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메온 이바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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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메온 이바노비치는 이반 1세의 장남으로, 1340년 모스크바 대공이 되었다. 그는 킵차크 칸국의 허락을 받아 대공이 되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시메온은 벨리키노브고로드와의 갈등에서 승리하여 세금을 징수했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관계를 통해 평화를 유지했다. 1340년대 흑사병이 확산되면서 1353년 사망했으며, 그의 유언장은 모스크바에서 종이에 쓰인 최초의 문서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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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의 테오그노스토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출신으로 키예프와 모든 루스의 관구장 주교가 되었으며, 모스크바를 주교좌로 선택하고 노브고로드와 모스크바 대공국 사이의 화해를 중재했으며, 러시아 정교회의 특권을 지키고 교회들을 복구했으며, 19세기에 시성되었다. - 전 루스의 대공 - 드미트리 돈스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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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1세는 모스크바 공작으로 즉위하여 블라디미르 대공의 지위를 얻어 모스크바 대공국을 러시아의 중심지로 만들고, 킵차크 칸국과의 외교, 재정적 수단, 트베리 공국과의 갈등 승리, 러시아 정교회 중심지 이전 등을 통해 모스크바 대공국의 성장과 러시아 국가 형성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 1316년 출생 - 진우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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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메온 이바노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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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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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시메온 이바노비치 |
다른 표기 | 시메온 이바노비치 세묜 이바노비치 |
별칭 | 고르디 (Gordy) |
통치 | |
모스크바 대공 | 재위 기간: 1340년 3월 31일 – 1353년 4월 27일 대관식: 1340년 3월 31일 이전: 이반 1세 이후: 이반 2세 |
블라디미르 대공 | 재위 기간: 1340년 3월 31일 – 1353년 4월 27일 대관식: 1340년 3월 31일 이전: 이반 1세 이후: 이반 2세 |
개인 정보 | |
배우자 | 아우구스타 아나스타시아 에우프락시아 (스몰렌스크) 마리아 (트베리) |
배우자 유형 | 배우자 |
자녀 | 8명 (더 보기...) |
가문 | 류리크 |
가문 유형 | 왕조 |
아버지 | 이반 1세 |
어머니 | 헬레나 |
출생일 | 1317년 9월 7일 |
출생지 | 모스크바, 모스크바 공국 |
사망일 | 1353년 4월 27일 (35세) |
사망지 | 모스크바, 모스크바 공국 |
매장지 | 대천사 성당 |
종교 | 동방 정교회 |
자녀 | |
자녀 정보 | 8명의 자녀 |
칭호 | |
모스크바 대공 | 1340년 - 1353년 |
블라디미르 대공 | 17대, 1340년 - 1353년 |
2. 생애
이반 1세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340년 아버지 이반 1세가 사망한 후 형제들 및 다른 공작들과의 경쟁 끝에 킵차크 칸국의 우즈베크 칸으로부터 야를릭(칙서)을 받아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다.[1][2] 그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의례적인 칭호(ὁ ἐπί τραπέζης ὀφφίκιος|에피 트라페제스 오피키오스grc)도 받았다.[3]
대공으로서 시메온은 노브고로드 공화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며, 1340년에는 토르조크 지역의 징세권을 확보했다.[5] 또한,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알기르다스와 외교 및 군사적 대립 관계에 있었다.[6][12] 그는 킵차크 칸국의 자니베크 칸에게 리투아니아의 위협을 강조하며 칸국의 지원을 얻어내기도 했다.[12]
1346년 남부 러시아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점차 북상하여 1353년 모스크바를 덮쳤다. 이 재앙으로 시메온과 그의 두 아들, 동생 안드레이, 그리고 키예프의 테오그노스투스 대주교가 사망했다.[9][15]
시메온은 죽기 직전 수도 서원을 하고 소존트(Sozont)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그의 유언장은 러시아에서 종이에 쓰인 최초의 문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시신은 모스크바 크렘린의 대천사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2. 1. 초기 생애
이반 1세 대공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1340년 아버지 이반 1세가 사망하자, 시메온은 니즈니노브고로드에 주둔 중이었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형제 안드레이, 이반과 함께 골든 호드로 가서 대공 작위를 인정하는 우즈베크 칸의 칙서(야를릭)를 얻으려 했다. 당시 트베리의 콘스탄틴과 수즈달의 콘스탄틴 등 다른 공작들도 칸에게 조공을 바치며 계승권을 주장했으나,[1] 시메온은 칸의 측근에게 뇌물을 주는 등 경쟁에서 승리하여 칙서를 확보했다.[2] 경쟁자들은 시메온의 우위를 인정해야 했고, 우즈베크 칸은 시메온과 그의 후손들에게 호의를 보였다.[1] 시메온은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으며,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의례적인 ὁ ἐπί τραπέζης ὀφφίκιος|에피 트라페제스 오피키오스grc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시종이나 스톨니크와 유사한 지위였다.[3]대공 즉위 직후인 1340년, 시메온은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군사적으로 대립했다. 그는 노브고로드의 도시 토르조크에서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주장했으나, 토르조크의 보야르들은 시메온의 세금 징수원들을 감금하고 노브고로드에 도움을 요청했다. 시메온은 키예프의 테오그노스투스 대주교 및 노브고로드에 적대적인 다른 공작들과 연합하여 노브고로드를 압박했다. 그는 "노브고로드인들은 누구와도 상의 없이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며, 모든 러시아를 존중하지 않고 대공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노브고로드의 우스튜즈나와 벨로예 오제로 침공을 명분으로 삼았다.[4] 모스크바 연합군이 노브고로드 영토로 진군하자, 토르조크 주민들이 보야르에 반발하여 모스크바 군대에 합류했다. 결국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시메온에게 연간 1000RUB 상당의 토르조크 지역 세금을 양도했고, 시메온은 기존의 시민 헌장을 존중하기로 합의했다.[5]
1341년, 모스크바 연합군이 해산된 틈을 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알기르다스 대공(당시 비테브스크 공작)이 스몰렌스크 공작과 동맹하여 모자이스크를 포위했다. 그러나 게디미나스 대공의 사망 소식으로 알기르다스는 시메온이 군사적으로 대응하기 전에 철수해야 했다.[6] 얼마 후 시메온의 군주인 우즈베크 칸도 사망했고, 그의 아들 자니베크 칸이 형제들을 제거하고 칸위에 올랐다. 시메온은 테오그노스투스 대주교와 함께 다시 골든 호드로 가서 자니베크 칸으로부터 대공 지위를 재확인받았다. 하지만 자니베크 칸은 교회로부터 돈을 얻어내기 위해 테오그노스투스를 인질로 잡았고, 대주교는 600RUB을 지불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7]
시메온은 세 번 결혼했다. 1333년에는 리투아니아의 알기르다스 대공의 여동생 아유스타(세례명 아나스타샤)와 결혼했다.[8] 1345년 그녀가 사망하자, 스몰렌스크의 에우프락시아와 재혼했으나, 결혼 후 그녀가 저주를 받아 "매일 밤 죽은 듯이 보였다"는 이유로 곧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에우프락시아는 이후 포민스키 공작과 재혼했다. 시메온은 마지막으로 트베리의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와 결혼했지만, 그 사이에서 태어난 네 아들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다.[9]
1340년대 내내 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의 군사 활동 및 내부 정치 혼란으로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힘은 약화되었다. 노브고로드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던 시메온은 오히려 약화된 공화국을 이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347년, 노브고로드가 스웨덴의 침공에 맞서 도움을 요청했을 때, 시메온은 동생 이반과 로스토프의 콘스탄틴을 보냈지만, 이들은 노브고로드를 위해 싸우기를 거부했다.[10] 시메온 자신은 골든 호드 내에서 리투아니아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데 집중했으며, 리투아니아 왕위를 노리던 두 명의 반역 공작을 보호하기도 했다.[11] 그는 자니베크 칸에게 리투아니아의 성장이 호드에 가장 큰 위협이라고 설득했다.[12] 결국 자니베크 칸은 시메온의 주장을 받아들여 리투아니아 사절들을 시메온에게 넘겨주었다.[12] 시메온은 알기르다스와 휴전을 맺고 포로를 석방했으며, 리투아니아 공작과 루스인 귀족 여성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교도였던 알기르다스와 정교회 신자인 트베리의 울리아나의 결혼은 교회법상 논란이 있었으나 테오그노스투스 대주교의 승인 하에 이루어졌고, 이 결혼에서 미래의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인 요가일라가 태어났다.[13]
1351년-1352년, 시메온은 스몰렌스크 지역의 작은 도시들의 지배권을 두고 알기르다스와 다시 무력 충돌을 벌였다. 그러나 알기르다스가 전면전보다는 협상을 선호했기 때문에 분쟁은 큰 전쟁으로 번지지 않았다. 첫 협상은 리투아니아 측에 의해 결렬되었지만, 결국 시메온은 분쟁 지역의 도시들을 모스크바의 영향권 아래 두는 데 성공했다. 이 군사 활동은 시메온의 생애 마지막 공식 활동이 되었다.[14]
흑사병은 1346년 이미 남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기록되었다. 1349년에는 스칸디나비아, 1352년 초에는 프스코프, 같은 해 8월에는 노브고로드까지 확산되었고, 프스코프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흑사병은 리투아니아와 루스 북동부 지역으로도 퍼져나갔다.[15] 1353년 마침내 모스크바에도 흑사병이 닥쳐왔고, 테오그노스투스 대주교, 시메온 본인, 그의 두 아들 시메온과 이반, 그리고 그의 동생 안드레이(시메온보다 6주 더 생존)가 모두 흑사병으로 사망했다.[9]
사망하기 직전인 1353년, 시메온은 수도 서원을 하고 소존트(Sozont)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알렉시를 사망한 테오그노스투스의 뒤를 이을 모스크바의 수도 대주교로 지명했으며, 아내 마리아를 위해 수익성 좋은 영지를 확보해주었다.[9] 시메온의 유언장은 러시아에서 종이가 사용된 최초의 사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이전까지는 주로 양피지가 사용되었다.
시메온은 모스크바 크렘린 내의 대천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2. 2. 노브고로드와의 관계
1340년, 시메온은 벨리키 노브고로드와 처음으로 군사적 충돌을 겪었다. 그는 노브고로드의 도시인 토르조크에서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주장했다. 토르조크의 보야르(귀족)들은 시메온의 세금 징수원을 가두고 노브고로드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시메온은 키예프의 테오그노스투스 대주교 및 노브고로드와 적대적인 다른 공작들과 연합하여 노브고로드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시메온 측은 노브고로드가 독단적으로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고 우스튜즈나와 벨로예 오제로를 침략하는 등 러시아 전체를 존중하지 않고 대공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4] 연합군이 노브고로드 영토로 진격하자, 토르조크 주민들은 보야르에 반기를 들고 모스크바 군대에 합류했다. 결국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시메온의 요구를 받아들여, 토르조크 지역의 세금(연간 1,000 루블 상당)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시메온은 기존의 시민 헌장을 존중하기로 합의했다.[5]1340년대 동안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스웨덴의 군사 활동 및 내부 혼란으로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힘은 약해졌다. 대공으로서 노브고로드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지만, 시메온은 약화된 공화국 상황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347년, 노브고로드가 스웨덴의 공격에 맞서 도움을 요청했을 때, 시메온은 동생 이반과 로스토프의 콘스탄틴을 보냈으나, 이들은 노브고로드를 위해 싸우는 것을 거부했다.[10]
2. 3. 리투아니아와의 관계
1333년, 시메온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알기르다스 대공 여동생인 아유스타(세례명 아나스타샤)와 결혼했다.[8]1341년 모스크바 연합군이 해산된 직후, 당시 비테브스크 공작이었던 알기르다스는 스몰렌스크 공작과 동맹하여 모자이스크를 포위 공격했다.[6] 그러나 리투아니아의 게디미나스 대공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알기르다스는 시메온이 군사적 대응을 준비하기 전에 작전을 중단하고 물러나야 했다.[6] 얼마 지나지 않아 시메온의 군주였던 킵차크 칸국의 우즈베크 칸이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 자니베크 칸이 칸위에 올랐다. 시메온은 다시 호드로 가서 새로운 칸에게 자신의 권리를 재확인받았다.[7]
1340년대 내내 시메온은 킵차크 칸국 내에서 리투아니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외교 활동에 주력했다. 그는 리투아니아 왕위를 노리던 두 명의 망명 공작을 보호하는 한편,[11] 자니베크 칸에게 리투아니아의 성장이 칸국에 가장 중요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설득했다.[12] 결국 자니베크 칸은 시메온의 주장을 받아들여 리투아니아 사절들을 시메온에게 넘겨주었다.[12] 시메온은 알기르다스와의 직접적인 충돌보다는 휴전을 맺고 포로를 교환하며, 정략결혼을 통해 관계를 안정시키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 과정에서 이교도였던 알기르다스와 정교회 신자인 트베리의 울리아나의 결혼이 키예프의 테오그노스투스 대주교의 승인 아래 성사되었는데, 이 결혼을 통해 훗날 폴란드의 왕이 되는 요가일라가 태어났다.[13]
1345년 첫 부인 아유스타가 사망하자, 시메온은 스몰렌스크의 에우프락시아와 재혼했다. 하지만 결혼 직후 에우프락시아가 저주를 받아 "매일 밤 죽은 듯이 보였다"는 이유로 그녀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시메온은 트베리의 마리아와 세 번째로 결혼했다.[9]
1351년부터 1352년까지 시메온은 스몰렌스크 지역의 작은 도시들의 지배권을 놓고 알기르다스와 다시 무력 충돌을 벌였다. 이 분쟁 역시 알기르다스가 전면전보다는 협상을 선호하면서 큰 전쟁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첫 협상은 리투아니아 측에 의해 결렬되었으나, 결국 시메온은 분쟁 대상이었던 도시들을 모스크바의 영토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 군사적 성공은 시메온 생애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 되었다.[14]
2. 4. 흑사병과 죽음
흑사병은 1346년 현재의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처음 기록되었다. 이후 1349년에는 스칸디나비아, 1352년 초에는 프스코프, 같은 해 8월에는 노브고로드까지 확산되었다. 1352년 말까지 프스코프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이 병은 리투아니아와 루스 북동부 지역으로도 퍼져나갔다.[15]1353년 흑사병은 마침내 모스크바에도 도달했다. 이로 인해 키예프의 테오그노스투스(Theognostus) 대주교, 시메온 본인과 그의 두 아들 시메온 시메오노비치와 이반 시메오노비치, 그리고 그의 형제 안드레이 이바노비치(시메온보다 6주 더 생존)가 사망했다.[9]
시메온은 1353년 사망하기 직전 수도 서원을 하고 소존트(Sozont)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는 알렉시를 사망한 테오그노스투스의 뒤를 이을 모스크바 대주교로 지명했으며, 아내 마리아를 위해 수익성 있는 영지를 확보해주었다.[9] 시메온의 유언장은 러시아에서 양피지가 아닌 종이에 쓰여진 최초의 문서로 알려져 있다.
시메온의 시신은 모스크바 크렘린 내의 대천사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2. 5. 유산
1346년 현재의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점차 북쪽으로 확산되었다. 1349년에는 스칸디나비아, 1352년 초에는 프스코프, 같은 해 8월에는 노브고로드까지 퍼졌고, 프스코프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치명적이었다.[15] 1353년, 마침내 흑사병은 모스크바에도 도달했다.이 흑사병으로 키예프의 테오그노스투스 대주교, 시메온 본인과 그의 두 아들 시메온 시메오노비치와 이반 시메오노비치, 그리고 그의 동생 안드레이 이바노비치까지 모두 사망했다.[9] 시메온의 아들들이 모두 어려서 사망하면서, 그의 대공위는 동생인 이반 2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시메온은 죽음을 앞두고 수도 서원을 하여 소존트(Sozont)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또한 그는 알렉시를 사망한 테오그노스투스의 뒤를 이을 모스크바 대주교로 지명했으며, 아내 마리아를 위해 수입이 보장되는 영지를 남겼다.[9]
시메온이 남긴 유언장은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양피지가 아닌 종이에 작성된 문서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시신은 모스크바 크렘린 내의 대천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
wikitext
이름 | 생몰년 | 비고 |
---|---|---|
바실리 시메오노비치 | 1337년 4월 12일 ~ 1338년[8] | |
바실리사 시메오노바 | ? ~ 1369년 4월 20일 | 카신 공작 미하일 바실리예비치와 결혼 |
콘스탄틴 시메오노비치 | 1341년 | 요절 |
딸 (이름 미상) | ? ~ ? | 폴란드의 카리요타스의 아들 리투아니아의 알렉산드르와 결혼 |
다니일 시메오노비치 | 1347년 12월 15일 ~ ? | 요절 |
미하일 시메오노비치 | 1348년 ~ ? | 요절 |
이반 시메오노비치 | 1351년 ~ 1353년 3월 | 아버지와 같은 시기에 흑사병으로 사망 |
시메온 시메오노비치 | 1352년 ~ 1353년 3월 | 아버지와 같은 시기에 흑사병으로 사망 |
참조
[1]
서적
Curtin, p. 336
[2]
서적
Karamzin, 1340
[3]
웹사이트
Anton Kartashev. History of the Russian church
http://www.krotov.in[...]
[4]
서적
Curtin, p. 337
[5]
서적
Karamzin, 1340
[6]
서적
Karamzin, 1341
[7]
서적
Karamzin, 1342
[8]
서적
Medieval Russia:A source book, 850-1700
Academic International Press
2000
[9]
서적
Karamzin, 1353
[10]
서적
Karamzin, 1347
[11]
서적
Curtin, p. 338
[12]
서적
Curtin, p. 339
[13]
서적
Karamzin, 1349
[14]
서적
Curtin, p. 340
[15]
서적
Karamzin,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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