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케이스먼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로저 케이스먼트는 더블린 출신으로, 영국 외교관이자 인권 조사관이었다. 그는 콩고 자유국에서 벌어진 폭력 행위를 고발하고, 페루의 푸투마요 강에서 원주민 학대 사건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후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독일의 지원을 받아 무기를 밀수하려다 체포되었고, 반역죄로 런던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삶과 관련된 '검은 일기'의 진위 여부는 논란의 대상이며, 그는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일랜드의 반란자 - 그라너 니 말러
그라너 니 말러는 16세기 아일랜드의 오말리 가문 수장으로 해상 무역과 해적 활동을 하며 잉글랜드의 지배에 저항했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면담을 시도하는 등 잉글랜드와 협력 및 대립하며 아일랜드 문화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 아일랜드의 인도주의자 - 밥 겔도프
아일랜드의 싱어송라이터, 배우, 사업가이자 정치 운동가인 밥 겔도프는 붐타운 래츠의 리드 싱어로서 활동하며 히트곡을 발표했고, 밴드 에이드와 라이브 에이드를 조직하여 아프리카 기아 문제 해결에 기여했으며, 음악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사회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 아일랜드의 인도주의자 - 보노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싱어송라이터이자 U2의 리드 보컬인 보노는 1976년 U2를 결성하여 사회·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가사와 격렬한 라이브 퍼포먼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솔로 활동, 영화 음악 작업, 사회 운동, 자선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 처형된 부활절 봉기 관련자 - 패트릭 피어스
패트릭 피어스는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작가, 교육자, 정치 활동가이며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아일랜드어 부흥 운동과 자치 운동에 헌신, 1916년 부활절 봉기에서 아일랜드 공화국 잠정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했지만 봉기 실패 후 처형당해 아일랜드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 처형된 부활절 봉기 관련자 - 제임스 코널리
제임스 코널리는 아일랜드의 사회주의자, 혁명가, 노동운동가로서 스코틀랜드와 미국에서 노동 운동에 참여하고 아일랜드 사회주의 공화당을 창당하고 아일랜드 운수 및 일반 노동자 연합을 조직하는 데 기여했으며, 1916년 부활절 봉기에서 더블린 지역 사령관으로 활동하다 처형되었고 그의 사상은 아일랜드 독립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저 케이스먼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로저 데이비드 케이스먼트 |
로마자 표기 | Rojeo Deibideu Keiseumenteu |
아일랜드어 표기 | Ruairí Dáithí Mac Easmainn (루아리 다히 막 아스만) |
출생 | 1864년 9월 1일 |
출생지 | 샌디코브, 카운티 더블린, 아일랜드 |
사망 | 1916년 8월 3일 |
사망지 | 펜턴빌 교도소, 런던, 잉글랜드 |
사망 원인 | 교수형 |
국적 | 영국 (출생 당시), 아일랜드 |
묘지 | 글라스네빈 공동묘지 |
직업 | |
직업 | 외교관, 시인, 인권 운동가, 민족주의자 |
소속 | 영국 외무부, 아일랜드 의용군 |
가족 | |
어머니 | 앤 제프슨 |
아버지 | 로저 케이스먼트 |
활동 | |
운동 | 아일랜드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
서훈 | |
훈장 | 아마존 원주민을 위한 노력으로 기사 작위를 받음, 1905년 콩고에서의 활동으로 성 마이클 앤드 성 조지 훈장(CMG) 동반자 |
기념물 | |
기념물 | 발리헤이그 해변의 케이스먼트 기념비 던 레어리의 로저 케이스먼트 동상 |
2. 초기 생애
로저 케이스먼트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가족 배경과 교육 과정은 여러 과정을 거쳤으며, 젊은 시절에는 리버풀의 해운 회사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이러한 초기 경험은 훗날 그가 영국 외교관으로서 활동하고, 나아가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2. 1. 가족과 교육

로저 케이스먼트는 더블린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은 현재는 사라진 샌디코브 로손 테라스의 도일스 코티지에서 보냈다.[7] 이곳은 현재 피츠제럴드 펍과 더 버틀러스 팬트리 델리카트슨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그의 아버지 로저 케이스먼트 대위는 킹스 오운 로열 드래군 연대 소속 군인이었으며, 벨파스트의 선박 상인이었던 휴 케이스먼트의 아들이었다. 할아버지 휴 케이스먼트는 파산 후 호주로 이주했다. 아버지 케이스먼트 대위는 1842년 아프가니스탄 원정에 참전했으며,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에는 자원하여 싸우기 위해 유럽으로 갔으나, 빌라고스 항복 이후에 도착했다. 케이스먼트의 어머니 앤 젭슨은 더블린의 성공회 가문 출신이었으나, 로저가 세 살 때 웨일스의 릴에서 비밀리에 로마 가톨릭교 세례를 받게 했다고 전해진다.[8][9] 하지만 1916년, 세례를 주관했다고 알려진 사제는 실제 장소가 릴에서 약 128.75km 떨어진 애버리스트위스였다고 밝혀, 중요한 사건의 기억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10]
케이스먼트는 1892년 편지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카운티 코크 말로의 젭슨 가문 후손이라고 믿었으나,[11] 젭슨 가문의 역사가들은 이를 뒷받침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12] 그의 가족은 잉글랜드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으며, 로저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카운티 안트림으로 이주하여 아버지 쪽 친척들 근처에서 살았다. 로저가 열세 살 때 아버지마저 밸리미나에서 사망하자, 그는 영(Young) 가문과 케이스먼트 가문 친척들의 도움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는 밸리미나 교구 학교(훗날의 밸리미나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16세에 학업을 중단하고 리버풀의 해운 회사 엘더 뎀스터에서 서기로 일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갔다. 엘더 뎀스터는 알프레드 루이스 존스가 운영하던 회사였다.[13]
로저 케이스먼트의 형 토머스 휴 젭슨 케이스먼트(1863–1939)는 선원과 군인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았으며, 후에 아일랜드 해안 경비대 창설에 기여했다.[14] 그는 데니스 존스턴의 희곡 '노란 강 속의 달'의 등장인물에게 영감을 주었다. 토머스는 1939년 3월 6일, 더블린의 그랜드 운하에서 투신하겠다고 위협한 뒤 익사했다.[14][15]
2. 2. 케이스먼트에 대한 회상
케이스먼트에 대한 회상에서, 그의 이후 운명을 염두에 두고 다소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브라질 주재 영사 시절 그의 부관이었던 어니스트 햄블로흐는 케이스먼트를 "예상치 못한" 인물로 기억했다. 그는 키가 크고 어색했으며 "매우 정중"했지만 "방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꽤나 허세를 부렸다". 그는 "말솜씨가 좋고 글을 잘 썼"지만, "사안을 설명할 수는 있었으나, 논쟁할 수는 없었다". 그의 가장 큰 매력은, 그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던 그의 목소리였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그의 눈은 "상냥"했지만, 잘 웃지 않았다. 햄블로흐는 "유머 감각이 있었다면 그를 많은 위험에서 구했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16]조지프 콘래드는 콩고에서 만난 케이스먼트에 대한 첫인상을 "운이 좋았다"고 평가하며, "생각도 잘하고, 말도 잘하며, 매우 지적이고 매우 공감하는"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케이스먼트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이후, 콘래드는 더욱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미 아프리카에서 나는 그가 엄밀히 말해,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판단했다. 멍청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는 온통 감정적이었다는 뜻이다. 감정적인 힘(푸투마요, 콩고 보고서 등)으로 그는 자신의 길을 개척했고, 순수한 기질로—정말로 비극적인 인물이다."[17]
3. 영국 외교관 및 인권 조사관
더블린 출신으로 영국 외교관이 되었다. 영국 정부에 의해 콩고 자유국으로 파견되어, 현지에서 벌어지는 폭력 행위를 보고했다.[18][84] 그의 보고서는 영국 외무장관의 서문을 첨부하여 각국 정부에 보내졌고, 국제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재 총영사로 임명되어, 페루 푸투마요 강 유역에서 발생한 고무 채취 과정에서의 원주민 착취와 학대를 조사하고 보고했다.[25][27] 이러한 인권 조사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11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28] 1912년 외교관직을 사임했다.
3. 1. 콩고와 케이스먼트 보고서
케이스먼트는 1884년부터 헨리 모턴 스탠리와 아프리카 국제 협회에서 일하며 콩고강 유역에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 협회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콩고 자유국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조직이었다.[18] 케이스먼트는 초기에는 통신 개선을 위한 측량 작업에 참여했으며, 콩고강 하류의 폭포로 인해 항해가 불가능한 약 약 354.05km 구간을 우회하는 철도 건설을 위해 노동자를 모집하고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여러 아프리카 언어를 습득했다.
1890년, 케이스먼트는 콩고에서 상선 'Le Roi des Belges'(벨기에 국왕) 호를 운항하기 위해 온 작가 조지프 콘래드를 만났다. 당시 두 사람 모두 "유럽의 식민지화가 아프리카 대륙에 도덕적, 사회적 진보를 가져오고 원주민들을 '노예 제도, 이교도, 기타 야만성'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는 생각에 동조했으나, 곧 식민 통치의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고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19] 콘래드는 이후 콩고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식민주의의 폐해를 고발하는 소설 ''암흑의 핵심'' (1899)을 발표했다. 케이스먼트 역시 훗날 영국 정부의 공식 조사를 통해 콩고의 실상을 폭로하게 된다. 이 시기에 케이스먼트는 조각가 허버트 워드와도 만나 오랜 우정을 쌓았다. 워드는 1889년 아프리카를 떠나 예술가의 길을 걸었으며, 그의 작품에는 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
케이스먼트는 영국 식민지부 소속으로 영국령 서아프리카에서 근무하다가[84] 1901년 8월 외무부로 옮겨 프랑스령 콩고 동부 지역의 영국 영사로 임명되었다.[20] 1903년, 영국 정부는 당시 콩고 자유국의 보마 주재 영사였던 케이스먼트에게 레오폴드 2세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이 지역의 인권 실태를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레오폴드 2세는 '군사력'(Force Publique|포르스 퓌블리크프랑스어)이라는 사병 조직을 동원하여 고무와 상아 등 천연자원을 수탈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폭력과 공포 통치를 자행하고 있었다.
케이스먼트는 몇 달간 상부 콩고 분지를 여행하며 원주민 노동자, 감독관, 용병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증언을 수집했다. 그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고무 채취 과정에서의 원주민 노예화, 잔인한 신체 절단, 고문" 등 벨기에 식민 당국의 끔찍한 만행을 상세히 기록한 보고서를 영국 정부에 제출했다.[84] 이 보고서는 1904년 ''케이스먼트 보고서''라는 이름으로 공개되었다. 베를린 회의(1884-1885)를 통해 콩고 자유국에 대한 통치권을 사실상 인정받은 레오폴드 2세는 이곳을 개인 사유지처럼 운영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그 이면에는 원주민들에 대한 잔혹한 착취와 학살이 있었다. 케이스먼트 보고서는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콩고에서 사업 이권을 가지고 있던 일부 기업과 케이스먼트의 옛 고용주였던 알프레드 루이스 존스 등은 보고서의 내용을 부인하며 반발했다.[13]
보고서 공개 이후, E. D. 모렐과 같은 인권 운동가들은 케이스먼트의 지원을 받아 콩고 개혁 협회를 결성하는 등 콩고의 참상을 알리고 개선을 요구하는 국제적인 운동이 확산되었다. 영국 의회는 베를린 회의 협정의 재검토를 요구했고, 다른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벨기에 의회는 사회주의 지도자 에밀 반데르벨데 등의 압력에 밀려 독립적인 조사 위원회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이 위원회는 레오폴드 2세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케이스먼트 보고서의 내용이 대부분 사실임을 확인했다. 국제적인 비난 여론과 벨기에 내부의 압력에 직면한 레오폴드 2세는 결국 콩고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했고, 1908년 11월 15일 벨기에 정부가 콩고 자유국을 공식적으로 인수하여 벨기에령 콩고로 행정 체제를 전환하게 되었다.
3. 2. 페루: 푸투마요 원주민에 대한 학대
1906년 외무성은 케이스먼트를 브라질로 파견했다. 처음에는 상투스 영사로, 이후 파라로 전근되었고,[24] 최종적으로 리우데자네이루 총영사로 승진했다.[25] 그는 1907년 영국에 등록된 페루 아마존 회사(PAC)의 고무 채취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예 노동 실태를 조사하는 위원회에 영사 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 회사는 영국인 이사진과 다수의 주주를 두고 있었다. 1909년 9월, 언론인 시드니 파터노스터는 영국 잡지 ''Truth''에 PAC 노동자 학대와 분쟁 지역인 페루 아마존에서 콜롬비아인과 경쟁하는 페루인에 대한 학대 사실을 폭로했다. 기사 제목은 "악마의 낙원: 영국 소유 콩고"였다.또한, 이키토스 주재 영국 영사는 영국 제국의 일부로 간주되던 바베이도스인들이 PAC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보고했는데, 이는 영국 정부가 개입할 명분을 제공했다(일반적으로 타국의 내부 문제에는 개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바베이도스인들은 회사에 빚을 지게 되었고, 회사가 노예화한 원주민 노동력을 통제하는 집행자로 이용되었다. 미국의 토목 기사 월터 하덴버그는 파터노스터에게 PAC와 페루 군대가 합동 작전을 벌여 콜롬비아 고무 기지를 파괴하고 고무를 탈취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한 "아라나의 표식"(고무 회사 대표)이라는 패턴으로 심하게 채찍질당한 페루 원주민들을 보았으며 다른 학대 사례들도 보고했다.[26]
이키토스에 운영 본부를 둔 PAC는 도시와 지역을 사실상 지배했다. 이 지역은 안데스 산맥으로 인해 페루의 주요 인구 중심지와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아마존 강 하구의 파라에서는 약 3057.75km 떨어져 있었다. 영국에 등록된 회사였지만, 실질적인 통제권은 전형적인 고무 남작인 훌리오 세사르 아라나와 그의 형제에게 있었다. 리오하 출신의 아라나는 가난을 딛고 일어나 세계 시장에서 수요가 높은 페루 아마존의 고무를 대량으로 채취하는 회사를 소유하고 운영하게 되었다. 고무 호황은 이키토스를 무역 중심지로 급성장시켰다. 모든 회사의 고무가 이곳을 거쳐 아마존 강을 따라 대서양 항구로 운송되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외국인들이 고무 사업으로 부를 쌓거나 최소한 사업의 일부라도 얻기 위해 이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존경받는 사업체와 유흥가가 공존하는 거친 변경 도시였던 이키토스 역시 PAC와 아라나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케이스먼트는 아마존 분지 깊숙한 곳, 고무가 채취되는 푸투마요 구로 이동하여 페루의 지역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처우를 조사했다.[27] 이 고립된 지역은 사실상 국가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았고, 콜롬비아와의 국경 근처에 위치하여 콜롬비아인들이 주기적으로 고무 채취 경쟁에 뛰어들었다. 수년간 원주민들은 PAC 현장 직원들에 의해 무보수 노동을 강요당했다. 직원들은 원주민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그들을 기아 상태에 가깝게 몰아넣었고, 심각한 신체적 학대, 관리자와 감독자에 의한 여성 및 소녀 강간, 테러 행위, 무자비한 살인이 만연했다. 케이스먼트는 이곳의 상황이 콩고 자유국만큼이나 비인간적임을 확인했다. 1910년 10월 23일자 기록에서 그는 "가장 심각한 부패와 타락 측면에서는 콩고 정권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적었다. 그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긍정적인 측면"은 푸투마요 학살이 수천 명에게 영향을 미친 반면, 레오폴드의 국가는 수백만 명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었다.
케이스먼트는 1910년 상업 조사 위원회와 함께 처음으로 해당 지역을 장기간 방문했다. 푸투마요 첫 방문 동안 그는 아르만도 노르망과 빅토르 마세도를 포함하여 회사 내 가장 악명 높은 가해 행위와 관련된 여러 인물들을 만났다. 케이스먼트는 일기에서 노르망과 마세도가 자신의 조사를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바베이도스인 직원들에게 뇌물을 주려 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마세도와 노르망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어떤 수단이든 동원할 것이며, 심지어 바베이도스인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이키토스에서 체포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케이스먼트는 만약 자신이 노르망의 기지였던 마탄자스에 혼자 갔더라면 "열병으로 죽었을 것"이고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이는 케이스먼트가 공식 임무로 푸투마요에 오지 않았다면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는 이전의 암시와 일치한다. 이키토스로 돌아온 후, 이전에 만났던 프랑스 상인은 케이스먼트에게 만약 그가 공식적인 자격으로 오지 않았다면 회사가 그를 "처리했을 것"이며 그의 죽음은 원주민의 탓으로 돌려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케이스먼트는 푸투마요 원주민, 그들을 학대한 가해자들, 그리고 회사에 의해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고통받았던 30명의 바베이도스인(그중 3명 포함)을 인터뷰했다. 그의 보고서가 공개되자 영국에서는 학대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일었다.

케이스먼트의 보고서는 "학대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1인칭 증언을 엮어 "지금까지 공식 문서에서 멀리 떨어진 식민지 주민들에게 개인적인 목소리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저널리즘"으로 평가받았다.[84] 보고서가 영국 정부에 제출된 후, PAC의 일부 부유한 이사진들은 밝혀진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라나와 페루 정부는 개선을 약속했다. 1911년, 영국 정부는 케이스먼트에게 이키토스와 푸투마요로 돌아가 약속된 처우 개선이 이루어졌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1911년 3월 17일자 영국 외무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케이스먼트는 고무 회사가 원주민을 처벌하기 위해 계속해서 목 조르개를 사용했다고 상세히 설명했다.
남자, 여자, 아이들이 며칠, 몇 주, 종종 몇 달 동안 그 안에 갇혀 있었다. ... 온 가족... 아버지, 어머니, 자녀들이 감옥에 갇히고 많은 경우 부모가 굶어 죽거나 매질로 인한 상처로 죽는다는 보고가 있었고, 그들의 자녀들은 슬픔 속에서 부모의 죽어가는 고통을 지켜보기 위해 그 옆에 묶여 있었다.

1910년 보고서에서 살인자로 지목된 회사 직원 중 일부는 페루 당국에 의해 기소되었지만, 대부분은 지역을 벗어나 도주하여 체포되지 않았다. 1911년, 케이스먼트는 안드레스 오도넬이라는 인물을 체포하려 시도했는데, 그가 바베이도스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오도넬은 아라나 밑에서 엔트레 리오스의 관리자로 7년간 일했으며, 그의 관리 하에 수백 명의 원주민이 사망했다. 케이스먼트는 그가 "가장 덜 범죄적인 주요 요원"이며 "나는 그가 즐거움이나 스포츠를 위해 인디언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고무를 얻기 위해 공포심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언급했다. 페루에서 인도 명령이 발부되었지만 결함이 발견되어 오도넬은 법적 기술적 문제로 풀려났다. 그는 나중에 파나마로 도망친 다음 미국으로 도피했다. 아르만도 노르망과 아우구스토 히메네스 세미나리오와 같은 다른 인물들은 체포되었지만 재판이 끝나기 전에 감옥에서 탈출했다.
1911년 9월에서 11월 사이, 케이스먼트는 알프레도 몬트와 호세 이노센테 폰세카의 체포를 시도했는데, 케이스먼트는 이들을 "푸투마요에서 가장 악명 높은 범죄자"라고 불렀다. 당시 이들은 에드워즈 & 세라라는 브라질 회사를 위해 자바리 강과 솔리모에스 강이 합류하는 지점 근처인 벤자민 콘스탄트에서 약 40마일 떨어진 산타 테레사 정착지에서 일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라 초레라의 에이전시 소속 라 사바나 고무 기지에서 밀매된 약 10명의 보라스족을 데리고 있었다. 케이스먼트는 브라질 당국이 체포 영장과 브라질 영토에서의 추방 명령을 발부하도록 조치했지만, 이 영장은 "마나오스에서 파견된 경찰관에 의해 실행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지역 당국에 전달된 지침에 따르면, 그들은 케이스먼트와 동행하여 몬트와 폰세카를 구금한 다음, 페루와 브라질 국경에 위치한 페루 항구인 나사렛으로 이동하여 페루 당국이 그들을 체포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케이스먼트는 벤자민 콘스탄트에 도착한 날, 마나오스에서 파견된 호세 P. 데 캄포스 장교가 현지 경찰 사령관 및 에드워즈 & 세라 회사의 세르 씨와 만나는 것을 목격했다. 케이스먼트는 캄포스가 벤자민 콘스탄트에 도착한 지 4일 후에야 추격을 시작했으며, 그 사이에 이 두 명의 권력자에게 뇌물을 받고 몬트와 폰세카에게 당국이 그들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다는 경고를 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몬트와 폰세카는 페루와 브라질 당국의 체포 시도를 다시 한번 회피할 수 있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케이스먼트는 노예 반대 및 원주민 보호 협회와 그 지역의 가톨릭 선교회의 개입을 조직함으로써 추가적인 영사 활동을 이어갔다. 일부 기업가들은 고무 식물 절단을 밀수하여 대영 제국 식민지인 동남아시아에서 재배를 시작했다. PAC 스캔들은 회사에 막대한 사업 손실을 초래했고, 고무 수요는 세계 다른 지역의 농장에서 재배된 고무로 충족되기 시작했다. PAC 사업 붕괴로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이키토스를 떠났고, 도시는 이전의 고립된 상태로 돌아갔다. 한동안 푸투마요 원주민에게 의존했던 고무 채취업자들은 대체로 방치되었다. 아라나는 회사의 대표로서 기소되지 않았다. 그는 수년간 런던에 살다가 페루로 돌아왔다. 케이스먼트의 보고서와 페루 정부에 대한 국제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아라나는 나중에 성공적인 정치 경력을 쌓았다. 그는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52년 페루 리마에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8]
케이스먼트는 1910-1911년 2년 동안 개인 기록을 위해 (항상 그랬듯이) 광범위하게 글을 썼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일기를 계속 썼고, 1911년의 일기는 이례적으로 산만하다고 묘사되었다. 그는 1903년 일기 및 기타 당시의 서류와 함께 런던에 보관했는데, 아마도 "콩고 케이스먼트"로서의 그의 계속되는 업무와 푸투마요 원주민의 구세주로서의 업무에 대해 참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911년 케이스먼트는 아마존 원주민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는데, 1905년 콩고에서의 활동으로 성 마이클 및 성 조지 훈장(CMG) 동반 기사로 임명된 바 있었다.
4.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
더블린 출신의 로저 케이스먼트는 영국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제국주의의 실상을 목격하게 된다. 특히 영국 정부의 지시로 파견된 콩고 자유국에서 벌어진 참혹한 폭력과 착취를 고발하는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이는 국제적인 문제로 부상했다. 이후 리우데자네이루 총영사로 재직하며 푸투마요 강 유역의 원주민 학살 및 고무 채취업자들의 잔혹한 착취 실태를 조사하고 보고하면서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은 더욱 깊어졌다.
이러한 경험은 케이스먼트가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눈뜨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12년 외교관직을 사임하고 본격적으로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아일랜드의 독립을 쟁취할 기회로 보고 1916년 아일랜드 의용군의 부활절 봉기를 지원하기 위해 독일 제국과 접촉하여 무기 지원을 얻어내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아일랜드로 귀국하던 중 영국 당국에 체포되어 반역죄 혐의로 런던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4. 1. 아일랜드로의 귀환

1904년 아프리카에서 휴가를 얻어 아일랜드에 머물게 된 케이스먼트는 1905년까지 머물면서 아일랜드어의 사용을 보존하고 부활시키기 위해 1893년에 설립된 게일어 연맹(Conradh na Gaeilge)에 가입했다. 그는 콩고에서의 활동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당시 강력한 정치 세력이었던 아일랜드 의회당(IPP)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케이스먼트는 자치법안을 추진하던 IPP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는데, 영국 귀족원이 결국 이를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아서 그리피스가 1905년에 창당한 신 페인 당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신 페인은 비폭력적인 파업과 보이콧을 통해 완전한 독립 아일랜드를 추구했으며, 유일하게 제안한 제국적 관계는 헝가리의 페렌츠 데아크 정책을 모델로 한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이중 군주제였다. 케이스먼트는 1905년에 신 페인에 가입했다.[29]
케이스먼트는 아일랜드 역사학자 앨리스 스톱포드 그린(Alice Stopford Green)에게 1906년 4월 20일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어떻게 영국 제국주의를 받아들였다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로 변모했는지 설명했다.[30]
아일랜드 사람이 영국인과 섞이는 것은 실수입니다. 그는 두 가지 중 하나를 해야 합니다. 즉, 아일랜드인으로 남으면 벽으로 가거나 스스로 영국인이 되어야 합니다. 보세요, 저도 한때 거의 그렇게 될 뻔했습니다. 보어 전쟁 때, 저는 오랫동안 아일랜드에서 떠나 마음과 정신에 고유한 모든 것과 거리가 멀어져, 제 임무를 다하려고 애썼고, 모든 새로운 임무는 저를 영국인의 이상에 훨씬 더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제국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영국의 지배는 모든 사람에게 최고이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받아들여야 하며, 그러한 확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당하게 '박살'되어야 합니다. 저는 정규 제국주의 열광주의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비록 모든 것의 밑바탕과, 거의 저 자신도 모르게, 저는 아일랜드인으로 남아 있었지만 말입니다. 글쎄요, 전쟁 [즉, 보어 전쟁]은 제게 말년에 불안감을 안겨주었고—수용소는 더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고—마침내, 제가 레오폴드를 발견한 외로운 콩고 숲에서 저는 또한 굽힐 줄 모르는 아일랜드인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더블린 출신인 케이스먼트는 외교관으로서 영국 정부의 지시로 콩고 자유국을 시찰하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폭력 행위를 고발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영국 외무장관의 서문과 함께 각국 정부에 전달되어 국제적인 문제로 부상했다. 이후 리우데자네이루 주재 총영사로 임명된 그는 푸투마요 강 유역에서 발생한 원주민 학살 사건 조사를 지시받아, 고무 채취업자들의 잔혹한 원주민 착취와 학대 실태를 보고했다.
케이스먼트는 1912년 외교관직을 사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1916년 아일랜드 의용군이 부활절 봉기에 사용할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독일 제국의 베를린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아일랜드로 돌아오던 중 체포되었고, 반역죄와 스파이 혐의로 런던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4. 2. 미국과 독일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 로저 케이스먼트는 아일랜드 의용군이 부활절 봉기에 사용할 무기를 조달하고자 독일 제국의 베를린으로 갔다. 그러나 아일랜드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영국 당국에 체포되었다. 그는 반역죄와 스파이 활동 혐의로 기소되었고, 결국 런던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4. 3. 체포와 처형
1916년 4월, 독일은 아일랜드 의용군이 부활절 봉기에 사용할 무기로 모신-나강 1891 소총 20,000정, 기관총 10정 및 탄약을 제공하기로 약속했으나, 이는 케이스먼트가 기대했던 규모에 크게 미치지 못했으며, 독일군 장교의 파견도 없었다.[58] 이 무기를 운반하기 위해 독일 화물선 ''리바우''가 노르웨이 선박 ''오드-노르지''로 위장하여 출항했다.[59] 그러나 영국 정보 당국은 독일 암호 통신을 해독하여 무기 밀수 시도를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존 데보이가 피어스의 지시를 잘못 전달했거나 따르지 않아[55] 하역 준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리바우''는 1916년 4월 21일 성금요일 오후, 케리 주 해안에서 영국 해군 순찰선 HMS ''블루벨''에 의해 나포되었다. 다음 날 아침, 코크 주 코브(당시 퀸스타운)로 예인되던 중, 칼 스핀들러 선장은 미리 설치된 폭약으로 배를 자침시켰다. 살아남은 독일 선원들은 전쟁 포로가 되었다.[60][61]케이스먼트는 독일의 지원이 봉기를 성공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봉기 지도자인 에인 맥네일을 설득하여 봉기를 취소시키기 위해 무기 수송선보다 먼저 아일랜드에 도착하고자 했다.[62] 그는 로버트 몬테이스, 대니얼 베벌리(베일리) 하사와 함께 처음에는 독일 잠수함 U-20에 승선했으나, 엔진 고장으로 U-19으로 옮겨 탔다.

1916년 4월 21일 이른 새벽, 케이스먼트 일행은 케리 주 트랄리 만의 배나 스트랜드에 상륙했다. 상륙에 사용된 작은 보트는 현재 런던의 제국 전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65] 과거 콩고에서 얻은 말라리아가 재발하여 심하게 쇠약해진 케이스먼트는 일행과 떨어져 인근의 고대 유적인 맥케나 요새(현재 케이스먼트 요새로 불림)에 숨어 있다가 왕립 아일랜드 경찰(RIC)에게 발각되었다. 근처에서 권총 3정이 발견되자 그는 불법 무기 반입 혐의로 체포되었다.[66][67] 아일랜드 의용군 케리 여단은 그를 구출하려 했을 수도 있으나, 봉기 전에 어떠한 교전도 피하라는 더블린 지도부의 엄명에 따라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68][69] 케이스먼트는 자살 시도를 우려하여 특별 감시가 가능한 브릭스턴 감옥으로 이송되었다.[70]
케이스먼트의 공판은 1916년 6월 26일 영국 왕립 법원에서 반역죄, 파괴 공작, 간첩 혐의로 시작되었다. 검찰은 케이스먼트의 주요 활동이 영국 영토 밖인 독일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영국 내에서의 반역 행위만을 규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1351년 반역법을 적용하는 데 법리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해당 법의 앵글로노르만어 원문에 구두점을 추가하여, "왕국 내에서든 또는 다른 곳에서든(in the realm, or elsewhere)" 왕의 적에게 가담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다고 유권 해석을 내렸다.[71][72] 이에 대해 케이스먼트 자신은 "쉼표에 목매달리게 되었다(hanged on a comma)"고 기록했다.[73]
재판 과정에서 영국 정부는 케이스먼트의 동성애 행위를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위 '검은 일기(Black Diaries)'의 사본을 언론인과 각계 유력 인사들에게 비밀리에 유포했다. 이는 케이스먼트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고 그의 구명 운동을 방해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당시 검찰 총장이자 아일랜드 독립에 강경하게 반대했던 F. E. 스미스는 변호인 A. M. 설리번에게 이 일기를 근거로 정신 이상 주장을 펼칠 것을 제안했으나, 설리번은 이를 거부했다. 이 일기의 진위 여부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으며, 1959년에야 공식 출판되었다. 원본으로 추정되는 문서는 현재 영국 국립 기록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74]
케이스먼트는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항소는 기각되었다. 아서 코난 도일 경, 시인 W. B. 예이츠,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 등 많은 저명인사들이 그의 사면을 탄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미국 상원의 사면 요청은 F. E. 스미스의 강력한 반대로 영국 내각에서 거부되었다.[76] 케이스먼트의 기사 작위는 1916년 6월 29일 공식적으로 박탈되었다.[77]
1916년 8월 3일, 케이스먼트는 런던의 펜튼빌 교도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는 처형 직전, 자신의 요청에 따라 두 명의 가톨릭 사제의 도움으로 가톨릭교회에 귀의했다.[78][79]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케이스먼트의 시신은 처형 후 펜튼빌 교도소 부지 내에 생석회와 함께 매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유해가 현재의 북아일랜드 앤트림주 해안의 멀로그 만에 묻히기를 희망했다. 그의 사후 수십 년 동안 아일랜드 정부는 여러 차례 유해 송환을 영국 정부에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1953년 아일랜드 총리 에몬 데 발레라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에게 직접 요청했지만, 법적 제약을 이유로 거절당했다.[81][82]

마침내 1965년, 해럴드 윌슨 영국 총리 정부는 케이스먼트의 유해를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송환하는 것을 허가했다. 다만, 유해를 북아일랜드로 이장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는데, 이는 북아일랜드 내에서의 종교적 갈등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84] 케이스먼트의 유해는 아일랜드로 돌아와 5일간 아버힐 교도소 인근 교회에 안치된 후, 아일랜드 국장으로 더블린의 글래스네빈 묘지 내 공화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었다.[85] 장례식에는 당시 80대 중반의 아일랜드 대통령이자 부활절 봉기의 마지막 생존 지도자였던 에몬 데 발레라를 비롯하여 약 3만 명의 추모객이 참석했다.
5. 검은 일기 논란
영국 관리들은 로저 케이스먼트가 1903년, 1910년, 1911년(두 번)에 걸쳐 작성한 일련의 일기, 이른바 '검은 일기'를 보관했다고 주장했다. 이 일기들의 판본을 출판한 제프리 더전은 "그의 동성애 생활은 그의 경력과 정치적 활동과 거의 완전히 분리되어 눈에 띄지 않았다"고 언급했다.[92] 이 일기들이 진본이라면, 케이스먼트가 다수의 파트너를 둔 동성애자였으며, 젊은 남성을 선호했고 대부분 성관계의 대가로 돈을 지불했음을 보여준다.[86]
1916년 케이스먼트가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영국 정보부는 그의 사형 집행 유예를 위해 활동하던 사람들에게 경찰이 작성한 필사본(케이스먼트 일기의 사본이라고 주장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당시 아일랜드 가톨릭 사회에 만연했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 필사본과 케이스먼트의 동성애 혐의를 공개하는 것은 그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일기가 진본인지 혹은 위조인지에 대한 문제는 오랫동안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제본된 형태의 일기는 1959년 8월, 내무부의 승인을 받은 사람들에 한해 제한적으로 검토될 수 있도록 기밀 해제되었으며, 현재 영국 큐에 있는 영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열람할 수 있다.
케이스먼트의 생애를 연구한 역사학자와 전기 작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로저 맥휴(1976년)와 앵거스 미첼(1990년대 이후) 등은 일기가 위조되었다고 주장한다. 미첼은 노트르담 대학교의 'Field Day Review'에 여러 관련 글을 기고했다.[92] 2019년, 폴 R. 하이드는 'Anatomy of a lie; Decoding Casement'라는 책을 출판하여, 다수의 공식 증거를 제시하며 케이스먼트 사후에 제본된 일기가 위조되었다고 결론지었다.
반면, 골드스미스 대학교의 윌리엄 J. 맥코맥 교수는 BBC와 RTE의 공동 자금 지원을 받아 오드리 자일스 박사에게 '검은 일기'의 진위 여부에 대한 법의학적 조사를 의뢰했다. 2002년 3월 12일 런던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표된 이 보고서는 해당 문서가 "위조나 다른 사람의 개입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고 결론 내렸다.[87]
그러나 두 명의 미국 법의학 문서 감정인은 자일스 보고서를 검토한 후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제임스 호란은 "'법과학 저널'과 '미국 문서 감정인 협회 저널'의 편집자로서, 자일스 보고서의 결론에 도달한 방법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자일스 보고서의 게재를 권장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자일스 보고서에 근거하여 '이 글이 로저 케이스먼트의 글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88][89] 문서 감정인 마르셀 매틀리 역시 "검토된 모든 문서가 케이스먼트의 진정한 글이라 할지라도, 이 보고서는 그 사실을 입증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평가했다.[90]
1959년 내무부 직원이 작성한 매우 짧은 전문가 의견은 케이스먼트를 일기의 저자로 특정하지 못했다. 이 의견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케이스먼트 관련 문헌에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2015년 7월까지 영국 국립 기록 보관소는 '검은 일기'를 "로저 케이스먼트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모호하게 설명하면서도, 비공개된 자일스 보고서 결과에 대해서는 만족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9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그의 2010년 소설 '켈트인의 꿈'에서 케이스먼트의 성 정체성에 대해 복합적인 시각을 제시하며, 케이스먼트가 동성애적 만남에서 실제로 일어났으면 하고 바랐던 일들을 부분적으로 허구화하여 일기에 기록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13년 기사에서 제프리 더전은 당시 민족주의 운동에서 케이스먼트가 가톨릭 순교자로서의 역할에 부합하기 위해 "성적으로 무색(sexless)"해야 했다고 주장했다.[92] 더전은 "케이스먼트가 활발한 동성애자였다는 증거는 그의 일기와 필체에 있으며, 그 세부 사항과 범위가 엄청나게 설득력이 있다"고 썼다.[92][93]
2024년 4월, 아일랜드 시사 잡지 'Village' 웹사이트에 폴 R. 하이드가 쓴 'The Devil & Mr Roger Casement'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이 기사는 진본 케이스먼트 문서와 논란이 되고 있는 1911년 장부/일기 사이의 모순점을 면밀히 조사하여, 이를 '검은 일기' 위조의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했다. 하이드는 이 증거가 2002년 케이스먼트 연구에서 제프리 더전이 저지른 오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하이드는 "'더존 씨가 장부의 진정성 여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는 17년 동안 그 위태로운 문장을 게재했고, 세 번째 판에서 아무런 설명 없이 삭제했다는 사실이 있다'고 지적하며, '이 증거는 개연성에 따른 정황 증거의 해석에 의존하지 않으며, 논리적 필연성의 증명으로서 2+2=4와 같이 100%의 확실성을 제공한다'고 강조했다. 더존은 'The Devil & Mr. Casement'에 대한 답변에서, 케이스먼트가 밀러에게 지불했음을 기록한 진본 문서와 코벌리에게 지불한 것으로 알려진 출처 불명의 논란 문건 사이에 모순이 없다고 반박했다.
6. 유산
로저 케이스먼트의 시신은 그가 교수형을 당했던 펜턴빌 교도소 뒤편 교도소 묘지의 생석회 구덩이에 묻혔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현재의 북아일랜드 앤트림주 북부 해안의 멀로그 만에 묻히는 것이었으나,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의 사형 이후 수십 년 동안 영국 정부는 케이스먼트 유해 송환에 대한 아일랜드 측의 여러 공식 요청을 거부했다. 예를 들어, 1953년 9월 아일랜드 총리 에몬 데 발레라는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을 다우닝 가에서 만나 유해 반환을 요청했다.[81] 처칠은 개인적으로 반대하지 않지만 동료들과 상의하고 법률 자문을 구하겠다고 답했으나, 결국 사형수의 유해는 발굴될 수 없다는 법적 의무를 이유로 들어 아일랜드의 요청을 거부했다. 데 발레라는 이 법률 자문에 이의를 제기하며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82]
:로저 케이스먼트의 유해가 영국 교도소 벽 안에 남아 있는 한, 그 자신이 고국으로 옮겨지기를 바랐음에도, 영국 정부의 적어도 보기 흉한 완고함으로 보일 수 있는 것에 대해 여기에서는 대중의 분노가 있을 것입니다.
데 발레라는 답신을 받지 못했다.[81]
마침내 1965년, 케이스먼트의 유해는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송환되었다. 그의 기사 작위가 1916년에 박탈되었음에도, 1965년 영국 내각의 송환 결정 기록에는 그를 "로저 케이스먼트 경"이라고 언급하고 있다.[83] 케이스먼트의 바람과는 달리, 해럴드 윌슨 총리 정부는 유해를 북아일랜드로 가져가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아 송환을 허가했다. 이는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에서의 재매장이 가톨릭 신자들의 축하와 개신교도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84]
케이스먼트의 유해는 더블린 시 아버힐 병영 교회(현재 아버힐 교도소)에 5일 동안 안치되었다. 이곳은 1916년 부활절 봉기의 다른 지도자들이 묻힌 곳과 가깝지만, 그들 곁에 묻히지는 않았다. 아일랜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후, 유해는 다른 아일랜드 공화주의자 및 민족주의자들이 묻힌 더블린의 글래스네빈 묘지 공화주의자 묘역에 정식 군사적 예우를 갖춰 매장되었다.[85] 당시 80대 중반이었고 부활절 봉기의 마지막 생존 지도자였던 아일랜드 대통령 에몬 데 발레라가 약 3만 명의 추모객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
6. 1. 주요 시설 및 단체

- 케이스먼트 공원: 서벨파스트 앤더슨스타운 로드에 위치한 게일 운동 협회 경기장.
- 여러 게일 운동 협회(GAA) 클럽: 로저 케이스먼츠 GAA 클럽(코번트리, 영국), 브램튼 로저 케이스먼츠 GAC(토론토, 캐나다), 로저 케이스먼츠 GAC(포트글레논, 북아일랜드) 등.
- Gaelscoil Mhic Easmainn: 아일랜드어로 '케이스먼트 학교'라는 뜻으로, 케리주 트랄리에 있는 아일랜드어 사용 초등학교.
- 던돌크의 Árd Easmuinn(Casement Heights) 주택 단지.
- 케이스먼트 비행장: 더블린 근처 발도넬에 위치한 아일랜드 공군 기지.
- 트랄리의 케이스먼트 기차 및 버스 정류장: 이언로드 에런(아일랜드 철도)과 버스 에런(아일랜드 버스)이 운영하며, 케이스먼트가 상륙했던 반나 해변 근처에 위치함.
- 코크 서부 교외 글래스힌(Glassheen)의 로저 케이스먼트 파크 주택 단지.
- 코크주 클로나킬티의 케이스먼트 거리와 인접 주택 단지.
- 케리주 반나 해변의 케이스먼트 기념비.
- 케리주 발리헤이그(Ballyheigue)의 케이스먼트 동상.
- 던레어리 목욕탕의 케이스먼트 동상.[94]
- 더블린주 핑글라스(Finglas)의 케이스먼트 로드(Casement Road), 케이스먼트 파크(Casement Park), 케이스먼트 드라이브(Casement Drive), 케이스먼트 그로브(Casement Grove) 등 다수의 거리.
- 앤트림주 발리미나 해리빌(Harryville)의 케이스먼트 스트리트(Casement Street): 케이스먼트의 증조부(그곳의 변호사)를 기리는 거리.[95]
6. 2. 문화적 묘사
영국 정부는 로저 케이스먼트가 1903년, 1910년, 1911년(두 번)에 걸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련의 일기, 이른바 '검은 일기'를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제프리 더전은 이 일기들을 출판하며 "그의 동성애 생활은 그의 경력과 정치적 활동과 거의 완전히 분리되어 눈에 띄지 않았다"고 언급했다.[92] 만약 이 일기들이 진본이라면, 케이스먼트가 다수의 파트너를 둔 동성애자였으며, 주로 젊은 남성에게 금전적 대가를 지불하고 성관계를 가졌음을 시사한다.[86]1916년, 케이스먼트가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자 영국 정보부는 그의 사형 집행 유예를 위해 활동하던 인사들에게 케이스먼트 일기의 사본이라고 주장하는 경찰 타자 문서를 보여주었다. 이는 당시 아일랜드 가톨릭 사회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이용하여, 동성애 혐의를 부각함으로써 케이스먼트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려는 명백한 의도로 해석된다. 이 일기의 진위 여부는 오랫동안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해당 일기들은 1959년 8월 제한적인 열람(영국 내무부의 승인을 받은 사람에 한함)이 허용되었으며, 1916년에는 공개되지 않았던 제본된 형태의 일기는 현재 영국 국립 문서 보관소 큐에 보관되어 있다. 케이스먼트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로저 맥휴(1976)와 앵거스 미첼(1990년대 이후) 등은 일기가 위조되었다고 주장한다. 미첼은 노트르담 대학교의 ''Field Day Review''에 관련 글을 여러 차례 기고했다.[92] 2019년 폴 R. 하이드는 ''Anatomy of a lie; Decoding Casement''라는 저서를 통해 공식 증거들을 분석하며 케이스먼트 사후에 제본된 일기가 위조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케이스먼트는 사망 이후 다양한 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종류 | 제목 | 작가/제작자 | 발표 연도 | 비고 |
---|---|---|---|---|
발라드 | 외로운 반나 해변(Lonely Banna Strand) | 부활절 봉기 전후 케이스먼트의 역할, 체포, 처형을 노래함.[96] | ||
소설 | 잃어버린 세계 | 아서 코난 도일 | 1912 | 존 록스턴 경 캐릭터에 영감을 줌.[97] |
시 | 로저 케이스먼트의 유령 | W. B. 예이츠 | 케이스먼트 유해 반환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음. | |
소설 | 'Giants Causeway'' | 피에르 베누아 | 1922 | 케이스먼트를 고귀한 순교자로 묘사. |
소설 | N or M? | 애거사 크리스티 | 1941 | 케이스먼트와 1916년 봉기를 언급. |
자전적 소설 | Borstal Boy | 브렌던 비한 | 1958 | 작가 가족의 케이스먼트에 대한 존경심을 서술. |
희곡 | 왕관의 죄수 | 리차드 허드, 리차드 스톡턴 | 1972 (초연) | 더블린 애비 극장에서 초연.[98] |
TV 시리즈 | 로저 케이스먼트 경 | 1968 |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체류 기간을 다룸. | |
라디오 드라마 | Cries from Casement as His Bones are Brought to Dublin | 데이비드 르드킨 (BBC 라디오) | 1973 |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음. |
소설 | The Dream of the Celt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 2012 (영문판) | 케이스먼트의 삶을 바탕으로 한 역사 소설. 에디스 그로스만 번역. |
기악곡 | The Betrayal of Roger Casement & the Irish Brigade | ...And You Will Know Us by the Trail of Dead | 2008 | 밴드의 EP Festival Thyme 수록곡. |
전기 소설 | Dying for Ireland | 앨런 루이스 | 2012 | 케이스먼트의 글과 생애를 바탕으로 감옥 회고록을 "소설적으로 재해석".[99] |
연극 | 로저 케이스먼트를 교수형에 처해야 하는가? | 2016 (초연) | 주로 스코틀랜드 야드에서의 심문을 바탕으로 함. 글래스고 트론 극장에서 초연.[100] | |
그래픽 노블 | The Trial of Roger Casement | 피오누알라 도란 | [101] | |
소설 | The Rings of Saturn | W. G. 제발트 | 케이스먼트에 대해 논의. | |
역사 소설 | Valiant Gentlemen | 사비나 머레이 | 2016 | 케이스먼트와 허버트 워드, 그의 아내 사리타 샌포드의 우정을 다룸.[102] |
다큐멘터리 | Roger Casement – Heart of Darkness | 케네스 그리피스 | 1992 | 케이스먼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제목은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장을 참조.[103][104] |
다큐멘터리 | The Ghost of Roger Casement | 2002 | 흑색 일기에 대한 법의학적 검사의 진위 여부를 조사.[105] |
참조
[1]
웹사이트
Ruairí Mac Easmainn/Roger Casement: The Global Imperative
https://irishstudies[...]
2022-04-03
[2]
웹사이트
Kerry marks first anniversary of Casement execution – Century Ireland
https://www.rte.ie/c[...]
2019-02-04
[3]
웹사이트
Humanities InstituteRoger Casement: A Human Rights Celebration (1916–2016)
https://web.archive.[...]
2019-02-04
[4]
웹사이트
Roger Casement: Ten facts about the Irish patriot executed in 1916
https://www.irishpos[...]
2020-06-08
[5]
서적
One Bold Deed of Open Treason: The Berlin Diary of Roger Casement 1914–1916
Merrion Press
[6]
논문
Phases of a Dishonourable Phantasy
https://www.academia[...]
2012
[7]
웹사이트
The 1916 Rising: Personalities & Perspectives (an online exhibition)
https://web.archive.[...]
National Library of Ireland/Leabharlann Náisiúnta na hÉireann
2008-04-02
[8]
서적
Casement
Haus Publishing
[9]
서적
Roger Casement
[10]
문서
Bureau of Military History
Dublin
[11]
서적
Casement the Flawed Hero
Routledge
[12]
서적
An Anglo-Irish Miscellany
Allen Figgis
[13]
서적
Roger Casement, Imperialist, Rebel, Revolutionary
Lilliput Press
[14]
웹사이트
Casement, Thomas Hugh ('Tom')
https://www.dib.ie/b[...]
Dictionary of Irish Biography
[15]
웹사이트
Thomas Hugh Jephson Casement profile
http://genealogy.met[...]
2017-08-16
[16]
서적
British Consul: Memories of Thirty Years' Service in Europe and Brazil
George G. Harrap & Co.
1938
[17]
논문
Conrad and Roger Casement
https://www.jstor.or[...]
1973
[18]
뉴스
The Dream of the Celt by Mario Vargas Llosa – review
https://www.theguard[...]
2016-04-12
[19]
뉴스
Traitor, Martyr, Liberator
https://www.nytimes.[...]
2014-10-23
[20]
간행물
1901-09-13
[21]
뉴스
Daniel J Danielsen – a pioneering humanitarian who helped Roger Casement expose the horror of Belgian rule in the Congo
https://www.irishtim[...]
2021-01-25
[22]
서적
Broken Angel. The Tempestuous Lives of Roger Casement
Bloomsbury USA
1995-07-17
[23]
서적
Broken Angel. The Tempestuous Lives of Roger Casement
Bloomsbury USA
1995-07-17
[24]
서적
Roger Casement
[25]
서적
Rubber, the Amazon and the Atlantic World 1884–1916
Humanitas
[26]
서적
The Devil and Mr. Casement: One Man's Battle for Human Rights in South ...
https://books.google[...]
Farrar, Straus and Giroux
2016-01-04
[27]
서적
The Amazon Journal of Roger Casement
Anaconda Editions
[28]
서적
The devil and Mr. Casement: one man's battle for human rights in South America's heart of darkness
https://archive.org/[...]
Farrar, Straus and Giroux
2010
[29]
서적
Roger Casement
Harcourt Jovanovich
[30]
웹사이트
Where Casement would have stood today - Address to the Roger Casement Sinn Fein Club, Dublin.
https://libcom.org/a[...]
2022-10-19
[31]
서적
The New Women of the Glens Writers and Revolutionaries
https://ulir.ul.ie/b[...]
University College Dublin Press
[32]
서적
Feis Na Ngleann: Gaelic Culture in Antrim Glens
Ulster Historical Association
2005
[33]
서적
Alice Milligan and the Irish Cultural Revival
Four Courts Press
2013
[34]
논문
No Other Place but Ireland: Alice Milligan's Diary and Letters
https://www.jstor.or[...]
2021-01-27
[35]
서적
Roger Casement
Coronet
[36]
서적
Roger Casement
The O'Brien Press
[37]
서적
James Connolly. 'A Full Life'
Gill & Macmillan
[38]
서적
Maud Goone: Lucky Eyes and a High Heart
Victor Gollanz
[39]
서적
A Ripple in the Pond: The Home Rule Revolt in North Antrim
Ulster Scots Agency
[40]
웹사이트
The Ballymoney meeting, 24 October 1913
https://www.historyi[...]
2022-08-23
[41]
서적
The I.R.B. and the 1916 Rising
Mercire Press
[42]
서적
Easter 1916 : the Irish rebellion
http://archive.org/d[...]
London; New York : Allen Lane
2005
[43]
웹사이트
Alice Milligan
https://web.archive.[...]
Ulster-Scots Community Network
2021-01-29
[44]
서적
Roger Casement
The O'Brien Press
[45]
서적
Roger Casement: Imperialist, Rebel, Revolutionary
[46]
서적
Roger Casement
Coronet
[47]
웹사이트
The role of Roger Casement in the 1916 Easter Rising
http://qpol.qub.ac.u[...]
2022-02-18
[48]
서적
Broken Archangel: The Tempestuous Lives of Roger Casement
Bodley Head
[49]
서적
Casement
[50]
기록보관소
National Archives, Kew, PRO FO 95/776
[51]
웹사이트
Handwritten statement by Mansfeldt de Cardonnel Findlay, H.B.M. Minister, British Legation at Christiania, Norway promising to pay Adler Christensen the sum of £5,000 for the provision of information that would lead to the capture of Roger Casement
http://digital.ucd.i[...]
2007-07-30
[52]
웹사이트
Casement's War
http://www.drb.ie/es[...]
[53]
뉴스
The Continental Times
1914-11-20
[54]
서적
One Bold Deed of Open Treason: The Berlin Diary of Roger Casement 1914–1916
Merrion Press
[55]
잡지
The Literary Digest
https://archive.org/[...]
Funk and Wagnall
1916-05-13
[56]
문서
Here lived in summer 1915 Sir Roger Casement, a martyr for Ireland's freedom, a magnanimous friend of Germany in grave times. He sealed the love of his country with his blood.
[57]
논문
Irish Republicans and the Indo–German Conspiracy of World War I
[58]
웹사이트
Easter Rising insurrection
https://www.bbc.co.u[...]
[59]
서적
Broken Angel. The Tempestuous Lives of Roger Casement
Bloomsbury USA
1995-07-17
[60]
뉴스
Black night in Ballykissane
http://archives.tcm.[...]
The Kingdom
2006-04-13
[61]
서적
A Dictionary of Irish History
Gill and Macmillan
1980
[62]
서적
1916 The Long Revolution, The First World War and the Rising: Mode, Moment and Memory
https://archive.org/[...]
Mercier Press
2007
[63]
기록보관소
Casement's diary entry for 27 March 1916
[64]
서적
Easter 1916: The Irish Rebellion
[65]
웹사이트
Vehicles, Aircraft and Ships – Boat, Wooden, German
https://www.iwm.org.[...]
Imperial War Museum
[66]
의회회의록
HL Deb 4 May 1916 vol 21 cc940-1
[67]
서적
Broken Angel. The Tempestuous Lives of Roger Casement
Bloomsbury USA
1995-07-17
[68]
회고록
Memoir of Willie Mullins
1968
[69]
뉴스
Irish Times
1968-07-29
[70]
서적
Odd People: Hunting Spies in the First World War (original title: Queer People)
Biteback Publishing
[71]
뉴스
Roger Casement's Appeal Fails
http://www.britishne[...]
1916-07-18
[72]
서적
The trial of Sir Roger Casement
https://archive.org/[...]
Canadian Law Book Co.
[73]
웹사이트
Roger Casement: The Gay Irish Humanitarian Who Was Hanged on a Comma
http://www.firstthin[...]
First Things
2011-11-15
[74]
웹사이트
Field Day Review
http://limerick.acad[...]
2017-08-16
[75]
웹사이트
Casement in Kerry: A Revolutionary Journey
http://kerrymuseum.i[...]
Kerry County Museum
[76]
간행물
Roger Casement and the History Question
2016-07-01
[77]
London Gazette
1916-07-04
[78]
문서
A History of St Mary and St Michael's Parish, Commercial Road, East London
[79]
뉴스
Execution of Roger Casement
http://www.britishne[...]
1916-08-03
[80]
웹사이트
Digital materials for the study and appreciation of Anglo–Irish Literature
http://www.ricorso.n[...]
[81]
서적
De Valera Rule, 1932–75
Gill Books
[82]
서적
De Valera Rule, 1932–75
Gill Books
[83]
아카이브
National Archives
[84]
웹사이트
The Multiple Hero
https://newrepublic.[...]
2012-08-02
[85]
서적
Resting Places: The Burial Sites of More Than 14,000 Famous Persons
https://books.google[...]
McFarland & Company, Inc., Publishers
[86]
웹사이트
The Casement Diaries: A Suitable Case for Treatment
http://www.gold.ac.u[...]
Research Hallmark, Goldsmiths College, University of London
2001-03-01
[87]
웹사이트
British History in depth: Roger Casement: Secrets of the Black Diaries
https://www.bbc.co.u[...]
2002-01-01
[88]
뉴스
British History in depth: Roger Casement: Secrets of the Black Diaries
https://www.bbc.co.u[...]
2002-01-01
[89]
저널
Lost to History: An Assessment and Review of the Casement Black Diaries
https://breac.nd.edu[...]
2016-04-01
[90]
잡지
Casement tried and tested—the Giles Report on the Black Diaries
https://www.historyi[...]
History Publications Ltd
2016-07-01
[91]
간행물
Casement Tried and Tested – The Giles Report
2016-07-01
[92]
웹사이트
Cult of the Sexless Casement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Novel ''The Dream of the Celt'' by Mario Vargas Llosa, Studi irlandesi. ''A Journal of Irish Studies'' no. 3 (2013), pp. 35–58.
http://www.fupress.c[...]
[93]
웹사이트
The Black Stain
https://limerick.aca[...]
2016-04-01
[94]
웹사이트
Roger Casement statue unveiled and will stand in Dún Laoghaire
https://www.irishtim[...]
[95]
웹사이트
Casement Road Citation
http://mdgballygall.[...]
[96]
웹사이트
The Wolfe Tones – Banna Strand
https://genius.com/T[...]
[97]
서적
The Amazon Journal of Roger Casement
Anaconda Editions
[98]
저널
Review of Prisoner of the Crown
https://www.jstor.or[...]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2-10-01
[99]
서적
Dying for Ireland: The Prison Memoirs of Roger Casement
[100]
웹사이트
Tron theatre website
http://www.tron.co.u[...]
2023-02-01
[101]
웹사이트
The graphic tale of Irish revolutionary Roger Casement
http://www.irishnews[...]
2016-08-11
[102]
웹사이트
'Gentlemen': a superb novel about Irish patriot Roger Casement
https://www.washingt[...]
2016-10-27
[103]
웹사이트
Welsh film-maker fascinated by Irish history
https://www.irishtim[...]
2006-10-21
[104]
웹사이트
Griffith, Kenneth (1921–2006)
http://www.screenonl[...]
2014-01-01
[105]
웹사이트
Roger Casement Diaries Authenticated
2002-01-01
[106]
웹사이트
「ケルト人の夢」書評 西欧の野蛮問うた外交官の胆力|好書好日
https://book.asahi.c[...]
朝日新聞
2021-12-25
[107]
웹사이트
ケルト人の夢 マリオ・バルガス=リョサ著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21-12-25
[108]
뉴스
Sex diaries of Roger Casement found to be genuine
http://www.theguardi[...]
가디언지
2002-03-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