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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군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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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천군 학살 사건은 한국 전쟁 중 신천군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북한은 미군이 민간인 3만 5천여 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며 신천 박물관을 통해 이를 전시하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좌우 대립으로 인한 학살, 또는 북한군의 학살로 보는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미군의 학살을 비난하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소설가 황석영은 소설 《손님》을 통해 사건을 다루었으며,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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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군 학살 사건
사건 개요
위치신천군
표적신천 주민
날짜1950년 10월 17일 – 1950년 12월 7일
유형대량 학살
사망자30,000–35,383명 (북한 주장)
주장되는 가해자
관련 정보
관련 사건선천 터널 학살 사건
다른 이름신천군 사건
신천 사건
신천 학살
신천 대량 학살

2. 사건의 배경

신천박물관 경내의 방공호. 북한측은 이곳에서 미군이 900명의 신천 주민들을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3. 북한 측 주장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약 35,000명이 52일 동안 미국의 군대와 그 지지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 수치는 당시 신천군 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한다.[4] 1958년에 설립된 신천 박물관은 사건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유해와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5] 북한 학교에서는 미국인들이 "희생자들의 머리에 못을 박고" "여성의 가슴을 잘랐다"고 가르친다. 관리들은 "박물관의 모든 이미지를 복사하여 학교 복도 전체에 붙인다."[6]

1998년 7월 3일 조선중앙통신이 발표한 "분노로 들끓는 신천"이라는 제목의 보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양키들은 물과 우유를 달라고 울부짖는 아이들과 아기들에게 휘발유를 붓기 전에 어머니와 자녀를 갈라놓았다. 아이들과 아기들이 휘발유를 빨아들이고 큰 고통을 느끼며 울부짖자, 양키들은 불타는 횃불을 던져 죽였다. 그들은 또한 어머니들에게 폭탄을 던졌다. 미군들은 석탕교에서 2,000명이 넘는 무고한 사람들을 떨어뜨려 익사시켰다. 그들은 또한 소원저수지에서 1,000명 이상의 여성들을 익사시켰다. 얼음 창고에 갇힌 1,200명 이상의 애국심 넘치는 사람들이 군견에게 물어 죽임을 당했다. 중산초등학교 윤해원 교장의 머리가 산 채로 톱질을 당했다. 신천담배공장 여성동맹 박용교 위원장의 눈알과 가슴이 도려내졌다. 적들은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라 9개월 된 태아를 칼자루에 매달고 크게 웃었다. 양키들은 신천을 점령한 52일 동안 신천 인구의 4분의 1인 35,383명의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했다. 신천 박물관에는 미 제국주의 야만인들의 인간 사냥을 보여주는 6,465점의 증거물과 약 450장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국제변호사협회 조사단은 1952년 공동 성명을 발표하여 신천에서 벌어진 미 제국주의자들의 학살을 전례 없는 규모의 살인이라고 통렬히 비난했다. 조선 인민은 학살을 영원히 기억하고 피로 피를 갚을 것이다.[7]

김정일은 1998년에 박물관을 방문했다.[8] 김정은은 2014년 11월에 방문하여 "우리 군대와 인민을 위한 반미 교훈을 강화하고... 1천만 군인과 인민을 미국과의 전투에서 강력하게 단결시키기 위해" 방문했다.[8] 2015년 7월 김정은은 황병서 등 고위 군사 관계자들과 함께 다시 방문하여 신천 학살 박물관의 대대적인 확장을 공개했다.[9]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1952년 3월,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이 현지에 들어가 "조선에서의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범죄였다"고 규탄했다[24]。또한 1958년 3월 26일, 이 지역에 신천박물관이 개관되었으며, 개전을 도발한 미국(미국)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현지를 점령, 주민 3만 5383명을 학살했다며, 6465점의 유물·증거 자료와 450여 건의 사진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25][26]

2005년 8월 16일에는 신천군 원암리에서 이 사건은 유엔의 간판 아래에서 행해진 미국의 전쟁 범죄라는 국제탄핵대회가 열렸다[27]

한편, 대한민국(한국)의 소설가 황석영은 현지를 취재했고, 또 이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뉴욕 거주 한국인 목사로부터 당시의 목격담을 듣고, 2001년에 소설 『손님』을 저술했다. 이 책은 학살은 북한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하는 것처럼 미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신교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며, 한국 전쟁은 남북의 군대나 미군·중국군의 전쟁뿐만 아니라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의 살육전이기도 했다고 한다. 황석영은 북한 정부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도, 한국의 기독교 관계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28]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1951년, 이 사건을 토대로 「한국에서의 학살」(피카소 미술관 (파리) 소장)을 그렸다.

3. 1. 국제민주법률가협회(IADL) 보고서

1950년 국제민주법률가협회(IADL) 조사위원회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보고서를 작성했다.[13] 이 보고서는 한국 전쟁 당시 신천군에서 미군 주도로 학살이 자행되었다고 주장하며, '해리슨'이라는 미군 중위가 이를 지휘했다고 묘사한다.[13] 보고서는 미군이 일본 사무라이 검을 사용하여 최대 300명의 북한 주민의 목을 베었으며, 미국 공군이 한국에서 세균전을 벌였다고 주장했다.[23]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1952년 3월,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이 현지에 들어가 "조선에서의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범죄였다"고 규탄했다[24]

북한은 미군 1개 중대가 3만 5천여 명을 학살했으며, 희생자 대부분은 좌파 운동가 가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고서에서 학살 주도자로 지목된 '해리슨' 중위는 윌리엄 켈리 해리슨으로 추정되지만, 그가 신천군 사건 당시 현장에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32] 그 자신도 이러한 주장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33] 신천박물관에서는 해리슨을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증거는 부족하다.[15][16][17]

3. 2. 신천 박물관

1958년에 설립된 신천 박물관은 사건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유해와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5] 북한 학교에서는 미국인들이 "희생자들의 머리에 못을 박고" "여성의 가슴을 잘랐다"고 가르친다.[6] 박물관에는 미 제국주의 야만인들의 인간 사냥을 보여주는 6,465점의 증거물과 약 450장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7]

1952년 3월,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은 현지 조사 후 "조선에서의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범죄였다"고 규탄했다.[24] 1998년 7월 3일 조선중앙통신은 "분노로 들끓는 신천"이라는 제목의 보도에서, 미군들이 신천군에서 저지른 만행을 상세히 전하며, 신천 인구의 4분의 1인 35,383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7]

김정일1998년에 박물관을 방문했다.[8] 김정은2014년2015년에 방문하여 반미 교훈을 강화하고, 신천 학살 박물관의 확장을 지시했다.[8][9]

2005년 8월 16일에는 신천군 원암리에서 이 사건이 유엔의 간판 아래에서 행해진 미국의 전쟁 범죄라는 국제탄핵대회가 열렸다.[27]

대한민국의 소설가 황석영2001년 소설 『손님』에서 학살이 미군이 아닌 개신교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었다.[28] 파블로 피카소1951년 이 사건을 토대로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렸다.

3. 3. 북한 매체의 보도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관영 매체들은 신천군 학살 사건을 지속적으로 보도하며 반미 선전을 이어가고 있다.[4][7][25][26] 이들 매체는 미군이 신천군 주민 35,383명을 학살했으며, 이는 당시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4][7]

1998년 7월 3일 조선중앙통신은 "분노로 들끓는 신천"이라는 제목의 보도에서 미군이 저지른 학살의 잔혹성을 상세히 묘사하며, "조선 인민은 학살을 영원히 기억하고 피로 피를 갚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7]

북한은 1958년 신천 박물관을 설립하여 학살 희생자들의 유해와 유품을 전시하고, 학교 교육을 통해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고 있다.[5][6] 김정일김정은은 박물관을 방문하여 반미 교훈을 강조했다.[8][9]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은 1952년 신천에서 벌어진 학살을 "전례 없는 규모의 살인"이라고 비난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7] 조선중앙통신은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이 현지 조사 결과 "조선에서의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범죄였다"고 규탄했다고 보도했다.[24]

2005년 8월 16일에는 신천군 원암리에서 이 사건이 유엔의 간판 아래에서 행해진 미국의 전쟁 범죄라는 국제탄핵대회가 열렸다.[27]

4. 북한 측 주장에 대한 반박

1950년 6월 25일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은 인천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대한민국 국군유엔군북한군을 몰아내고 서울을 수복, 38선을 넘어 북진이 시작되었고 조선인민군은 패퇴를 거듭했었다. 국군과 유엔군, 특히 미군 각 부대는 이 과정에서 북한 정권의 본거지 평양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 불이 붙었고, 이 때문에 신천군에는 오래 주둔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무엇보다 북한에서 학살을 주도한 미군의 지휘관으로 지목하는 '해리슨'이라는 미군 중위가 실제 당시의 미군 명단에서 그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부터 북한이 주장하는 미군 주도에 의한 학살설은 근거가 흔들린다.[32]

당시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신천군 사건을 주도, 감독한 것으로 지목한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미군 중위는 한국 전쟁 당시인 1951년 미8군 부사령관으로 한국에 와 있었던 윌리엄 켈리 해리슨으로, 보고서에 따르면 그가 신천군에서의 학살을 주도했으며 이를 모두 사진으로 찍어 기록해두도록 명령했다고 했지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없었다. 윌리엄 켈리 해리슨(William Kelly Harrison) 본인의 경우,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는 했지만 정작 신천군 사건 당시에는 신천에 있지도 않았음이 확인되었다.[32] 아울러 윌리엄 켈리 해리슨 본인은 자신이 신천에서의 학살 주동자로 지목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33] 신천박물관에서는 이후로도 계속해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미군 중위를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홍보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1952년 3월,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이 현지에 들어가 "조선에서의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범죄였다"고 규탄했다.[24] 1958년 3월 26일, 이 지역에 신천박물관이 개관되었으며, 개전을 도발한 미국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현지를 점령, 주민 3만 5383명을 학살했다며, 6465점의 유물·증거 자료와 450여 건의 사진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25][26]

2005년 8월 16일에는 신천군 원암리에서 이 사건은 유엔의 간판 아래에서 행해진 미국의 전쟁 범죄라는 국제탄핵대회가 열렸다.[27]

한편, 대한민국의 소설가 황석영은 현지를 취재했고, 또 이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뉴욕 거주 한국인 목사로부터 당시의 목격담을 듣고, 2001년에 소설 『손님』을 저술했다. 이 책은 학살은 북한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하는 것처럼 미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신교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며, 한국 전쟁은 남북의 군대나 미군·중국군의 전쟁뿐만 아니라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의 살육전이기도 했다고 한다. 황석영은 북한 정부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도, 한국의 기독교 관계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28]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1951년, 이 사건을 토대로 「한국에서의 학살」(피카소 미술관 (파리) 소장)을 그렸다.

4. 1. '해리슨' 중위의 실존 여부

한국전쟁 당시 신천군에서 일어난 학살을 주도한 미군 지휘관으로 '해리슨' 중위가 지목되었으나, 당시 미군 명단에서 그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32] 북한은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지목한 해리슨 중위가 1951년 미8군 부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켈리 해리슨이라고 주장했지만, 윌리엄 켈리 해리슨은 당시 신천에 없었다.[32] 윌리엄 켈리 해리슨 본인 또한 자신이 신천에서의 학살 주동자로 지목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33]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1952년 3월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이 현지에 들어가 "조선에서의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범죄였다"고 규탄했다[24]。1958년 3월 26일, 이 지역에 신천박물관이 개관되었으며, 미국이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현지를 점령, 주민 3만 5383명을 학살했다며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25][26]

2005년 8월 16일에는 신천군 원암리에서 이 사건은 유엔의 간판 아래에서 행해진 미국의 전쟁 범죄라는 국제탄핵대회가 열렸다.[27]

한편, 대한민국의 소설가 황석영은 현지 취재와 증언을 토대로 2001년에 소설 『손님』을 저술, 학살이 미군이 아닌 개신교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었다.[28]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1951년, 이 사건을 토대로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렸다.

4. 2. 학살 주체에 대한 의문

1950년 6월 25일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은 인천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대한민국 국군유엔군북한군을 몰아내고 서울을 수복, 38선을 넘어 북진이 시작되었고 조선인민군은 패퇴를 거듭했었다. 국군과 유엔군, 특히 미군 각 부대는 이 과정에서 북한 정권의 본거지 평양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 불이 붙었고, 이 때문에 신천군에는 오래 주둔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무엇보다 북한에서 학살을 주도한 미군의 지휘관으로 지목하는 '해리슨'이라는 미군 중위가 실제 당시의 미군 명단에서 그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부터 북한이 주장하는 미군 주도에 의한 학살설은 근거가 흔들린다.[32]

당시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신천군 사건을 주도, 감독한 것으로 지목한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미군 중위는 한국 전쟁 당시인 1951년 미8군 부사령관으로 한국에 와 있었던 윌리엄 켈리 해리슨으로, 보고서에 따르면 그가 신천군에서의 학살을 주도했으며 이를 모두 사진으로 찍어 기록해두도록 명령했다고 했지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없었다. 윌리엄 켈리 해리슨(William Kelly Harrison) 본인의 경우,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는 했지만 정작 신천군 사건 당시에는 신천에 있지도 않았음이 확인되었다.[32] 아울러 윌리엄 켈리 해리슨 본인은 자신이 신천에서의 학살 주동자로 지목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33] 신천박물관에서는 이후로도 계속해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미군 중위를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홍보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1952년 3월,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이 현지에 들어가 "조선에서의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범죄였다"고 규탄했다.[24] 1958년 3월 26일, 이 지역에 신천박물관이 개관되었으며, 개전을 도발한 미국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현지를 점령, 주민 3만 5383명을 학살했다며, 6465점의 유물·증거 자료와 450여 건의 사진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25][26]

2005년 8월 16일에는 신천군 원암리에서 이 사건은 유엔의 간판 아래에서 행해진 미국의 전쟁 범죄라는 국제탄핵대회가 열렸다.[27]

한편, 대한민국의 소설가 황석영은 현지를 취재했고, 또 이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뉴욕 거주 한국인 목사로부터 당시의 목격담을 듣고, 2001년에 소설 『손님』을 저술했다. 이 책은 학살은 북한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하는 것처럼 미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신교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며, 한국 전쟁은 남북의 군대나 미군·중국군의 전쟁뿐만 아니라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의 살육전이기도 했다고 한다. 황석영은 북한 정부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도, 한국의 기독교 관계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28]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1951년, 이 사건을 토대로 「한국에서의 학살」(피카소 미술관 (파리) 소장)을 그렸다.

5. 다양한 관점과 해석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1952년 3월,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이 현지에 들어가 "조선에서의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범죄였다"고 규탄했다[24]。또한 1958년 3월 26일, 이 지역에 신천박물관이 개관되었으며, 개전을 도발한 미국(미국)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현지를 점령, 주민 3만 5383명을 학살했다며, 6465점의 유물·증거 자료와 450여 건의 사진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25][26]

2005년 8월 16일에는 신천군 원암리에서 이 사건은 유엔의 간판 아래에서 행해진 미국의 전쟁 범죄라는 국제탄핵대회가 열렸다[27]

한편, 대한민국(한국)의 소설가 황석영은 현지를 취재했고, 또 이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뉴욕 거주 한국인 목사로부터 당시의 목격담을 듣고, 2001년에 소설 『손님』을 저술했다. 이 책은 학살은 북한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하는 것처럼 미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신교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며, 한국 전쟁은 남북의 군대나 미군·중국군의 전쟁뿐만 아니라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의 살육전이기도 했다고 한다. 황석영은 북한 정부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도, 한국의 기독교 관계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28]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1951년, 이 사건을 토대로 「한국에서의 학살」(피카소 미술관 (파리) 소장)을 그렸다.

황해도 신천군 지도


신천군 사건은 해방 공간의 특수성과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 좌우 대립이 격화되어 발생한 동족 간 학살이라는 것이 현재까지 확인된 증언과 연구 성과를 통해 볼 때 가장 설득력 있는 본질이다.[37] 2004년 역사문제연구소는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에서 신천군 사건이 미군 개입 없이 신천군 내 기독교 우파 세력과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공산 좌파 세력 간의 갈등이 토지개혁을 매개로 격화되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황해도 지역은 지주와 소작인, 좌우익 간 갈등이 심했고,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토지개혁으로 갈등이 더욱 첨예해졌다. 조선공산당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많은 우익 인사들이 월남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이들은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에 맞춰 선발대로 고향에 복귀, 좌익 활동가들에게 보복했고, 이 과정에서 정치적 의사와 상관없는 민간인들마저 부역자로 몰려 학살 대상이 되었다.

2002년 4월 21일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중공군 개입 이후 유엔군이 남쪽으로 물러가기 직전 우익에 의한 마지막 학살이 있었다고 보도하며, 신천군 사건이 해방 전후 좌우 대립과 갈등, 6.25 전쟁 등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37]

5. 1. 우익 단체의 반공 투쟁 주장

한국에서는 북한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신천군 사건의 본질은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에 쫓겨 패퇴하던 인민군이 신천군에 남아 있던 지주, 자본가, 기독교인 등 우파 성향의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우파 민간인들이 인민군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 신천군 출신으로 6.25를 겪었던 실향민들의 증언에서 나온 주장이다. 이들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조선로동당과 인민군에 맞선 자유주의 우파 지하조직과 신천 군민의 저항이자 반공투쟁이라고 증언하고 있다.[34][35]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유엔군이 국군을 도와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하자, 전세가 불리해진 북한군은 지주, 성직자, 교사를 포함한 우파 세력들을 처형했다. 박천군(博川郡)에서는 교회당 같은 종교시설은 유엔군이 포격하지 않는다며 피난민들을 모이게 해놓고 폭격을 가해 많은 사람들이 몰살당하는 일도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에 쫓겨 달아나던 조선공산당이 마지막 발악으로 반체제 인사들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며 지하로 숨어들었던 북한 출신의 우익 청년들이 10월 13일을 기해 '반공 봉기'를 일으켜 국군의 북진에 호응했다는 것이다. 국제연합 한국 유격군, 흔히 구월산유격대(九月山遊擊隊)로 알려진 이들 반공청년단 조직은 구월산(九月山)을 거점으로 강화(江華)에서 신의주(新義州), 속초(束草)에서 주문진에 걸치는 한반도 중북부 각지에서 국군을 도와 전과를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36] 한국에는 이와 관련해 국제연합 한국유격군전우회와 신천 10·13반공의거동지회가 존재하며, 2010년에는 신천 10·13 반공 의거 제60주기 추도식이 대전광역시국립현충원 현충탑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현충원에는 당시의 전사자 309명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5. 2. 좌우 대립으로 인한 학살



신천군 사건은 해방 공간의 특수성과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 좌우 대립이 격화되어 발생한 동족 간 학살이라는 것이 현재까지 확인된 증언과 연구 성과를 통해 볼 때 가장 설득력 있는 본질이다.[37] 2004년 역사문제연구소는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에서 신천군 사건이 미군 개입 없이 신천군 내 기독교 우파 세력과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공산 좌파 세력 간의 갈등이 토지개혁을 매개로 격화되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황해도 지역은 지주와 소작인, 좌우익 간 갈등이 심했고,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토지개혁으로 갈등이 더욱 첨예해졌다. 조선공산당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많은 우익 인사들이 월남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이들은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에 맞춰 선발대로 고향에 복귀, 좌익 활동가들에게 보복했고, 이 과정에서 정치적 의사와 상관없는 민간인들마저 부역자로 몰려 학살 대상이 되었다.

2002년 4월 21일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중공군 개입 이후 유엔군이 남쪽으로 물러가기 직전 우익에 의한 마지막 학살이 있었다고 보도하며, 신천군 사건이 해방 전후 좌우 대립과 갈등, 6.25 전쟁 등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37]

조선중앙통신은 1952년 3월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이 현지에서 "조선에서의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범죄였다"고 규탄했다고 보도했다.[24] 1958년 3월 26일에는 신천박물관이 개관되어 미군이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주민 3만 5383명을 학살했다는 주장과 함께 관련 유물 및 사진 자료가 전시되었다.[25][26] 2005년 8월 16일 신천군 원암리에서는 이 사건이 유엔의 간판 아래에서 행해진 미국의 전쟁 범죄라는 국제탄핵대회가 열렸다.[27]

한국 소설가 황석영은 현지 취재와 목격담을 바탕으로 2001년 소설 『손님』을 저술, 학살이 미군이 아닌 개신교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한국 전쟁이 남북 군대, 미군, 중국군뿐 아니라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의 살육전이었다고 묘사했다. 황석영은 북한 정부 지지자와 한국 기독교 관계자 양측으로부터 비판받았다.[28] 화가 파블로 피카소1951년 이 사건을 토대로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렸다.

5. 3. 학살의 복합적 원인

신천군 사건의 본질은 북한 측의 미군 주도설과는 달리, 해방 공간의 특수성과 한국전쟁이라는 혼란 속에 격화된 좌우 대립으로 빚어진 동족 간 학살이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이다.[37] 2004년 한국의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에서는 신천군 내 기독교 우파 세력과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공산 좌파 세력 간의 갈등이 토지개혁을 매개로 격화되어 파멸적인 비극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하였다.

당시 황해도 지역은 지주와 소작인, 좌우익 간 갈등이 심했고,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설립 후 토지개혁을 둘러싼 좌우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37] 조선공산당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른 토지개혁 과정에서 많은 우익 인사들이 월남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이들은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에 앞서 고향에 복귀해 좌익 활동가들에게 보복했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마저 부역자로 몰려 학살 대상이 되었다.[37]

2002년 4월 21일에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망각의 전쟁 - 황해도 신천 사건"에 따르면 중공군 개입 이후 유엔군이 남쪽으로 물러가기 직전 우익에 의한 마지막 학살이 있었다.[37] 결국 신천군 사건은 해방 전후 좌우 대립과 갈등, 한국전쟁 등의 복합적인 원인이 맞물려 발생한 비극이다.[37]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1952년 3월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은 현지 조사 후 "조선에서의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범죄였다"고 규탄했다.[24] 1958년 3월 26일에는 이 지역에 신천박물관이 개관되었으며, 북한은 미국이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현지를 점령, 주민 3만 5383명을 학살했다며, 6465점의 유물·증거 자료와 450여 건의 사진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25][26] 2005년 8월 16일에는 신천군 원암리에서 이 사건을 유엔의 간판 아래에서 행해진 미국의 전쟁 범죄로 규정하는 국제탄핵대회가 열렸다.[27]

한편, 대한민국의 소설가 황석영은 현지 취재와 목격담을 바탕으로 2001년 소설 『손님』을 저술했다. 이 책은 학살이 미군이 아닌 개신교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한국 전쟁이 남북 군대, 미군, 중국군뿐 아니라 같은 마을 사람들 간의 살육전이었다고 묘사한다. 황석영은 북한 정부 지지자들과 한국 기독교 관계자들 양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28]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1951년 이 사건을 토대로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렸다.

6. 사건을 다룬 매체

황석영의 장편소설 《손님》(2001년)은 신천군 학살 사건기독교 우파와 좌파간의 사상 대립과 대결이 폭력으로 악화된 끝에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소설 속 등장 인물인 류요섭 박사의 모델이자 실제 황석영의 친구이기도 한 재미교포 목사 류태영은 이를 부정했다.[38] 황석영은 현지를 취재했고, 또 이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뉴욕 거주 한국인 목사로부터 당시의 목격담을 듣고, 2001년에 소설 『손님』을 저술했다. 이 책은 학살은 북한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하는 것처럼 미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신교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며, 한국 전쟁은 남북의 군대나 미군·중국군의 전쟁뿐만 아니라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의 살육전이기도 했다고 한다. 황석영은 북한 정부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도, 한국의 기독교 관계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28]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57회 「망각의 전쟁, 신천군 사건」(2002년 4월 21일 방영)에서, 조준묵 프로듀서는 신천군 사건이 미군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으며, "신천 지역에 꾸려진 반공 청년단을 이승만 정부가 북진하면서 묵인"했고 신천군 사건은 ‘좌우 대립의 결과’로 일어난 비극적 학살극이라는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39]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1952년 3월,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이 현지에 들어가 "조선에서의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범죄였다"고 규탄했다[24]。또한 1958년 3월 26일, 이 지역에 신천박물관이 개관되었으며, 개전을 도발한 미국(미국)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현지를 점령, 주민 3만 5383명을 학살했다며, 6465점의 유물·증거 자료와 450여 건의 사진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25][26]

2005년 8월 16일에는 신천군 원암리에서 이 사건은 유엔의 간판 아래에서 행해진 미국의 전쟁 범죄라는 국제탄핵대회가 열렸다[27]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1951년, 이 사건을 토대로 「한국에서의 학살」(피카소 미술관 (파리) 소장)을 그렸다.

6. 1. 소설

황석영의 장편소설 《손님》(2001년)은 신천군 사건을 기독교 우파와 좌파간의 사상 대립과 대결이 폭력으로 악화된 끝에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소설 속 등장 인물인 류요섭 박사의 모델이자 실제 황석영의 친구이기도 한 재미교포 목사 류태영은 이를 부정했다.[38] 황석영은 현지를 취재했고, 또 이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뉴욕 거주 한국인 목사로부터 당시의 목격담을 듣고, 2001년에 소설 『손님』을 저술했다. 이 책은 학살은 북한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하는 것처럼 미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신교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며, 한국 전쟁은 남북의 군대나 미군·중국군의 전쟁뿐만 아니라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의 살육전이기도 했다고 한다. 황석영은 북한 정부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도, 한국의 기독교 관계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28]

6. 2. 다큐멘터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57회 「망각의 전쟁, 신천군 사건」(2002년 4월 21일 방영)에서, 조준묵 프로듀서는 신천군 사건이 미군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으며, "신천 지역에 꾸려진 반공 청년단을 이승만 정부가 북진하면서 묵인"했고 신천군 사건은 ‘좌우 대립의 결과’로 일어난 비극적 학살극이라는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39]

6. 3. 회화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작)은 신천군 학살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정치적으로 공산주의자이기도 했던 피카소의 이 그림은 한국 전쟁 당시 신천군에서 벌어진 학살이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카소가 이 그림을 그리고 1년 뒤에 국제민주법률가협회에 의해 북한 지역에서의 학살 상황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고 신천군 사건과 관련된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7. 진상 규명 노력과 과제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1952년 3월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이 현지에 들어가 "조선에서의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범죄였다"고 규탄했다.[24] 1958년 3월 26일, 이 지역에 신천박물관이 개관되었으며, 미국이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현지를 점령, 주민 3만 5383명을 학살했다며, 6465점의 유물·증거 자료와 450여 건의 사진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25][26]

2005년 8월 16일에는 신천군 원암리에서 이 사건은 유엔의 간판 아래에서 행해진 미국의 전쟁 범죄라는 국제탄핵대회가 열렸다.[27]

대한민국의 소설가 황석영은 현지를 취재했고, 또 이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뉴욕 거주 한국인 목사로부터 당시의 목격담을 듣고, 2001년에 소설 『손님』을 저술했다. 이 책은 학살은 북한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하는 것처럼 미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신교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며, 한국 전쟁은 남북의 군대나 미군·중국군의 전쟁뿐만 아니라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의 살육전이기도 했다고 한다. 황석영은 북한 정부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도, 한국의 기독교 관계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28]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1951년, 이 사건을 토대로 「한국에서의 학살」(피카소 미술관 (파리) 소장)을 그렸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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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웹사이트 米国は朝鮮戦争挑発者/朝鮮中央通信④ http://www1.korea-np[...] 조선신보 2013-06-16
[26] 웹사이트 Pyongyang, March 27 (KCNA) -- The 50th anniversary of the Sinchon Museum was observed. http://www.kcna.co.j[...] 조선중앙통신 2013-06-16
[27] 웹사이트 信川で国際弾劾大会 朝鮮戦争時の米軍犯罪糾弾 http://www1.korea-np[...] 조선신보 2013-06-16
[28] 웹사이트 黄晳暎『客人(ソンニム)』紹介サイト https://www.iwanami.[...] 岩波書店 2013-06-16
[29] 웹인용 Report on U.S. Crimes in Korea http://www.uwpep.org[...] 2013-05-26
[30] 웹인용 민족21 http://www.minjog21.[...] 2010-06-21
[31] 뉴스 ‘신천 비극’ 좌우대립설 설득력 http://www.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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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간행물 Facts Forum 1955
[34] 서적 평양에서 본 북한사회 도서출판 답게 2001
[35] 문서 남한에서도 북한군에 밀려 [[낙동강]]까지 밀려났던 전쟁 초기에 경찰과 육군특무대, [[서북청년단]]이나 [[대동청년단]] 등 우익 단체에 의해, 각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크고 작은 죄수들이나 [[보도연맹]]원 등 좌익 운동 가담 경력자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판명된 자들을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재판도 거치지 않고 학살한 사례가 있다([[보도연맹 사건]] 항목 참조). 다만 신천군 사건과는 달리 보도연맹 사건에는 미군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일부 확인되었다.
[36] 웹인용 현충뉴스 - 국립현충원 공지 http://www.dnc.go.kr[...] 2015-06-20
[37] 서적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웅진닷컴
[38] 웹인용 민족21 http://www.minjog21.[...] 2010-06-21
[39] 뉴스 ‘신천 비극’ 좌우대립설 설득력 : 사회 : 인터넷한겨레 http://www.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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