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어 치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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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투어 치머만은 프로이센 왕국 출신의 독일 외교관으로, 1916년 11월부터 1917년 8월까지 독일 제국의 외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법학을 전공하고 외교관으로 경력을 시작하여 청나라에서 영사로 근무했으며, 의화단 운동을 겪었다. 외무부 차관을 거쳐 외무장관에 임명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일랜드 독립 운동과 러시아 혁명을 지원했다. 특히 미국 참전을 유도한 '치머만 전보' 사건으로 인해 사임했으며, 1940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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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력

아르투어 치머만은 프로이센 왕국 동프로이센 마르그라보바(현재 폴란드 올레츠코)에서 태어났다. 쾨니히스베르크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893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2.1. 외교관 경력 초기

1893년 외교관 경력을 시작하여 베를린의 영사관에 들어갔다. 1896년 청나라로 파견되어 광둥 등지에서 근무했으며, 1900년에는 영사 직급에 올랐다. 의화단 운동을 직접 목격했다. 1902년 독일로 귀국하여 외무부에서 근무했다.

2.2. 외무부 관료

1911년 치머만은 외무부 차관이 되었다. 1916년 11월 24일 고틀리프 폰 야고의 뒤를 이어 외무장관에 취임했다. 그는 비귀족 출신으로는 최초로 외무장관이 된 인물이었다. 외무장관 취임 전에도 상관인 야고 장관이 내성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상당 기간 외국 대표와의 협상을 주도했다.

3. 제1차 세계 대전과 외교 정책

1916년 외무 대신에 취임한 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외교적 지원 역할을 맡았다. 아일랜드 독립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로저 케이스먼트와 만나 원조를 제안했으며,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블라디미르 레닌러시아 제국으로 보내 동부 전선의 조기 종결을 꾀했다. 그러나 멕시코를 끌어들여 미국을 견제하려 한 치머만 전보 사건으로 미국의 연합국 측 참전을 초래하면서 외무 대신 직에서 해임되었다.

3.1. 크론라트(숙의) 참여

1914년 7월, 소위 '크론라트'라 불리는 숙의에 빌헬름 2세와 테오발트 폰 베스만 홀베크 총리와 함께 참여했다. 이 회의에서 사라예보 사건으로 암살당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 대공의 죽음에 대한 대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훗날 치머만은 숙의에서의 결정적인 것은 황제의 의견이었다며 자신의 책임을 부인했지만, 총리와 치머만은 이 결정에 동의했다.

3.2. 아일랜드 독립 운동 지원

1914년 치머만은 아일랜드 혁명단의 로저 케이스먼트를 만나 아일랜드 독립 운동 지원을 논의했다. 75,000정의 소총과 25,000명의 군대를 아일랜드 서쪽에 상륙시키는 계획을 세웠으나, 독일 작전 참모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1916년 케이스먼트는 아일랜드로 돌아갔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노르웨이 국기를 게양한 독일 선박(SS 리바우) '아우드'호는 20,000정의 소총을 아일랜드 남부 해안에 수송하려 했으나, 반군과의 연계 실패 및 선원들에 의한 자침으로 실패했다. 이러한 지원 계획에 따라 소수의 아일랜드 혁명단은 더블린에서 부활절 봉기를 일으켰다. 비록 봉기는 실패했지만, 그 정치적 효과는 1919-1922년 영국-아일랜드 전쟁과 아일랜드 자유국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3.3. 러시아 혁명 지원

1917년 3월, 러시아 전선의 붕괴가 임박하자 치머만은 러시아와의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당시 독일에게 매우 중요한 제안이었다. 외무장관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제시했다. 교전 상대와의 최전선 접촉에 대한 규정, 점령 지역의 상호 철수, 폴란드, 리투아니아, 쿠를란트에 대한 우호적인 합의, 그리고 러시아의 재건 및 재활을 돕겠다는 약속. 마지막으로, 레닌과 망명 혁명가들이 독일을 거쳐 기차로 러시아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할 것이었다. 이러한 제안들이 실행되면 독일은 동부의 군대를 자유롭게 하여 서부에 집중시킬 수 있었고, 이는 독일 서부 전선을 대폭 강화하는 묘책이 될 수 있었다.

3.4. 치머만 전보 사건

1917년 1월 16일, 치머만은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 하인리히 폰 에카르트에게 '치머만 전보'를 보냈다. 이 전보는 미국이 중립을 포기하고 참전할 경우, 독일이 멕시코와 동맹을 맺고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하도록 지원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독일은 멕시코에 재정 지원과 함께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 등 과거 멕시코 영토 반환을 약속했다.

전보는 영국 정보부에 의해 해독되었고, 미국 정부에 전달되어 1917년 3월 1일 언론에 공개되었다. 1917년 3월 29일, 치머만은 Reichstag 연설에서 전보의 내용을 시인하며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을 종식시켰다.

멕시코의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대통령은 이 제안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1917년 4월 14일 공식적으로 거절했다.

4. 사임과 죽음

치머만 전보 사건으로 미국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이 가시화되면서, 치머만은 1917년 8월 6일 외무장관직에서 사임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리하르트 폰 퀠만이 임명되었다. 그는 1940년 베를린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