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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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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토니우스의 내전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간의 권력 다툼으로 발생한 일련의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제2차 삼두정치 이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각각 서방과 동방을 장악했으나,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불륜 관계를 맺고 로마 영토를 할양하면서 옥타비아누스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비난하는 여론전을 펼치고, 유언장을 공개하여 안토니우스를 반역자로 규정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주했으나, 결국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결했다. 이 사건으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되었고, 로마는 팍스 로마나 시대를 맞이하며 번영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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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의 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로렌스 A 카스트로의 악티움 해전, 1672년
로렌스 A 카스트로의 악티움 해전 (1672년)
분쟁 명칭악티움 전쟁
일부로마 공화정의 위기
날짜기원전 32년 3월 – 기원전 30년 8월
장소그리스, 이집트
결과옥타비아누스의 승리
영향로마가 이집트를 합병하고 동부 속주에 대한 통제권을 재확립함
로마 내전 종식
팍스 로마나 시작
로마 공화정에서 로마 제국으로 전환
교전 세력
교전국 1로마 공화정 (서부 속주)
교전국 2로마 공화정 (동부 속주)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국 1 지휘관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
교전국 2 지휘관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7세
가이우스 소시우스
}}
병력 규모
교전국 1 병력로마 군단병 200,000명
로마 군함 및 수송선 450척
교전국 2 병력로마 군단병 173,700명
프톨레마이오스 군인 18,000명
메디아 증원군 5,000명
로마 및 프톨레마이오스 군함 및 수송선 154척
사상자 및 피해
교전국 1 사상자50,000명
교전국 2 사상자75,000명
추가 정보
옥타비아누스
옥타비아누스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대리석 흉상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클레오파트라의 자살
영어 명칭Antony's Civil War (안토니우스의 내전)

2. 배경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결혼했으나,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에서 지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관계를 끊고 그를 제거하여 로마 세계 전체를 장악하려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을 원로원에 공개했는데, 유언장에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재산을 클레오파트라와의 자녀들에게 남기고, 그들이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남겨줄 왕국에서 군주로 통치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이에 충격을 받았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다.[1]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원로원에 선전전을 펼쳐 클레오파트라에게 전쟁을 선포하도록 설득했다. 원로원은 안토니우스가 로마인이라는 이유로 전쟁 선포를 꺼렸지만,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원로원 지지자들을 로마에서 쫓아내고 기원전 32년에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1]

2. 1. 제2차 삼두정치와 권력 분할

카이사르의 암살로 생긴 권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카이사르의 측근인 옥타비아누스(카이사르의 주요 상속자),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레피두스가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했다.[1]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물리친 후, 기원전 36년에 레피두스가 삼두정치에서 축출되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로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두 인물로 남게 되었다.[1] 옥타비아누스는 히스파니아, 갈리아, 이탈리아, 아프리카를 포함한 서방을 장악했고,[1] 안토니우스는 그리스, 아시아, 시리아, 이집트를 포함한 동방을 장악했다.[1]

기원전 30년경의 젊은 옥타비아누스인 아우구스투스의 재구성된 조각상


각각 클레오파트라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묘사된 기원전 36년 안티오크 조폐창에서 주조된 은 테트라드라크마의 앞면과 뒷면

2. 2.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동맹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 대신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에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다.[1]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클레오파트라와의 자녀들에게 남겼고, 그들이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그들에게 남겨줄 왕국에서 군주로 통치할 것이라고 낭독했다.[1]

안토니우스의 ''알렉산드리아 기증''에서 그는 로마 영토의 상당 부분을 클레오파트라에게 할양했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은 이집트와 키프로스의 공동 통치자로 즉위했고,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의 통치자로,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키레나이카와 리비아의 통치자로,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는 페니키아, 시리아, 킬리키아의 통치자로 즉위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왕들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카이사리온은 "왕들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6]

2. 3. 옥타비아누스의 선전전과 전쟁 명분 확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 (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대신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에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관계를 끊고 그를 꺾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여, 잠재적인 경쟁자를 제거하고 로마 세계 전체를 장악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을 원로원에 교묘하게 공개했는데, 유언장에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클레오파트라와의 자녀들에게 남겼고, 그들이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그들에게 남겨줄 왕국에서 군주로 통치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행태에 충격을 받았다. 이후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원로원을 상대로 선전전을 펼쳐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도록 설득했다. 안토니우스는 진정한 로마인이었고 옥타비아누스나 원로원이 가장 원치 않았던 것은 반란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안토니우스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을 꺼렸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원로원 지지자들을 로마에서 쫓아냈고, 기원전 32년에 로마 원로원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3. 군사적 충돌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충돌을 겪었다. 옥타비아누스는 해군 지휘를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맡겼는데, 아그리파는 경험 많은 리부르니안 선박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었다.[1] 반면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대형 선박 중심이었으나, 선원과 지휘관의 경험은 부족했다.[1] 훈련 상태와 경험에서 우위를 점한 옥타비아누스 함대는 안토니우스 해군을 빠르게 제압했다.[1]

전투 중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옥타비아누스 함대의 중앙을 돌파하여 도주하고, 안토니우스도 뒤따라 퇴각하면서 안토니우스 함대는 거의 파괴되었다.[1]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육로를 통해 이집트로 진격했고,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했다. 안토니우스는 남은 병력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기병대와 함대가 항복하고 보병대도 전투 없이 항복했다.[6]

자신의 패배를 직감한 안토니우스는 자결을 시도했고, 클레오파트라 역시 옥타비아누스에게 사로잡히기 전 자살했다.[7]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의 죽음 이후 로마에서 공개 군사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3. 1. 해상 전력 비교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지휘하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대부분 작고 기동성이 뛰어난 리부르니안 선박으로 구성되었으며, 경험 많은 선원들로 가득했다.[1] 반면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대형 선박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지만, 선원과 지휘관은 경험이 부족했다.[1] 옥타비아누스는 350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고, 안토니우스는 290척의 선박과 30~50척의 수송선을 보유했다.[1] 안토니우스의 선박은 더 크고 무장이 잘 되어 있었으나, 옥타비아누스 함대의 선원들은 더 나은 훈련을 받았고 신선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의 해군을 빠르게 제압했다.[1]

3. 2. 악티움 해전 (기원전 31년)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협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 함대가 격돌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해군 지휘를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맡겼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대형 선박으로 구성되었지만, 선원과 지휘관의 경험이 부족했다. 반면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더 작고 기동성이 뛰어난 리부르니안 선박으로 구성되었으며, 경험 많은 선원들로 가득했다.[1]

옥타비아누스는 해상에서 안토니우스와 싸우기를 원했고, 양측은 소모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안토니우스의 전 장군 중 한 명이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의 전투 계획을 알렸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가장 큰 선박을 사용하여 아그리파의 라인 북쪽 끝을 밀어내려 했지만,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모두 신중하게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정오 직후, 안토니우스는 해안의 보호에서 벗어나 자신의 라인을 확장하고, 마침내 적과 교전해야 했다.[1]

훈련이 더 잘되고 신선한 선원들로 무장한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안토니우스의 더 크고 경험이 부족한 해군을 빠르게 제압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군인들은 로마 해상 전투에서 수년간 싸웠고, 적선을 충돌시켜 화살 세례와 투석기로 갑판 위의 선원들을 공격했다.[1]

전투가 안토니우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본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선박 분대를 이끌고 옥타비아누스의 중앙을 돌파하려 했다. 아그리파의 봉쇄에 틈이 생기자, 그녀는 그 틈으로 빠져나갔고, 안토니우스도 뒤따라 함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로 퇴각했다. 이로써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거의 대부분 파괴되었고, 지상군도 항복하면서 안토니우스 세력은 결정적인 몰락을 맞이했다.[1]

3. 3. 알렉산드리아 전투와 안토니우스의 죽음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는 즉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추격하려 했으나, 오랜 기간 복무한 참전 용사들의 은퇴 요청으로 인해 일부 병력을 해산해야 했다. 이들 중 다수는 20년 전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에서 복무했던 병사들이었다.[6]

겨울이 지나고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는 해상 공격 대신 육로를 통해 아시아를 거쳐 이집트로 진격했다. 이는 안토니우스가 동방 속주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세력을 재규합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로마 회화로 주세페 2세의 집, 폼페이에서 발견되었으며, 서기 1세기에 제작되었다. 이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그녀는 왕실 보관을 착용하고 자살로 독을 마시고 있으며, 아들 카이사리온 또한 왕실 보관을 착용하고 그녀 뒤에 서 있다.


악티움 해전 이후 안토니우스의 주력 부대(23개 군단, 15,000 기병)는 그리스에 남아 있었으나 보급 부족으로 항복했다. 안토니우스는 키레나이카에서 루키우스 피나리우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피나리우스는 이미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바친 후였다. 옥타비아누스는 피나리우스에게 4개 군단을 알렉산드리아로 이동시키고, 자신은 서쪽에서 진격했다.

옥타비아누스와 피나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여 도시를 포위했다. 안토니우스는 남은 병력 3만 명으로 피나리우스를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알렉산드리아로 퇴각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접근하자 안토니우스의 기병대와 함대는 항복했고, 보병대도 전투 없이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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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군대와 로마 지배에 대한 희망을 잃은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0년 8월 1일, 칼에 몸을 던져 자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실패하고 복부에 상처를 입은 채 영묘로 피신한 클레오파트라에게 옮겨져 그녀의 품에서 죽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와 협상을 시도하며 카이사리온의 생명을 구걸하고 자발적인 투옥을 제안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두 명의 카이사르는 너무 많다"며 거절하고 카이사리온을 살해했다.[6]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의 개선식에 동원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스트라보의 기록에 따르면 독사에게 물리거나 독성 연고를 발라 자살했다.[7]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그녀의 용기를 존경하여 안토니우스와 함께 로마에서 공개 군사 장례식을 치렀다. 로마 전역에 애도 기간이 선포되었고,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존경하고 로마 국민에게 자신의 자비로움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알렉산드리아를 떠나면서 로마는 이집트를 병합했고,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공화국의 마지막 전쟁은 끝났다.

thumb가 되어 초대 로마 황제가 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안토니우스의 내전은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끝나면서 한 세기 동안 이어진 내전이 종식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 공화정은 막을 내리고 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으며 초대 로마 황제가 되었고, 그의 통치는 로마에 안정과 평화를 가져왔다. 이 시기를 "팍스 로마나"라고 부른다.[1]

1세기의 로마 황제 중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안토니우스의 직계 후손이었다.[1]

4. 1. 옥타비아누스의 승리와 로마 제정의 시작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는 파라오로 임명되었고, 이집트는 그의 개인 소유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지지자들을 처형함으로써 한 세기 동안의 내전을 종식시켰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에 의해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명명되었고 전례 없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공화국을 로마 제국으로 변모시켜 초대 로마 황제로서 통치했다.[1]

그 후 몇 달, 몇 년 동안 아우구스투스는 겉으로는 공화국의 외형을 유지하면서도 그의 지위를 최우선 권력과 권위로 만드는 일련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는 현재 로마 제국이라고 불리는 제국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 이후로 로마 국가는 "프린켑스"(Princeps, 첫 번째 시민)에 의해 통치될 것이며,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로마는 이제부터 황제에 의해 통치될 것이다.[1]

원로원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특정 원로원 속주에 대한 권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시리아, 이집트, 갈리아와 같이 가장 많은 군단을 필요로 하는 중요한 국경 속주는 아우구스투스와 후임 황제들이 직접 통치할 것이다.[1]

마지막 공화정 내전이 끝나면서 공화국은 제국으로 대체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로마 문화의 황금 시대를 열었으며 로마가 한 세기 이상 보지 못했던 안정을 가져왔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 전체를 장악하면서 아우구스투스 사후 수세기 동안 로마 세계에는 평화가 지배할 것이다. 이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의 평화)라고 한다.[1]

1세기의 로마 황제 중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안토니우스의 직계 후손이었다.[1]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제국은 서유럽에서 5세기에 로마 멸망까지 지속되었다.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은 또한 서기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까지 비잔틴 제국으로 살아남았다.[1]

4. 2. 로마 제국의 성립과 팍스 로마나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지지자들을 처형하고 한 세기 동안의 내전을 종식시켰다. 기원전 27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전례 없는 권한을 부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을 로마 제국으로 변모시켜 초대 로마 황제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의 외형을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는 로마 제국의 토대를 마련했고, 이후 로마는 '프린켑스(Princeps, 첫 번째 시민)'에 의해 통치되었다. 현대적 용어로, 로마는 이제부터 황제에 의해 통치될 것이다.

원로원은 표면적으로 특정 원로원 속주에 대한 권한을 가졌지만, 시리아, 이집트, 갈리아와 같이 중요한 국경 속주는 아우구스투스와 후임 황제들이 직접 통치했다.

마지막 공화정 내전이 끝나고 공화국은 제국으로 대체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로마 문화의 황금 시대를 열었고, 한 세기 이상 보지 못했던 안정을 가져왔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장악하면서, 아우구스투스 사후 수세기 동안 로마 세계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이를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라고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제국은 서유럽에서 5세기 로마 멸망까지 지속되었다.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까지 비잔틴 제국으로 살아남았다.

참조

[1] 논문 Biographers of the Caesars 1980
[2] 논문 Triumvirate and Principate 1973
[3] 논문 The Authenticity and Validity of Antony's will 1978
[4] 논문 The Dating of Livy's First Decade 1965
[5] 서적 Jewish War Loeb ed.
[6] 문서
[7] 문서 Geography
[8] 웹사이트 Roman Legions http://www.globalsec[...]
[9] 웹인용 Cleopatra https://www.webcitat[...] 200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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