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노키 마사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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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1294년 가와치국에서 태어난 무장이자 전략가로, 가마쿠라 막부 타도와 겐무 신정에 기여했으나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결했다. 그는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충절의 상징으로 추앙받았으며, 게릴라 전술에 능하여 아카사카 성 전투와 지하야 성 전투에서 뛰어난 방어 전략을 펼쳤다. 에도 시대에는 존왕주의의 상징으로, 메이지 시대에는 충신으로 칭송받았지만, 전후 역사 연구에서는 '악당'으로서의 측면도 조명받았다. 그의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며, 다양한 문화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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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노키씨 - 가와치씨
가와치 씨는 가야에서 건너온 도래인 계통, 겐지 계통, 구스노키류, 지바류 등 여러 계통으로 존재하며, 각 계통은 야마토 왕권, 시나노 등 여러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거나 남북조 시대, 센고쿠 시대에 활약했다. - 구스노키씨 - 지하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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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노키 마사시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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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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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구스노키 마사시게 |
본명 | 楠木 正成 |
출생 | 1294년 (추정) |
사망 | 1336년 7월 4일 |
묘소 | 간신지 |
다른 이름 | 다이 난코, 효에노조, 사에몬노조, 조 |
직업 | 무사 |
알려진 이유 | 가마쿠라 막부 타도, 이상적인 무사 충성 |
기념물 | 호켄토, 여러 동상 |
신호 | 남목명신 |
아명 | 다몬마루 |
존칭 | 다이난코 |
계명 | 영광사 대원 의룡 만당 |
관위 | 병위, 종5위하, 검비위사, 좌위문위, 가와치노카미, 셋쓰노카미, 증 정1위 |
주군 | 고다이고 천황 |
씨족 | 구스노키 씨(칭 다치바나 씨) |
아버지 | 구스노키 마사토(추정) |
형제 | 도시치카(마사토시)(추정), 마사시게, 마사스에 |
자녀 | 마사쓰라, 마사토키, 마사노리 |
배우자 | 히사코 (미나미에 마사타다의 딸) |
일본어 정보 | |
일본어 이름 | 楠木 正成 |
로마자 표기 | Kusunoki Masashige |
한국어 정보 | |
한국어 이름 | 구스노키 마사시게 |
사망 관련 정보 | |
사망 년도 | 1336년 |
사망 날짜 (음력) | 음력 5월 25일 |
기타 정보 | |
활동 시기 | 가마쿠라 시대 말기 - 남북조 시대 |
2. 생애
고다이고 천황이 1331년(겐코 원년)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위해 거병하자,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시모아카사카 성에서 거병하여 막부군과 싸워 승리했다(아카사카 성 전투).[2]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 섬으로 유배되었을 때도, 모리요시 친왕과 함께 가와치 국 가미아카사카 성, 곤고 산 중턱의 지하야 산성 등에서 게릴라 전법과 분뇨를 이용한 공격 등으로 막부군에 맞섰다.
1333년(겐코 3년, 쇼쿄 2년), 아시카가 다카우지, 닛타 요시사다, 아카마쓰 노리무라 등이 거병하면서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했다(겐코의 난).[2] 구스노키는 교토로 개선하는 천황을 효고에서 마중하고 경호했다.
겐무 신정에서 마사시게는 기록소기인(記録所寄人)과 잡소결단소봉행인(雜訴決斷所奉行人)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고, 가와치 국, 이즈미 국 등지의 슈고를 겸하며 천황의 신임을 받았다. 유키 지카미쓰, 나와 나가토시, 지쿠사 다다아키와 함께 '삼목일초(三木一草)'로 불렸다.[2]
1335년 나카센다이의 난 진압 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반기를 들자, 닛타 요시사다가 토벌에 나섰으나 하코네, 다케노시타에서 패배했다. 구스노키는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과 연합하여 아시카가 군을 교토에서 몰아냈다.[3]
1336년 다카우지가 규슈에서 세력을 키워 다시 교토로 진격하자, 구스노키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닛타 요시사다를 내치고 다카우지와 화친할 것과 교토에서 잠시 철군할 것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닛타 요시사다의 휘하 장수로 출진하여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아시카가 군에 패배, 동생 마사스에와 함께 자결했다. 향년 43세였다.[2][3]
2. 1. 출신 배경
구스노키 가문은 이요 다치바나씨(오치씨, 越智氏) 다치바나노 도야스(橘遠保)의 후예라고 자처했다. 그러나 마사시게 이전의 계보는 일치하지 않아 후세의 창작으로 보인다. 1335년 마사시게가 『법화경』 사경 발문에 "귤 아소미 마사나리(橘朝臣正成)"라고 직접 적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귤씨(橘氏)의 후예라고 자칭하고 있었다.마사시게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 가와치 호족설: 가와치국 이시카와군(石川郡) 아카사카촌(赤坂村, 지금의 일본 오사카부 미나미카와치군 지하야아카사카촌千早赤阪村) 출신이라는 설.[56] 이 시기 마사시게는 '악당(惡党) 구스노키 효에노이(楠木兵衛尉)'라는 이름으로 린센지(臨川寺) 소유 이즈미국 와카마쓰 장원 관련 사료에 등장한다.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이 아닌, 가와치를 중심으로 수은 유통 등을 장악한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효에노조'라는 관직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아 조정과 연을 맺고 고다이고 천황과도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간토 출신설: 조상이 호조 씨 집안의 가신으로 가와치로 이주했다는 설, 하타 가문 일족이라는 설 등이 있다.
- 스루가 국 출신설: 득능홍일이 제창한 설로, 가케이 마사히로, 아라이 타카시게 등이 지지한다.[6][9]

2. 1. 1. 가와치 호족설
《태평기》에 따르면,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가와치국 금강산 서쪽(현재의 일본 오사카부 미나미카와치군 지하야아카사카촌)의 유복한 지방 지주 출신이다.[5] 楠木氏는 橘氏의 후예로 여겨지며,[6] 정성의 어머니는 橘遠保의 후예 橘盛仲의 딸이다. 겐코 원년(1331년) 린센지 소유 이즈미국 와카마쓰 장원 관련 사료에 '악당 구스노키 효에노조'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56] 이는 그가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이 아닌, 가와치 지역을 중심으로 수은 유통 등을 장악한 호족이었음을 시사한다.2. 1. 2. 간토 출신설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가문은 스루가 국 출신으로, 호조 씨 가문의 가신(피관)으로서 가와치 국으로 이주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근거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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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치 국 내 구스노키 지명 부재 |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고향인 가와치 국 곤고 산 서쪽 기슭부터 간신사 장원 일대에는 구스노키라는 지명이 없다. |
스루가 국 구스노키무라 존재 | 가마쿠라 막부가 1293년 스루가 국 입강장 내 나가사키고 일부와 구스노키무라를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 기증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곳에 호조 득종 피관인 구스노키 씨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간신지 장원 지두와 호조 씨의 관계 | 간신사 장원의 지두였던 아다치 씨가 1285년 시모쓰키 소동으로 멸망했고, 이후 장원이 득종 가문에 편입되면서 나가사키 씨와 같은 고향인 구스노키 씨가 간신지 장원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가마쿠라 쇼군케푸』 기록 | 1322년 호조 다카토키의 명령을 받은 마사시게가 셋쓰 국 요도가와 하구의 와타나베토를 토벌하고, 기이 국 야스다쇼지를 죽이고, 남야마토의 오치 씨를 격멸했다는 기록이 있다. (단, 사료의 신빙성은 낮다.) |
『고코묘쇼인 칸파키키』 낙수 기록 | 1333년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공격하는 가마쿠라 막부군을 조롱하는 낙수에 "구스노키의 가지는 가마쿠라에 있는데, 가지를 자르러 왜 나오는가"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0] 이는 구스노키 씨의 출신이 가마쿠라(동국 득종가)임을 암시한다.[6] |
아미노 요시히코는 『고야 슌쥬 헨넨 슈로쿠』 등을 근거로 구스노키 씨가 원래 무사시 국 고케닌으로, 호조 씨의 피관(고나이닌)이 되어 시모쓰키 소동으로 득종령이 된 간신지 장원의 대관으로 가와치로 이주했다고 추정했다.[11]
이러한 득종 피관·고케닌 설에 대해, 이마이 마사노스케는 에도 시대 유행한 『태평기』 주석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신빙성에 의문이 남는다고 주장했다.[13]
득종 피관·고케닌 설의 대전제인 가와치 국에 '구스노키'라는 지명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도, 현재 미나미카와치 군 타이시초 오아자 야마다에 '구스노키'라는 지명이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13][14]
2. 2. 가마쿠라 막부 타도
1331년(겐코 원년), 고다이고 천황의 거병 소식을 듣고 시모아카사카 성에서 거병하여 막부군과 싸워 승리했다(아카사카 성 전투).[2] 이때 천황과 구스노키를 연결해 준 것은 이가 가네미쓰 혹은 진언종의 승려인 몬칸으로 보인다.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 섬으로 유배되었을 동안에도 모리요시 친왕과 함께 가와치 국의 가미아카사카 성, 곤고 산 중턱에 쌓은 지하야 산성 등에서 게릴라 전법 및 분뇨를 사용한 오물 공격 등으로 막부군에 맞서 분전했다.1333년(겐코 3년, 쇼쿄 2년) 각지에서 막부 타도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아시카가 다카우지, 닛타 요시사다, 아카마쓰 노리무라 등이 거병하여 마침내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였다(겐코의 난).[2] 교토로 개선하는 천황을 구스노키는 효고까지 나아가 마중하였고 천황의 경호를 맡았다고 한다.
2. 3. 겐무 신정과 몰락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이 시작되자, 마사시게는 기록소기인(記録所寄人)과 잡소결단소봉행인(雜訴決斷所奉行人)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고, 가와치 국, 이즈미 국 등지의 슈고를 겸하며 천황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유키 지카미쓰, 나와 나가토시, 지쿠사 다다아키와 함께 '삼목일초(三木一草)'로 불리며 그 공을 인정받아 조정으로부터 두터운 포상을 받았다.[2]1335년,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과 신정에 반기를 들었다. 조정은 닛타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 토벌을 명했지만, 요시사다는 하코네, 다케노시타에서 다카우지에게 패배했다. 구스노키는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과 연합하여 요시사다와 함께 아시카가 군을 교토에서 축출했다.[3]
1336년, 다카우지가 규슈에서 세력을 회복하여 다시 교토로 진격해 왔다. 구스노키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닛타 요시사다를 내치고 다카우지와 화친할 것을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토에서 잠시 철군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마저도 묵살되었다. 결국 닛타 요시사다의 휘하 장수로 출진하여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아시카가 군에 패배했다.[4] 구스노키는 동생 마사스에와 함께 자결했으며, 향년 43세였다.[2][3]
3. 후세의 평가
《태평기》는 남조의 시각에서 난보쿠초 시대를 그린 고전으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공적을 강조하여 서술하고 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마사시게의 청렴함에 경의를 표했고, 이는 아시카가 가문의 사서인 《매송론》에서조차 마사시게를 동정적으로 서술하게 된 배경으로 분석된다.
남북조의 싸움이 북조의 승리로 끝나면서 마사시게는 역적으로 여겨졌으나, 1559년 그의 자손을 칭한 구스노키 마사토라(楠木正虎)가 조정에 탄원하여 오기마치 천황의 명으로 사면받았다. 에도 시대에는 미토번에서 융성했던 미토학의 존왕주의 사가들에 의해 충신으로 추앙받아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존왕가에 의해 빈번히 그의 제사가 올려졌고, 이는 미나토가와 신사 창건으로 이어졌으며, 야스쿠니 신사 등의 초혼사 창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는 남조 공신의 자손에게 작위를 하사하고자 했으나, 마사시게의 직계 자손을 찾지 못해 작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1940년 '대남공 600년제'를 전후해 구스노키 집안의 자손이 확인되었고, 미나토가와 신사 안에 '구스노키 동족회'가 조직되었다. 현재 니가타현에는 그의 직계 자손이라고 하는 가계가 존재하는데, 성은 구스노키(楠木)가 아닌 미나미(南)라고 한다.
그의 아들 구스노키 마사쓰라는 12세의 고무라카미 천황의 후계자를 섬기며 아버지의 뜻을 이어 충절을 지켰다.[1] 마사시게와 아들의 이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 학교에서 인기 있던 애국가의 주제였다.[3]
구스노키는 "문무의 덕을 겸비한 이상적인 무사의 모습으로 국가 역사에 남아 있다."[4]
3. 1. 군사적 업적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게릴라 전술에 능숙했으며, 그의 전술은 에도 시대에 구스노키류 군학(楠木流軍学)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아카사카성 전투(赤坂城の戦い)와 지하야성 전투(千早城の戦い)에서 보여준 뛰어난 방어 전략은 그를 탁월한 전술가로 평가받게 했다.[2]아카사카성 전투(赤坂城の戦い)에서는 시모아카사카성(下赤坂城)에서 거병하여 가마쿠라 막부측의 유아사 조부쓰(湯淺定佛)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지하야성 전투(千早城の戦い)에서는 곤고산 중턱에 쌓은 지하야산성(千早城)에서 막부군에 맞서 싸웠다. 그는 성벽에 매달아 놓은 가짜 담벼락, 뜨거운 물, 낙석 등을 활용한 기발한 전술로 농성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전술은 게릴라전 및 분뇨를 사용한 오물 공격과 함께 막부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2]
3. 2. 충절의 상징
주자학이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국가 이념으로 본격적으로 도입된 이후, 한때 북조에 의해 역적으로 불렸던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주자학 이론에 근거하여 고다이고 천황과 함께 중국 중심주의적 절대주의의 선구자로 재평가되었다.[13] 에도 시대 동안 주자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학자와 사무라이들은 구스노키의 전설을 널리 알리고, 그를 황제에 대한 충절, 용기, 헌신을 구현한 애국 영웅인 '''난코(楠公)''' 또는 '''다이 난코(大楠公)'''로 추앙했다. 1871년에는 미나토가와 신사가 건립되었다. 구스노키는 이후 황제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신의 정신적 계승자로 여긴 제2차 세계 대전의 가미카제들의 일종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미나토가와 전투 직전, 사쿠라이 역에서 아들 마사쓰라와 작별하는 장면은 '사쿠라이의 이별'로 불리며 충절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다. 마사시게와 마사스에가 칠생보국을 맹세하고 자결했다는 이야기는 충의의 극치로 여겨진다.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마사스에와 함께 서로 찌르는 방식으로 자결한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충성심은 후세에 높이 평가되어, 에도 시대에는 미토학파에 의해 존왕주의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
3. 3. 문화적 영향
메이지 시대에 남북조정윤론이 제기되어 남조가 정통으로 여겨지면서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대(大) 남공(楠公)'''으로 불리게 되었다.[4] 강담(講談) 등에서는 《삼국지연의》 속의 제갈량과 견주어 참모적인 이미지가 더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황국사관의 영향으로 대의를 위해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하는 「충신의 표상」, 「일본인의 귀감」으로서 상찬되어 수신 교육에도 영향을 주었다.그의 패도(佩刀)인 고류카게미쓰(小竜景光)는 야마다 아사우에몬(山田淺右衛門)의 손을 거쳐 메이지 천황의 패도가 되었는데, 메이지 천황은 청일 전쟁 중 대본영이 히로시마로 옮겨질 때도 이 칼을 차고 갔다고 한다. 현재 이 패도는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황거외원에는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마사시게와 그의 아들의 이별은 "이전에는 모든 초등학교 교과서에 포함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 학교에서 인기 있던 애국가의 주제였다."[3]
'사쿠라이의 결별(櫻井の決別)'이라는 제목의 일본 창가는 1899년 6월 발표되었는데, 오치아이 나오후미(落合直文)가 가사를 짓고 오쿠야마 도모야스(奥山朝恭)가 작곡했다. 도쿄 대학 전신인 제일고등학교(第一高等学校) 교수였던 오치아이는 학교 생도행군가 「미나토 강」의 제1편으로 이 「사쿠라이의 결별」을 발표하였다. 작곡가 오쿠야마는 오카야마 대학의 전신인 오카야마(岡山) 사범학교의 교사였다.
전후는 가치관의 전환과 역사학에서의 중세사 연구가 진행되면서 '악당'으로서의 성격이 강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소설 「사본태평기」(私本太平記)이다. 다만 이 '악당'이라는 평가는 어디까지나 역사학에서의 이야기이고 일반적인 것은 아니며, 아직까지도 마사시게는 일본인들에게는 영웅으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4. 유적 및 기념물
- '''다이난공 구비즈카'''
:오사카부 가와치나가노시에 있는 진언종 사찰인 간신사(觀心寺) 경내에 있다. 미나토 강 전투 뒤,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명으로 유족에게 반환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목이 안장되어 있다. 간신사는 대대로 구스노키 가문의 묘가 있는 사찰이다.

- '''나기(南木) 신사'''
:오사카부 미나미카와치군 지하야아카사카촌에 있는 다케미쿠마리 신사의 부속신사로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1337년 고다이고 천황이 직접 조각한 마사시게 조각상에 제를 올린 것이 시작이라고 하며, 후에 고무라카미 천황이 나기명신(南木明神)이라는 신호(神號)를 주었다.
- '''난비안간논사'''(楠妣庵観音寺)
: 오사카 부 돈다바야시(富田林) 시 간나비에 있는 임제종 묘신사파 사원으로 구스노키 집안의 향화사(香華寺)로 여겨진다. 1348년 구스노키 마사쓰라ㆍ마사토키 형제가 시조나와테 전투에서 전사한 뒤 마사시게의 아내 히사코가 암자를 짓고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 '''나가타키 시치샤 신사'''
: 기후현 야마가타시 나가타키에 있는 시치샤 신사 옆에는 '하치오지궁(八王寺宮)'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무덤이 있는데,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부인 히사코(久子)의 무덤이다. 1348년 아들 마사쓰라ㆍ마사토키 형제가 시조나와테 전투에서 전사한 후, 마사시게의 처는 출가하여 암자를 짓고 살면서 구스노키 일족의 명복을 빌며 지냈다고 전해진다.
- '''미나토가와 신사'''
: 고베시에 있으며,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주신으로 모신 신사이다. 그의 아들 마사쓰라 및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전사한 일족 16인과 기쿠치 다케요시(菊池武吉)의 제를 지내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마사시게의 부인 히사코의 신령도 합사하였다. 1872년(메이지 5년)에 신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그 전에는 미토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세운 「오호충신남자지묘(嗚呼忠臣楠子之墓)」라 새긴 마사시게의 묘비가 있었다.
- '''이바라키성'''(茨木城)
: 오사카부 이바라키시에 축성된 성으로,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쌓았다는 설이 있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 '''호켄 탑'''(奉建塔)
: 구스노키 마사시게 사후 600년을 기념하여 1940년 전국 아동학생과 교직원 등의 모금에 의해 조신사(浄心寺) 터에 세워진 기념탑이다. 마사시게의 추측 연령이 43세인 것에 기인해 높이 13m로 지어졌다. 탑에는 구스노키 집안의 문장인 국수문(菊水紋)과 마사시게가 전장에서 깃발에 써서 내걸었다는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 이 세상의 어떤 법규와 도리도 위대한 하늘의 뜻보다 우선될 수는 없다)'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 '''쿠스노키산유'''(楠公産湯) 우물
: 구스노키의 탄생지에서 도보로 몇 분 떨어진 곳에 있는 우물로 막 태어난 그를 이곳에서 씻겼다는 전설이 있다.

5. 논란과 쟁점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가마쿠라 막부에 맞서 싸운 인물로, 천하성 전투에서 뛰어난 전략을 보여주었다. 1333년 2월, 마사시게는 아카사카성과 금강산 중턱에 축성한 천하성에서 막부의 대군에 맞서 게릴라 전법, 낙석 공격, 화계 등을 활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28]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섬에 유배된 동안에도 고라 친왕과 함께 막부에 저항했으며, 윤2월에는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를 탈출했다.[28]
마사시게의 활약은 각지에서 막부 타도 움직임을 촉발시켰고, 아카마쓰 엔신 등이 거병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1333년 5월 7일 로쿠하라를 함락시켜 교토에서 막부 세력을 몰아냈다.[29] 5월 10일, 이 소식은 천하성을 포위하던 막부군에게도 전해져 철수하게 만들었고, 이는 구스노키 군의 승리로 이어졌다.[29]
니타 요시사다가 1333년 5월 22일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것 역시 마사시게의 분전이 큰 영향을 미쳤다. 막부는 마사시게 토벌에 필요한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니타 쇼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고, 이는 요시사다가 반기를 드는 계기가 되었다.
마사시게는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로 돌아올 때 효고에서 영접하고 경호를 맡았으며, 행렬의 선봉을 이끌었다.[30]
5. 1. '악당'으로서의 재평가
전후 역사 연구에서는 마사시게를 단순한 충신이 아닌, 가마쿠라 막부 체제에 반기를 든 '악당'으로서의 측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악당'은 당시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마사시게가 수은 유통 등을 장악하고 막부에 저항한 행적은 이러한 '악당'의 성격과 부합한다는 것이다.[56]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사본태평기》에서는 전쟁 전의 이미지와는 다른 마사시게의 인물상을 그려내기도 했다.
하지만 '악당'이라는 용어에는 일반적으로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 내지 악행을 이루는 집단'이라는 뜻이 담겨있어, 마사시게를 '악당'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실제로 NHK의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당당 일본사」에서 「겐무신정의 파괴, 악당 구스노키 마사시게 할복」이라는 타이틀로 방송하자 미나토가와 신사가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5. 2. 출신 배경에 대한 논쟁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이요 다치바나씨(오치씨, 越智氏)의 후예라는 설이 있지만, 마사시게 이전의 계보와는 일치하지 않아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56]가와치국 호족 출신이라는 설이 유력한데, 가와치국 이시카와군(石川郡) 아카사카촌(赤坂村, 지금의 일본 오사카부 미나미카와치군南河内郡 지하야아카사카촌千早赤阪村)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다.[56] 그러나 가와치에는 다치바나 성의 유래가 되는 지명이 없고, 조상이 호조 집안의 가신으로 가와치로 이주했다는 설도 있다.[56]
득능홍일은 구스노키 씨(楠木氏)가 스루가 국(駿河國) 출신이라는 설을 제창했고, 가케이 마사히로(筧雅博), 아라이 타카시게(新井孝重)도 구스노키 씨(楠木氏)의 출신을 스루가 국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했다.
#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의 고향인 가와치(河内)의 콩고잔(金剛山) 서쪽 기슭부터 간신지쇼(觀心寺莊) 일대에는 "구스노키"(楠木)라는 지명이 없다.
#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쇼오(正応) 6년(1293년) 7월에 스루가 국(駿河國)의 장원(입강장(入江莊)) 중 나가사키고(長崎郷)의 일부와 구스노키무라(楠木村)를 쓰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에 기증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구스노키무라(楠木村)에 호조(北条) 득종(得宗) 피관(被官)인 구스노키 씨(楠木氏)가 거주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 간신지(觀心寺) 장(莊)의 지두(地頭)였던 아다치 씨(安達氏)는 코안(弘安) 8년(1285년)에 입강장(入江莊)과 깊은 관계가 있는 호조(北条) 득종(得宗)가의 유력 피관(被官)인 나가사키 씨(長崎氏)에게 시모츠키 소동(霜月騒動)에서 멸망했고, 그 장(莊)은 득종(得宗)가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출신이 나가사키 씨(長崎氏)와 같은 고향인 구스노키 씨(楠木氏)가 간신지쇼(觀心寺莊)로 이주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 『가마쿠라 쇼군케푸』(鎌倉将軍家譜)에 따르면, 겐쿄(元享) 2년(1322년)에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의 명령을 받은 마사시게(正成)가 셋쓰(摂津) 국의 요도가와(淀川) 하구에 거처를 둔 와타나베토(渡辺党)를 토벌하고, 다음으로 기이(紀伊) 국의 야스다쇼지(安田庄司)를 죽이고, 또 남야마토(南大和)의 오치 씨(越智氏)를 격멸했다고 한다. 이때 야스다쇼지(安田庄司)의 구령(舊領)은 마사시게(正成)에게 주어졌다.
#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를 공격하는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대군이 교토(京都)를 메운 겐코(元弘) 3년(쇼케이(正慶) 2년, 1333년) 윤2월의 공가(公家) 니조 미치히라(二条道平)의 일기인 『고코묘쇼인 칸파키키』(後光明照院関白記)(『미치히라코키』(道平公記))에
구스노키의 가지는 가마쿠라에 있는데, 가지를 자르러 왜 나오는가라는 낙수가 기록되어 있다.[10]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는 구스노키 씨(楠木氏)는 원래 무사시 국(武蔵國) 고케닌(御家人)으로 호조 씨(北条氏)의 피관(被官) (고나이닌(御内人))이 되어, 시모츠키 소동(霜月騒動)으로 득종령(得宗領)이 된 간신지쇼(觀心寺莊)의 대관(代官)으로 가와치(河内)로 이주했다고 추정했다.[11]
그러나 이마이 마사노스케(今井正之助)는 구스노키 씨(楠木氏) 득종 피관(得宗被官)설의 근거로 사용되는 사료들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13] 또한, 호리우치 카즈아키(堀内和明)는 현재의 미나미카와치군(南河内郡) 타이시초(太子町) 오아자 야마다(山田) (구·가와치(河内) 국 이시카와군(石川郡) 야마다(山田))에 "구스노키"(楠木)라는 지명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여, 득종 피관설의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13][14]
결론적으로, 마사시게의 출신 배경은 여전히 논쟁 중이며,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특히 간토 출신설은 마사시게가 호조 가문의 가신이었다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어, 그의 충절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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