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안공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순안공 왕종은 고려 원종과 경창궁주 유씨의 아들로, 충렬왕의 이복 동생이다. 1263년 검교수사도순안군개국후에 봉해졌으며, 1269년 부왕 원종을 대신하여 국사를 임시로 맡기도 했다. 1273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총애를 받았고, 순안공으로 진봉되었다. 이후 어머니 경창궁주가 충렬왕을 저주하려 했다는 혐의로 1277년 유배되었으나, 1283년 개경으로 소환되었다. 1295년 이후 행적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고려의 공작 - 왕면
왕면은 고려 의종의 사위로, 수사공 등의 관작을 받았으며, 순후하고 침착한 성품으로 의술에 정통하여 종기를 치료하는 등 헌신적인 면모를 보였다. - 고려의 공작 - 최충헌
최충헌은 1149년에 태어나 1219년에 사망한 고려 시대의 무신으로, 무신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최씨 무신 정권을 수립하고 여러 왕을 옹립하며 도방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다가 몽골의 침략 시기까지 최씨 정권을 이끌었다. - 고려의 후작 - 염제신
염제신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원나라 관료 생활 후 고려로 돌아와 기철 일파 숙청과 홍건적 격퇴에 공을 세워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공민왕의 후궁 신비 염씨의 아버지로서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 고려의 후작 - 김부식
신라 왕족 후예인 김부식은 고려 중기 문신이자 학자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진압에 공을 세웠으며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 13세기 한국 사람 - 충선왕
충선왕은 고려 제26대 왕으로 즉위 후 원나라 간섭 속에서 심양왕에 봉해졌으며, 고려와 심양을 동시에 통치하는 동군연합을 이루었으나 개혁 정치는 실패하고 티베트로 유배되었다. - 13세기 한국 사람 - 원종 (고려)
원종은 고려 고종의 장남으로 몽골과의 강화 조약을 위해 원나라에 갔다가 즉위하여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으며, 임연의 쿠데타와 삼별초의 항쟁을 겪고 개경으로 환도한 후 1274년에 사망했다.
순안공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작위 | 후, 공 |
별칭 | 순안후(順安侯) |
휘 | 왕종(王悰 또는 王琮) |
가문 | |
왕가 | 고려 왕조 |
왕조 | 고려 왕조 |
아버지 | 고려 원종 |
어머니 | 경창궁주 유씨 |
친척 | 고려 고종(친조부), 안혜태후(친조모), 신안공(외조부), 가순궁주(외조모) 등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고려 |
사망지 | 고려 |
사망일 | 미상 |
기타 | |
활동 시기 | 13세기 |
직함 | 고려의 왕자 |
2. 생애
1263년 형과 함께 '''순안군'''(順安郡開國侯)의 군호를 받았다.[2] 1269년부터 몽골로 간 아버지 원종을 대신해 임시로 조정의 업무를 맡았고, 1273년에는 사신 자격으로 원나라를 방문했다.[3][4] 이때 원나라 황제는 그를 총애하여 500근(斤)과 800필의 ''저포''(苧布)를 하사했는데, 이는 이복형 충렬왕에게 주어진 것보다 훨씬 많았다.[5] 이후 '''순안공'''(順安公)으로 봉해졌다.[5]
1277년 원종 사후 충렬왕이 즉위했으나, 경창궁주와 순안공이 맹인 승려 종동을 시켜 충렬왕을 저주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6] 순안공은 종종 소찬을 지었고, 어머니 경창궁주는 종동에게 액막이법을 물어 의식을 행하고 땅에 "전찬"(奠饌)을 묻었다.[7]
이에 충렬왕은 즉시 승려의 추종자들을 조사하게 했고, 김방경, 허공, 조인규를 파견해 경창궁주와 종동을 직접 조사하게 했다.[5] 이들이 자백하지 않자, 충렬왕이 직접 심문했다. 며칠 후 대신들이 이들의 용서를 구했지만, 충렬왕은 이복 형제인 순안공 가문의 혈통을 끊으려 했다. 대신들은 원나라에 요청했고, 황후 쿠툴루그 켈미쉬는 강력하게 체포를 주장하여 결국 경창궁주의 집을 파괴했다. 이로 인해 순안공이 가지고 있던 많은 재산은 모두 쿠툴루그 켈미쉬의 소유가 되었다.[9]
이 사건은 원나라에 보고되었고, 1277년 경창궁주는 폐위되어 평민으로 강등되었으며, 순안공과 종동은 구음도로 유배되었다.[10][11] 6년 후인 1283년 종동은 수도 개경으로 소환되었다. 1295년 충렬왕은 순안공을 위해 재산을 축적하고 속관(屬官)을 설치했다.[5]
2. 1. 가계 및 왕자 시절
고려 원종과 원종의 제2비 경창궁주 유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은 왕, 이름은 종(悰[12] 또는 琮[13]), 본관은 개성이다. 충렬왕의 이복 동생이기도 하다.[14]어머니 경창궁주는 왕족 출신으로, 현종의 아들 평양공 기(平壤公 基)의 7세손인 신안공 전(新安公 佺)의 딸이다. 경창궁주의 어머니는 희종과 성평왕후 임씨의 딸인 가순궁주이다.[15] 왕종의 친조모인 안혜태후 유씨도 희종과 성평왕후의 딸이니, 왕종의 친조모와 외조모는 친자매간이 되는 셈이다.
1263년(원종 4년) 음력 8월 13일 친형 시양후 태(珆)와 함께 작위를 받아 검교수사도순안군개국후(檢校守司徒順安郡開國侯)에 책봉되었다.[12] 1269년(원종 10년) 음력 12월 19일부터는 몽고로 떠나는 부왕 원종을 대신해 임시로 국사를 맡아보기도 하였다.[16] 1273년(원종 14년) 음력 윤6월에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17] 이때 원나라 황제가 왕종을 총애하여 백은 500근과 저포(苧布) 800필 등을 하사하였다. 당시 하사받은 물건은 세자(충렬왕)에게 하사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18] 이후 '''순안공'''(順安公)으로 진봉되었다.
1277년(충렬왕 3년) 음력 7월 29일[13], 충렬왕에게 내관 양선대와 대수장 등으로부터 왕종과 관련된 보고가 올라왔다. 그 내용은 "경창궁주가 자신의 아들 순안공과 함께 맹인 승려인 종동을 시켜 주상(충렬왕)을 저주하고, 왕종으로 하여금 공주(제국대장공주)에게 장가들게 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순안공은 평소 잔병치레를 자주 하여 어머니인 경창궁주가 종동에게 액(厄)을 막는 방법을 묻고, 초제(醮祭)[19]를 지내고 전찬(奠饌)을 땅에 묻은 것이 화근이었다.[18]
이 보고를 받은 충렬왕은 곧바로 사람들을 시켜 승려 종동을 국문하고, 다음 달인 음력 8월에는 김방경, 허공, 조인규 등을 시켜 경창궁주와 왕종을 직접 국문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자복을 하지 않자, 이튿날 충렬왕이 직접 왕종을 친국하기도 하였다. 며칠 후 대신들이 경창궁주와 왕종을 용서해주기를 청하였고, 충렬왕은 경창궁주의 집을 적몰하는 선에서 끝내려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 역시도 상국인 원나라에 물어보고 지시를 받아서 행해야 한다고 하자, 충렬왕은 원나라에 이 일을 알리고 그 결정을 받기로 한다. 하지만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강력하게 적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경창궁주 모자의 집을 적몰하였다. 원래 왕종은 부왕 원종의 총애를 받아 재산이 많았는데, 이 재산은 제국대장공주가 모조리 차지하게 되었다.[18][20]
이 사건의 전말은 원나라에 낱낱이 보고되었고,[21] 결국 원나라의 지시에 의해 1277년(충렬왕 3년) 음력 9월 16일 왕종의 어머니 경창궁주는 폐위되어 서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였고, 왕종과 승려 종동은 구음도[22]라는 섬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23] 왕종은 6년 뒤인 1283년(충렬왕 9년)[24] 음력 8월 2일에야 개경으로 소환되었다.[25] 이후 1295년(충렬왕 21년) 왕종을 위해 부를 세우고 속관(屬官)을 두었다.[18]
2. 2. 충렬왕과의 갈등 및 유배
1277년(충렬왕 3년) 음력 7월 29일, 충렬왕에게 경창궁주와 관련된 보고가 올라왔다. 경창궁주가 자신의 아들 순안공과 함께 맹인 승려 종동을 시켜 충렬왕을 저주하고, 왕종을 제국대장공주와 혼인시키려 한다는 내용이었다.[18] 순안공은 평소 잔병치레가 잦아 어머니 경창궁주가 종동에게 액막이 방법을 묻고 초제를 지낸 것이 화근이었다.[18][19]충렬왕은 곧바로 사람을 시켜 종동을 국문하고, 음력 8월에는 김방경, 조인규 등을 시켜 경창궁주와 왕종을 직접 국문하였다. 이들이 자복하지 않자, 다음날 충렬왕이 직접 왕종을 친국하기도 하였다. 며칠 후 대신들이 경창궁주와 왕종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고, 충렬왕은 경창궁주의 집을 적몰하는 선에서 끝내려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 역시도 상국인 원나라에 물어보고 지시를 받아서 행해야 한다고 하자, 충렬왕은 원나라에 이 일을 알리고 그 결정을 받기로 한다. 하지만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강력하게 적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경창궁주 모자의 집을 적몰하였다. 원래 왕종은 부왕 원종의 총애를 받아 재산이 많았는데, 이 재산은 제국대장공주가 모조리 차지하게 되었다.[18][20]
이 사건의 전말은 원나라에 낱낱이 보고되었고,[21] 결국 원나라의 지시에 의해 1277년(충렬왕 3년) 음력 9월 16일 왕종의 어머니 경창궁주는 폐위되어 서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였고, 왕종과 승려 종동은 구음도라는 섬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23][22]
왕종은 6년 뒤인 1283년(충렬왕 9년) 음력 8월 2일에야 개경으로 소환되었다.[25][24] 이후 1295년(충렬왕 21년) 왕종을 위해 부를 세우고 속관(屬官)을 두었다.[18]
2. 3. 사망
1295년(충렬왕) 이후 순안공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어 그 자세한 생애는 물론이고, 언제 죽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 수 없다.[1] 호는 '''순안공'''(順安公)이다.[1]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친조부 | 고종 | 1192년~1259년, 고려의 제23대 왕 |
친조모 | 안혜태후 유씨 | ?~1232년, 희종과 성평왕후 임씨의 딸. 외조모 가순궁주의 친언니 |
아버지 | 원종 | 1219년~1274년, 고려의 제24대 왕 |
이복형 | 충렬왕 | 1236년~1308년, 고려의 제25대 왕. 원종과 순경태후 김씨의 아들 |
외조부 | 신안공 전 | ?~1261년, 현종의 8세손 |
외조모 | 가순궁주 | 생몰년 미상, 희종과 성평왕후 임씨의 딸. 친조모 안혜태후 유씨의 친동생 |
어머니 | 경창궁주 유씨 | 생몰년 미상, 원종의 제2비 |
형 | 시양후 태 | ?~1256년 |
남매 | 경안궁주 | 생몰년 미상 |
남매 | 함녕궁주 | 생몰년 미상 |
참조
[1]
웹사이트
원종 소생 왕자
http://db.history.go[...]
2021-12-30
[2]
서적
高麗史 Volume 8
https://books.google[...]
Shinseowon
2001
[3]
문서
《고려사》권26〈세가〉권26 - 원종 10년 12월 - 왕이 몽고로 가면서 순안후 왕종에게 국사를 맡기다
[4]
문서
《고려사》권27〈세가〉권27 - 원종 14년 윤6월 - 원에 사신을 보내 책봉을 하례하다
[5]
웹사이트
원종 왕자 순안공 왕종
http://db.history.go[...]
2022-01-10
[6]
웹사이트
경창궁주와 왕종이 저주를 행한다는 고변이 들어오다
http://db.history.go[...]
2022-01-10
[7]
문서
It refers to making an altar and offering sacrifices to the Holy Spirit
[8]
문서
《고려사절요》제19권 - 충렬왕1 1277년
[9]
서적
고려사 - 열정과 자존의 오백년 - Volume 1
https://books.google[...]
Deullyeok
2014
[10]
문서
《고려사》권28〈세가〉권28 - 충렬왕 3년 9월 - 원 황제의 지시에 따라 경창궁주를 폐위시키고 왕종을 유배보내다
[11]
웹사이트
왕제 종을 구음도에서 소환하다
http://db.history.go[...]
2022-01-10
[12]
문서
《고려사》권25〈세가〉권25 - 원종 4년 8월 - 왕자들을 개국후로 책봉하다
[13]
문서
《고려사》권28〈세가〉권28 - 충렬왕 3년 7월 - 경창궁주와 왕종이 저주를 행한다는 고변이 들어오다
[14]
웹인용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순안공〉항목
http://people.aks.ac[...]
2012-07-01
[15]
문서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왕전〉항목
https://terms.naver.[...]
[16]
문서
《고려사》권26〈세가〉권26 - 원종 10년 12월 - 왕이 몽고로 가면서 순안후 왕종에게 국사를 맡기다
[17]
문서
《고려사》권27〈세가〉권27 - 원종 14년 윤6월 - 원에 사신을 보내 책봉을 하례하다
[18]
문서
《고려사》권91〈열전〉권4 - 순안공 왕종
[19]
문서
단을 만들어 성신(星辰)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20]
웹인용
《고려사절요》제19권 - 충렬왕1 1277년
http://db.itkc.or.kr[...]
2018-10-30
[21]
문서
《고려사》권28〈세가〉권28 - 충렬왕 3년 8월 - 원에 왕종 저주사건의 전말을 알리다
[22]
문서
《[[고려사]]》〈지〉에서는 [[강화도]]에 속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그 자세한 위치를 알 수 없다.
[23]
문서
《고려사》권28〈세가〉권28 - 충렬왕 3년 9월 - 원 황제의 지시에 따라 경창궁주를 폐위시키고 왕종을 유배보내다
[24]
문서
그러나 《고려사》〈열전〉 권4 - 순안공 왕종 항목에는 [[1285년]](충렬왕 11년)에 소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5]
문서
《고려사》권29〈세가〉권29 - 충렬왕 9년 8월 - 왕제 종을 구음도에서 소환하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