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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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민당 (1960년)은 1960년 민주당 내 신구파의 갈등으로 분당된 구파가 창당한 정당이다. 민주당 내분으로 구파는 23인위원회를 구성하고, 신파는 13인위원회를 구성하여 세 대결을 벌였다.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가 선출되었으나, 구파는 장면 내각에 불만을 품고 1960년 11월 8일 신민당 창당을 선언했다. 1961년 2월 20일 창당하여 국회의원 79명을 보유한 제1야당이 되었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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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196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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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1960-1961) | |
한글 | 신민당 |
한자 | 新民黨 |
로마자 표기 | Sinmindang |
존속 기간 | 1960년 ~ 1961년 |
신민당 (1960년) | |
한글 | 신민당 |
한자 | 新民黨 |
로마자 표기 | Sinmindang |
존속 기간 | 1960년 |
2. 창당 배경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었다. 이후 실시된 제5대 총선에서 야당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었으나, 민주당 내에서는 구 정권 요직 역임 정치인 중심의 신파와 민주국민당(한국민주당 전신 보수 정당) 계열 구파 간 갈등이 계속되었다. 특히 선거 후 국무총리 승인을 둘러싸고 갈등이 심화되었다.[1] 윤보선 대통령(구파)이 지명한 김도연(구파)의 총리 인준안이 부결되고 장면(신파)이 총리에 취임하자, 구파는 신파와 결별하고 10월 13일 분당을 선언했다.
2. 1. 민주당 내 신파와 구파의 갈등
민주당은 창당 이전부터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 출신의 구파와 자유당 및 무소속 출신의 신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양 파벌은 당권 경쟁, 대통령 후보 선출, 개헌 문제 등 주요 사안마다 대립하였다.[3] 특히, 7·29 총선거 공천 과정에서 갈등이 심화되어, 많은 지역구에서 구파와 신파 후보가 모두 출마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구파는 이 시점에서 처음으로 분당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3]2. 2. 분당의 가속화
총선 이후, 구파는 유진산 의원을 통해 분당을 선언하였는데, "일당 독재로의 회귀를 막기 위해 건전한 야당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웠다.[4] 이는 민주당 지도부 및 국회의원 당선자 비율에서 신파에게 수적으로 밀린 구파가, 당내에서 신파와 경쟁해봐야 승산이 없다는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분석된다. 신파는 대통령은 구파, 총리는 신파로 하자는 안배론을 주장했으나, 구파는 대통령과 총리 모두 구파에서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신파가 수가 더 많은 상무위원회나 의원총회에서 논의할 경우 꼼짝없이 신파 주장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4]3. 제5대 민의원 및 초대 참의원 당선자 대회
제5대 총선 이후 민주당 내 신파와 구파는 각각 별도의 국회의원 당선자 대회를 개최하여 세 대결을 벌였다. 양측은 초선 의원들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며, 심지어 기차역에서 의원들을 "납치"하는 듯한 상황도 발생했다.[5]
1960년 8월 6일, 신파는 종로 대명관에서, 구파는 시청 앞 아서원에서 각각 당선자 대회를 개최했다. 신파 측 대회에는 민의원 의원 당선자 75명, 참의원 의원 당선자 10명 등 총 85명이 참석했고, 구파 측 대회에는 민의원 의원 당선자 83명, 참의원 의원 당선자 12명 등 총 95명이 참석했다.[5]
구파는 백남억, 박준규, 권중돈, 김광준, 강승구, 최해용, 전석봉 등 7명이 불참 통고를 했다고 밝혔고, 신파는 한근조, 류성권, 김재곤, 장면, 곽상훈, 이상면, 김동욱, 박순천, 조일재, 서정귀, 태완선, 김광준, 전석봉, 황인원, 류진, 김채용, 최해용, 이민우 등 15명이 불참 통고를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실제로는 상대편 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다.[5]
3. 1. 구파 및 신파 당선자 명단 (표)
구분 | 참의원 (명) | 민의원 (명) | 비고 |
---|---|---|---|
구파 | 12 | 83 | 백남억, 박준규, 권중돈, 김광준, 강승구, 최해용, 전석봉 등 7명은 불참을 통고했다.[5] |
신파 | 10 | 75 | 한근조, 류성권, 김재곤, 장면, 곽상훈, 이상면, 김동욱, 박순천, 조일재, 서정귀, 태완선, 김광준, 전석봉, 황인원, 류진, 김채용, 최해용, 이민우 등 15명은 불참을 통고했으나, 이 중 일부는 구파 대회에 참석했다.[5] |
4. 지도부
신민당의 지도부는 구파와 신파로 나뉘었다. 구파는 23인위원회, 신파는 13인위원회가 각각 당을 이끌었다.[5][1]
4. 1. 구파: 23인위원회
분당 운동 초기에는 20인위원회가 이끌다가, 8월 6일 당선자 대회를 기점으로 23인위원회 체제로 개편되었다. 23인위원회는 국회의장단, 대통령, 총리 등의 선거에서 구파의 후보 결정 및 선거 전략에 대한 권한을 당선자 대회로부터 위임받았으며, 분당 및 신당 창당 준비를 이끌었다.[5]23인 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지역구 |
---|---|
김산 | 민·서울 서대문구 을 |
민관식 | 민·서울 동대문구 갑 |
홍길선 | 민·경기 수원시 |
강영훈 | 민·경기 양주군 갑 |
신인우 | 민·강원 정선군 |
정순응 | 참·강원 1부 |
신각휴 | 민·충북6 옥천군 |
이민우 | 민·충북 청주시 |
윤담 | 민·충남 논산군 을 |
이상돈 | 민·충남 천안군 을 |
양일동 | 민·전북 옥구군 |
윤제술 | 민·전북 김제군 을 |
조영규 | 민·전남 영광군 |
유옥우 | 민·전남 무안군 을 |
권중돈 | 민·경북 영천군 을 |
박해정 | 민·경북 경산군 |
정헌주 | 민·경남 사천군 |
김영삼 | 민·경남 부산시 서구 갑 |
고담룡 | 민·제주시 |
유진산 | 민·전북 금산군 |
소선규 | 참·전북 1부 |
이정래 | 민·전남 보성군 |
서범석 | 민·서울 성북구 |
4. 2. 신파: 13인위원회
신파는 13인위원회가 이끌었다.[1]이름 | 지역구 |
---|---|
김상돈 | 민·서울 마포구 |
홍익표 | 민·경기 가평군 |
이상철 | 민·충남 청양군 |
이철승 | 민·전북 전주시 을 |
양병일 | 민·전남 강진군 |
조재천 | 민·경북 대구시 정 |
김용진 | 민·경남 진주시 |
계광순 | 민·강원 춘천시 |
오위영 | 참·경남 1부 |
한통숙 | 참·서울 1부 |
이태용 | 민·충북 제천군 |
현석호 | 민·경북 예천군 |
정일형 | 민·서울 중구 을 |
5. 장면 내각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발생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었다. 이후 실시된 대한민국 제5대 총선 결과, 야당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었으나,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갈등을 겪었다. 윤보선 대통령(구파)이 지명한 김도연(구파) 총리 인준안이 부결되고, 결국 신파의 장면이 국무총리에 취임하면서 구파는 신파와 결별하고 분당했다.[1]
5. 1. 대통령 및 총리 선출 과정
제5대 총선 결과, 야당 민주당이 국회와 상원 양원에서 다수당을 차지했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서는 구 정권에서 요직을 역임한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한 신파와 민주국민당(한국민주당을 전신으로 하는 보수 정당) 계열의 구파 간의 갈등이 계속되었고, 선거 후 국무총리 승인을 둘러싸고 급격히 첨예화되었다.[1]민주당 내 구파와 신파는 각각 23인 위원회와 13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통령 및 국무총리 후보를 논의했다. 23인 위원회는 윤보선을 대통령, 김도연을 총리로 합의했다. 13인 위원회는 곽상훈을 대통령, 장면을 총리로 하는 안 등 여러 안을 검토했으나, 파벌 균형 원칙에 따라 윤보선을 대통령, 장면을 총리로 지지하기로 결정했다.[3]
양측의 지지를 받은 윤보선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윤보선 대통령이 총리로 김도연을 지명하자 두 파벌 간의 갈등이 다시 심화되었다. 결국 김도연 총리 인준안은 부결되었고, 윤보선 대통령은 장면을 총리로 지명했다. 장면의 인준안이 통과되어 장면 내각이 출범했다.[3]
5. 2. 구파 의원 입각 문제
장면 총리는 내각에 구파 의원 5명을 입각시키겠다고 약속했으나, 신파 내부의 반발로 정헌주 의원 1명만 입각하게 되어 계파 갈등이 다시 심화되었다.[3]6. 신민당 창당
민주당 구파는 1960년 8월 31일 구파동지회를 원내 교섭단체로 등록시키고, 9월 22일 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했다. 9월 23일에는 신파가 단독으로 민주당으로 교섭단체를 등록해, 사실상 민주당은 분당됐다.[3]
1960년 3월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발생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실시된 대한민국 제5대 총선 결과, 야당인 민주당이 국회와 상원 양원에서 다수당을 차지했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서는 구 정권에서 요직을 역임한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한 신파와 구 민주국민당(한국민주당을 전신으로 하는 보수 정당) 계열의 구파 간의 갈등이 계속되었고, 선거 후 국무총리 승인을 둘러싸고 급격히 첨예화되었다.[1] 윤보선 대통령(구파)이 지명한 김도연(구파)에 대한 동의안이 부결되고 결국 신파의 영수인 장면이 국무총리에 취임하자 구파는 신파와의 결별을 결의, 같은 해 10월 13일 분당을 선언했다.
구파는 11월 8일 발기준비대회를 열고 당명을 신민당으로 확정지었으며,[3] 11월 24일 구파 의원들의 교섭단체인 「구파동지회」는 「신민당」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1961년 2월 20일 창당 대회를 개최하고 신민당 창당을 선포했다. 위원장(당수)에 김도연, 간사장에는 유진산을 선출했다.[2] 신민당은 창당과 함께 국회의원 79명을 보유한 제1야당이 되었다.[3] 하지만 같은 해 5월 16일 발생한 군사정변으로 발족한 군정의 포고로 해산되었다.
7. 5.16 군사정변과 신민당 해산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발생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실시된 제5대 총선 결과, 야당인 민주당이 국회와 상원 양원에서 다수당을 차지했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서는 신파와 구 민주국민당 계열의 구파 간의 갈등이 계속되었고, 국무총리 승인을 둘러싸고 급격히 첨예화되었다.[1] 윤보선 대통령(구파)이 지명한 김도연(구파)에 대한 동의안이 부결되고 결국 신파의 영수인 장면이 국무총리에 취임하자 구파는 신파와의 결별을 결의, 같은 해 10월 13일 분당을 선언했다.
1961년 2월 20일 창당 대회를 개최하고 신민당 창당을 선포했다. 신민당은 창당과 함께 국회의원 79명을 보유한 제1야당이 되었다.[3] 그러나, 신민당은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존속했다.
1961년 5월 16일 발생한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군부는 정당 활동을 금지시키고, 신민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을 해산시켰다. 제3공화국 발족 직전 야당으로 결성된 민정당에는 윤보선을 비롯한 신민당에서 활동했던 정치인들이 다수 참여했다.
참조
[1]
일반텍스트
[2]
뉴스
新民黨第1野黨{{lang|ko|으로}}發足(新民党 第1野党で発足)
http://gonews.kinds.[...]
1961-02-21
[3]
논문
민주당내 신·구 파벌간 갈등에 관한 연구
역사문제연구소
[4]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06
[5]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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