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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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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사손은 조선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심정의 차남으로, 1517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 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했다. 1525년 경상우도 암행어사를 거쳐 만포진 첨절제사로 재직 중 1528년 함경도에서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사망했다. 사후 예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아들 심수경의 출세로 영의정에 가증되었다. 그는 신중하고 근면한 성격으로 평가받았으며, 20세에 훤칠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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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심사손
한자 표기沈思遜
별명심사손 (沈士遜)
출생일1493년 12월 25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일1528년 (36세)
사망원인함경도 지역에서 여진족의 기습으로 피살됨
국적조선
거주지조선
종교유교(성리학)
가족 관계
배우자증 정경부인 전의 이씨
자녀3남 2녀
아들심수경, 심수약, 심수준
아버지심정
어머니정경부인 하양 허씨
형제심사공 (형), 심사순 (동생)
외조부허당
장인이예장
사돈신파
손자심일장, 심일취
서손자심일매, 심일준, 심일운
증손자심관
고손자심노
5세손심구
학력 및 경력
학력1513년(중종 8년) 진사시 합격, 1517년(중종 12년) 별시 문과 급제
직업문신, 무신
직책문신, 무신

2. 생애

심사손은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 심정의 차남이자, 심사순의 형이고, 심수경의 아버지이다.

1513년 (중종 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7년 (중종 12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 예문관 검열(한림), 예문관 봉교, 사관(史官) 등을 지냈다. 1523년 (중종 18년) 홍문관 교리 겸 비변사 낭관으로서 서북면의 여진족 정벌에 참여하였고, 1524년 (중종 19년) 경연관, 특진관, 의정부 사인 등을 지냈다.

1525년 (중종 20년) 경상우도의 암행어사로 다녀왔다. 이후 중종의 특명으로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되어 충무위상호군이 되었다가, 만포진 첨절제사(滿浦鎭 僉節制使) 겸 절충장군[1]에 임명되었다.

양천현(현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3동 410) 서개화산(西開花山) 언덕에 안장되었다. 후에 그의 묘소 주변으로 아버지 심정, 동생 심사순, 아들 심수경 등의 묘소가 조성되었다.

사후, 바로 증 자헌대부 예조판서 등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심정김안로에게 숙청되었으나, 그의 관직은 추탈되지 않았다. 훗날 아들 심수경의 출세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가증되었고, 다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2. 1. 가계

심사손은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 심정의 차남이자, 심사순의 형이고, 심수경의 아버지이다.

2. 2. 관력

1513년(중종 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7년(중종 12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 예문관 검열(한림), 예문관 봉교, 사관(史官),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옥당),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 병조정랑, 홍문관 교리, 홍문관 부응교, 홍문관 응교, 사헌부 장령 등을 지냈다. 1523년(중종 18년) 홍문관 교리 겸 비변사 낭관으로서 서북면의 여진족 정벌에 참여하였고, 1524년(중종 19년) 경연관, 특진관, 의정부 사인 등을 지냈다.

1525년(중종 20년) 경상우도의 암행어사로 다녀왔다. 이후 사헌부 집의, 홍문관 전한 겸 경연관 시강관, 홍문관 직제학 겸 경연관 시독관을 지내고, 중종의 특명으로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되어 충무위상호군이 되었다가, 만포진 첨절제사(滿浦鎭 僉節制使) 겸 절충장군[1]에 임명되었다.

2. 3. 죽음과 사후

양천현(현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3동 410) 서개화산(西開花山) 언덕 건좌손향(乾坐巽向), 삼정중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후에 그의 묘소 주변으로 아버지 심정, 동생 심사순, 아들 심수경 등의 묘소가 조성되었다.

사후, 바로 증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심정김안로에게 숙청되었으나, 그의 관직은 추탈되지 않았다. 훗날 아들 심수경의 출세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가증되었고, 다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3. 평가

심사원려하는 성격으로, 조삼모사와 같은 얄팍한 꾀를 쓰지 않고 근면하고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여 주저함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

4. 기타

20살이 되자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였다.[3]

참조

[1] 문서 문과 급제자로서는 특별히 무반직에 제수되었다.
[2] 문서 꾀주머니로 알려진 그의 아버지 심정과는 대조적이다.
[3] 문서 심사손 신도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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