히데나가로 개명)가 호랴쿠력 개혁 때 니시카와 마사요시의 아들 주쿄의 작업에 참여하고, 1764년 천문직으로 임명되어 달력 수정사업을 맡았다. 이후 막말까지 천문직을 세습했다.
| 순서 | 이름 |
|---|---|
| 1 | 요시다 히데나가 |
| 2 | 히데마스 |
| 3 | 히데카타 |
| 4 | 슈모 |
- 오쿠무라 가문(奥村家)
오쿠무라 구니토시가 1765년 역법 개정에 참여하고 1787년 천문직에 임명되었다. 1대로 단절.
- 다카하시 가문(高橋家)
다카하시 요시토키가 1795년 천문직에 임명된 것으로 시작되었다. 요시토키의 장남 가게야스가 지볼트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했기 때문에 다카하시가는 2대로 단절되었다. 차남 가게스케는 시부카와가에 입양되었다.
| 순서 | 이름 |
|---|---|
| 1 | 다카하시 요시토키 |
| 2 | 가게야스 |
- 아다치 가문(足立家)
아다치 노부아키라가 간세이력 편찬 당시 다카하시 요시토키의 조수로 참여하고 1835년 천문직으로 임명되었다. 막말까지 2대에 걸쳐 천문직을 맡았다.
| 순서 | 이름 |
|---|---|
| 1 | 아다치 노부아키라 |
| 2 | 노부유키 |
5. 천문방의 폐지와 그 이후
대정봉환과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츠치미카도 하루오는 조정에 역법 관련 권한을 츠치미카도가로 되돌리고 천문방을 폐지할 것을 요청했다. 이로 인해 천문방은 폐지되었고, 음양료의 책임자는 시부카와 요시노리나 야마지 아키쓰네가 아닌 츠치미카도 하루오가 맡게 되었다.[1]
1869년(메이지 2년), 츠치미카도가의 지휘 아래 달력 제작이 진행되었으나, 같은 해 하루오가 사망하면서 츠치미카도가의 가독은 당시 11세였던 하레나가가 잇게 되었다. 1870년(메이지 3년) 천문 및 역도 관련 권한은 문부성 천문역도국(天文暦道局)으로 이관되었고, 이후 천문역도국은 도쿄로 옮겨져 성학국(星学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성학국에는 이전 천문방에서 일했던 시부카와 요시노리도 임용되었다. 그해 말, 츠치미카도 하레나가는 대학어용계에서 면직되었고, 츠치미카도 음양사 가문이 역법에 대해 가지고 있던 특권도 폐지되었다.[1]
5. 1. 폐지 과정
대정봉환,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음양사 공경 당주 쓰치미카도 하루오가 조정에 탄원하여 역법 관련 권한을 쓰치미카도가로 되돌리고 천문방은 폐지되었다.[1] 음양료 책임자에는 천문방 관련자 시부카와 요시노리, 야마지 아키쓰네 대신 쓰치미카도 하루오가 임명되었다.[1] 이후 쓰치미카도가 지휘 아래 1869년(메이지 2년) 달력 제작을 진행했으나, 같은 해 하루오가 사망하면서 쓰치미카도가 가독은 당시 11세였던 하레나가가 잇게 되었다.[1] 1870년(메이지 3년), 천문 및 역도 관련 권한은 문부성 천문역도국(天文暦道局)으로 이관되었고, 같은 해 천문역도국은 도쿄로 옮겨져 성학국(星学局)으로 개칭되었다.[1] 성학국에는 구 천문방 막신이었던 시부카와 요시노리도 임용되었다.[1] 그해 말 쓰치미카도 하레나가는 대학어용계에서 면직되고, 쓰치미카도 음양사 가문의 역법 관련 특권도 폐지되었다.[1]5. 2. 도쿄 대학으로의 계승
대정봉환,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음양사 공경의 당주 쓰치미카도 하루오가 조정에 탄원하여 역법에 관한 권한을 쓰치미카도가로 되돌리고 천문방은 폐지되었다. 음양료의 책임자에는 천문방 관련자인 시부카와 요시노리나 야마지 아키쓰네가 아닌 쓰치미카도 하루오가 임명되었다. 이후 쓰치미카도가의 지휘하에 1869년(메이지 2년) 달력 제작을 진행했으나 같은 해 하루오가 사망, 쓰치미카도가의 가독은 당시 11세에 불과한 하레나가가 잇게 되었다. 1870년(메이지 3년), 천문 및 역도에 관한 권한은 문부성 천문역도국(天文暦道局)으로 이관되었고 같은 해 천문역도국은 도쿄로 옮겨져 성학국(星学局)으로 개칭되었다. 성학국에는 구 천문방 막신인 시부카와 요시노리도 임용되었다. 그해 말 쓰치미카도 하레나가는 대학어용계에서 면직되고, 쓰치미카도 음양사 가문의 역법에 관한 특권도 폐지되었다.[2]6. 천문방에 대한 평가와 현대적 의의
(결과물이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참조
[1]
웹사이트
利用案内・情報 ≫ ホットニュース ≫ 2010-06-15 :: 国立科学博物館 National Museum of Nature and Science,Tokyo
https://www.kahaku.g[...]
2024-03-23
[2]
웹사이트
東京大学は2027年に創立150周年を迎えます
https://www.u-tokyo.[...]
2024-03-23
[3]
웹사이트
知の職人たち-南葵文庫に見る江戸のモノづくり-
https://www.lib.u-to[...]
202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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