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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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류동 전투는 1950년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 김포 비행장과 오류동 일대에서 벌어진 한국 전쟁 초기 전투이다. 6월 29일 국군은 김포 비행장 탈환 작전을 펼쳤으나, 미 공군의 폭격과 지휘 체계 붕괴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 국군은 138고지, 107고지 확보에 주력하며 북한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7월 3일 북한군의 공세로 인해 김포로 철수했다. 이 전투의 패배는 한강 방어선 붕괴의 원인이 되었고, 결국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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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동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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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한국 전쟁 |
날짜 | 1950년 6월 29일 ~ 7월 3일 |
장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 일대 (당시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오류리)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및 지도자 (대한민국) | |
지휘관 | 계인주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대령 겸 육군남산학교장 대리 대령 (6월 26일부터) 우병옥†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중령 (6월 28일부터) 임충식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중령 (6월 29일부터) 최영희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대령 (6월 30일부터) 임무열 독립기갑연대 제1장갑수색대대장 소령 강문헌† 제3도보수색대대장 대위 박태운 제8연대 3대대장 소령 한순화 제12연대 2대대장 소령 이재일 제15연대 1대대장 소령 안광영 제15연대 2대대장 소령 장춘권 제18연대 2대대장 소령 안민일 제18연대 3대대장 소령 손영을 제22연대 3대대장 소령 방원철 육군보국대대장 소령 장영문 육군보병학교 후보대대장 소령 김광정 육군보병학교 후보대대장 소령 (6월 28일부터) 최복수† 육군 남산학교장 대리 중령 |
지휘관 및 지도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지휘관 | 방호산 제6사단장 소장 한일래 제14연대장 대좌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 알 수 없음 |
교전국 2 | 알 수 없음 |
사상자 규모 | |
교전국 1 | 알 수 없음 |
교전국 2 | 알 수 없음 |
2. 배경
6월 25일부터 치열하게 전개된 김포 반도 전투는 6월 28일까지 이어졌으나,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국군은 후퇴하게 된다. 결국 6월 29일부터는 당시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에 위치했던 김포 비행장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오류리였던 오류동을 중심으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치열한 방어전을 펼치게 된다.
대한민국 육군은 6월 29일 김포비행장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우병옥 중령이 자결하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이후 전선은 소사 북쪽 고지대로 옮겨져 경인가도 확보를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6월 30일에는 임충식 중령의 지휘 아래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김홍일 소장은 최영희 대령을 새로운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전열을 정비했다.
3. 전투 과정
7월 1일, 최영희 대령의 지휘 아래 국군은 138고지와 107고지 등 주요 고지를 점령하며 경인가도에 대한 위협을 일시적으로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다음 날인 7월 2일, 북한군의 반격으로 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결국 7월 3일, 한강을 건너 증원된 북한군의 공세와 한강 방어선 붕괴 소식에 따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철수를 결정했다. 이로써 김포반도 상륙 이후 일주일간 벌어진 국군의 지연전은 오류동에서의 철수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자세한 전투 과정은 날짜별 하위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3. 1. 6월 29일
이날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김포비행장 탈환 작전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오전 6시, 최복수 중령의 지휘 아래 부대는 소사에서 김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북진하여 공격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때 비행장 북쪽에서 총성이 들려왔는데, 이는 새벽에 행주나루터를 통해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 18연대가 비행장을 기습 공격한 소리였다. 원래 18연대는 부평으로 이동할 계획이었으나, 개화산 서북쪽 4km 지점인 옥녀봉(79고지)에서 북한군의 박격포 공격에 막히자 김포비행장과 소사 방향으로 목표를 변경했다. 제18연대 2대대 5중대가 먼저 비행장 북쪽 끝의 철조망을 넘어 들어갔고, 6중대와 7중대는 비행장 입구에서 돌격했다. 바로 그때 B-29 폭격기 편대가 비행장에 폭탄을 투하하면서 순식간에 그 일대가 폭발과 화염에 휩싸였다.
이 기회를 이용해 7중대는 외발산 동쪽으로, 6중대는 내언리 쪽으로 정찰했지만 돌파구를 찾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전 10시 20분경, 비행장에 돌입했던 5중대는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국군 병사들을 구출하여 본대와 합류했다. 다시 대열을 정비한 5중대는 기관총 2정을 앞세워 내언리 정면을 돌파하며 진로를 열었다.
비행장 동북쪽에서 제18연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18연대가 마지막 돌파구를 열던 오전 10시 30분경 비행장 서남쪽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공격에 앞서 공습 후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최복수 중령은 안영작 대위를 정찰 보냈으나, 안 대위는 비행장 남쪽 1km 지점인 안오쇠 부근에서 전사했다.
이에 따라 전투사령부는 기갑연대의 도보대대에게 장갑차의 엄호를 받으며 동남쪽으로 진격하도록 하고, 제22연대 3대대에게는 안오쇠 부근의 북한군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제12연대 2대대는 비행장 서북쪽으로 우회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작전들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상자만 늘어났으며, 결국 비행장 탈환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참모장 최복수 중령을 비롯해 제3전투대대장 강문헌 대위, 박영수 소위, 김수동 소위, 김일록 중위 등이 전사했다.
또한 전투 패배의 책임을 느낀 사령관 우병옥 중령이 권총으로 자결하면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사실상 지휘 체계가 무너져 통합 사령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시흥지구전투사령관인 김홍일 소장은 소사 지역에 집결해 있던 제18연대장 임충식 중령에게 해당 지역 부대들을 통합하여 지휘하도록 긴급 조치했다.
3. 2. 6월 30일
이제 전선은 김포비행장에서 남하하여 소사 북쪽의 고지대로 옮겨졌고, 경인가도 확보가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경인가도는 인천항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보급선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등포 방면에서 한강 방어선을 구축한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주력 부대의 측면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또한, 경인가도의 확보 여부는 소사 동북쪽에 위치한 138고지(오류동 서북쪽 2km)와 원미산의 전투 결과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6월 30일 새벽, 북한군은 전차 2대를 앞세워 김포비행장-소사 간 도로를 따라 공격해왔다. 이 공격으로 107고지에 배치된 후보생대대와 도보대대의 진지가 압박을 받았다. 북한군은 전차의 지원을 받아 138고지와 시월리(원미산 북쪽 1.5km) 일대 진지의 일부를 점령하고 소사 북쪽 2km 지점까지 진출하여, 경인가도는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당시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이었던 임충식 중령은 오전 9시, 중앙 전선의 제18연대 2대대에 138고지 탈환을 명령하고, 좌측 부대에는 원미산 북쪽의 적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공격 선두에서 부대를 지휘하던 제7중대장 이규대 중위가 전사하고 소대장 3명 전원이 부상을 입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오류동-소사 지역의 상황이 심각해지자,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전력 강화를 위해 지휘관 교체를 단행했다. 제5사단 15연대장이었던 최영희 대령을 새로운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제5사단 병력을 조속히 수습하여 경인가도를 반드시 지켜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3. 3. 7월 1일
밤 사이 증원부대를 오류동-소사 간 도로 남쪽에 배치한 최영희 대령은 이미 제공권이 미 공군에게 넘어갔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시흥사령부가 목표로 했던 비행장을 확보하는 것의 가치가 낮아졌다고 보고, 우선 공격의 발판이 될 요충지 확보에 집중하기로 했다. 주요 목표는 비행장 남쪽의 138고지와 107고지였다.
공격 준비를 위해, 부대가 가진 유일한 중화기인 81mm 박격포는 138고지를 지원하고, 장갑차의 37mm 포와 자동화기는 107고지를 지원하도록 화력을 나누었다. 또한 부평의 제1병기대대가 보유한 박격포탄을 확보하여 오류동 일대 경인가도 길가에 배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공격은 오후 1시에 시작되었다.
이 공격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좌측 공격을 맡은 제1대대는 장갑차의 엄호를 받으며 전진했고, 공병대대의 협력으로 오후 5시에 107고지를 점령했다. 의외로 가벼운 저항을 물리치고, 다른 목표 고지들도 차례로 확보했다. 결과적으로 이날 77고지-138고지-107고지선을 장악하게 되어, 경인가도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3. 4. 7월 2일
전날 확보한 138고지와 107고지선을 발판 삼아, 최영희 대령은 여세를 몰아 북한군을 138고지 북쪽의 126고지 너머로 밀어내어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로 결심했다. 날이 밝자 육군 제15연대 2대대에 126고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육군 제18연대의 2대대와 3대대도 모두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126고지 방면에서 북한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한국군은 점차 138고지 쪽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처럼 진전 없는 공방전이 계속되다가 날이 저물면서 양측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3. 5. 7월 3일
전날 밤부터 난지도 쪽으로 한강을 도하한 1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오류동 정면으로 가세함으로써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북한군은 공격에 앞서 비행장 쪽에서 그들의 보병에 화력을 지원하던 전차 2대를 야음을 틈타 126 고지 남쪽으로 추진한 다음, 그로 하여금 고척동 서쪽 계곡을 따라 경인가도에 모습을 드러나게 하였고, 또한 전차에 태극기를 달아 국군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작전도 구사하였다.
아침부터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한강 북쪽의 신촌 부근에 자리잡은 적 중포로써 고척동 북근과 오류동 일대에 위협사격을 가하는 한편 비행장 부근에서 박격포로 138고지 일대에 화력을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적 포화에 전열이 분열되었고 적의 공격을 감당하기에 힘든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인 오전 10시에 시흥사령부에서는 새벽에 적의 전차가 한강철교를 건너게 됨으로써 혼성 제 7사단의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어 시흥사령부의 철수도 힘들게 되었다. 이에 김홍일 소장은 '한강선이 적의 전차에 무너진 지금, 경인가도의 확보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따라서 이대로 시간만 끈다면 영등포 - 시흥도로에 적이 먼저 들어서게 되어 오류동쪽 김포사의 퇴로조차 잃을 것이다.'라고 판단하고 참모장인 박병권 대령을 오류동으로 급파하여 철수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날 낮 대대별로 적과의 접촉을 일체 끊고 다시 철수길에 오르게 됨으로써 6월 27일에 북한군이 김포반도에 상륙한 뒤로 1주일간 벌어졌던 지연전도 오류동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7월 3일 아침, 한강을 건넌 북한군 병력과 오류동 방면에서 진격해 온 병력이 합류하여 영등포를 점령하였다. 이로 인해 김포 지역에 있던 국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날 자정 무렵에는 북한군 1개 대대 규모 병력이 6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경인가도를 따라 인천까지 점령하였다. 결국 경인가도 이북 지역은 모두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었다.
한강과 오류동의 방어선이 동시에 무너지자, 북한군은 이날 중으로 선견대를 시흥(현재의 서울특별시 금천구)까지 진출시켜 국군과의 접촉을 유지하려 했다. 북한군 주력은 영등포와 오류동 부근에서 전열을 가다듬는 모습을 보였으며, 경부국도를 따라 전차를 이용한 돌파를 시도할 것이 명확해 보였다.
한편, 오류동 전선에서 철수하게 된 김포사령부 병력의 이동 경로는 다양했다. 일부는 소사에서 소래를 거쳐 서해안을 따라 수원으로 직접 이동했고, 다른 일부는 오류동 남쪽의 양지산 기슭을 따라 안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김포사령부의 철수 명령이 모든 일선 병사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혼란이 있었다. 일부 병사들은 여전히 진지를 지키고 있었고, 명령을 들었음에도 후퇴를 거부하고 참호에 남아있던 병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날 저녁 북한군 전차가 경인가도를 장악하자 그제야 전차 부대의 틈을 뚫고 남하하거나, 인천으로 이동하여 마지막 열차편으로 수원으로 가기도 했다. 제12연대 2대대장 한순화 소령의 경우, 인천에서 배를 구해 서해안을 보름 동안 표류한 끝에 군산에 상륙하기도 했다.
이날 저녁, 김포사령부의 주력 부대는 안양 부근에 집결하여 재편성되었다. 제15연대와 제18연대는 시흥사령관 김홍일 소장의 지휘 아래 들어가 안양 서북쪽 4km 지점인 덕안 부근의 안양 저지선 서쪽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고, 다시 지연전을 펼치게 되었다. 이 전투의 패배는 수도권 방어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후 국군이 안양 등지에서 힘겨운 방어전을 이어가는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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