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삼두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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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삼두정치는 기원전 43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후,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5년간 로마를 통치하기 위해 맺은 정치적 동맹이다. 이들은 카이사르 암살자들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숙청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고 서부 로마 세계를 분할했다. 그러나 권력 투쟁과 선전전 끝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면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하며 삼두정치는 종말을 맞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이후 원수정을 수립하며 로마 제국 시대를 열었으며, 이 시기는 로마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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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삼두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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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명칭 | 제2차 삼두정치 |
로마자 표기 | Second Triumvirate |
라틴어 표기 | Tresviri Rei Publicae Constituendae |
설립 시기 | 기원전 43년 11월 27일 |
소멸 시기 | 기원전 32년 |
유형 | 로마 공화정 정치 체제 |
구성원 | |
주요 인물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기타 관련 인물 | 키케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
정치 체제 | |
공식 명칭 | '국가 재건을 위한 3인 위원회' |
권력 형태 | 3인에 의한 독재 |
목적 |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혼란 수습 반대파 제거 권력 분할 |
주요 사건 | |
주요 사건 | 필리피 전투 나우로쿠스 전투 악티움 해전 삼두정치 종료 및 내전 |
역사적 배경 | |
배경 |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정치적 혼란 |
권력 투쟁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사이 권력 투쟁 원로원과 대립 |
삼두정치 이후 | |
옥타비아누스 독주 | 옥타비아누스의 권력 장악 및 로마 제국 건설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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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칭
"제2차 삼두정치"라는 명칭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사이의 정치 동맹(기원전 59년경 결성)을 "제1차 삼두정치"로 부르면서 생겨난 현대의 명칭이다.[1] 이 명칭은 17세기 후반에 처음 언급되었고, 다음 세기에 와서야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1] 최근의 서적들은 "제1차"와 "제2차" 삼두정치라는 전통적인 명명법을 피하고 있다.[2]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리베라토레스(liberatores)'라 불린 암살자들과 카이사르 지지자들 사이에는 일시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합의에는 암살자들에 대한 사면, 카이사르의 공식적인 행위들의 확인, 독재정치 폐지가 포함되었다.[3] 그러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법적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진영에서 카이사르의 노병들을 끌어들여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지원을 약화시켰다.
3. 삼두정치 시대
키케로는 기원전 44년 12월, 원로원을 설득하여 옥타비아누스의 노력을 기리고 안토니우스에 맞서 키살피나와 트란살피나 갈리아의 기존 총독들이 속주를 유지하도록 지원하게 했다. 원로원의 군대는 두 집정관과 옥타비아누스가 이끌었고, 기원전 43년 4월 21일 무티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를 패주시켰다. 그러나 두 집정관이 모두 죽자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에 대항하여 남쪽으로 진군하여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집정관직을 확보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협상하여 화해하고, 기원전 43년 5년간 '국가 재건을 위한 삼인 위원회'(triumviri rei publicae constituendae)를 구성하였다. 이는 렉스 티티아에 의해 승인되었다.[5] 이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 카시우스 등 '해방자들'과의 전쟁을 준비하며 로마 세계를 분할했다.
기원전 41년, 이탈리아에서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해상 봉쇄로 기근이 발생하고, 토지 요구 문제까지 겹쳐 사회 불안이 커졌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옥타비아누스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을 규합했다. 결국 페루시아는 함락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를 석방하고, 자신의 병사들의 중재로 루키우스의 병사들도 살려주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페루시아를 약탈하고, 의회 의원들을 학살했으며, 도시를 불태웠다.[16]
기원전 40년 9월, 브룬디시움 협정이 체결되었다.[3] 이 조약으로 옥타비아누스는 갈리아와 일리리쿰을,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지배하게 되었다.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유지했다. 안토니우스는 카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파르티아 원정을 이끌 권한을 받았다. 이 조약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인 옥타비아의 결혼으로 더욱 굳어졌다.
기원전 39년 여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미세눔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평화 협상을 맺었다. 기원전 38년 봄, 쿠마이와 메시나 근처에서 두 차례의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다. 두 전투 모두 섹스투스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는 자신의 이점을 활용하지 않고 옥타비아누스가 캄파니아로 후퇴하도록 허용했다.
기원전 37년 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300척의 함선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항해했다. 그들은 섹스투스의 아우구르 직위와 미래의 집정관직을 박탈하기로 합의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공격을 1년 연기하고, 2만 명의 병력과 1,000명의 정예 부대와 교환으로 안토니우스로부터 120척의 함선을 받기로 했다. 삼두정치는 기원전 38년 말에 만료되었으나, 그들은 사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두정의 법적 지위는 실질적으로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헌법주의를 과시하며, 삼두정치는 기원전 33년 마지막 날 만료될 5년간 다시 법으로 갱신되었다.[10]
3. 1.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기원전 44년)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암살자들(''리베라토레스'')과 카이사르 지지자들 사이에 일시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합의에는 암살자들에 대한 사면, 카이사르의 공식적인 행위들의 확인, 독재정치 폐지가 포함되었다.[3] 기원전 44년 늦봄, 카이사르가 죽기 전 할당했던 여러 속주들은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었다. (많은 속주가 나중에 그의 살해자들에게 할당됨)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4년 집정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기원전 44년 6월 2일, 자신에게 키살피나와 트란살피나 갈리아 속주를 할당하는 불법적인 법안을 통과시켜 기존 총독들을 몰아냈다.[3] 이 총독직은 안토니우스에게 루비콘 강 너머에서 원로원과 이탈리아를 위협할 수 있는 정치적 미래를 보장해 주었다. 안토니우스는 또한 원로원을 설득하여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주요 암살자 두 명)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곡물 공급 임무를 맡겼다.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법적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관계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진영에서 카이사르의 노병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지원을 약화시켰다. 키케로는 기원전 44년 12월, 원로원을 설득하여 옥타비아누스의 노력을 기리고 안토니우스에 맞서 키살피나와 트란살피나 갈리아의 기존 총독들이 속주를 유지하도록 지원하게 했다. 원로원의 군대는 두 집정관과 옥타비아누스가 이끌었고, 기원전 43년 4월 21일 무티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를 패주시켰다.
3. 2. 삼두정치의 성립 (기원전 43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암살자들과 카이사르 지지자들 사이에 일시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상속자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3] 기원전 43년, 무티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한 후,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진군하여 퀸투스 페디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었다.[4]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협상하여 화해하고, 기원전 43년 5년간 ''국가 재건을 위한 삼인 위원회''(triumviri rei publicae constituendae)를 구성하였다. 이는 렉스 티티아에 의해 승인되었다.[5] 이 법은 기원전 82년 술라의 독재정을 수립한 ''렉스 발레리아''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6] 삼두정치자들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포고령을 발표하고, 임페리움 마이우스를 부여받았으며,sine provocationela (항소권 없이) 행동할 수 있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 카시우스 등 ''해방자들''과의 전쟁을 준비하며 로마 세계를 분할했다.
3. 3. 숙청 (기원전 43년)
돈이 절박했던 삼두정치 세력은 사형 명단을 발표했고, 약 300명의 상원의원과 2,000명의 기사가 살해되었다. 이 숙청은 삼두정의 적과 친구들을 모두 희생시켰다. 사형 명단에 오른 사람들의 재산은 몰수되어 매각되었고, 독립적인 암살자, 현상금 사냥꾼, 밀고자들은 살인에 가담한 대가로 현금 보상을 받았다.[3]3. 4. 해방자들의 내전 (기원전 42년)
이탈리아에서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해상 봉쇄로 기근이 발생하고, 토지 요구 문제까지 겹쳐 사회 불안이 커졌다.[14] 기원전 41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이자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와 함께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옥타비아누스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을 규합했다. 이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시민의 권리를 짓밟고, 안토니우스보다 자신의 베테랑(퇴역 군인)을 우선시한다는 선전을 퍼뜨렸다.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었지만,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무장 봉기를 일으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안토니우스는 사태를 관망하는 입장이었지만, 이탈리아 내 그의 지지자들은 그의 의중을 모른 채 갈등을 준비했다. 기원전 41년 여름, 루키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점령했으나, 옥타비아누스 군대에 의해 페루시아로 쫓겨나 포위되었다. 갈리아와 이탈리아 남부의 친(親) 안토니우스 세력은 안토니우스의 의도를 확신하지 못하고 관망했다. 결국 페루시아는 함락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를 석방하고, 자신의 병사들의 중재로 루키우스의 병사들도 살려주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페루시아를 약탈하고, 의회 의원들을 학살했으며, 도시를 불태웠다.[16]
기원전 40년 여름, 갈리아의 친 안토니우스 총독이 사망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 지역을 점령하고, 이탈리아 남부 군단의 지지도 얻었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동쪽에서 상당한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귀환했다.[17]
3. 5. 안토니우스의 동방 정책 (기원전 42-40년)
필리피 전투 이후, 안토니우스는 동부 속주들을 재편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르티아에 대항하여 움직였다.기원전 40년 9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브룬디시움 협정을 체결했다.[3] 이 조약으로 옥타비아누스는 갈리아와 일리리쿰을,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지배하게 되었다.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유지했다. 안토니우스는 카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파르티아 원정을 이끌 권한을 받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합의하거나 그를 패배시켜야 했다. 전 공화파들에게는 사면이 부여되었고, 이탈리아는 공유되었지만 사실상 옥타비아누스의 영토가 되었다.[3]
이 조약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인 옥타비아의 결혼으로 더욱 굳어졌다. 이 평화 선언은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크게 환영받았고, 두 지도자는 10월에 로마에서 승전식을 거행했다.[3]
기원전 39년 여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미세눔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평화 협상을 맺었다. 섹스투스는 5년 동안 코르시카, 사르데냐, 시칠리아, 펠로폰네소스를 확보하고, 기원전 33년 집정관직과 아우구르 직위를 약속받았다. 대신 섹스투스는 이탈리아 곡물 수송선의 자유로운 통행과 지중해 해적 진압을 보장해야 했다. 섹스투스의 지지자들은 사면과 재산 보상을, 병사들은 퇴역 연금을, 도망친 노예들은 자유를 얻었다.[3] 이 합의 후,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9년 10월 2일에 동방으로 떠났다.[3]
3. 6. 페루시아 전쟁 (기원전 41-4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그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의 토지 분배 문제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항의와 불안을 야기했다.[3]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이러한 불만을 이용하여 옥타비아누스를 약화시키려 했다.기원전 41년 여름,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점령했지만,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 의해 격퇴되어 페루시아에 포위되었다. 결국 페루시아는 함락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를 석방했지만, 도시를 약탈하고 의회 의원들을 학살했으며 도시를 불태웠다.[3]
3. 7. 브룬디시움 조약과 미세눔 조약 (기원전 40-39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의 군사적 지원을 약화시키기 위해 카이사르의 노병들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다.기원전 40년 9월, 브룬디시움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안토니우스는 동부 속주와 속국들을 재편할 수 있게 되었고, 클레오파트라에게 함대 건조를 위한 목재를 얻을 수 있도록 동부 키리키아와 키프로스의 일부를 주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공개적으로 디오니소스 신과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상황이 악화되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브룬디시움으로 불러들였다. 옥타비아누스가 즉시 도착하지 않자 안토니우스는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시리아로 이동하여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의 승전보를 들었다. 벤티디우스는 안토니우스에 의해 지휘권에서 해임되었고, 기원전 38년 11월 27일에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3]
기원전 39년 여름, 미세눔 조약이 체결되었다.
3. 8. 삼두정치의 갱신 (기원전 38-37년)
안토니우스가 아테네에서 겨울을 보내고 기원전 38년 봄에 동쪽으로 돌아왔을 때,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협정은 기원전 39년 가을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 이탈리아에서는 기근이 계속되었고 해적들은 곡물 수송선을 계속 습격했다. 섹스투스의 제독 중 한 명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면서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섬, 그리고 3개 군단과 60척의 함선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돌아갔다. 이에 격분한 섹스투스는 전쟁을 선포했다.기원전 38년 봄, 쿠마이와 메시나 근처에서 두 차례의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다. 두 전투 모두 섹스투스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는 자신의 이점을 활용하지 않고 옥타비아누스가 캄파니아로 후퇴하도록 허용했다. 안토니우스는 아마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옥타비아누스와 섹스투스 사이의 권력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러한 패배 후 옥타비아누스는 지원을 요청했다. 권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안토니우스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지원을 제공할 준비를 했다. 한편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아그리파가 기원전 38년 말까지 진압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스러웠던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의 불명예스러운 패배를 고려하여 신중하게 개선식을 거행하지 않았다.
3. 9. 파르티아와 시칠리아 (기원전 36년)
기원전 37년 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300척의 함선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항해했다. 브룬디시움(시민들은 침략을 의심했다)에서 입항이 거부되자, 대신 타렌툼에 정박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만나러 그곳으로 갔다. 협상은 7월 말이나 8월 초까지 질질 끌었다. 안토니우스는 아내 옥타비아의 설득을 받아 섹스투스에 대항하여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해야 했다.[10]그들은 섹스투스의 아우구르 직위와 미래의 집정관직을 박탈하기로 합의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공격을 1년 연기하고, 2만 명의 병력과 1,000명의 정예 부대와 교환으로 안토니우스로부터 120척의 함선을 받기로 했다.[10] 삼두정치는 기원전 38년 말에 불편하게도 만료되었다. 일반적인 공화정 관례에 따르면 고위직들은 임기 종료 시 직무를 사임했다. 삼두정의 임기는 끝났지만, 그들은 사임하지 않았다. 후계자도 임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두정의 법적 지위는 실질적으로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헌법주의를 과시하며, 삼두정치는 기원전 33년 마지막 날 만료될 5년간 다시 법으로 갱신되었다.[10]
4. 삼두정치의 붕괴 (기원전 36-30년)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암살자들과 카이사르 지지자들 사이의 일시적인 합의는 독재정치 폐지로 이어졌다.[3]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키살피나와 트란살피나 갈리아 속주를 차지하며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견제했다.[3]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관계 악화 속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 무티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한 후 원로원에 대항하여 집정관직을 확보했다.[3]
기원전 37년, 아그리파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 대항하기 위해 포르투스 율리우스(portus Julius)를 건설했다.[3] 동방에서는 헤로데 대왕이 유대 지역을 탈환하고, 파르티아의 위협이 왕조 투쟁으로 약화되었다.[3]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를 강화하며 이집트에서 지지 기반을 다졌지만, 이는 이탈리아에서 그의 인기를 떨어뜨렸다.[3]
4. 1. 권력 투쟁과 선전전 (기원전 35-33년)
기원전 35년, 삼두정치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두 사람으로 축소되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대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를 부각시키려 했고, 일리리쿰에서 군대를 훈련시켰다.[3]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이에 느리게 반응하며 동방의 아르메니아에 집중했다.[3]한편,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내전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가져왔다는 그의 선전을 믿고 제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상여금을 지급하고 일리리쿰 전리품에 대한 계략을 사용했다.[3] 또한 옥타비아를 통해 안토니우스에게 빌려준 함선의 절반과 정예병 2,000명을 요구하는 사절단을 보냈는데, 이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상환'을 받아들이거나 이탈리아인들 앞에서 아내를 모욕하는 선택을 강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안토니우스는 아내의 군대를 받아들였지만, 옥타비아에게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겨울을 보내라고 명령했다.[3]
4. 2. 삼두정치의 종말과 악티움 해전 (기원전 32-31년)
삼두정치의 법적 기한은 기원전 33년 12월 31일에 만료되었다.[11] 새해가 시작되자 옥타비아누스는 한 집정관이 자신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자 로마에서 부활할 가능성이 있는 집정관들을 무력으로 몰아냈다. 이 집정관들은 동쪽으로 도망쳐 안토니우스와 합류했고, 안토니우스는 수백 명의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반대 원로원"을 조직했다.[12]안토니우스는 약 10만 명의 병력과 800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서쪽의 그리스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그의 부하들은 클레오파트라를 그들과 함께 있게 할 것인지에 대해 논쟁했다. 그녀를 제거해야 한다는 주된 이유는 그녀의 존재가 동쪽에 대한 전쟁을 묘사하는 옥타비아누스의 선전을 강화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제거하면 로마 장군이 아닌 그들의 여왕을 위해 싸우는 병력 일부의 사기가 저하될 수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아테네에 도착하여 옥타비아와 이혼했다. 로마인 아내를 버리고 이집트 여왕과 함께 있기로 한 선택은 이탈리아 여론을 악화시켰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랑쿠스는 안토니우스 진영에서 옥타비아누스 진영으로 도망쳤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베스타의 처녀들이 법적으로 봉인한 안토니우스의 유서를 열어볼 것을 권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유서를 열었고, 안토니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매장될 계획이며,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아들로 인정하고, 로마의 토지를 클레오파트라와의 자녀들에게 상당 부분 나눠줄 것이라는 내용을 발견했다고 한다. 옥타비아누스가 이 조항들을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로마의 베스타 처녀들은 봉인된 유서를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안토니우스가 부인하기 어렵거나(동부의 지지를 잃는) 인정하기 어려운(서부의 지지를 잃는) 조항이 있었을 수 있다.
그리스에 있는 안토니우스의 병력은 이탈리아에 공황을 일으켰다. 옥타비아누스는 더 이상 자신을 삼두정이라 부르지 않았지만(그의 속주 지휘권은 유지했다), 반도 방어를 조직했다. 그는 공화정 역사상 전례 없는 개인적인 지도력에 대한 시민 선서를 조직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공화정이 안토니우스의 법적 지위를 박탈하도록 했다.
기원전 31년 초,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가 통제하는 서부 그리스 항구에 대한 기습 공격을 시작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코르키라 근처 그리스 본토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안토니우스의 육로 보급로와 탈출로를 차단한 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남은 함대를 이끌고 돌파하기 위한 해전을 벌였다. 그들은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싸웠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계획대로 전열의 틈을 통해 도망쳤지만, 그의 함대 대부분은 항구로 돌아갔다. 전투 후, 그리스에 있는 그의 병력 대부분이 항복했다.
4. 3.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기원전 30년)
기원전 31년과 30년 겨울 동안 로마 총독과 속국 왕들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면서, 안토니우스의 남은 병력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만 남게 되었다.[12] 옥타비아누스는 병사들의 토지 요구를 대규모 토지 매입으로 해결할 수 있었기에, 전리품을 얻기 위해 이집트로 진군하여 지중해 연안으로 육로로 이동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와 협상을 벌였지만, 기원전 30년 7월에 결렬되었다.[12] 그달 말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고 8월 1일에 그 도시를 함락시켜 약탈했다.[12] 그는 카이사리온과 안토니우스의 상속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안틸루스를 죽였지만,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은 개선식을 위해 사로잡았다. 이후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자살했다.[12]5. 유산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 왕을 속여 사로잡은 뒤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하며 디오니소스 축제 행렬에 참여시켰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로마 신들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는 선전을 펼쳤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을 동방 군주로 봉하는 '알렉산드리아의 기증'을 거행했는데,, 이는 로마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의 책임을 공공 도덕의 붕괴로 돌리고, 안토니우스를 클레오파트라의 영향 아래 있는 동방의 부도덕과 연결시켰다.
안토니우스 측은 옥타비아누스를 비겁자라 비난하고, 레피두스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이탈리아 토지 독점을 비난하며 반격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가 전직 집정관들의 아내를 훔치고 딸을 외국 왕에게 매춘했다고 주장했다.
선전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일리리쿰에서 군사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병사들의 경험을 쌓게 했다. 그는 개선식을 통해 얻은 전리품으로 로마의 건물 건설 및 보수 공사에 자금을 지원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로마에 새로운 공공 사업을 건설하는 경쟁을 벌였다. 옥타비아누스의 동맹인 아그리파는 하수도와 수도교 보수 공사에 참여했고, 기원전 33년에는 화려한 게임과 공공 기부를 후원했다.,
5. 1. 원수정의 형성과 로마 제국
옥타비아누스가 삼두정치를 종식시키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의 헌법적 "정착"은 원수정과 로마 제국을 탄생시켰다.[13]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삼두정치의 수립과 절대적인 권력 체제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14] 심지어 제정 시대의 역사가 타키투스와 같은 사람들도 공화정이 이전에도 개인에 의해 지배된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14] 게다가, 삼두정치가 반란군을 반드시 물리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어려웠다.[15] 필리피 전투에서 절정에 달한 삼두정치의 성공적인 군사 작전은 후대에 공화정 역사의 전환점으로 인식되었다. 예를 들어 타키투스는 공화정의 종말을 삼두정치의 승리 시점으로 보았고, 이로 인해 공화정은 무방비 상태, 즉 ''nulla iam publica arma'' (공화정은 무장 해제되었다)가 되었다고 기록했다.[16] 에리히 그루엔은 그의 저서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세대''에서 카이사르 암살 이후 장기간에 걸친 잔혹한 갈등, 특히 삼두정치 세력에 의해 벌어지고 그들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이 공화정 붕괴의 원인이며, 결국 "수습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설명한다.[17]삼두정치의 대규모 폭력과 비전통적인 통치 방식은 당시 불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18] 이러한 비난에 맞서 삼두정치는 공화정의 관습과 합법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18] 물론 삼두정치가 공화정 전통을 준수한 정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적 상황이 안정되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1년에 여러 명의 임시 집정관을 임명하는 대신) 집정관직의 정상적인 운영을 재개했다.[18]
전통적인 관리들은 삼두정치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공적인 업무를 수행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게다가 집정관들은 여전히 어느 정도의 독립적인 정치적 권한을 행사했다.[18] 상원과 집회에 법안을 제출하는 전통적인 방법 또한 버려지지 않았다. 삼두정치는 시민권 확대, 안토니우스의 동방 정책 비준, 삼두정치 연장, 파트리키 확대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여러 법안을 국민 앞에 제출했다.[18] 공화정의 제도적 기계 작동 자체가 자유 국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삼두정치는 전통적인 법적 세부 사항을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18] 삼두정치는 여러 차례 상원과 국민에게 권력을 반환하겠다는 약속이나 제안을 반복했지만, 물론 이러한 약속은 결코 지켜지지 않았다.[18] 특히, 모든 속주 총독을 임명할 수 있는 삼두정치의 권한은 나중에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정착에서 채택된 군사 속주와 시민 속주 간의 분할의 일부로 작용했다.[18]
5. 2. 로마 문화에 미친 영향
삼두정치 시대의 정치적 혼란은 많은 속주민, 노병, 그리고 전 노예들에게 발판이 되었다.[19]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정치적 경쟁은 옥타비아누스의 동맹자인 가이우스 마이케나스가 당대의 많은 저명한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원동력이 되었다.[19]베르길리우스의 『전원시』는 필리피 전투 후 노병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토지를 몰수했던 옥타비아누스 시대에 이탈리아 시골의 목자들과 목동들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프로스크립티오(몰수형) 또한 과장된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며, 희생자들의 고난과 탈출 시도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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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right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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