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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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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남일보는 1909년 10월 15일 진주에서 창간된 경상남도 지역 신문이다. 창간 당시 한국 지방에서 발행된 최초의 신문 중 하나였으며, 일제강점기 탄압으로 폐간되었다가 해방 이후 재창간되었으나,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다시 폐간되었다. 1989년 복간되어 현재까지 발행되고 있으며, 지역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주요 사건으로는 경남일보 필화 사건, 1952년 무장 괴한 테러 사건, 언론 통폐합 조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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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일보 - [회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경남일보
원어명경남일보
종류지역 신문
언어한국어
본사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웹사이트경남일보
창간호 표지 (1909년 10월 15일)
창간호 표지 (1909년 10월 15일)
역사
창간1909년 10월 15일
폐간1915년 1월
1980년 11월 25일
재창간1946년 3월 1일
1989년 1월
발행 정보
발행 도시진주시
발행 국가대한민국
조직 정보

2. 역사

경남일보는 1909년 창간되어 여러 차례 폐간과 재창간, 복간을 거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09년 10월 15일 경남 진주에서 창간된 경남일보는 일제 강점기 언론 탄압으로 1915년 강제 폐간되었다.[2] 1910년 10월 14일에는 경남일보 필화 사건으로 첫 정간을 당하기도 했다.[2][5][4]

1946년 3월 1일 재창간된 경남일보는 한국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사설을 실었다가 무장 괴한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2][4] 자유당 정권과 박정희 군사정부 시절 언론 탄압을 받으며 어려움을 겪었다.

1980년 11월 25일,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조치로 또다시 강제 폐간되어 ''경남신문''으로 흡수 통합되었다.[4] 1989년 11월 25일 복간되었으며, 2000년 1월 1일부터는 원래 이름인 경남일보로 발행을 시작했다.[4][2]

2. 1. 창간과 일제 강점기 (1909년 ~ 1915년)

1909년 10월 15일, 경남 진주에서 김홍조, 장지연 등 민족 자본가와 지식인들이 참여하여 경남일보를 창간하였다.[2][5][4] 창간 당시 경남일보는 한국 지방에서 창간된 최초의 신문 중 하나였으며, 주식회사 형태를 띤 초기 언론사였다.[2]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한 인물로 알려진 장지연은 경남일보의 초대 주필을 맡았다.[5] 신문은 처음에는 지방 관청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5]

창간 1주년을 앞둔 10월 11일자 사설에 매천 황현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했다가 신문을 압수당하고, 1910년 10월 14일 첫 정간을 당하게 되었다. (경남일보 필화 사건)[2][5][4] 11일 후 10월 25일 정간 해제되어 27일부터 정상 발행을 하였다.

1912년 8월 30일 일제의 탄압으로 주필 장지연이 사임하고, 2대 주필에 권도용(權道溶)이 취임하였으나 8개월 만에 물러났다.[5] 1915년 1월, 887호를 마지막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당하게 된다.[2][4] 당시 한국에서 발행되던 유일한 다른 일간 한글 신문은 식민지 정부가 사실상 운영하는 매일신보였다.[4][6][7]

2. 2. 해방 이후 재창간과 시련 (1946년 ~ 1980년)

1946년 3월 1일, 경남일보는 반공, 반독재, 반부패를 기조로 재창간되었다.[2][4] 당시 좌우익 갈등이 극심했는데, 1947년 10월에는 좌익 세력이 신문사에 난입하여 붉은 기를 강제로 게양하고 논조를 바꾸라고 협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9년 3월 2일 경영난으로 무기 휴간했다가, 9월 1일 속간하면서 개천예술제의 전신인 영남예술제를 전폭적으로 후원하여 첫 행사를 진행했다.[2]

1952년 한국전쟁 중 임시 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발췌개헌안' 통과를 비판하고 하야를 촉구하는 사설을 실었다가, 10여 명의 무장 괴한에게 테러를 당해 1주일간 신문을 휴간했다.[2][4]

자유당 정권의 압력으로 그해 9월 문해술 사장이 주식을 사원에게 무상 양도하고 퇴임했다. 이후 설창수 주필이 제6대 사장에 취임하고 사원동인제를 채택했다. 1954년 5월 31일 전쟁으로 불탄 사옥을 준공하고, 진주성에 골프장을 건설하려던 계획을 끈질긴 반대 논지와 시민운동으로 무산시켰다.

1960년 3.15 부정 선거가 시작되자, 개표도 시작하기 전에 "민주주의에 장송의 종!"이라는 호외를 발행했다.[4]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 주도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육해공, 해병 쿠데타"라는 호외를 통해 사실을 알렸다.[4] 5월 20일 혁명정부를 비난한 기사에 검열을 가하자 말뚝 할자로 항거하였다. 1962년 박정희 군사정부의 압력이 심해지자, 1월 31일 설창수 사장이 퇴임하고, 2월 2일 최재호 사장이 취임했다. 그 후에도 잦은 경영진 교체가 있었다.

1979년 박정희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하면서, 1도 1사 언론 통폐합 조치에 의해 경남일보는 또다시 강제 폐간당하게 된다.[2] 1980년 11월 13일 김윤양 사장은 이사회에서 폐간 사실을 밝히고, 11월 25일 자 폐간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2][4] ''경남일보''는 ''경남신문''으로 흡수 통합되었다.[4]

2. 3. 복간과 현재 (1989년 ~ 현재)

1988년 12월 16일 폐간 당시 사장이었던 김윤양 박사는 경남일보 복간을 선언하였고, 1989년 11월 25일 9년 만에 복간하게 된다. 김윤양 박사는 8월 17일 병세가 악화되어 복간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20대 사장에 김흥치 사장이 선임되었다.[8]

경남일보는 진주시 상평동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복간 이후 진주성 중건에 관련된 사실과 초기 진주소싸움 등의 안내에 대한 사초를 발굴하고, 전국민속 투우대회를 개최하고, 남인수가요제를 제정하는 등 문화적인 면에서 많은 기여를 하였다.

김흥치 대표의 무능과 독선에 반발한 노조는 2010년 3월 30일부터 4월 13일까지 이사진 전원의 사퇴를 요구하며 10일간 신문을 발행하지 않았다. 김흥치 대표와 이사진은 전원 사퇴하였으며, 새 회장에는 하순봉, 사장에는 이연근 씨를 선임하였다. 이후 제호를 교체하고 진주종합경기장 준공 기념 공연, 프로축구 경기를 개최하였다.

2015년 1월 5일 제29대 대표이사에 이재근산청군수가 취임했다. 2017년 1월 2일 제30대 대표이사 회장에 고영진경상남도교육감이 취임했다.

1989년 1월, 새로운 직원들에 의해 신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상평동에 새로운 사무실을 건설했다. 처음에는 원래 이름 사용에 대한 법적 제한 때문에 "신경남일보"라고 불렸다.[4][2] 결국 이름 사용 권한을 획득하여 2000년 1월 1일자 13691호부터 해당 이름으로 발행을 시작했다.[4][2] 2003년에는 수곡면의 한 고가에서 first-ever issue of the paper|경남일보 창간호영어의 사본이 발견되었으며, 2009년 8월 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2호로 지정되었다.[2]

3. 주요 사건

경남일보는 여러 주요 사건들을 겪었다.


  • 경남일보 필화 사건: 1910년 황현의 절명시를 사설에 게재하여 신문이 압수되고 첫 정간을 겪었다.
  • 1952년 무장 괴한 테러 사건: 1952년 한국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사설을 실어 무장괴한에게 테러를 당했다.
  • 언론 통폐합 조치: 1979년 10·26 사건 이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3. 1. 경남일보 필화 사건

1910년 10월 11일, 경남일보는 사설에 매천 황현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했다가 신문을 압수당하고, 10월 14일 첫 정간을 당했다. 이로 인해 창간 1주년 기념행사는 열리지 못했다.[2][5][4] 경남일보 필화 사건 발생 11일 후인 10월 25일 정간 조치가 해제되어 27일부터 신문 발행이 재개되었다.

한일 병합 직후, 황현은 병합에 반대하며 절명시를 쓰고 자결했다. 경남일보는 이 시를 게재했고, 그 결과 10일간 발행이 정지되는 처분을 받았다.[2][5][4]

3. 2. 1952년 무장 괴한 테러 사건

1952년 한국전쟁 중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발췌개헌안' 통과를 비난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사설을 실었다. 이로 인해 10일 후 밤 11시에 10여 명의 무장괴한에게 테러를 당해 1주일간 신문이 휴간되었다.[2][4]

3. 3. 언론 통폐합 조치

1979년 박정희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하면서, 1도 1사 언론통폐합 조치에 의해 경남일보는 또 다시 강제 폐간당하게 된다.[1] 1980년 11월 13일 김윤양 사장은 이사회에서 폐간 사실을 밝히고, 11월 25일자 폐간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게 된다.[1]

4. 사회적 기여

경남일보는 지역 사회와 문화 발전에 기여해왔다. 개천예술제의 전신인 영남예술제를 후원하고, 진주성 중건 관련 사초를 발굴하는 등 문화 사업을 펼쳤다.

4. 1. 개천예술제 (영남예술제)

1946년 3월 1일 경남일보는 반공, 반독재, 반부패를 기조로 재창간했다. 1949년 9월 1일 경남일보는 개천예술제의 전신인 영남예술제를 전폭적으로 후원하여 첫 행사를 진행하였다.[1]

4. 2. 문화 사업

1988년 12월 16일 폐간 당시 사장이었던 김윤양 박사는 경남일보 복간을 선언했고, 1989년 11월 25일 9년 만에 복간하게 된다. 김윤양 박사는 8월 17일 병세가 악화되어 복간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20대 사장에 김흥치 사장이 선임되었다.[8]

복간 이후 경남일보는 진주시 상평동에 본사를 두고, 진주성 중건 관련 사초를 발굴하였다. 또한 전국민속 투우대회를 개최하고, 남인수가요제를 제정하는 등 문화적인 면에서 많은 기여를 하였다.

5. 발행 부수

발행 부수(경남)
2010년2012년2014년2017년비고
18,28620,34218,56920,435
출처: 한국ABC협회, 미디어오늘


참조

[1] 웹사이트 경남일보 https://nl.go.kr/new[...] 2024-02-10
[2] 웹사이트 [창간특집] 우리는 언제나 역사의 편에 선다 http://www.gnnews.co[...] 2024-02-10
[3] 웹사이트 '다사다난'한 전북언론, 그 역사를 알아보다 https://www.jbpressc[...] 2024-02-07
[4] 웹사이트 경남일보[慶南日報] https://www.nl.go.kr[...] 2024-02-02
[5] 웹사이트 경남일보(慶南日報) https://encykorea.ak[...] 2024-02-10
[6] 웹사이트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https://encykorea.ak[...] 2024-01-26
[7] 웹사이트 매일신보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4-01-26
[8] 웹인용 경남일보의 약사 https://web.archive.[...] 경남일보 200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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