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 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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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노 렌시는 고다이고 천황의 측실이자, 가인이며, 남조 시대의 황태후이다. 도인공현의 양녀로, 1319년 고다이고 천황의 중궁인 사이온지 기시를 섬기며 궁중에 들어갔다. 쇼추 2년(1325년) 쓰네나가 친왕을 낳았고, 이후 고다이고 천황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다. 1331년 삼위내시에 서임되었으며, 겐코의 난으로 오키 섬에 유배된 고다이고 천황을 따랐다. 겐무 신정 이후에는 남조의 황태후로서 고무라카미 천황을 보필했으며, 말년에는 정사에 관여하여 '호조 마사코'에 비견되기도 했다. 1359년 사망했으며, 가인으로서 신엽화가집에 작품이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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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노가 - 아노 젠조
아노 젠조는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이복 동생으로서 요리토모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요리토모 사후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처형되었고, 그의 후손은 무가와 공가로 나뉘어 이어졌다. - 무로마치·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후비후궁 - 니조 에이시
니조 에이시는 관백 니조 미치히라의 딸로, 고다이고 천황의 뇨고가 되었으며, 천황 사후 출가하여 안푸쿠도노라고 불렸다. - 무로마치·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후비후궁 - 슌시 내친왕
고다이고 천황의 중궁인 슌시 내친왕은 겐무 신정의 안정을 위해 혼인했으나, 딸 출산 후 겐무 정권의 불안정을 심화시키고 일찍 사망했으며, 고다이고 천황의 깊은 애정을 받았다. - 난보쿠초 시대의 여성 - 우에스기 기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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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하시 나리코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부인이자 호조 씨 출신으로,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와 아시카가 모토우지를 낳았으며, 다카우지가 무로마치 막부를 수립한 후 미다이도코로로서 종2위에 서임된 정치적 수완과 모성애를 겸비한 인물이다.
아노 렌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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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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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제97대 천황의 생모 (황태후) |
재위 | 랴쿠오 2년/엔겐 4년 (1339년) 10월 이후? |
작위2 | 신타이켄몬인 |
재위2 | 쇼헤이 6년/간노 2년 12월 28일 (1352년 1월 15일) |
출생일 | 쇼안 3년 (1301년) |
사망일 | 쇼헤이 14년/엔분 4년 4월 29일 (1359년 5월 26일) |
휘 | 렌시/카도코 (廉子) |
별호 | 산미노나이시 (三位内侍) |
가문 | 아노가 (후지와라씨) |
아버지 | 아노 킨카네 양아버지 : 토인 킨카타 |
배우자 | 고다이고 천황 |
자녀 | 쇼시 내친왕 츠네요시 친왕 나리요시 친왕 노리요시 친왕 (고무라카미 천황) 코레코 내친왕 (신센요몬인?) |
2. 생애
『女院小伝』일본어에 따르면, 아노 렌시는 태어난 후 좌대신 도인 긴사다의 양녀가 되었다.
겐무 신정 와해 후 요시노로 고다이고 천황을 따라가 도왔다. 고다이고 천황 사후에는 고무라카미 천황의 생모로서 남조의 황태후가 되었으며, 쇼헤이 6년/간오 2년(1351년) 12월에 원호 선하를 받고, 쇼헤이 12년/엔분 2년(1357년) 9월에 낙식했다.
쇼헤이 14년/엔분 4년(1359년) 4월 가와치 간신지에서 붕어했으며, 향년 59세였다.
2. 1. 출생과 입궁
겐오 원년(1319년) 8월 사이온지 기시가 고다이고 천황의 중궁으로 책립되었을 때, 아노 렌시는 19세로 중궁 내시(중궁의 배하 서열 3위)로 입궁했다.[2] 당시 동료는 선지(서열 1위)였던 니조파의 시인 니조 후지코와 중궁 어갑전별당(서열 2위)이었던 어갑전 (사이온지 킨아키라의 딸)이다.[3]1320년대 전반에 쇼시 내친왕을, 쇼추 2년(1325년)에 쓰네나가 친왕을 낳는 등, 고다이고 천황과의 사이에서 많은 아이를 낳았다. 가랴쿠 3년(1328년)에는 요시나가 친왕(훗날의 고무라카미 천황)이 태어났다. 겐코 원년/겐토쿠 3년(1331년) 3월 종삼위에 서임되어, '''삼위내시'''라 불렸다.
2. 2. 고다이고 천황의 총비
겐오 원년(1319년) 8월, 사이온지 기시가 고다이고 천황의 중궁으로 책립되었을 때, 아노 렌시는 19세로 중궁 내시(중궁의 배하 서열 3위)로 입시했다. 이때 동료는 선지(서열 1위)였던 니조파의 시인 니조 후지코[2], 그리고 중궁 어갑전별당(서열 2위)이었던 어갑전 (사이온지 킨아키라의 딸)[3]이다.1320년대 전반에 쇼시 내친왕을, 쇼추 2년(1325년)에는 쓰네나가 친왕을 낳는 등, 고다이고 천황과의 사이에서 많은 아이를 낳았다. 가랴쿠 3년(1328년)에는 요시나가 친왕(훗날의 고무라카미 천황)이 태어났다. 겐코 원년/겐토쿠 3년(1331년) 3월 종삼위에 서임되어, '''삼위내시'''라 불렸다.
겐코 2년/겐토쿠 4년(1332년), 전년의 겐코의 난으로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섬으로 유배될 때 동행했다.
겐무 신정이 시작된 겐코 3년(1333년) 10월 12일(11월 19일)에 사이온지 기시가 붕어하자, 이미 많은 황자를 낳고 고다이고 천황의 오키섬 유배 생활을 함께한 아노 렌시는 중요한 비빈으로 부상했다.
겐무 원년(1334년) 1월 23일에는, 렌시 소생의 장남 쓰네나가 친왕이 태자가 되었다[4]。 겐무 2년(1335년) 4월에는 준삼후의 영예를 받았다.
2. 3. 겐무 신정과 남조
고다이고 천황의 중궁 사이온지 기시가 겐오 원년(1319년) 8월에 책립되자, 아노 렌시는 19세의 나이로 중궁 내시(중궁 배하 서열 3위)로 입시했다. 당시 동료로는 선지(서열 1위)였던 니조파 시인 니조 후지코[2]와 중궁 어갑전별당(서열 2위)이었던 어갑전 (사이온지 킨아키라의 딸)[3]이 있었다.1320년대 전반 쇼시 내친왕을, 쇼추 2년(1325년)에는 쓰네나가 친왕을 낳는 등 고다이고 천황과의 사이에서 여러 아이를 낳았다. 가랴쿠 3년(1328년)에는 요시나가 친왕(훗날 고무라카미 천황)이 태어났다. 겐코 원년/겐토쿠 3년(1331년) 3월에는 종삼위에 서임되어 '''삼위내시'''로 불렸다.
겐코 2년/겐토쿠 4년(1332년), 전년의 겐코의 난으로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섬으로 유배될 때 동행했다.
겐무 신정이 시작된 겐코 3년(1333년) 10월 12일(11월 19일) 기시가 붕어하자, 이미 많은 황자를 낳고 고다이고 천황의 오키섬 유배 생활을 지탱한 아노 렌시가 비로소 부상했다.
겐무 원년(1334년) 1월 23일, 아노 렌시의 장남 쓰네나가 친왕이 태자가 되었다.[4] 겐무 2년(1335년) 4월에는 준삼후의 영예를 얻었다.
겐무 신정 와해 후 요시노 천행에도 동행하여 고다이고 천황을 도왔다. 고다이고 천황 사후에는 고무라카미 천황의 생모로서 남조의 황태후가 되었으며, 쇼헤이 6년/간오 2년(1351년) 12월에 원호 선하를 받고, 쇼헤이 12년/엔분 2년(1357년) 9월에 낙식했다.
2. 4. 사망
쇼헤이 14년/엔분 4년(1359년) 4월 가와치 간신지에서 향년 59세로 붕어했다.[4]3. 평가
아노 렌시는 가인으로서, 준 칙찬집 『신엽화가집』에 20수가 수록되었다[1]。
렌시는 관료·정치가로서 높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1352년 여원호를 얻은 후 남조의 국정에 직접 참여했다. "신대현문원영지"를 발하여 야마시로국의 기원사에 명하여 기도를 행하게 하거나, 야마토국사이다이지의 소령 안도를 행하는 등 했다[1]。일본사 연구자 모리 시게아키는 말년의 렌시의 활약에 대해 "니쇼군 호조 마사코를 방불케 한다"고 평가했다[1]。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상주문』(1338년6월 3일)에서 "여관 중에 사리사욕으로 국정을 어지럽히는 자가 있다"고 고다이고 천황을 비난했지만, 이는 편향된 의견일 수 있으며 객관적인 사실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4]。
『태평기』는 렌시가 미모와 교활함을 겸비하여 고다이고 천황의 총애를 독점했고, 모리요시 친왕과의 정권 항쟁이 신정 실패의 원인 중 하나였다고 서술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중국 속담을 인용하며 비판하지만, 이는 사이온지 기시와의 관계 묘사와 모순되며, 백거이의 한시 "상양백발인"을 바탕으로 한 창작이거나 무로마치 막부의 개찬으로 인한 것일 수 있다。
3. 1. 긍정적 평가
가인으로서, 준 칙찬집 신엽화가집에 20수가 수록되었다[1]。렌시는 관료·정치가로서 높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여원호를 얻은 정평 6년/관응 2년(1352년) 이후 남조의 국정에 직접 참여하는 능력을 보였으며, "신대현문원영지"를 발하여 야마시로국의 기원사에 명하여 기도를 행하게 하거나, 야마토국사이다이지의 소령 안도를 행하는 등 했다[1]。일본사 연구자 모리 시게아키는 말년의 렌시의 활약에 대해 "니쇼군 호조 마사코를 방불케 한다"고 평가했다[1]。
3. 2. 부정적 평가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죽기 직전에 쓴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상주문』(1338년6월 3일)에서 "여관 중에 사리사욕으로 국정을 어지럽히는 자가 있다"고 지명하지는 않았지만, 렌시를 중용하는 고다이고 천황을 암암리에 비난하는 부분이 있다[4]。 다만 이는 공가 대표로서 편향된 의견이며, 렌시의 영향이 객관적으로 나빴는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볼 필요가 있다[4]。『태평기』는 렌코가 "뛰어난 미모"뿐만 아니라 "교활함"을 겸비했기 때문에 고다이고 천황의 총애를 독점했다고 하며, 신정 실패의 원인 중 하나로 렌코와 모리요시 친왕 간의 정권 내 항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중국의 속담을 인용하며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정비인 사이온지 기시로부터 천황의 총애를 빼앗은 경성경국의 악녀라는 묘사는 『태평기』 외에는 보이지 않으며, 다른 현존 자료와 일치하지 않는다。 『태평기』 내부에서도 고다이고와 기시의 사이좋은 모습이 그려져 있어, 렌코 악녀설은 이야기로서 설정이 파탄나고 있다。 사실이 아닌 내용이 묘사된 이유로서, 『태평기』 연구자인 병도 히로키는 편찬자가 문학적 효과를 노리고 백거이의 한시 "상양백발인"을 바탕으로 창작한 점, 현행 『태평기』의 일부에는 겐무 정권 비판을 의도하여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개찬이 가해졌다고 보이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3. 3.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의 비판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죽기 직전에 쓴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상주문』(엔겐 3년/랴쿠오 원년 5월 15일 (1338년 6월 3일)에는 "여관 중에 사리사욕으로 국정을 어지럽히는 자가 있다"라고 콕 집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렌시를 중용하는 고다이고 천황을 은근히 비난하는 부분이 있다.[3] 다만, 이는 공가 대표로서 편향된 의견이므로, 렌시의 영향이 객관적으로 나빴는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3]3. 4. 가인으로서의 렌시
가인으로서, 준 칙찬집 『신엽화가집』에 20수가 수록되었다[1]。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죽음에 임하여 써 내려간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상주문』(엔겐 3년/랴쿠오 원년 5월 15일 (1338년 6월 3일)에서는, "여관 중에 사리사욕에 의해 국정을 어지럽히는 자가 있다"고 지명하지는 않았지만, 렌시를 중용하는 고다이고 천황을 암암리에 비난하는 부분이 있다[2]。 다만, 이는 공가 대표로서의 편향된 의견이며, 객관적인 사실로서 렌시의 영향이 나빴는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2]。
3. 5. 묘소
묘소에 관해서는 관심사 경내의 코보자카 능묘 참고지, 경외의 히노오카 능묘 참고지 등이 전해지고 있지만, 덴주 4년/에이와 4년(1378년)에 이 절을 참배한 겐요의 『관심사 참배 제당 순례기』를 참조하면, 현재 경내에 "남공수총(머리무덤)"이라고 칭하고 있는 오륜탑 주변이 진짜 여원 묘에 해당하는 듯하다.[5]
4. 관련 작품
아노 렌시는 『태평기』에서의 강렬한 인상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악녀" 이미지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분야 | 작품명 | 비고 |
---|---|---|
소설 | 요시카와 에이지, 『사본 태평기』 | |
소설 | 미네 류이치로, 『아시카가 타카우지 여태평기』 | |
소설 | 모리무라 세이이치, 『태평기』 | |
영화 | 사쿠라 사쿠라 (1924년) | 닛카츠, 연기: 오노에 타마노조 |
텔레비전 드라마 | 태평기 (1991년) | NHK 대하드라마, 연기: 하라다 미에코 |
연극 | 벚꽃의 폭풍기 (2021년) | 다카라즈카 가극단 츠키구미 공연, 연기: 카에데 유키 |
만화 | 카미야 소노코, 『아노 렌시 (로망 코믹스 인물 일본 여성사 17)』 | |
만화 | 이치카와 준, 『귀국 환상』 |
참조
[1]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2]
문서
廉子と同じく後に後醍醐天皇の側室ともなり[[懐良親王]]をもうける。
[3]
문서
後に後醍醐天皇第一皇子[[尊良親王]]の妻。
[4]
웹사이트
大日本史料
https://clioimg.hi.u[...]
[5]
서적
新発見の資料に拠る新待賢門院御陵墓攷
安田文庫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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