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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즈 스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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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미즈 스미코는 1989년 일본 사회당 비례대표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 일본의 정치인이자 여성 운동가이다. 후쿠이현 출신으로, 후쿠이현 여성노동자 모임 결성, 일본 부인회 사무국장 및 의장 역임 등 여성 권익 신장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1990년대에는 참의원 의원으로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며, 북일 국교 정상화를 주장하고 조선학교 무상화를 요구했다. 2001년 정계 은퇴 후에도 여성 단체 활동과 북한 관련 활동을 이어갔으며, 2013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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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즈 스미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평화와 민주주의』1967년 11월 1일호'
『평화와 민주주의』1967년 11월 1일호
이름시미즈 스미코
원어 이름清水 澄子 (시미즈 스미코)
로마자 표기Shimizu Sumiko
출생1928년 3월 1일
출생지후쿠이현 사카이시
사망2013년 1월 14일
사망지알려지지 않음
국적일본
학력
출신 학교후쿠이현립 마루오카 고등학교
정치 경력
소속 정당일본사회당 → 사회민주당
직업참의원 의원
선거구비례구
당선 횟수2회
임기 시작1989년 7월 23일
임기 종료2001년 7월 22일
기타 정보
배우자알려지지 않음
웹사이트알려지지 않음

2. 약력


  • 후쿠이현 출신이다.
  • 1944년 마루오카 정립 마루오카 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다카츠키 고등여자 의전에 진학했으나, 재학 중 공습을 당해 후쿠이현으로 돌아갔다.
  • 1951년 후쿠이현 노동조합 평의회에서 근무했다.
  • 1956년 후쿠이현 여성노동자의 모임을 결성했다.
  • 1962년 4월 14일 일본 부인회의(현 I 여성회의)가 발족되자, 시미즈도 참가하여 일본 부인회의 후쿠이현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 1965년 다나카 스미코의 비서가 되었다.
  • 1967년 일본 부인회의 사무국장을 거쳐 의장에 취임했고, 이후 상임 고문을 역임했다.
  • 사이타마현사이타마시에 거주했으며[2], 일본 사회당 사이타마현 연합·사회민주당 사이타마현 연합 소속이었다.
  • 1989년 제15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일본 사회당 비례대표 후보로 입후보하여 첫 당선되었다.
  • 조일 우호 의원 연맹에 소속되어 있었다.
  • 1994년 사회당 여성·시민 국장을 역임했다.
  • 1995년 제4회 세계 여성 회의(베이징)에 참가했고, 같은 해 11월 NGO "베이징 JAC"의 간사가 되었다.
  • 1995년 제17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사회당 비례대표로 재선되었다.
  • 1996년 사회민주당 발족에 따라 부당수에 취임했다.
  • 2001년 제19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낙선하여 정계를 은퇴했다.
  • 은퇴 후에는 I 여성회의 상임 고문을 역임했다.
  • 2013년 1월 14일 폐암으로 사망했다[3] . 사망일자로 종4위.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 후쿠이현 출신이다.
  • 1944년에 마루오카 정립 마루오카 고등여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다카츠키 고등여자 의전에 진학했지만, 재학 중에 공습을 당해 후쿠이현으로 돌아갔다.
  • 1951년, 후쿠이현 노동조합 평의회에서 근무했다.
  • 1956년, 후쿠이현 여성노동자의 모임을 결성했다.
  • 1962년 4월 14일, 일본 부인회의(현 I 여성회의)가 발족되자 시미즈도 참가하여 일본 부인회의 후쿠이현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 1965년, 일본 사회당 참의원 의원 다나카 스미코의 비서가 되었다.

2. 2. 여성 운동 및 정치 활동

清水澄子|시미즈 스미코일본어1956년 후쿠이현 여성노동자 모임을 결성했다.[2] 1962년 4월 14일, 일본 부인회의(현 I 여성회의)가 발족되자 시미즈도 참가하여 일본 부인회의 후쿠이현 사무국장에 취임했다.[2] 1965년에는 일본 사회당 참의원 의원 다나카 스미코의 비서가 되었다.[2] 1967년 일본 부인회의 사무국장을 거쳐 의장에 취임했고, 이후 상임 고문을 역임했다.[2] 1994년 사회당 여성·시민 국장을 역임했다.[2] 1995년 제4회 세계 여성 회의 (베이징)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11월에 발족한 NGO "베이징 JAC"의 간사가 되었다.[2]

정치 활동으로는 1989년 제15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일본 사회당 비례대표 후보로 입후보하여 첫 당선되었다.[2] 조일 우호 의원 연맹에 소속되어 있었다.[2] 1995년 제17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사회당 비례대표로 재선되었다.[2] 1996년 사회민주당 발족에 따라 부당수에 취임했다.[2] 2001년 제19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낙선하여 정계를 은퇴했다.[2]

3. 주요 활동

시미즈 스미코는 여성 권익 신장,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활동했다.


  • 여성 권익 신장: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 도입을 지지하며, 현행 제도가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4] 2006년에는 "군사화와 젠더"를 주제로 강연하며 도쿄도사이타마현의 남녀 공동 참가 정책을 비판했다.
  • 일본군 '위안부' 문제: 1990년 참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여자정신대의 강제 연행 문제를 제기하고, 1992년 요시다 세이지를 참고인으로 요청했다.[5]
  • 북한 관련 활동: "북일 국교 정상화를 요구하는 연락회" 공동 대표로서, 북한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와 조선학교 무상화를 요구했다.[1] 2001년 일본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인터뷰에서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를 긴급한 과제로 제시했다.[7] 2009년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재개와 재일 조선인 인권 보장을 외무성에 요청했다.[8]


2012년 박두진 코리아국제연구소 소장은 1987년 원자탄·수소폭탄 금지 세계대회 비밀 회담에서 북한, 사회당, 정대협 3자 연대 밀약이 확인되었다고 주장하며, 시미즈 스미코가 북한과 연계하여 활동했다고 주장했다.[6]

3. 1. 여성 권익 신장

시미즈 스미코는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 도입에 찬성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람에게는 각자 고유의 성이 있습니다. 기본적 인권입니다. 그런데 결혼과 동시에 법률로 부부의 성을 하나로 할 것을 강제하고, 별성을 선택한 경우에는 법률상의 결혼으로 인정하지 않고, 법정 상속인이 될 수 없습니다. 아이에게는 '혼외자'라는 제재까지 가하고 있습니다. 이 부조리를 정부는 언제까지 여성에게 수인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부부별성과 혼외자 차별의 문제는 헌법 제정에 따른 1946년의 민법 개정 이후의 숙제입니다."[4]

2006년 5월, 시미즈 등이 개최한 "06 권리와 생활 평화를 위한 여성 집회"에서 시미즈는 "군사화와 젠더"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며, "도쿄도(이시하라 신타로 지사)나 사이타마현(우에다 기요시 지사)에서 남녀 공동 참가가 집요한 공격에 노출되고 있다"고 말했다.

3. 2. 일본군 '위안부' 문제

1990년 12월 18일 참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이른바 "종군 위안부"에 관해 여자정신대로서 "강제 연행"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취지의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후생성 담당자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위안부의 강제 동원의 실태에 관해 요시다 세이지를 1992년 3월 21일 예산위원회의 참고인으로 요청했고, "그것이 실현되지 않아 매우 유감입니다."라고 말했다.[5]

2012년 코리아국제연구소 소장 박두진1987년 8월 원자탄·수소폭탄 금지 세계대회에서 비밀 회담이 열렸고, 북한 공작 기관과 사회당 부인 회의 (시미즈 스미코), 정대협의 전신과 3자 연대의 밀약이 확인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북한 좌익과 북한의 연계인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심포지엄"을 획책, 1990년 9월 김금환 방북단, 1991년 1월 평양에서 일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교 정상화 예비 회담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의 배상금 1조과 한반도 분단 전략으로 김일성위안부 문제에 주목했으며, 1990년 11월 정대협 결성, 1991년 5월부터 밀약 실행, 남북 합의로 정대협, 북한 공작 기관과 사회당 부인 회의 (시미즈 스미코) 공조에 합의, 미키 전 총리 부인의 도움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가이후가 총리이므로) 북한 공작원에 비자가 쉽게 발급되었고, KCIA가 나와도 사회당에서는 대응할 수 없지만, 가이후 총리라면 처리할 수 있었으며, 미키 전 총리 부인이 발기인이 되어 자택에서 비밀 회합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1992년 9월 평양에서 제3회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심포지엄에서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여, 여기부터 종군 위안부의 한국-북한 분단 공작과 배상금 1조 공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6]

3. 3. 북한 관련 활동

시미즈 스미코는 "북일 국교 정상화를 요구하는 연락회" 공동 대표로서, 북한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와 조선학교 무상화를 요구하고 있다.[1]

2001년 1월, 일본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죄와 보상에 기초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가 가장 긴급한 정치 과제"라고 주장했다. 같은 달, 일본 정부에 북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관한 질의서를 제출하여 "북한에 의해 납치된 의혹이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7]

2009년 12월 1일, 외무성에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재개와 재일 조선인 인권 보장을 요청했다.[8] 2011년 9월 29일에는 조선 여성과 연대하는 일본 부인 연락회 대표로서 노다 요시히코 총리, 겡바 고이치로 외무대신에게 2012년 가을까지 북일 국교 정상화를 요구하는 문서를 제출했다.[9]

3. 3. 1. 비판적 시각

시미즈 스미코는 "북일 국교 정상화를 요구하는 연락회" 공동 대표로서, 북한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 및 조선학교 무상화를 주장하고 있다.[1]

2001년 1월, 일본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가 과거사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며,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조선 민족에 대한 차별 의식 때문이라고 비판했다.[7] 같은 달, 일본 정부에 북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관한 질의서를 제출하여, 북한에 의해 납치된 의혹이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2009년 12월 1일, 외무성에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재개와 재일 조선인의 인권 보장을 요청했다.[8]

2011년 9월 29일, 조선 여성과 연대하는 일본 부인 연락회 대표로서 노다 요시히코 총리와 겡바 고이치로 외무대신에게 2012년 가을까지 북일 국교 정상화를 조속히 실현하고, 대북 제재 조치와 만경봉 92호의 일본 입항 금지를 해제하며,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 중단을 요구하는 요구서를 제출했다.[9]

4. 정계 은퇴 후 활동

낙선 후에도 납치 문제의 "종결"과 북일 수교 정상화 추진, 북한인권법 반대, 조선인 유골 반환 문제 해결 등을 호소했다. 또한 의원 재직 중부터 "여성 국제 전범 법정"에 참여하여 "종군 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전쟁 책임" 추궁, 더 나아가 호헌, 인권, 아시아에 네트워크를 구축한다고 칭하는 페미니즘·젠더 프리 관련 시민 운동 및 NGO에 참여했다.[1]

2010년에는 "한일 강제 병합 100년, 일본과 한반도의 현재를 묻고 북일 수교 정상화 실현을! 여성 집회"의 실행 위원장에 취임했다. 와다 하루키, 우쓰미 아이코 등을 포함한 200명의 참가자를 모았다.[1]

시미즈 스미코는 다음과 같은 단체에서 활동했다.[1]

단체명직책
조선 여성과 연대하는 일본 부인 연락회대표
I 여성 회의상임 고문
포럼 평화·인권·환경부대표
베이징 JAC간사
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 기념 일본 준비위원회위원장


5. 저서


  • 手さぐりの女解放|테사구리노 온나 가이호일본어
  • 男女平等|단조뵤도일본어 (공저)
  • 医療110番|이료 110반일본어 (공저)
  • 女が創る21世紀 私たちの北京「行動綱領」|온나가 쓰쿠루 니주잇세이키 와타시타치노 페킨 코도코료일본어 (시미즈 스미코·기타자와 요코 공저) 1996년 2월 여성정책연구소/출판 육크샤/발매 ISBN 4-8431-0061-7

참조

[1] 웹사이트 日朝国交正常化連絡会 「無償化」署名運動協力を呼びかけ http://korea-np.co.j[...]
[2] 문서 大宮市
[3] 뉴스 清水澄子さん死去 http://www.asahi.com[...] 朝日新聞 2013-01-15
[4] 웹사이트 別姓訴訟を支える会、応援メッセージ http://www.asahi-net[...]
[5] 웹사이트 第123回国会 予算委員会 第6号 平成四年三月二十一日(土曜日) https://kokkai.ndl.g[...]
[6] Youtube https://www.youtube.[...]
[7] 웹사이트 日本労働党ホームページ 20010101 独立・自主の進路打ち立てよう 本年前半にも日朝国交を 朝鮮女性と連帯する日本婦人連絡会代表、参議院議員・清水 澄子 http://www.jlp.net/i[...]
[8] 웹사이트 日朝国交正常化連絡会 日本外務省に要請 「対朝鮮政策で新たな転換を」 http://www1.korea-np[...]
[9] 웹사이트 首相、外相に宛てた要望書提出 日朝正常化を来年秋までに http://jp.korea-np.c[...]
[10] 웹사이트 朝日友好ニュース 「韓国併合」100年 東京・水道橋で女性集会 http://www.chongryon[...]
[11] 웹사이트 日朝国交正常化連絡会 「無償化」署名運動協力を呼びかけ http://korea-np.co.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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