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권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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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권무는 1914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 소련 유학 후 팔로군에서 복무했으며, 해방 후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했다.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창설에 참여, 한국 전쟁에 제4사단장으로 참전하여 서울 점령과 대전 전투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제1군단장,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을 역임했으나, 1959년 숙청되었다. 그는 뛰어난 전술가로 평가받았으나, 사단 레벨 이상의 지휘 능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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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권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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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이권무 |
한글 | 리권무 |
한자 | 李權武 |
로마자 표기 | Ri Gwon-mu |
남한 표기 | 이권무 |
남한 로마자 표기 | I Gwon-mu |
기본 정보 | |
출생 | 1914년 |
사망 | 1986년 |
출생지 | 만주, 중화민국 |
사망 장소 | 알려지지 않음 |
안장 장소 | 알려지지 않음 |
군사 복무 | |
소속 | [[파일:Flag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Pre-1996).svg|23px]] 팔로군 조선인민군 |
복무 기간 | 1948년 ~ 1959년 |
최종 계급 | [[파일:Flag of the Korean People's Army Ground Force (1993-2023).svg|18px]] 조선인민군 상장 |
지휘 | 조선인민군 제4사단 조선인민군 제1군단 |
참전 전투 | 항일전쟁 국공내전 한국 전쟁 의정부 전투 동두천 전투 포천 전투 창동 전투 미아리 전투 신사동-과천 전투 시흥-안양-수원 전투 오산 전투 평택 전투 천안 전투 직산 전투 조치원 전투 대전 전투 거창 전투 하동 전투 부산 방어선 전투 제1차 낙동강 방어선 전투 제2차 낙동강 방어선 전투 보남고지 328 전투 제3차 서울 전투 용산 전투 |
수상 | 공화국 영웅 1급 국기훈장 |
2. 초기 생애 및 항일 운동
리권무는 1914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으며, 청년 시절 만주에서 농업에 종사했다.[16] 만주 사변 이후 동만주의 항일 활동에 참여했으며, 1936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방호산 등과 함께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에 유학했다.[17] 1937년 초부터 1938년 여름까지 모스크바 식민지반식민지 이익연구학원(구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반에서 공부했다.[16]
1939년 3월 모스크바를 출발해 9월 말 연안에 도착해서 1940년 무렵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에서 학습했다. 이때 같이 훈련받은 인물은 주덕해, 방호산, 김창덕, 장복, 전우, 주춘운, 리림, 진반수였다.[17] 그 후 팔로군 제359여단 제718연대 작전훈련참모로 배속되었다.[18] 1942년 초 연안 해외연구반 조선조(朝蘇組)에 배속되었다.[19]
1945년, 조선의용군 제5지대 부지대장을 지냈다. 해방 후 조선의용군 제5지대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연변으로 진출했다.[19] 1946년 38선 이북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창건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7월 1일 기준으로 보안국 평안남도 보안부 부부장이었다. 1947년, 제1사단 제1연대장을 지냈으며 같은 해 말 소련군 고문과 충돌하여 병사로 강등되었으나, 후에 복귀했다.[13]
2. 1. 출생 및 성장
2. 2. 중국 공산당 입당 및 항일 운동
리권무는 만주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6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16] 1937년 초부터 1938년 여름까지 모스크바 식민지반식민지 이익연구학원(구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반에서 유학했다.[16] 1939년에는 연안으로 가서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에서 주덕해, 방호산 등과 함께 훈련을 받았고, 팔로군 제359여단 제718연대 작전훈련참모로 복무했다.[17][18]1942년 초, 리권무는 연안 해외연구반 조선조(朝蘇組)에 배속되었다.[19]
2. 3. 소련 유학 및 연안 시절
리권무는 만주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7년 초부터 1938년 여름까지 모스크바 식민지반식민지 이익연구학원(구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반에서 공부했다.[16] 1939년 3월 모스크바를 출발해 9월 말 옌안에 도착, 1940년 무렵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에서 주덕해, 방호산 등과 함께 훈련받았다.[17] 그 후 팔로군 제359여단 제718연대 작전훈련참모로 배속되었다.[18] 1942년 초 연안 해외연구반 조선조(朝蘇組)에 배속되었고, 해방 후에는 조선의용군 제5지대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옌볜으로 진출했다.[19]3. 해방 후 북한에서의 활동
리권무는 만주에서 농업에 종사했으며 1937년 초부터 1938년 여름까지 모스크바 식민지반식민지 이익연구학원(구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반에 입학했다.[16] 1939년 3월 모스크바를 출발해 9월 말 연안에 도착해서 1940년 무렵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에서 주덕해, 방호산, 김창덕, 장복, 전우, 주춘운, 리림, 진반수와 함께 훈련을 받았다.[17] 그후 팔로군 제359여단 제718연대 작전훈련참모로 배속되었다.[18] 1942년 초 연안 해외연구반 조선조(朝蘇組)에 배속되었다.[19] 해방 후 조선의용군 제5지대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연변으로 진출했다.[19]
1946년 38선 이북으로 귀국하여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사단장, 3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이 되었다.[20]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제3차 대회)이 되었다. 1953년 8월 조선노동당 장칙 수정 위원이 되었다.
3. 1. 조선의용군 활동
리권무는 만주에서 농업에 종사하다 1937년 초부터 1938년 여름까지 모스크바 식민지반식민지 이익연구학원(구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반에서 공부했다.[16] 1939년 3월 모스크바를 출발해 9월 말 연안에 도착, 1940년 무렵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에서 주덕해, 방호산 등과 함께 훈련받았다.[17] 그 후 팔로군 제359여단 제718연대 작전훈련참모로 배속되었다.[18] 1942년 초에는 연안 해외연구반 조선조(朝蘇組)에 배속되었고,[19] 1945년 해방 후에는 조선의용군 제5지대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연변으로 진출했다.[19]3. 2. 북한 귀국 및 조선인민군 창설
리권무는 만주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7년 초부터 1938년 여름까지 모스크바 식민지반식민지 이익연구학원(구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반에서 공부했다.[16] 1939년 3월 모스크바를 출발해 9월 말 연안에 도착, 1940년 무렵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에서 주덕해, 방호산 등과 함께 훈련받았다.[17] 그 후 팔로군 제359여단 제718연대 작전훈련참모로 배속되었다.[18] 1942년 초에는 연안 해외연구반 조선조(朝蘇組)에 배속되었다.해방 후, 조선의용군 제5지대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연변으로 진출했다.[19] 1946년 38선 이북으로 귀국하여[20] 조선인민군 창건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7월 1일 기준으로 보안국 평안남도 보안부 부부장이었다. 1947년에는 제1사단 제1연대장을 지냈으며, 같은 해 말 소련군 고문과 충돌하여 병사로 강등되었으나 이후 복귀했다.[13]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사단장이 되었고,[20] 3월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이 되었다.[20] 같은 해 10월, 제4혼성여단장을 지냈다. 1949년에는 조선인민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50년 조선인민군 소장으로 제4사단을 지휘하며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6월 18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로부터 남침명령서를 하달받았고,[21] 6월 25일 제4사단을 이끌고 의정부 방면으로 진출하여 서울을 공격, 6월 28일 점령했다.[22] 이후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 특임대를, 대전 전투에서 미육군 제24사단을 격퇴했다. 같은 해 8월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다시 제24사단과 교전하여 우세하게 진격했지만, 다른 미군 부대의 반격을 받아 제4사단은 재기 불능이 되었다. 1950년 10월 제1군단장으로 평양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1953년 8월 조선노동당 장칙 수정 위원을 지냈고, 1954년 7월 조선인민군 중장이 되었다.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제3차 대회)이 되었고, 제1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8년 1월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을 맞아 제1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이 무렵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 되었다가 1959년 6월 해임되었다.[23]
3. 3.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리권무는 만주에서 농업에 종사했으며 1937년 초부터 1938년 여름까지 모스크바 식민지반식민지 이익연구학원(구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반에 입학했다.[16] 1939년 3월 모스크바를 출발해 9월 말 연안에 도착해서 1940년 무렵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에서 주덕해, 방호산 등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17] 그후 팔로군 제359여단 제718연대 작전훈련참모로 배속되었다.[18] 1942년 초 연안 해외연구반 조선조(朝蘇組)에 배속되었다.[19] 해방 후 조선의용군 제5지대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연변(延邊)으로 진출했다.[19]1946년 38선 이북으로 귀국하여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사단장, 3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이 되었다.[20]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제3차 대회)이 되었다. 1953년 8월 조선노동당 장칙 수정 위원이 되었다.
4. 한국 전쟁 참전
1950년 조선인민군 소장으로 제4사단을 지휘하던 리권무는 6월 18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로부터 남침명령서를 하달받았다.[21] 6월 25일 남침작전구상에 따라 조선인민군 제4사단을 이끌고 의정부 방면으로 진출하여 서울을 공격,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다.[22] 이후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 특임대를 격파하고,[6] 대전 전투에서 미육군 제24사단을 격퇴했다.[7] 같은 해 8월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다시 제24사단과 교전하여 우세하게 진격했지만, 다른 미군 부대의 반격을 받아 제4사단은 재기 불능이 되었다.[7] 1950년 10월 제1군단장으로 평양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4. 1. 조선인민군 제4사단장
리권무는 1914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농업에 종사했다.[16] 1936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방호산 등과 함께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에 유학했다.[17] 1937년 초부터 1938년 여름까지 모스크바 식민지반식민지 이익연구학원(구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반에서 학습했고,[16] 1939년 3월 모스크바를 출발해 9월 말 연안에 도착해서 1940년 무렵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에서 주덕해, 방호산 등과 함께 학습했다.[17] 그 후 팔로군 제359여단 제718연대 작전훈련참모로 배속되었다.[18] 1942년 초 연안 해외연구반 조선조(朝蘇組)에 배속되었다.[19] 해방 후 조선의용군 제5지대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연변(延邊)으로 진출했다.[19]1946년 38선 이북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창건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7월 1일 기준으로 보안국 평안남도 보안부 부부장이었다.[20]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사단장, 3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이 되었다.[20] 1949년 조선인민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50년 조선인민군 소장으로서 제4사단을 지휘했다. 한국 전쟁 이전, 김일성의 개인적인 명령에 따라 소환되어 조선인민군 제4사단을 지휘하게 되었고, 소장으로 진급했다.[4] 6월 18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로부터 남침명령서를 하달받았다.[21] 6월 22일, 작전 명령을 내려 제4사단이 제1사단, 제3사단과 함께 서울을 공격하고 의정부 축선을 따라 남하할 것을 명시했다.[5] 6월 25일 남침작전구상에 따라 조선인민군 제4사단을 이끌고 의정부 방면으로 진출하여 서울을 공격,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다.[22]
서울 점령 후, 남쪽으로 진격하여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 특임대와 교전하여 미국 육군을 격파했다.[6] 이후 평택 전투, 천안 전투, 조치원 전투에서 미군과 교전했고, 대전 전투에서 미국 제24보병사단을 격파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7] 이러한 공로로 근위 부대 지위를 부여받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4]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국제 연합군과 교전했으며, 낙동강을 따라 미국 제24보병사단과 대치했다.[7] 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강 건너로 후퇴하여 재편성되었다.[7]
부산 교두보에서 북한군의 패배 이후, 중장으로 진급하고 김웅을 대신하여 조선인민군 제1군단의 사령관이 되었다.[8] 1950년 10월 제1군단장으로 평양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그의 지휘 아래, 조선인민군 제1군단은 1951년 중국의 제3차, 제4차 및 제5차 공세에 참여했다.[9] 1953년 8월 조선노동당 장칙 수정 위원, 1954년 7월 조선인민군 중장이 되었다.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제3차 대회), 제1집단군 사령관,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1958년 1월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에 즈음하여 제1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이 무렵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 되었다가 1959년 6월 해임되었다.[23]
4. 2. 서울 점령 및 남하
1950년 조선인민군 소장으로 제4사단을 지휘하던 리권무는 6월 18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로부터 남침명령서를 하달받았다.[21] 6월 25일 남침작전구상에 따라 조선인민군 제4사단을 이끌고 의정부 방면으로 진출하여 서울을 공격,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다.[22] 이후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 특임대를 격파하고,[6] 대전 전투에서 미육군 제24사단을 격퇴했다.[7] 같은 해 8월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다시 제24사단과 교전하여 우세하게 진격했지만, 다른 미군 부대의 반격을 받아 제4사단은 재기 불능이 되었다.[7] 1950년 10월 제1군단장으로 평양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4. 3. 부산 교두보 전투
1950년 조선인민군 소장으로 제4사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6월 18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로부터 남침명령서를 하달받았다.[21] 6월 25일 남침작전구상에 따라 조선인민군 제4사단을 이끌고 의정부 방면으로 진출하여 서울을 공격,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다.[22]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 특임대를 격퇴하였다.[6] 7월 12일부터 20일까지 벌어진 대전 전투에서 리권무의 사단은 미국 제24보병사단을 격파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업적으로 근위 부대의 지위를 부여받았다.[7] 리권무는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4]그 직후, 리권무의 사단은 부산 교두보로 진격했으며, 이곳에서 국제 연합군은 부산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리권무의 사단은 8월 5일부터 19일까지 낙동강을 따라 미국 제24보병사단과 대치했다.[7] 이 전투에서 원래 7,000명이었던 그의 사단은 3,500명으로 줄었다. 결국 패배하여 강 건너로 후퇴하여 재편성되었다.[7] 부산 교두보에서 북한군의 패배 이후, 리권무는 중장으로 진급하고 김웅을 대신하여 조선인민군 제1군단의 사령관이 되었다.[8] 1950년 10월 제1군단장으로 평양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4. 4. 제1군단장 및 중공군 지원
리권무는 1936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방호산 등과 함께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에서 유학했다.[16] 1939년에는 연안으로 돌아와 항일군정대학 동북 간부 훈련조에서 공부했으며, 이후 팔로군 제359여단 제718단 작전훈련 참모를 지냈다.[17][18] 1942년에는 중공 중앙 해외위원회 연구반 조선조에 배속되었고,[19] 1945년에는 조선의용군 제5지대 부지대장을 역임했다.[19]1946년 귀국 후, 조선인민군 창건에 참여했으며, 보안국 평안남도 보안부 부부장을 거쳐[20] 1947년 제1사단 제1연대장을 역임했다.[20] 1948년 3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고,[20] 같은 해 10월 제4혼성여단장을 맡았다.[20] 1949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제4사단장을 맡고 있던[4] 리권무는 김일성의 직접 명령에 따라[4] 6월 25일 의정부 방면으로 진격하여 서울을 점령했다.[22] 이후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 특임대를 격파하고,[6] 평택 전투, 천안 전투, 조치원 전투, 의정부 전투에서 미군과 교전했다.[7] 특히 대전 전투에서는 미국 제24보병사단을 격파하여 근위 부대 칭호를 받았다.[7] 이러한 공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4]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미군의 반격으로 제4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후,[7] 1950년 9월 제1군단장으로 임명되어[8] 평양 탈환 작전에 참여했다. 1951년에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제3차, 제4차, 제5차 공세에 참여했다.[9]
1954년 7월 중장으로 진급했고,[23]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57년 8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및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고, 9월에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어 대장 계급을 받았다. 1958년 1월 21일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으며,[23] 2월 25일에는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에 따른 방위 교대 연합 명령에 서명했다.
5. 한국 전쟁 이후
전쟁 후 리권무는 조선인민군 참모총장직에 복귀했다. 그러나 1959년 김일성은 조선인민군 내 소련파와 중국파의 모든 경쟁자를 체계적으로 숙청했고, 리권무는 그의 자리에서 물러났다.[10] 그는 해임된 직후 공직에서 사라졌다.[11]
5. 1.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리권무는 만주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7년 초부터 1938년 여름까지 모스크바 식민지반식민지 이익연구학원(구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반에서 공부했다.[16] 1939년 3월 모스크바를 출발해 9월 말 연안에 도착해서 1940년 무렵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에서 주덕해, 방호산 등과 함께 학습했다.[17] 그후 팔로군 제359여단 제718연대 작전훈련참모로 배속되었다.[18] 1942년 초 연안 해외연구반 조선조(朝蘇組)에 배속되었으며, 해방 후 조선의용군 제5지대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연변(延邊)으로 진출했다.[19]1946년 38선 이북으로 귀국하여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사단장, 3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이 되었다.[20] 1950년 조선인민군 소장으로 제4사단을 지휘했으며, 6월 18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로부터 남침명령서를 하달 받았다.[21] 6월 25일 남침작전구상에 따라 조선인민군 제4사단을 이끌고 의정부 방면으로 진출하여 서울을 공격,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다.[22] 이후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 특임대를, 대전 전투에서 미육군 제24사단을 격퇴했다. 같은 해 8월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다시 제24사단과 교전하여 우세하게 진격했지만, 다른 미군 부대의 반격을 받아 제4사단은 재기 불능이 되었다.
1950년 10월 제1군단장으로 평양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1953년 8월 조선노동당 장칙 수정 위원, 1954년 7월 조선인민군 중장이 되었다.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제3차 대회), 제1집단군 사령관,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1958년 1월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에 즈음하여 제1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이 무렵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 되었다가 1959년 6월 해임되었다.[23] 김일성은 조선인민군 내 소련파와 중국파의 모든 경쟁자를 체계적으로 숙청했고, 리권무는 그의 자리에서 물러났다.[10] 그는 해임된 직후 공직에서 사라졌다.[11] 1958년 3월, 당 중앙 전체회의 확대회의에서 중점 토론 대상으로 연단에 올라 토론을 한 후 며칠 뒤 반당 종파의 우두머리 중 한 명으로 감금되었다.
5. 2. 숙청 및 실종
전쟁 후 리권무는 조선인민군 참모총장직에 복귀했다. 그러나 1959년 김일성은 조선인민군 내 소련파와 중국파의 모든 경쟁자를 체계적으로 숙청했고, 리권무는 그의 자리에서 물러났다.[10] 그는 해임된 직후 공직에서 사라졌다.[11] 1958년 3월, 당 중앙 전체회의 확대회의에서 중점 토론 대상으로 연단에 올라 토론을 한 후 며칠 뒤 반당 종파의 우두머리 중 한 명으로 감금되었다.6. 평가 및 논란
리권무는 공정하고, 우호적이며, 현명하고, 유능하며, 겸손하고, 상냥하다고 여겨졌다. 성실하고 근면한 사령관이었다. 그의 부대는 훈련이 잘 되어 있었고, 작전 계획은 명확하게 준비되어 잘 실행되었다. 사무 처리를 싫어하고 신체적으로 활발했던 리권무는 타고난 군인이자 투사였고, 뛰어난 전술가였지만, 사단 레벨을 넘어서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미국 정보부의 정보 자료 파일에는 포로의 증언에 따르면, 학자 타입보다는 활발한 타입으로, 교양 있고 지적인 인물로 보였다.[14] 중국어에 능통했으며, 러시아어를 조금 할 수 있었다.[14] 여정에 따르면, 호랑이 같은 장군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여정에 따르면, 이권무에게는 이재운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연안파였던 형과는 달리 빨치산 출신이었다. 이재운은 제88특별여단에 있었으며, 소련군 소위의 견장을 달고 귀국했고, 그 이후에는 지휘관으로 근무했다. 1958년 당시, 제2집단군 제23해안포여단장이었으나, 체포되어 "형 이권무와 함께 당과 정부를 전복하는 무장 폭동을 음모한 극악인"으로 몰려 처형되었다고 한다.
6. 1. 긍정적 평가
리권무는 공정하고, 우호적이며, 현명하고, 유능하며, 겸손하고, 상냥하다고 여겨졌다. 성실하고 근면한 사령관이었다. 그의 부대는 훈련이 잘 되어 있었고, 작전 계획은 명확하게 준비되어 잘 실행되었다. 사무 처리를 싫어하고 신체적으로 활발했던 리권무는 타고난 군인이자 투사였고, 뛰어난 전술가였지만, 사단 레벨을 넘어서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미국 정보부의 정보 자료 파일에는 포로의 증언에 따르면, 학자 타입보다는 활발한 타입으로, 교양 있고 지적인 인물로 보였다.[14] 중국어에 능통했으며, 러시아어를 조금 할 수 있었다.[14] 여정에 따르면, 호랑이 같은 장군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6. 2. 부정적 평가
리권무는 공정하고, 우호적이며, 현명하고, 유능하며, 겸손하고, 상냥하다고 여겨졌다. 성실하고 근면한 사령관으로, 그의 부대는 훈련이 잘 되어 있었고, 작전 계획은 명확하게 준비되어 잘 실행되었다. 사무 처리를 싫어하고 신체적으로 활발했던 리권무는 타고난 군인이자 투사였고, 뛰어난 전술가였지만, 사단 레벨을 넘어서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고 평가된다.미국 정보부 자료에 따르면, 리권무는 학자 타입보다는 활발한 타입으로, 교양 있고 지적인 인물로 보였다.[14] 중국어에 능통했으며, 러시아어를 조금 할 수 있었다.[14] 여정에 따르면, 호랑이 같은 장군으로 알려졌다.
6. 3. 종합적 평가
리권무는 공정하고 우호적이며 현명하고 유능하며 겸손하고 상냥하다고 여겨졌다. 성실하고 근면한 사령관으로, 부대 훈련과 작전 계획 수립 및 실행에 능숙했다. 사무 처리를 싫어하고 신체적으로 활발했던 그는 타고난 군인이자 투사였으며, 뛰어난 전술가로 평가받았다. 포로 증언에 따르면 학자 타입보다는 활발한 타입으로, 교양 있고 지적인 인물로 보였으며, 중국어에 능통하고 러시아어를 조금 할 수 있었다.[14] 여정에 따르면, 호랑이 같은 장군으로 알려졌다.그의 동생 이재운은 제88특별여단 출신으로, 소련군 소위 계급으로 귀국하여 지휘관으로 근무했다. 1958년 당시 제2집단군 제23해안포여단장이었으나, "형 이권무와 함께 당과 정부를 전복하는 무장 폭동을 음모한 극악인"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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