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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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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기원전 69년에 태어나 기원전 30년에 사망했다. '아버지의 영광'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그녀는 헬레니즘 문화를 계승하며 이집트를 통치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중 언어 구사 능력을 갖추고 이집트어를 배우는 등 다른 파라오와 차별화된 면모를 보였으며,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서 정치적 생존을 모색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관계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악티움 해전 패배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사후, 이집트는 로마에 병합되었고, 클레오파트라는 이후 수많은 예술 작품과 대중문화에서 매혹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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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클레오파트라 7세
그리스어 이름Κλεοπάτρα Ζ' Φιλοπάτωρ
라틴어 이름Cleopatra VII Philopator
다른 이름클레오파트라 테아 필로파토르 (Κλεοπάτρα Θεά Φιλοπάτωρ)
테아 네오테라 (Θεά Νεωτέρα)
필로파트리스 (Φιλόπατρις)
로마자 표기법Keuleopat'ra
이미지
클레오파트라 7세의 머리 조각상, 베를린 알테스 박물관 소장
클레오파트라 7세 두상 (기원전 40년경, 베를린 미술관 소장)
통치 정보
역할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바실레우스
재위 기간기원전 51년–30년 (21년)
선대 군주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
후대 군주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리온
공동 통치자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 (기원전 51년)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테르 (기원전 51년–47년)
프톨레마이오스 14세 (기원전 47년–44년)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리온 (기원전 44년–30년)
호칭 및 이름 정보
이집트어 이름클루페데레트 (Qlwjwꜣpꜣdrtꜣ)
호루스 이름'조언에 뛰어난, 완벽의 위대한 여인' (Wr(.t)-nb(.t)-nfrw-ꜣḫ(t)-sḥ, Wer(et)-neb(et)-neferu-achet-seh)
'위대한 자, 아버지의 신성한 형상' (Wr.t-twt-n-jt=s, Weret-tut-en-it-es)
출생명클레오파트라 (Qlwpdrt)
출생명 별칭'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클레오파트라 여신' (Qlwpdrt nṯrt mr(t) jts, Cleopatra netjeret mer(et) ites)
가계 정보
왕조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아버지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
어머니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이나 (추정) 또는 다른 여성
배우자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테르
프톨레마이오스 14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자녀카이사리온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마우레타니아 왕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프톨레마이오스 16세 필라델포스
생애 및 사망 정보
출생기원전 69년~70년경, 알렉산드리아
사망기원전 30년 8월 10일 (39세), 알렉산드리아
매장지위치 불명 (이집트 추정)
기타
기념물하토르 신전

2. 어원

클레오파트라는 고대 그리스어로 '영광'을 뜻하는 '클레오스(κλέος|클레오스grc)'와 '아버지'를 뜻하는 '파테르(πατήρ|파테르grc)'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으로, '아버지의 영광(Κλεοπάτρα|클레오파트라grc)'을 의미한다.[167]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의 남성형 형태는 클레오파트로스(Κλεόπατρος|클레오파트로스grc)나 파트로클로스(Πᾰ́τροκλος|파트로클로스grc)가 될 수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와 더불어 그리스 신화에서 멜레아그로스의 아내인 클레오파트라 알키오네의 이름이기도 하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와 클레오파트라 1세 시라 (셀레우코스 왕조의 공주) 간의 결혼을 통해,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도 들어서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채택한 칭호인 테아 필로파토라(Θεᾱ́ Φιλοπάτωρα|테아 필로파토라grc)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여신"이라는 의미이다.[7]

3. 생애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헬레니즘 흉상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원전 69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171] 베레니케 4세 에피파네이아의 생모이자[172]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부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이나로 추정된다.[173][174] 클레오파트라 5세는 클레오파트라 7세가 태어난 후 몇 달 뒤부터 기록에서 사라진다. 클레오파트라는 어린 시절 필로스트라토스로부터 그리스의 철학과 웅변술을 배웠으며, 무세이온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는 멤피스에서 프타의 최고 제사장으로부터 왕관을 받으며 대관식을 치른 뒤, 알렉산드리아에 머무르며 집무를 보았다.[168] 그리스어를 사용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파라오들은 헬레니즘 그리스 군주로서 이집트를 통치했으며 현지 언어를 배우지 않으려고 했다.[166]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성인이 되기 전에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이집트어를 배운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프톨레마이오스 통치자였다.[10]

로마는 클레오파트라 즉위 이전부터 이집트에 간섭해왔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 사후 그의 딸 베레니케 3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왕실에서 여성의 단독 통치에 대한 반대가 커지자 술라가 제시한 방책인 프톨레마이오스 11세와의 결혼 및 공동 통치를 받아들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결혼 직후 아내를 암살했으나, 이로 인한 폭동으로 피살당한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친생자들에게 나누어졌고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에게 주어졌다.

기원전 58년, 로마가 키프로스를 합병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형제를 자살로 몰아넣자,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침묵했다. 이 결정은 로마에 영토를 할양한 것과 더불어 백성들 사이에서 그의 신뢰도를 떨어뜨렸다.[17]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집트에서 추방되어 로마로 갔으며, 이때 약 11세였던 클레오파트라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19]

붉은 머리, 다이아뎀과 진주 귀고리를 착용한 클레오파트라의 초상. 헤르쿨라네움, 기원후 1세기.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원로원의 지원을 받아 복위를 시도하였고, 결국 기원전 55년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도움으로 이집트에 돌아와 베레니케 4세를 처형하고 복위했다. 당시 14살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원정군들과 함께 움직였는데, 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때 클레오파트라에게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기원전 52년 5월 31일, 클레오파트라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기원전 51년에 사망한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1740년대) 워싱턴 국립 미술관


파라오 복장을 한 클레오파트라가 이시스 여왕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다. 오노프리스라는 남성이 기원전 51년에 봉헌한 석판, 루브르 박물관 소유.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기원전 51년 3월 22일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의 직무를 시작한다.[26] 그러나 왕권을 잡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일강의 수위가 낮아져 흉년이 들고,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설치한 로마군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한다.[26]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1,750만 드라크마에 달하는 빚을 로마 공화국에 남기고 갔다.[26]

기원전 51년 8월 29일부터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단독 군주로 등장하는데, 이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밀려 공동 통치자가 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27] 클레오파트라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했을 것으로 추측되기는 하나,[27] 이를 확실히 입증할 만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기원전 50년 가을부터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클레오파트라보다 앞에 서명하는 등 클레오파트라는 점점 밀려나기 시작한다. 기원전 49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기준으로 한 기년법이 부여된다.[28]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년~기원전 14년) 통치 시대에 제작된 폼페이우스의 로마 초상화(기원전 70년~60년대 원본 복사본). 이탈리아 베네치아 국립 고고학 박물관 소장


기원전 49년 여름, 폼페이우스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러 도착했을 때, 클레오파트라의 군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맞서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폼페이우스에게 함선과 병력을 지원하였고, 이로써 로마에 진 빚의 일부를 변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동생과의 싸움에서 진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도망쳐야 했다. 기원전 48년 봄, 클레오파트라는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와 함께 시리아 속주로 이동하여 이집트로 향하는 침략군을 모았다.

한편, 그리스에서는 카이사르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섬멸하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피난한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고문들은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를 로마 내전의 각축장으로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기원전 48년 9월 28일, 폼페이우스를 암살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카이사르에게 보냈으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에 분노하며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에게 화해할 것을 요구했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1866), 장-레옹 제롬의 그림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를 만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 왔다고 한다.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는 그녀가 자신의 형제에게 알리지 않고, 매력적인 옷을 입고, 재치로 카이사르를 매료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녀가 침대 자루에 묶여 궁전으로 밀반입되어 카이사르를 만났다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제공한다.[33]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알렉산드리아 의회 앞에 데려와 폼페이가 소유하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유서를 공개했는데, 유서에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공동 상속인으로 지명되어 있었다.[34]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군대를 이끌고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를 공격했고, 궁궐 포위전이 발생한다.

투스쿨룸 초상, 이탈리아 토리노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당시 로마 조각상


기원전 47년, 카이사르의 증원군이 도착하고,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공격하여 승리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익사하고, 아르시노에 4세는 유배된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계속 사적으로 생활했다.[40]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4월경 이집트를 떠났고,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7년 6월 23일 카이사리온을 낳았다.[41]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의 부모에 대해 카이사르를 아버지로 지명하며 반복적으로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여왕의 이집트 초상화, 아마도 클레오파트라, 기원전 51–30년 경, 브루클린 박물관 소장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는 기원전 46년 말 로마를 방문하여 카이사르의 빌라에 머물렀다.[43] 카이사르는 3월의 이데스(3월 15일 기원전 44년)에 암살되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상속자로 인정되기를 헛되이 바라며 4월 중순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유언은 그의 조카 옥타비아누스를 주요 상속자로 지명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몇 달 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독살하여 죽이고, 아들 카이사리온을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44]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 1885년, 로런스 알마타데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로 초대한 뒤, 기원전 41년 11월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한다.[182]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카이사르 사후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후계자를 낳을 자신의 남편감으로 선택했다.[182] 안토니우스는 과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다시 돌려줄 수 있는 권한 역시 가지고 있었다.[182]

기원전 40년 말, 클레오파트라는 쌍둥이를 낳는다. 이때 태어난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모두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친자로 인정한다.[182]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7년 클레오파트라와 재회하고, 클레오파트라는 티레시돈을 제외한 레반트 지역에 있던 과거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영토를 거의 다 복구한다.[182]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왼쪽)와 옥타비아누스(오른쪽)이 양각된 아우레우스. 기원전 41년에 제2차 삼두정치를 기념하기 위해 발행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직접 지배 영토를 내어주면서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확장시킨 점을 이용해 안토니우스를 공격한다.[182]

기원전 36년,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제국 정벌에 유프라테스강까지 동행한다.[182] 기원전 36년 여름, 안토니우스와의 둘째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가 태어난다.[182]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정벌은 실패한다.[182]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4년 아르메니아 왕국을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열었다. 그는 디오니소스로 분장하고 전차를 타고 도시로 들어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왕족 포로들을 소개했다.

기원전 33년 2월에 작성된 파피루스 문서. 이집트의 한 사람에게 세금 면제를 부여하는 내용이며, 관리가 쓴 클레오파트라의 서명이 들어 있다.


개선식 직후 체육관에서 열린 행사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이시스로 분장하고, 자신이 왕들의 여왕이며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왕들의 왕이라고 선포했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의 왕으로,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시리아와 키리키아의 왕으로,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에게는 크레타와 키레네가 주어졌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 의식 중에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다.[50] 안토니우스는 로마에 보고서를 보내 이 영토 주장, 즉 알렉산드리아의 증여의 비준을 요청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확보하여,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알렉산드리아 봉헌에서의 선언을 확증하며,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내용을 폭로했다. 이를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아닌 클레오파트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54][56]

기원전 31년 암브라키아 만에서 옥타비아누스군과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 연합군이 격돌했다. (악티움 해전) 고대 기록에 따르면 9월 2일, 클레오파트라가 갑자기 전선에서 이탈하고 안토니우스도 동료들을 버리고 그녀를 따라갔기 때문에 패배했다고 전해진다.[187]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에 독재관 임기를 10년 연장했고,[61] 기원전 44년 2월에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으나, 같은 해 3월 15일에 암살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4년에 아르메니아 왕국(아르타크시아스 왕조)에 복수하고,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의 아이들에게 동방 세계를 분할하여 줄 것을 약속했다.[110]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가 로마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던 옥타비아와 이혼한 것과 너무나 이집트화된 것을 옥타비아누스가 선전에 이용해,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적이 되어 갔다고 한다.

3. 1. 배경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은 이집트 멤피스에서 프타 신관에 의해 즉위식을 치렀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다문화적이고 주로 그리스 문화가 지배적인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했다.[8] 그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이집트를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군주로서 통치하며, 고대 이집트어인 이집트 원주민 언어를 배우기를 거부했다.[9]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성인이 되기 전에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이집트어를 배운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프톨레마이오스 통치자였다.[10] 플루타르코스는 그녀가 메로에어(혹은 에티오피아어), "트로그로디타이"의 언어, 히브리어(혹은 아람어), 고대 아랍어, 시리아 언어(아마도 시리아어일 것임), 메디아어, 파르티아어도 구사했으며, 라틴어도 할 수 있었다고 암시한다. 비록 그녀의 로마 동시대인들은 그녀의 모국어인 코이네 그리스어로 대화하기를 선호했을 것이지만 말이다.[11] 그리스어, 이집트어, 라틴어 외에도 이러한 언어들은 클레오파트라가 한때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 속했던 북아프리카 역사와 서아시아 역사 지역을 복원하려는 열망을 반영했다.

로마의 이집트 개입은 클레오파트라의 통치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기원전 81년 후반에 프톨레마이오스 9세 라튀로스가 사망하자 그의 딸인 베레니케 3세가 계승했다. 단독 여왕 통치에 대한 반대가 왕궁에서 거세지자, 베레니케 3세는 로마의 독재자 술라가 주선한 합의에 따라 사촌이자 의붓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1세 알렉산드로스 2세와 공동 통치 및 결혼을 수락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기원전 80년 결혼 직후 아내를 죽이고, 암살에 대한 폭동으로 곧이어 살해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1세, 그리고 아마도 그의 삼촌 프톨레마이오스 9세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는 대출 담보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로마에 유증했기 때문에,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11세 암살 후 이집트라는 그들의 속국을 장악할 법적 근거를 갖게 되었다.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사생아들에게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분할하여 키프로스를 키프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에게 넘겨주었다.

아버지는 기원전 80년 ~ 기원전 58년 및 기원전 55년 ~ 기원전 51년의 파라오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아울레테스)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기 왕가의 계보에 누락된 부분이 있어 어머니는 특정할 수 없다.

클레오파트라 5세[97], 클레오파트라 6세, 또는 이름 미상의 여성이라는 설이 있다. 클레오파트라 5세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자매 또는 사촌이며, 베레니케 4세를 낳았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클레오파트라가 태어난 기원전 69년경 이후의 기록은 없다.

클레오파트라 6세는 기원전 58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이집트에서 추방된 후 이집트를 통치한 인물이지만, 5세와 동일 인물이라는 설과 5세의 장녀라는 설이 있다. 스트라보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을 베레니케 4세, 클레오파트라 7세, 아르시노에 4세로 기록하고 있으며,[98] 전자의 경우 이와 일치한다. 후자의 설은 포르푸리오스의 기록에 따른 것으로,[99] 이 경우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추방과 관련하여 계보에서 삭제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인물로서, 역사가 베르너 후스는 기원전 69년경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클레오파트라 5세와 이혼하고 멤피스의 유력한 가문의 여성과 재혼했으며, 이 여성이 클레오파트라 7세의 어머니라고 주장한다.[100]

동생으로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있으며, 모두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를 했다.

로마 공화정은 이집트산 곡물을 필요로 했고,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공격을 받은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로마에 도움을 요청한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당시 이집트는 최대의 밀 생산지였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 판매를 독점하고 있었다. 후대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로마 시의 4개월치를 매년 충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파피루스, 유리, 직물 생산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왕조였다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기원전 80년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같은 해 백성들에게 살해당했고, 11세의 사촌이자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로마의 허락 없이 즉위했다. 12세는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에게 의지했지만, 직접적인 개입을 주저했기에, 기원전 60년제1차 삼두정치가 시작되자, 그 한 축인 카이사르를 매수하여 겨우 정식으로 왕위가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매수에 든 비용을 증세로 충당했기 때문에, 기원전 58년에 반란이 일어나, 폼페이우스에게 의지하여 로마로 망명했다. 이때 딸 하나를 데리고 갔다고 전해지는데, 그 딸이 클레오파트라일 가능성을 주장하는 최근의 연구자들이 있다.[101]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클레오파트라 6세, 그리고 그녀의 사후 베레니케 4세가 섭정 자리에 올랐지만, 기원전 57년, 로마에서 12세의 복위 계획이 세워졌다. 이를 폼페이우스 파가 음모를 꾸몄다는 설도 있지만 실패했고, 결국 기원전 55년, 시리아 속주 담당 프로콘술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12세는 베레니케 4세를 처형하고 복위했다. 하지만 망명 중 생활비와 정계 활동비로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이 전투에 참여한 젊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베레니케 4세의 남편인 알케라우스가 전사했을 때, 왕에게 어울리는 장례를 치러준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 시기에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만났다는 설도 있다.

3. 2. 유년 시절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원전 69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171] 베레니케 4세 에피파네이아의 생모이자[172]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부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이나로 추정된다.[173][174] 클레오파트라 5세는 클레오파트라 7세가 태어난 후 몇 달 뒤부터 기록에서 사라진다. 클레오파트라의 형제자매로는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토르, 프톨레마이오스 14세 필로파토르가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어린 시절 필로스트라토스로부터 그리스의 철학과 웅변술을 배웠다. 무세이온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58년, 로마가 키프로스를 병합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형제를 자살로 몰아넣자,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침묵했다. 이 결정은 로마에 영토를 할양한 것과 더불어 백성들 사이에서 그의 신뢰도를 떨어뜨렸다.[17]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집트에서 추방되어 로마로 갔으며, 이때 약 11세였던 클레오파트라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19]

3. 3.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통치와 추방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는 멤피스에서 프타의 최고 제사장으로부터 왕관을 받으며 대관식을 치른 뒤, 알렉산드리아에 머무르며 집무를 보았다.[168] 그리스어를 사용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파라오들은 헬레니즘 그리스 군주로서 이집트를 통치했으며 현지 언어를 배우지 않으려고 했다.[166]

로마는 클레오파트라 즉위 이전부터 이집트에 간섭해왔다. 기원전 81년 말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죽자 그의 딸 베레니케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왕실에서 여성의 단독 통치에 대한 반대가 커지자 베레니케 3세는 로마의 독재관 술라가 제시한 방책인 사촌이자 의붓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1세와의 결혼 및 공동 통치를 받아들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결혼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80년에 아내를 암살했으나 이로 인한 폭동이 일어나게 되고, 그는 피살당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1세와 그의 삼촌 프톨레마이오스 9세 혹은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로마에게 왕국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암살되자 종속국 이집트를 합병할 법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지 않은 대신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친생자들에게 나누어 줬다. 키프로스에서는 키프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집권했고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에게 주어졌다.

기원전 65년에 로마 공화국감찰관이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공화국의 원로원 앞에 나아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를 합병시켜야 한다고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나 거절되고, 기원전 63년에는 트리부누스였던 세르빌리우스 룰루스가 유사한 청원을 올렸으나 마찬가지로 거절된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러한 합병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로마의 유력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바치는데, 이중에는 미트리다테스 6세 메가스를 정벌중인 폼페이우스가 있었으며, 기원전 59년에는 집정관에 오른 카이사르에게도 뇌물을 바친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낭비벽으로 인해 결국 파산에 이르고, 결국 로마의 은행가 가이우스 라비리우스 포스투무스에게 빚을 지게 된다.

기원전 58년에 로마는 키프로스를 합병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형제였던 키프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는 해적질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파포스로 추방되는 대신 자살을 선택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형제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으로 어떠한 성명도 내지 않는데, 비록 로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결정이었지만 그의 경제 정책에 이미 분노해있던 백성들의 심기를 더더욱 건드리는 꼴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후 이집트에서 강제로 추방당해 처음에는 로도스섬으로, 그다음엔 아테네로, 종국에는 이탈리아 프라에네스테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빌라에서 살게 된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표면상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함께 로마 변두리의 빌라에서 같이 생활한다.[176] 대신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 클레오파트라의 언니 베레니케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복귀하지 않고 자신이 계속 통치하도록 해달라는 취지의 사절을 로마에 보내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의 고위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사절단의 주요 인물들을 암살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원로원에게 자신이 이집트로 돌아갈 때 무장한 호위병력들을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나 거부되자, 기원전 57년 말에 이집트 대신 에페소스아르테미스 신전으로 가 거기 머무른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재정을 관리하던 로마인들은 그를 복권시키는데 힘을 보태기로 결정한다. 폼페이우스는 시리아 총독이던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로 하여금 이집트를 공격하여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권시키자고 설득하고, 1만 달란트를 원조한다. 결국 기원전 55년 가비니우스는 원로원의 승인을 받지 않은 채로 군대를 이끌고 하스모니안 왕국을 경유해 이집트를 침공하는데, 당시 하스모니안 왕국을 다스리던 힐카누스 2세와 이두매인 안티파테르는 로마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보급했다. 당시 젊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가비니우스의 지휘 하에 기병대 장교로 복무중이었는데, 펠루시움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려던 것을 막고 베레니케 4세의 남편인 아르켈라오스의 시신을 명예롭게 매장될 수 있게 해준 것으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 14살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로마의 원정군들과 함께 움직였는데 후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사랑에 빠진 것이 이 때였노라고 말한다.

가비니우스는 이후 로마에 불려가 재판을 받는데 권력 남용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뇌물 수수에 대해서는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당하지만, 그로부터 7년 후 기원전 48년에 카이사르에 의해 복직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자신의 왕위를 찬탈한 베레니케 4세와 그녀의 지원자들을 처형하고 가산을 몰수한다. 또 게르만족, 갈리아인들로 구성된 가바니우스 휘하의 로마군 주둔지를 설치하고, 오랜 기간동안 재정을 관리해온 라비리우스를 수석 재무 당당관으로 임명한다. 여기서 라비리우스는 보호 및 감시의 대상이 되나 이집트의 자원을 로마로 보내는 것에 의해 생명이 위협받자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라비리우스를 로마로 돌려보낸다. 비록 이런 문제들이 있긴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자신의 권력을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이양할 뜻을 밝히고, 에드푸 신전, 덴데라 신전 등의 공공건설사업 등을 펼치며 경제를 안정화시킨다. 기원전 52년 5월 31일,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라비리우스에게 진 빚은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넘어갔다.

3. 4. 권력을 잡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기원전 51년 3월 22일 클레오파트라는 테베 근처 헤르몬티스에 몬수 황소신상을 설치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으로 여왕의 직무를 시작한다.[26] 그러나 왕권을 잡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일강의 수위가 낮아져 흉년이 들고,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설치한 로마군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한다.[26]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1,750만 드라크마에 달하는 빚을 로마 공화국에 남기고 갔다.[26]

기원전 50년, 시리아 속주의 프로콘술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가비니우스가 남기고 간 로마군들을 로마-파르티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장남과 차남을 이집트로 보낸다.[26] 그러나 비불루스의 두 아들은 그들이 동원하려 했던 로마군들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한다.[26] 클레오파트라는 두 아들을 살해한 범인들을 비불루스가 직접 처분할 수 있도록 호송해 보내지만, 비불루스는 재판권은 로마 원로원에게만 있다며 클레오파트라를 문책하고 이들을 돌려보낸다.[26] 비불루스는 이후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폼페이우스의 편을 들었지만, 카이사르가 그리스에 함대를 상륙시키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뒤쫓아 이집트에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꼴이 되었다.[26]

기원전 51년 8월 29일부터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단독 군주로 등장하는데, 이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밀려 공동 통치자가 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27] 클레오파트라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했을 것으로 추측되기는 하나,[27] 이를 확실히 입증할 만한 기록은 없다. 남매간의 결혼은 당대 그리스인들에게는 혐오스러운 것이었지만,[27] 프톨레마이오스 2세 이후로 프톨레마이오스 통치자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27]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밀려나긴 했지만, 그의 가정교사이자 섭정이며 재산 관리인이었던 내시 포테이노스를 비롯해 많은 조력자들이 있었다.[28] 클레오파트라에 반대하는 사람들로는 또 다른 가정교사 테오도토스와 장군 아킬라스가 있었다.[28]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잠깐 동안 동맹을 형성했지만, 기원전 50년 가을부터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클레오파트라보다 앞에 서명하는 등 클레오파트라는 점점 밀려나기 시작한다. 기원전 49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기준으로 한 기년법이 부여된다.[28]

기원전 49년 여름, 폼페이우스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아버지의 명을 받고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러 도착했을 때, 클레오파트라의 군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맞서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와 기원전 49년 1월 루비콘강을 건넌 후 추격을 피해 그리스로 도망친 상황이었다.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마지못해 공동 성명으로 이를 재가하며 60척의 배와 가비니우스가 두고 간 로마군들을 포함해 500명의 병력을 보냈는데, 이로써 로마에 진 빚의 일부를 변제할 수 있었다. 남동생과의 싸움에서 진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도망쳐 테베 지역으로 철수해야 했다. 기원전 48년 봄이 되기 전,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와 함께 이집트로 향할 침략군을 모으기 위해 시리아 속주로 향한다. 그녀는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왔지만, 로마 주둔군까지 동원한 남동생의 군대에 의해 진격하지 못하고 나일강 삼각주 동부에 있는 펠루시움 외곽에 주둔한다.

한편, 기원전 48년 8월 9일 그리스에서는 카이사르가 파르살루스 전투 끝에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섬멸하고 폼페이우스는 레바논티레로 후퇴한다. 폼페이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우호적 관계에 기대 이집트로 피난해 병력을 정비하자는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고문들은 이집트가 로마 내전의 각축장으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결국 테오도투스의 계략에 의해 폼페이우스는 자신을 초청하는 편지를 받고 펠루시움 근처에 배를 타고 도착한 기원전 48년 9월 28일, 매복해 있던 암살자에 의해 칼에 찔려 죽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자신이 내전을 종식시켰다고 생각하여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방부 처리한 뒤 10월 초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 왕궁에 거주하던 카이사르에게 보낸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에 슬퍼하며 분노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에게 서로 화해하고 군대를 해산할 것을 요구한다.

3. 5. 폼페이우스의 암살



기원전 49년 여름,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군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여전히 싸우고 있었는데, 폼페이우스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군사 원조를 요청하며 도착했다.[29] 같은 해 1월, 갈리아 전쟁에서 돌아와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그리스로 도피하게 만들었다.[29] 아마도 마지막 공동 칙령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요청에 동의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60척의 함선과 500명의 병사(가비니아니 포함)를 보냈고, 이는 로마에 대한 일부 채무를 청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29] 형제와의 싸움에서 패한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테베 지역으로 후퇴해야 했다.[29] 기원전 48년 봄, 클레오파트라는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와 함께 로마 시리아로 이동하여 이집트로 향하는 침략군을 모았다.[29] 그녀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지만,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하는 것은 그녀를 공격하기 위해 동원된 일부 가비니아니를 포함한 그녀의 형제의 군대에 의해 막혔고, 그래서 그녀는 동부 나일 삼각주의 펠루시온 밖에 진을 쳤다.[29]

그리스에서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결전을 벌였고, 이로 인해 폼페이우스 군의 대부분이 궤멸되었으며 폼페이우스는 티로스로 도피하게 되었다.[29]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긴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폼페이우스는 궁극적으로 이집트를 그의 피난처로 삼아 군대를 재정비하기로 결정했다.[30]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고문들은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를 장기간의 로마 내전의 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30] 테오도토스가 고안한 계략에 따라, 폼페이우스는 서신으로 초대받은 후 펠루시온 근처에 배를 타고 도착했지만, 기원전 48년 9월 28일 매복 공격을 받아 칼에 찔려 죽었다.[31]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동시에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폼페이우스의 잘린 머리를 미라로 만들어 카이사르에게 보냈고, 카이사르는 10월 초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여 왕궁에 거처를 마련했다.[31]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살해에 대해 슬픔과 분노를 표하며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서로 화해할 것을 요구했다.[32]

3. 6. 카이사르와의 관계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군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는데, 이는 카이사르가 도착하기 전에 군대를 해산하라는 요구를 무시한 것이었다.[33] 클레오파트라는 처음에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냈지만, 카이사르가 왕족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직접 그를 만나러 알렉산드리아에 왔다고 한다.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는 그녀가 자신의 형제에게 알리지 않고, 매력적인 옷을 입고, 재치로 카이사르를 매료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녀가 침대 자루에 묶여 궁전으로 밀반입되어 카이사르를 만났다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제공한다.[33]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자신의 누이가 궁전에서 카이사르와 직접 교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려 했지만, 카이사르에게 체포되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설득력 있는 연설 솜씨를 이용하여 격분한 군중을 진정시켰다. 그런 다음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알렉산드리아 의회 앞에 데려왔고, 카이사르는 폼페이가 소유하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유서를 공개했다. 유서에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공동 상속인으로 지명되어 있었다.[34] 카이사르는 그 후 다른 두 형제인 아르시노에 4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키프로스를 함께 통치하도록 하려고 시도했는데, 이는 이집트 왕위에 대한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동시에 기원전 58년 로마에 키프로스를 빼앗긴 것에 대해 여전히 분노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신하들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34]

이 합의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보다 클레오파트라에게 유리하고, 가비니아니를 포함한 후자의 2만 명의 군대가 지원군이 없는 카이사르의 4,000명의 군대를 이길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판단 하에, 포테이노스는 아킬라스가 알렉산드리아로 군대를 이끌고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를 공격하도록 결정했다.[35] 카이사르가 포테이노스를 처형한 후, 아르시노에 4세는 아킬라스와 합세하여 여왕으로 선포되었지만, 얼마 후 그녀의 가정교사인 가니메데스가 아킬라스를 죽이고 그의 자리에 군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다.[36] 가니메데스는 그 후 카이사르가 이전에 포로로 잡혔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협상가로 요청하도록 속였고, 그 결과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아르시노에 4세의 군대에 합류했다. 그 결과 발생한 궁궐 포위전에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함께 갇혀 있었고, 이는 기원전 47년 다음 해까지 지속되었다.[37]

기원전 47년 1월과 3월 사이에 페르가몬의 미트리다테스와 이두마이아의 안티파테르가 이끄는 병력을 포함하여 카이사르의 증원군이 도착했다.[38]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아르시노에 4세는 군대를 나일 강으로 철수시켰고, 카이사르는 그들을 공격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배를 타고 도망치려 했지만 배가 뒤집히면서 익사했다.[39] 가니메데스는 전투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키오스의 테오도토스는 수년 후 아시아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 의해 발견되어 처형되었다. 아르시노에 4세는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에 유배되기 전에 카이사르의 로마 개선식에서 강제로 행진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러한 사건들에서 눈에 띄게 결석했고 궁전에 머물렀는데, 아마도 기원전 48년 9월부터 카이사르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카이사르의 집정관직은 기원전 48년 말에 만료되었다. 그러나 그의 장교인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기원전 47년 10월까지 1년 동안 독재관으로 임명되도록 도왔고, 이는 카이사르에게 이집트의 왕위 계승 분쟁을 해결할 법적 권한을 부여했다. 클레오파트라의 누이인 베레니케 4세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경계했던 카이사르는 12세의 클레오파트라의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22세의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공동 통치자로 명목상의 형제 결혼으로 임명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계속 사적으로 생활했다.[40] 키프로스가 언제 그녀의 통치하에 돌아왔는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기원전 42년에 그곳에 총독을 두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나일 강 유람과 이집트 유적 관광을 위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했을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이것은 후대의 부유한 로마인들의 성향을 반영하는 낭만적인 이야기일 뿐 실제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탈라메고스를 포함하여 이 항해에 대한 상당한 세부 사항을 제공했다. 탈라메고스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건설한 유람선으로, 그의 통치 시대에는 길이가 91m이고 높이가 24m에 달했으며, 식당, 국빈실, 성소, 산책로가 2층에 설치되어 떠다니는 빌라와 같았다. 카이사르는 지리에 대한 매료 때문에 나일 강 유람에 관심이 있었을 수 있다. 그는 에라토스테네스피테아스의 저서를 잘 읽었고, 아마도 강의 발원지를 발견하고 싶었지만 에티오피아에 도착하기 전에 되돌아왔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4월경에 아나톨리아에서 로마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폰투스의 파르나케스 2세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아들)와 대결하기 위해 이집트를 떠났다. 저명한 로마 여성인 칼푸르니아와 결혼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가 그의 아들을 낳았을 때 함께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을 피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불안정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아마도 그녀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해방 노예 루피오의 지휘하에 이집트에 3개 군단을 남겼고, 나중에 4개 군단으로 늘렸다.

카이사리온은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아이로 추정되며, 기원전 47년 6월 23일에 태어났고, 사카라 세라페움의 스텔레에 보존된 것처럼 원래 "파라오 카이사르"라고 불렸다.[41] 아직 자녀가 없는 칼푸르니아와의 결혼 생활 때문에 카이사르는 카이사리온에 대해 공개적으로 침묵했지만 (하지만 사적으로는 그의 부모임을 인정했을 수도 있다).[42]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의 부모에 대해 카이사르를 아버지로 지명하며 반복적으로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명목상의 공동 통치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는 기원전 46년 말에 로마를 방문했는데, 아마도 카이사리온 없이 방문했을 것이며, 카이사르 정원 내 카이사르의 빌라에 숙소를 제공받았다.[43]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마찬가지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 모두에게 "로마 시민의 친구이자 동맹"(socius et amicus populi Romanila)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하여, 사실상 로마에 충성하는 속국 통치자로 만들었다. 티베르 건너편 카이사르의 빌라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방문객에는 그녀를 거만하다고 생각한 원로원 의원 키케로가 포함되었다. 클레오파트라 궁정의 일원 중 한 명인 알렉산드리아의 소시게네스는 기원전 45년 1월 1일에 시행된 새로운 율리우스력 계산에 카이사르를 도왔다. 기원전 46년 9월 25일 카이사르 포럼에 세워진 비너스 게네트릭스 신전에는 클레오파트라의 금으로 만든 동상이 있었고 (적어도 3세기까지 그곳에 있었다), 카이사르의 아이의 어머니를 로마인의 어머니인 여신 비너스와 직접 연결시켰다. 이 동상은 또한 이집트 여신 이시스를 로마 종교와 은밀하게 연결시켰다.

클레오파트라의 로마 방문은 카이사르 암살 한 달 전 루페르칼리아 축제의 사건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려고 했지만, 카이사르는 로마 대중의 헬레니즘식 왕정 수용 여부를 가늠하기 위한 연출이었을 가능성이 큰 거절을 했다. 축제에 참석했던 키케로는 조롱하며 왕관이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는데, 이는 그가 혐오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여왕을 명백히 언급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3월의 이데스(3월 15일 기원전 44년)에 암살되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상속자로 인정되기를 헛되이 바라며 4월 중순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유언은 그의 조카 옥타비아누스를 주요 상속자로 지명했고,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로 떠나기로 결정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몇 달 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독살하여 죽이고, 아들 카이사리온을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44]

3. 7. 리베라토레스의 내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로 초대한 뒤, 기원전 41년 11월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한다.[182] 알렉산드리아 민중은 안토니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권시키는 과정에서 보여준 영웅적인 행동과 카이사르와 다르게 군대를 데리고 오지 않은 점에 대해 호감을 가졌다.[182] 이집트에 도착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배에서 볼 수 있었던 호화로운 왕실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고,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와 같은 부하들에게는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에서 파르티아인들을 몰아내도록 지시하였다.[182]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카이사르 사후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후계자를 낳을 자신의 남편감으로 선택했다.[182] 안토니우스는 삼두 중 하나로서 현재 로마의 손에 있는 과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다시 돌려줄 수 있는 권한 역시 가지고 있었다.[182] 기원전 38년 11월 19일에 킬리키아키프로스가 클레오파트라의 영토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와 함께 지내던 기원전 41-40년 겨울에 양도된 것으로 보인다.[182]

기원전 40년 봄, 파르티아 제국에서 망명한 로마 장교 퀸투스 라비에누스가 시리아를 공격해 총독 루키우스 데키디우스 삭사가 전사하고 군대가 사로잡히는 사건이 발생한다.[182] 안토니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집트를 떠나는데, 클레오파트라는 회복한 영토에 대한 보답으로 안토니우스에게 200척의 선박을 지원한다.[182] 이 둘은 기원전 37년이 되어서야 재회하지만, 서신으로 연락은 계속 이어갔으며,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군에 첩자를 심어두어 그의 소식을 파악했다는 증거도 있다.[182]

기원전 40년 말, 클레오파트라는 쌍둥이를 낳는다. 이때 태어난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모두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친자로 인정한다.[182] 태양을 의미하는 헬리오스와 달을 의미하는 셀레네는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를 정복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위업을 재현할 것이라는 클레오파트라의 기대뿐만 아니라 새 기운이 흐르는 사회의 상징이었다.[182]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정벌은 안토니우스의 본처 풀비아가 마르쿠스의 동생 루키우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페루시아 전쟁을 일으킴으로서 중단된다.[182] 풀비아가 안토니우스를 클레오파트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견해도 있으나, 타르수스에서 그 둘이 첫 만남을 가지기 전부터 갈등의 전조는 있었다.[182] 풀비아와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결국 페루시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포위되었고,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한다. 풀비아는 안토니우스에게로 가다가 그리스의 시키온에서 죽었다.[182]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기원전 40년 9월 이탈리아 브룬디시움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평화협정으로 이어졌다.[182] 이 협정에서 로마 공화정의 동쪽 이오니아해에 대한 안토니우스의 지배력이 공고히 승인되었지만, 동시에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갈리아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지배를 인정하고 그의 여동생과 결혼함으로써 클레오파트라에게 경쟁자가 생긴다.[182]

기원전 40년 12월, 클레오파트라는 예상치 못한 손님인 헤로데를 맞이한다.[182] 당시 유대 지방은 파르티아의 힘을 얻어 등극한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와 안토니우스에 의해 지원을 받은 헤로데와 그 형 파사엘이 서로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었다.[182] 안티고노스 2세는 헤로데의 형 파사엘을 감금했는데, 파사엘은 헤로데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오파트라에게 도망치는 동안 처형되었다.[182] 클레오파트라는 그에게 군사력을 제공하려 했지만, 헤로데는 이를 거절하고 로마로 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로부터 유다의 왕으로 임명받는다.[182] 이로 인해 헤로데는 헤로데 왕국의 주인이 되었는데, 그 영토가 과거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토와 겹치는 탓에 클레오파트라와 헤로데 사이에 갈등의 씨앗이 심어졌다.[182]

안토니우스는 정실 옥타비아와 기원전 39년에 대 안토니아, 기원전 36년에 소 안토니아를 낳은 뒤, 사령부를 아테네로 옮기는데 이는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계기가 된다.[182] 클레오파트라의 정적이었던 헤로데는 로마의 강력한 군사 지원 끝에 유대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182]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삼두정이 기원전 37년 1월 1일에 만료되었기 때문에 옥타비아는 타렌툼에서 만남을 주선했고, 회의 끝에 삼두정은 기원전 33년으로 연장되었다.[182] 옥타비아누스가 부여한 두 개의 군단과 옥타비아가 빌려준 천 명의 병사들과 함께 안토니우스는 안티오키아로 가서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준비한다.[182]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안티오키아로 불러 헤로데 왕국과 파르티아 정벌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같은 시급한 문제들을 논의한다.[182] 클레오파트라는 세 살 된 쌍둥이를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는데, 헬리오스와 셀레네라는 이름은 이때 안토니우스가 지어준 것으로 보인다.[182] 이는 단순히 동쪽을 안정시키는 것을 넘어, 클레오파트라의 왕국과 함께 여러 속국들을 아래에 둔 새로운 제국의 설립이라는 야심을 공유한 것에 대한 증거로 본다.[182]

이 회담에서 클레오파트라는 티레시돈을 제외한 레반트 지역에 있던 과거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영토를 거의 다 복구한다.[182]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 의해 건립된 도시인 아코 역시 할양받는다.[182] 셀레우코스와 같은 조상을 가진다는 점에 근거하여 오론테스강 상류의 코엘레 시리아 역시 양도받는다.[182] 심지어 팔레스타인의 예리코를 둘러싼 지역도 일부 할양받았지만, 이 영토는 임대 형식으로 헤로데에게 다시 돌려준다.[182] 클레오파트라는 아일라나를 포함한 홍해아카바만 주변 나바테아 왕국의 일부를 할양받는데, 나바테아 왕 말리쿠스 1세는 이에 앙심을 품는다.[182] 서쪽에서는 크레타의 이타노스와 올루스와 더불어 리비아 해안을 따라 키레네를 넘겨받았다.[182] 비록 여전히 로마 관리들이 통치하기는 했지만, 이 지역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 번영을 가져다준다.[182]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직접 지배 영토를 내어주면서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확장시킨 점을 이용해 안토니우스를 공격한다.[182]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아내 옥타비아를 등한시한다는 이야기에 바람을 불어넣었으며, 옥타비아와 자신의 아내 리비아 둘 다에게 신성불가침의 특권을 부여한다.[182] 50여 년 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 코넬리아 아프리카나가 로마인 여성 최초로 자신의 동상을 세운 것처럼, 옥타비아와 리비아의 동상이 세워졌고, 이들의 동상은 카이사르의 포럼에 세워진 클레오파트라의 동상 곁에 세워졌다.[182]

기원전 36년,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제국 정벌에 유프라테스강까지 동행한다.[182] 끝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거기서 돌아오는데, 임신이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182] 기원전 36년 여름, 안토니우스와의 둘째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가 태어난다.[182]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정벌은 동맹군이었던 대아르메니아 왕국의 아르타바스데스 2세의 배신으로 완전히 실패한다.[182] 과거 로마의 수치스러운 패전인 카레 전투에서 잃은 병력보다 더 많은 병력을 잃은 안토니우스는 12월 경 현재의 베이루트 인근 류코코메에 도착해 폭음을 벌인다.[182] 그러던 중 클레오파트라는 물질적 지원을 위해 안토니우스를 방문하고, 안토니우스는 위험을 감내하면서 로마로 돌아가는 대신 자신의 아들을 보기 위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향한다.[182]

3. 8. 안토니우스와의 관계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5년에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아르메니아를 목표로 했다. 이때 옥타비아는 안토니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2,000명의 군대와 함께 아테네로 갔지만,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손실을 이용해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계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49] 안토니우스는 이 군대를 받았지만, 자신과 클레오파트라가 안티오키아로 함께 여행하는 동안 옥타비아에게 아테네 동쪽으로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군사 원정을 포기하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49] 옥타비아가 로마로 돌아오자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누이를 안토니우스에게 피해를 입은 피해자로 묘사했지만, 옥타비아는 안토니우스의 집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레피두스를 포함한 서쪽의 라이벌들을 제거하면서 자신감을 키웠다.[49]

델리우스는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의 사절로 아르타바사데스 2세에게 파견되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아르메니아 왕의 딸과의 결혼 동맹을 협상했다. 이것이 거절되자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군하여 그들의 군대를 물리치고 왕과 아르메니아 왕족을 사로잡았다. 안토니우스는 그 후 로마의 개선식을 모방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열었다. 그는 디오니소스로 분장하고 전차를 타고 도시로 들어가 은색 단상 위에 놓인 금색 왕좌에 앉아 있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왕족 포로들을 소개했다. 이 소식은 로마에서 오랫동안 존중되어 온 로마의 의식과 의례가 이집트 여왕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비판을 받았다.

개선식 직후 체육관에서 열린 행사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이시스로 분장하고, 자신이 왕들의 여왕이며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왕들의 왕이라고 선포했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의 왕으로 선포되었고, 두 살 된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시리아와 키리키아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에게는 크레타와 키레네가 주어졌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 의식 중에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다.[50] 안토니우스는 로마에 보고서를 보내 이 영토 주장, 즉 알렉산드리아의 증여의 비준을 요청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선전 목적으로 이를 공개하고 싶어했지만,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두 명의 집정관은 이를 공개적으로 검열했다.

기원전 34년 후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수년간 지속될 격렬한 선전전을 벌였다.[51] 안토니우스는 라이벌이 레피두스삼두정치에서 불법적으로 축출하고 이탈리아에서 군대를 모으는 것을 금지했다고 주장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 왕을 불법적으로 구금하고, 누이 옥타비아와 결혼한 상태에서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으며, 카이사르의 상속자로 옥타비아누스가 아닌 카이사리온을 부당하게 주장했다고 비난했다. 이 선전전과 관련된 일련의 비난과 소문은 아우구스투스 시대 문학부터 현대의 다양한 매체에 이르기까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형성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마법과 주술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정신을 지배했고, 문명을 파괴하는 호머의 헬레네만큼 위험했다고 한다. 대 플리니우스는 그의 ''자연사''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저녁 식사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수천만 세스테르티우스의 가치가 있는 진주를 식초에 녹였다고 주장한다. 안토니우스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장서를 보충하기 위해 페르가몬 도서관에서 책을 훔쳤다는 주장은 나중에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가 허위임을 인정했다.

기원전 33년 2월에 작성된 파피루스 문서에는 클레오파트라의 서명이 들어 있는데, 아마도 그녀를 대신해 서명할 권한이 있는 관리가 쓴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또는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52]에게 부여된 이집트의 특정 세금 면제에 관한 것이다. 그는 전직 로마 집정관이자 안토니우스의 심복으로 악티움 해전에서 그의 육군을 지휘했다. 파피루스 하단의 다른 필체로 된 추신에는 "그렇게 하라" ()가 있다.[53] 이것은 여왕의 친필일 가능성이 높다. 위조를 피하기 위해 문서에 추인하는 것이 프톨레마이오스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3. 9. 알렉산드리아 봉헌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3년 1월 1일, 자신의 집정관 임기가 시작되는 날에 원로원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노예가 되어 로마의 자유와 영토를 훼손하려 한다고 비난했다.[51]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공동 통치 기간이 기원전 33년 12월 31일에 끝나기 전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로 선포하여 옥타비아누스의 입지를 약화시키려 했다.[51]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가이우스 소시우스와 그나에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집정관이 되었다. 소시우스는 당시 공직이 없던 옥타비아누스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고, 그를 억압하는 법안을 제안했다.[52] 다음 원로원 회의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무장 경호원과 함께 원로원 의사당에 들어가 집정관들을 고발했다.[52] 이러한 행동에 두려움을 느낀 집정관들과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200명 이상의 원로원 의원들은 다음 날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에게 갔다.[52][53]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2년에 에페소스로 함께 갔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800척의 함선 중 200척을 제공했다.[52] 아헤노바르부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선전이 대중에게 알려질까 봐 안토니우스에게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클레오파트라를 제외시키려 설득했다.[55] 그러나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전쟁 자금을 지원하고 있으며, 유능한 군주라고 반박했다.[55]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막는 것이 이집트를 방어하기 더 쉽다고 판단하여 안토니우스가 이집트로 돌아가라는 요청을 거절했다.[55] 클레오파트라가 그리스 전투에 참여하겠다고 고집하면서, 아헤노바르부스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랑쿠스와 같은 로마인들이 안토니우스 진영에서 이탈했다.[52][55]

기원전 32년 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아테네로 갔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옥타비아에게 공식적인 이혼 선언을 보내도록 설득했다.[52][53][55] 플랑쿠스는 베스타 여사제들에게 맡겨진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확보해야 한다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조언했다.[52][53][55] 신성하고 법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베스타 신전에서 강제로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확보했고, 이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한 선전전에서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53][55] 옥타비아누스는 유언장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견하여 선전에 활용했다.[53][56]

  •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
  • 알렉산드리아 봉헌에서의 선언 확증
  •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 묻히기를 원함
  • 로마 공화정의 새로운 수도로 알렉산드리아를 삼을 것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는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자신의 영묘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했다.[51] 또한 기원전 31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됨으로써 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옥타비아누스의 법적 지위도 해결되었다.[51] 안토니우스의 유언을 공개하여 전쟁 명분을 확보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아닌 클레오파트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54][56] 전쟁의 법적 명분은 클레오파트라의 영토 획득에 있었다. 안토니우스의 삼두 정치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는 이제 민간인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57]

3. 10. 악티움 해전

기원전 31년 암브라키아 만에서 옥타비아누스군과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 연합군이 격돌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9월 2일, 클레오파트라가 갑자기 전선에서 이탈하고 안토니우스도 동료들을 버리고 그녀를 따라갔기 때문에 패배했다고 전해지며, 마치 모든 책임이 클레오파트라에게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187] 이 해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학자들도 동서양 어느 쪽을 전문으로 하는가에 따라 의견이 나뉜다. 하지만 동양의 압도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능한 지휘관이었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패퇴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187]

호라티우스의 『에포데』 등 동시대인의 기록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 자신이 쓴 『업적록』에는 악티움에 관한 기록이 없어 그 존재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이며, 다만 클레오파트라가 적대시되었다는 것만 알 수 있다.[187] 당시 동서양의 경제 격차를 고려해 볼 때, 내전이 계속된 이탈리아를 재건하기 위해 안토니우스를 단독으로 지원할 수 있었던 이집트를 빼앗을 필요가 있었고, 이 때문에 클레오파트라가 적대시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반대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해상 봉쇄를 계속하며 적이 자멸하기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전략을 취했지만, 이에 대한 위기감에서 단결한 서방이 예상 외로 강력하여 봉쇄가 뚫린 것이 아닐까 하는 설도 있다.[187]

3. 11. 죽음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에 독재관 임기를 10년 연장했고,[61] 기원전 44년 2월에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으나, 같은 해 3월 15일에 암살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람과는 달리, 카이사리온은 그의 계승자가 될 수 없었고, 카이사르는 자신의 대조카이자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옥타비아누스, 후의 아우구스투스)를 계승자로 정해 두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귀국했지만, 곧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사망했다. 그녀에 의한 독살설도 있지만, 그의 뒤를 이어 카이사리온이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계승했다.

기원전 42년 필립피 전투에서 제2차 삼두정치 측이 아닌, 로마 동방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의 세력을 지원했다. 전투에서 브루투스 등이 패배하자, 삼두정치 측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출두를 명령했다. 이에 대해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아프로디테처럼 화려하게 치장하고, 향을 피워 분위기를 조성하여 타르수스에 출두했다. 거꾸로 안토니우스를 자신의 연회에 초대하는 등, 순식간에 안토니우스를 매혹했다고 전해진다.[109] 에페소스에 있던 아르시노에 4세는 기원전 41년에 안토니우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다. 기원전 39년에는 쌍둥이 남매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가, 기원전 36년에는 또 다른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가 태어났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돌아오지 않는 안토니우스는 로마에서의 평판을 떨어뜨렸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6년에 클레오파트라의 지원을 얻어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했으나 참패했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4년에 집정관에 선출되었으나 취임 첫날 사임하고, 아르메니아 왕국(아르타크시아스 왕조)에 복수하기 위해 니코폴리스에 나타나, 국왕 아르타크시아스 2세를 속여 포로로 잡았다. 아르메니아를 점령한 안토니우스는 많은 재물과 포로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개선하여,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의 아이들에게 동방 세계를 분할하여 줄 것을 약속했다.[110]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가 로마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던 옥타비아와 이혼한 것과 너무나 이집트화된 것을 옥타비아누스가 선전에 이용해,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적이 되어 갔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계승자로 선전했고, 안토니우스도 그의 후견인으로서의 입장을 강조했다. 그에 대해 옥타비아누스는, 그들과의 대립이 결정적이 되자, 계승자는 자신임을 강조하고, 집정관으로서 클레오파트라라는 외부의 적을 배제하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고 하며, 동시대의 기록에서는, 부유한 이집트 여왕의 위협에 맞서는 옥타비아누스라는 동서 대결의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4. 사후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녀 중 살아남은 사람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 세 명이었다. 이들은 클레오파트라 7세 사후 로마에 있는 안토니우스의 전처 소 옥타비아에게 맡겨졌다.[190]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와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의 개선식에 참석했다.[190] 이후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190]

셀레네 2세는 소 옥타비아의 주선으로 누미디아의 군주 유바 2세와 정략결혼을 했다.[190]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투스는 이 둘을 마우레타니아의 새로운 군주로 임명했다. 마우레타니아는 과거 카르타고의 도시 이올이었던 카이사레아 마우레타니아를 수도로 삼았다.[190] 셀레네 2세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의 학자, 예술가, 정치 고문들을 카이사레아로 불러들여 헬레니즘 그리스 문화를 발전시켰다.[191] 또한, 아들의 이름을 프톨레마이오스로 지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계승 의지를 보여주었다.[191]

셀레네 2세는 기원전 5년경, 유바 2세는 기원후 23/24년에 사망했고, 아들 프톨레마이오스가 왕위를 이었다.[191]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16년 뒤인 기원후 40년 칼리굴라에게 처형당했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프톨레마이오스가 독단적으로 왕실 주화를 발행한 것이 로마 제국의 주권을 위협하는 행동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191] 군인 황제 시대팔미라 제국의 여왕 제노비아가 클레오파트라의 후손임을 자처했지만, 마우레타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처형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출신의 마지막 군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191]

5. 통치

클레오파트라는 다른 마케도니아계 왕들과 마찬가지로 전제군주정을 펼쳤다.[1] 입법자인 동시에 대사제의 역할도 수행하여, 이집트뿐 아니라 그리스의 여러 신들을 향한 제의를 직접 진행하였다.[2] 이집트와 그리스의 신들 뿐 아니라 다른 신들을 위한 종교시설도 여럿 지었다.[3] 특히 이집트의 유대인들을 위한 시나고그를 지었으며, 카이사르의 사당 역시 알렉산드리아에 건설을 주도했다.[4][5]

기원전 51년부터 30년까지 사용된 40 드라흠 은화. 알렉산드리아에서 주조되었는데, 다이아뎀을 쓰고 있는 클레오파트라를 양각하였다. 뒷면에는 라는 문구와, 번개를 잡고 서 있는 독수리가 양각되어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국가의 대소사도 직접 관장했다.[6] 나라에 기근이 들었을 때에는 직접 지시하여 곡창을 열어 백성들을 구휼했다.[7] 이상적인 계획 경제를 추진하기도 했다.[8] 관세를 붙이고 일부 사치품은 전매하여 물가를 통제하려 했다. 또한 환율을 고정시키고, 농번기에는 소작농들이 거주지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9][10][11] 때때로 경제가 어려우면 주화의 질이 낮아지기도 했는데, 이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금화를 발행했던 것과는 다르게 클레오파트라 때에는 은화와 동화만 발행하였다.[12]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은 이집트의 프타 신관에 의해 멤피스에서 즉위식을 치렀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다문화적이고 주로 그리스 문화가 지배적인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했다.[14][15][8] 그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이집트를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군주로서 통치하며, 고대 이집트어인 이집트 원주민 언어를 배우기를 거부했다.[16][9]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성인이 되기 전에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이집트어를 배운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프톨레마이오스 통치자였다.[17][18][10] 플루타르코스는 그녀가 메로에어(혹은 에티오피아어), "트로그로디타이"의 언어, 히브리어(혹은 아람어), 고대 아랍어, 시리아 언어(아마도 시리아어일 것임), 메디아어, 파르티아어도 구사했으며, 라틴어도 할 수 있었다고 암시한다. 비록 그녀의 로마 동시대인들은 그녀의 모국어인 코이네 그리스어로 대화하기를 선호했을 것이지만 말이다.[19][11][20] 그리스어, 이집트어, 라틴어 외에도 이러한 언어들은 클레오파트라가 한때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 속했던 북아프리카 역사와 서아시아 역사 지역을 복원하려는 열망을 반영했다.[21]

로마의 이집트 개입은 클레오파트라의 통치 이전부터 시작되었다.[22][23][24] 기원전 81년 후반에 프톨레마이오스 9세 라튀로스가 사망하자 그의 딸인 베레니케 3세가 계승했다.[25][26] 단독 여왕 통치에 대한 반대가 왕궁에서 거세지자, 베레니케 3세는 로마의 독재자 술라가 주선한 합의에 따라 사촌이자 의붓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1세 알렉산드로스 2세와 공동 통치 및 결혼을 수락했다.[27][28]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기원전 80년 결혼 직후 아내를 죽이고, 암살에 대한 폭동으로 곧이어 살해당했다.[29][30][31] 프톨레마이오스 11세, 그리고 아마도 그의 삼촌 프톨레마이오스 9세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는 대출 담보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로마에 유증했기 때문에,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11세 암살 후 이집트라는 그들의 속국을 장악할 법적 근거를 갖게 되었다.[32][33][34]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사생아들에게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분할하여 키프로스를 키프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에게 넘겨주었다.[35][36]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한 후, 살아남은 세 자녀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그들의 아버지의 전처이자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 마이너와 함께 로마로 보내졌다.[42][43]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와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의 개선식에 참석했다.[44][45] 이후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의 행방은 알 수 없다.[46][47] 옥타비아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와 유바 2세의 약혼을 주선했다. 유바 2세는 유바 1세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유바 1세가 폼페이우스를 지지했기 때문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기원전 46년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왕국이 로마 속주로 편입되었다.[48][49][50]

기원전 25년 결혼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유바 2세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를 마우레타니아의 새로운 통치자로 임명했고, 그들은 옛 카르타고 도시 이올을 새로운 수도로 삼아 카이사레아 마우레타니애(현재 알제리 체르셸)로 개명했다.[51][52]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어머니의 궁정에서 많은 중요한 학자, 예술가, 고문들을 카이사레아로 데려와 헬레니즘 그리스 문화가 퍼져나가도록 했다.[53] 그녀는 또한 아들에게 그들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유산을 기리며 마우레타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54][55]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기원전 5년경 사망했고, 유바 2세는 서기 23/24년 사망하여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가 계승했다.[56][57]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결국 서기 40년 로마 황제 칼리굴라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아마도 불법적으로 자신의 왕실 주화를 주조하고 로마 황제에게만 허용된 왕권의 상징을 사용했다는 핑계였을 것이다.[58][59] 마우레타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 알려져 있지만, 3세기 위기 당시 짧게 존재했던 팔미라 제국의 여왕 제노비아는 클레오파트라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60][61] 클레오파트라를 위한 숭배는 서기 373년까지도 존재했는데, 이시스의 책을 쓴 이집트 서기관 페테세누페는 자신이 "클레오파트라의 조각상에 금을 입혔다"고 설명했다.[62]

기원전 51년, 클레오파트라가 18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함께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리스계였지만, 기원전 217년의 라피아 전투 이후로 이집트인들의 존재감이 커지고 그리스인들의 이집트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편, 역대 왕들은 통치에 무관심했고, 이집트인들의 반란도 일어나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인들과의 화해를 위해 스스로 이집트 문화를 받아들이려 했다고도 생각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악기와 같았으며, 여러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이전의 왕들과 달리 이집트어도 습득했다고 한다.[102] 클레오파트라는 오래전부터 민중들에게 친숙했던 이시스와 동일시되어 묘사되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서도 화해 정책을 채택했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아내 아르시노에 2세가 이시스로 묘사되었던 선례가 있으며, 그것을 재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6. 이미지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고대에는 클레오파트라를 묘사한 로마 조각상이 제작되었다. 카시아 가도 근처에서 발견되어 현재 피오-클레멘티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리석 조각상은 동전 초상과 유사한 관과 '멜론'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7]

알렉상드르 카바넬은 1887년 작품 ''사형수에게 독을 실험하는 클레오파트라''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모습을 묘사했다.[16]

6. 1. 역사학계

로마 시대의 역사학 문헌 가운데 클레오파트라를 언급하는 것은 약 50 건에 달하지만, 대부분 악티움 해전, 클레오파트라의 자살, 그리고 클레오파트라가 로마를 짓밟은 불순한 여인이라는 아우구스투스의 프로파간다를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191] 클레오파트라의 삶에 대해 가장 가치있다고 평가받는 문헌은 기원후 1세기 경 플루타르코스가 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안토니우스〉편이다.[192] 플루타르코스는 클레오파트라 사후 1세기 뒤의 인물이지만, 클레오파트라의 어의였던 올림포스, 암피사의 필로타스, 퀸투스 델리우스 등이 남긴 다양한 1차 자료들을 참고하여 글을 썼다.[193] 아우구스투스의 프로파간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 클레오파트라를 직접 만났던 사람들이 남긴 자료들을 취합하여 다양한 관점을 제공한다는 평가를 받는다.[194]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역시 헤로데 1세에 대한 기록을 남기며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서술하였는데, 다른 자료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내용들을 남겼다.[195]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은 대부분 헤로데의 회고와 클레오파트라 자녀들의 가정교사였던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의 기록에 의존하여 편향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96] 디오 카시우스와 사관들이 3세기 경 편찬한 《로마사》는 후기 헬레니즘 세계의 복잡함을 정확히 풀어내지는 못했지만, 클레오파트라 통치기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이전의 왕조와 분리하지 않고 유연히 서술하는데 성공했다.[197]

어느 카이사르 군 참모의 회고록인 《알렉산드리아 전기》에서는 클레오파트라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198] 클레오파트라와 사적 친분이 있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담백한 어조로 묘사하였다.[199]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프로페르티우스, 오비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를 위시한 당대 로마 제국이 갖고 있던 관점을 특별한 분별 없이 기록하였고, 이것이 이후 로마인들의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표준적 인식이 된다.[200] 베르길리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멜로드라마나 낭만적 서사시의 여자주인공처럼 묘사하였다.[201] 호라티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자살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는데, 이 관점은 중세 후기의 시인 제프리 초서에게도 영향을 주었다.[202]

스트라본,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아피아노스는 플루타르코스나 요세푸스처럼 클레오파트라 생애 전반에 대한 기록을 남기진 않았지만 이와는 독립적으로 세부적인 기록을 일부 남겼다.[203] 이외에도 프톨레마이오스의 화폐, 파피루스 문서, 부조 등에서 클레오파트라 및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관점을 알 수 있으나 로마의 기록에 비하면 그 양이 미미하다.[204]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의 남편인 유바 2세의 지원 아래 작성된 《리뷔카》에서도 클레오파트라를 옹호하는 관점을 볼 수 있다.[205]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신화는 대중매체에 널리 퍼져 있지만, 그녀의 해군 지휘와 행정 행위와 같은 중요한 업적은 상당히 간과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의학에 관한 출판물 중 그녀에게 귀속되는 것들은 1세기 후반에 활동한 같은 이름의 의사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인그리드 D. 로랜드는 3세기 또는 4세기 로마 여성 의사인 메트로도라가 언급한 "클레오파트라라 불리는 베레니케"가 중세 학자들에 의해 클레오파트라로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의학 및 화장품 관련 저술들은 갈레노스가 보존한 것과 같이 단편만 남아 있으며, 여기에는 탈모와 비듬을 포함한 두피 질환 치료법과 약학적 목적을 위한 무게와 측정 단위 목록이 포함되어 있다. 아미다의 아에티우스는 향이 나는 비누 제조법을 클레오파트라에게 돌렸고, 아이기나의 파울루스는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 염색과 웨이브 방법을 보존했다.

6. 2. 문화계

르네상스 시대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대중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196] 이 시기 클레오파트라를 주제로 한 문학, 공연, 미술 작품은 이전 고전 고대와 비교할 때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대중의 인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4세기 영국 시인 제프리 초서는 클레오파트라를 중세 기독교 세계의 맥락으로 설명하며, 그의 기사 안토니우스에게 사랑에 빠진 장난기 있는 존재로 묘사했다. 이는 조반니 보카치오의 영향으로,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유혹하는 여인의 면모가 강조되었다.

공연예술에서는 1594년 새뮤얼 다니엘이 연극 《클레오파트라》를 출판했고,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608년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초연했다. 셰익스피어는 클레오파트라의 정열적인 이미지를 강조했는데, 이는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의 대조를 위한 장치였다.[196] 1724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오페라 《줄리오 체사레》에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열애를 다루었다.

블레즈 파스칼은 《팡세》에서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196]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빅토리아 시대에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로런스 알마타데마, 알렉산드르 푸시킨, 조지 버나드 쇼 등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여러 예술가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참고했다.

영화화도 여러 차례 되었으며, 특히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한 1963년 영화 《클레오파트라》는 큰 인기를 끌었다.

1963년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클레오파트라 7세)와 리처드 버튼(안토니우스)

6. 3. 예술계

클레오파트라를 모델로 한 예술 작품은 고대 이집트 양식뿐만 아니라 헬레니즘 양식과 로마 양식으로도 제작되었다. 입상, 흉상, 부조, 동전, 카메오 등이 남아있다.[1] 현재 알테스 박물관에 소장 중인 카메오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헬레니즘 양식으로 표현했다.[2] 벽화 중에도 클레오파트라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있다.

로마의 비너스 게네트릭스 신전에는 클레오파트라의 금도금 동상이 전시되어 있었다.[5] 이 상은 카이사르가 세운 것으로 서기 3세기까지 남아있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실각한 후에도 카이사르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6]

현존하는 조각품 중에는 바티칸 미술관의 피오클레멘티노 전시관에 전시 중인 실물 크기의 로마 양식 입상이 있다. 이 입상은 카시아 가도에 있던 네로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8] 플루타르코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의 입상은 파괴했지만 클레오파트라의 것은 파괴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녀의 친구 아르키비우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2000달란트를 바치며 보존을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9]

1950년대부터는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1874년에 발굴되어 카피톨리니 미술관에 전시 중인 에스퀼리노 비너스상이 클레오파트라를 모델로 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찬성 측은 작품의 헤어스타일과 얼굴 표현 방식, 머리에 쓴 다이아뎀과 우라에우스를 근거로 제시했다.[10] 반대 측은 베를린 구 박물관 소장 두상보다 더 갸름하고, 벌거벗은 여신의 모델이 되었을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11] 그러나 이집트에서 이시스 여신의 모델로 묘사된 조소가 발굴되었고,[12] 일부 주화에서는 비너스-아프로디테 여신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는 점에서 반대 측 주장은 반박되었다.[13] 역사적으로도 클레오파트라가 타르수스에서 안토니우스를 마중할 때 아프로디테처럼 꾸며입었다는 기록이 있다.[14] 이 조각상은 기원전 1세기 그리스에서 파시텔레스파 예술가가 제작한 것을 서기 1세기 중반에 로마에서 복제한 것이다.[15]

약 50편의 고대 로마 역사서술 관련 저술들이 클레오파트라를 언급하지만, 대개 악티움 해전, 그녀의 자살, 그리고 그녀의 개인적 결점에 대한 아우구스투스의 선전만을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17] 1세기 서기 플루타르크가 저술한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클레오파트라의 삶을 가장 자세하게 다룬 기록이다.[18] 플루타르크는 클레오파트라 사후 1세기 후에 살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궁에 접근할 수 있었던 암피사의 필로타스와 같은 일차 사료들, 클레오파트라의 주치의인 올림포스, 그리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측근이었던 퀸투스 델리우스 등을 참고했다.[19]

1세기 서기 유대계 로마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 유대-로마를 통해 헤롯 대왕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클레오파트라의 삶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20] 하지만 이 저술은 헤롯의 회고록과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의 가정교사였고, 이후 유대에서 헤롯의 궁정에서 고문 겸 기록관으로 일했던 니콜라우스 오브 다마스쿠스의 편향된 기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21] 3세기 초 역사가인 카시우스 디오가 출판한 ''로마 역사''는 후기 헬레니즘 세계의 복잡성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클레오파트라 통치 시대에 대한 연속적인 역사를 제공한다.[22]

클레오파트라에 대해서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복무했던 익명의 참모의 회고록인 알렉산드리아 전투la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23] 그녀를 개인적으로 알았던 키케로의 저작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비판적인 묘사를 제공한다.[24]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작가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프로페르티우스, 오비디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퍼뜨렸다.[25] 하지만 베르길리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낭만적이고 서사적인 멜로드라마적 인물로 설정했다.[26] 호라티우스 또한 클레오파트라의 자살을 긍정적인 선택으로 보았는데,[27] 이러한 견해는 후기 중세의 제프리 초서에 의해 받아들여졌다.[28]

플루타르크, 요세푸스, 디오만큼 자세한 기록은 제공하지 않지만, 스트라보, 벨레이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플리니우스, 앱피아누스는 다른 역사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은 그녀의 삶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제공했다.[29] 당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주화에 새겨진 비문과 일부 이집트 파피루스 문서는 클레오파트라의 관점을 보여주지만, 로마 문학 작품에 비해 매우 제한적이다.[30] 클레오파트라의 사위인 유바 2세가 의뢰한 단편적인 ''리비카''는 클레오파트라의 관점을 뒷받침하는 역사 자료의 가능성을 보여준다.[31]

클레오파트라의 성별은 고대 이집트와 그레코-로마 세계에 대한 역사서술에서 그녀를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묘사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32] 예를 들어, 역사가 로널드 시임은 그녀가 카이사르에게 거의 중요하지 않았으며, 옥타비아누스의 선전이 그녀의 중요성을 과장했다고 주장했다.[33]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다산적인 유혹자였지만, 그녀는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라는 두 로마인과만 성관계를 가졌고, 그들은 그녀의 왕조의 생존을 보장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34] 플루타르크는 클레오파트라가 외모보다 강한 성격과 매력적인 재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묘사했다.[35]



현대에 클레오파트라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었으며,[37] 그 명성은 르네상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극 공연뿐만 아니라 그림과 영화에 의해 형성되었다.[38] 이러한 자료들은 고전 시대의 그녀에 대한 기존 역사 자료의 범위와 규모를 크게 능가하며, 후자보다 일반 대중의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인식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39] 14세기 영국의 시인 제프리 초서는 ''훌륭한 여성들의 전설''에서 중세의 기독교 세계를 위해 클레오파트라를 맥락화했다.[40] 그의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빛나는 기사인 안토니우스의 묘사는 궁정 연애에 종사하는 것으로, 현대에는 장난스러운 풍자 또는 여성 혐오적 풍자로 해석되어 왔다.[41]

초서는 클레오파트라가 단 두 명의 남성과 관계를 맺은 것을 유혹자의 삶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강조했으며, 14세기 이탈리아 시인 조반니 보카치오의 라틴어 작품에서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에 대한 반응으로 그의 작품을 썼다.[42]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Bernardino Cacciante|베르나르디노 카치안테it는 1504년 그의 ''Libretto apologetico delle donne''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명성을 옹호하고 보카치오 작품에서 인식되는 도덕주의와 여성 혐오를 비판한 최초의 이탈리아인이었다.[43] 아랍어로 쓰인 이슬람 역사 자료의 작품들은 클레오파트라의 통치를 다루었는데, 예를 들어 10세기의 알마수디의 ''황금 초원''이 있다.[44] 하지만 그의 작품은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의 자살 직후 사망했다고 잘못 주장했다.[45]

클레오파트라는 미니어처 형태로 장식 필사본에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부시코 마스터가 1409년에 제작한 고딕 양식 묘에 누워 있는 그녀와 안토니우스의 --가 있다.[46] 시각 예술에서 자살하는 독립적인 누드상으로서의 클레오파트라의 조각 묘사는 16세기 조각가 바르톨로메오 반디넬리와 알레산드로 비토리아로부터 시작되었다.[47] 클레오파트라를 묘사한 초기 판화에는 르네상스 예술가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보카치오 작품의 삽화가 있는 15세기 목판화도 포함된다.[48]

공연 예술에서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과 1606년 독일에서 발표된 클레오파트라의 편지라고 주장되는 편지는 새뮤얼 다니엘에게 1594년 희곡 ''클레오파트라''를 수정하여 1607년에 재출판하도록 영감을 주었다.[49] 그 뒤를 이어 플루타르크를 바탕으로 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가 1608년에 처음 공연되었는데, 잉글랜드의 처녀 여왕과는 대조적으로 다소 선정적인 클레오파트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50] 클레오파트라는 또한 오페라에도 등장했는데, 예를 들어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연애를 묘사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1724년 작품 ''이집트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있다.[51] 도메니코 치마로사는 1789년에 비슷한 주제를 다룬 ''클레오파트라''를 작곡했다.[52]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신화는 대중매체에 널리 퍼져 있지만, 그녀의 해군 지휘와 행정 행위와 같은 중요한 업적은 상당히 간과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의학에 관한 출판물 중 그녀에게 귀속되는 것들은 1세기 후반에 활동한 같은 이름의 의사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53] 인그리드 D. 로랜드는 3세기 또는 4세기 로마 여성 의사인 메트로도라가 언급한 "클레오파트라라 불리는 베레니케"가 중세 학자들에 의해 클레오파트라로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한다.[54] 이러한 의학 및 화장품 관련 저술들은 갈레노스가 보존한 것과 같이 단편만 남아 있으며, 여기에는 탈모와 비듬을 포함한 두피 질환 치료법과 약학적 목적을 위한 무게와 측정 단위 목록이 포함되어 있다.[55] 아미다의 아에티우스는 향이 나는 비누 제조법을 클레오파트라에게 돌렸고, 아이기나의 파울루스는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 염색과 웨이브 방법을 보존했다.[56]

클레오파트라를 다룬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영화

제목연도제작사주연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1913년이탈리아Gianna Terribili-Gonzales|조반나 테리빌리-곤살레스it
시저의 시대1917년폭스 영화사세다 바라
클레오파트라1934년파라마운트 픽처스클로드트 콜베르
시저와 클레오파트라1945년영국비비안 리
나일의 요녀 클레오파트라1953년론다 플레밍
Due notti con Cleopatra1954년소피아 로렌
클레오파트라1959년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 프로덕션린다 크리스탈
요희 클레오파트라1962년이탈리아파스칼 푸티
클레오파트라1963년20세기 폭스엘리자베스 테일러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1972년힐데가르드 니일
Deux Heures moins le quart avant Jésus-Christ1982년Mimi Coutelier
요염비 클레오파트라1985년이탈리아마르첼라 페트렐리
미션 클레오파트라2002년프랑스모니카 벨루치
Cleopatra (miniseries)|레전드 오브 이집트영어1999년미국의 TV 영화레오노라 바렐라
아프리칸 퀸즈: 클레오파트라2023년넷플릭스 오리지널 TV 프로그램아델 제임스


  • 만화
  • Astérix et Cléopâtre|아스테릭스와 클레오파트라프랑스어
  • 클레오파트라
  • 클레오파트라
  • 20세기의 클레오파트라
  • 사막의 여왕
  • 클레오파트라다조
  • 1000년 여왕
  •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 클레오파트라 :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 클레오파트라
  • 클레오파트라 여왕 : 고대 이집트 마지막 여왕
  • 클레오파트라 : 고대 이집트 왕조 마지막 여왕
  • 클레오파트라
  • 클레오파트라
  • 클레오파트라 :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 클레오파트라인 나날
  • 클레오파트라:고대 이집트 마지막 여왕
  • 클레오파트라 : 강하게 살았던 고대 이집트의 여왕!
  • 파트라와 철십자
  • 그러니까 나, 클레오파트라니까요!
  • 클레오파트라

  • 기타
  • 푸쉬킨 Египетские ночи|이집트의 밤ru (1837년)
  • 테오필 고티에 Une nuit de Cléopâtre|클레오파트라의 밤프랑스어 (1838년)
  • 미야오 토미코 『클레오파트라』(1996년)
  • 쿠스노키 세이이치로 『클레오파트라와 명탐정! : 타임슬립 탐정단 고대 이집트로』(2017년)
  • 벨루티: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변용』(마달린 오케스트라)
  • 버드 파웰: 『클레오파트라의 꿈』
  • 松竹歌극단 1981년 新竹取物語 1000년 여왕#연극|新竹取物語 1000년 여왕일본어
  • 宝塚歌剧단 1986년 화조(はなぐみ) 『진홍빛 바다에 기도를』
  • 宝塚歌剧단 2006년 월조(つきぐみ) 『여명의 로마』
  • 宝塚歌剧단 2021년 화조(はなぐみ) 『아우구스투스 -존엄있는 자-』
  • 화구미시바이(花組芝居) 1997년 『악녀 클레오파트라』
  • TremendousCircus(트레멘더스서커스) 2021년 『Femiking』
  •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스
  • 시드 마이어의 문명 VI
  • 클레오파트라 편 - 모모야(桃屋)의 "하나락교(花らっきょう)" CM

7. 혈통

클레오파트라는 고대 그리스어로 '아버지의 영광'을 의미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인 마케도니아의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기도 하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와 클레오파트라 1세 시라의 결혼을 통해,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들어오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채택한 칭호인 테아 필로파토라(Θεᾱ́ Φιλοπάτωραgrc)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여신"이라는 의미이다.[167]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마케도니아 그리스 왕조에 속한다.[83]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유럽 쪽 기원은 그리스 북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이기에, 클레오파트라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두 측근인,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창시자인 장군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 서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제국 창시자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의 후손이다.[84]

클레오파트라의 부계는 추적할 수 있으나 모계에 대해서는 불명이다.[85] 그녀는 클레오파트라 6세 트뤼파이나(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이나라고도 함)의 딸로 추정된다.[86] 클레오파트라 5세는 이전에 딸 베레니케 4세를 낳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누이이자 아내이다.[87]

클레오파트라 1세 시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비(非)그리스 혈통을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구성원이다. 클레오파트라 1세의 어머니 라오디케 3세는 페르시아인인 미트리다테스 왕조의 폰토스 왕 미트리다테스 2세와 그리스-페르시아 혈통의 라오디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클레오파트라 1세 시라의 아버지 안티오코스 3세 대왕은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의 소그디아나 이란인 아내인 여왕 아파마의 후손이다.[88]

일반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토착 이집트인과는 혼인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89] 마이클 그랜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인 내연녀는 단 한 명만이 알려져 있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 출신 부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더 나아가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이집트계 혈통이 없고 "자신을 그리스인으로 보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90] 스테이시 시프는 클레오파트라가 페르시아 혈통이 일부 포함된 마케도니아 그리스인이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인과 내연 관계를 갖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고 주장한다.[91] 두웨인 롤러는 클레오파트라가 이론상으로 반은 마케도니아 그리스계이고 반은 북이집트 멤피스프타의 사제 가문에 속한 이집트 여성의 혈통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한다.(일반적으로 이 가설은 학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92] 그녀의 조상이 누구이든,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계 프톨레마이오스의 유산을 가장 중요히 여겼다.[93]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로마의 선전에서는 그녀가 친생자라는 주장이 나온 적이 없다.[94] 스트라본은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한 베레니케 4세 이후에 태어난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자녀들이 친생자라고 주장한 유일한 고대 역사가였다. 클레오파트라 5세(또는 6세)는 클레오파트라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인 기원전 69년 말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왕궁에서 추방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세 자녀는 모두 아내가 없는 동안 태어났다.

프톨레마이오스 사이의 빈번했던 근친 결혼은 클레오파트라의 직계 조상들에게서도 나타난다.[95] 아래에 제시된 가계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아내인 클레오파트라 5세가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더 1세와 베레니케 3세의 딸로 나와 있다. 이를 따르면 그녀는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사촌이 되지만 클레오파트라 5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 라튀로스의 딸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여자형제이자 아내였을 것이다.

고대 1차 자료의 설명이 혼란을 주었기에 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아내를 클레오파트라 5세나 클레오파트라 6세 중 한 명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후자는 실제로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이었을 수 있으며, 일부에서는 그녀가 기원전 58년(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로마로 망명해 있던 동안임)에 베레니케 4세의 공동 통치자로서 재등장하지 않고 기원전 69년에 사망했다고 표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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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웹사이트 悪女クレオパトラ ==PRESS RELEASE== https://hanagumi.ne.[...] 2023-06-01
[158] 웹사이트 花組芝居「花博&悪女クレオパトラ」 https://hanagumi.ne.[...]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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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문서 율리우스력 기준으로는 8월 12일이다.
[163] 문서 클레오파트라는 외교관, 해군 사령관, 언어학자, 의학 작가이기도 했다.
[164] 문서 Southern(2009, p.43)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클레오파트라가 마지막 대표였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4세기 말에 설립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 출신이 아니었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수행원인 마케도니아 그리스인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에서 기인했다. 클레오파트라가 마지막 파라오였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4세기 끝무렵에 세워졌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 혈통은 아니었으나 마케도니아 그리스인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측근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후예들이었다." 마케도니아 그리스인 (Macedonian Greek)으로써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대한 추가 자료를 보려면 다음을 참고.
[165] 문서 Grant(1972)는 알렉산드로스 3대의 치세 이후 시작된 헬레니즘시대가 클레오파트라의 죽은 기원전 30년에 종말을 맞았다고 썼다. 마이클 그랜트는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가 고전시대로부터 꾸준히 쇠퇴해왔다는 관점이 고대 로마인들로부터 현대 역사학자들에게까지 이어져왔음을 강조한다. 마이클 그랜트는 헬레니즘 시대의 이집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그녀의 조상들이 그 기간 동안 했던 모든 것을 돌이켜보면,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동시대인들과 함께 클레오파트라는 그들 자신의 또 다른, 특이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공화국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지금 헬레니즘 시대가, 그리스 시대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질문 말이다. 이것은 클레오파트라의 마음에서 결코 멀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스 시대가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리스 시대가 영속되도록 하기 위해 그녀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작정이었다는 것은 매우 확실하다."
[166] 문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인물들이 통치령의 언어인 신이집트어 배우기를 거부한 탓에 고대 그리스어(코이네 그리스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었고 로제타석에도 적히게 되었다.
[167] 문서 Tyldesley(2017)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여신 클레오파트라"라 해석한다.
[168] 문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알렉산드리아 건설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에 크게 드러난 헬레니즘 그리스적 특징에 대한 설명,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여러 민족 집단에 관한 정보는 Burstein(2004)에서 볼 수 있다.
[169] 문서 추가 정보를 보려면, Grant(1972) 참고.
[170] 문서 고대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가 언급한 클레오파트라가 구사 가능한 언어 목록을 보려고 한다면, Jones(2006)을 참고할 수 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왕들이 점차 고대 마케도니아어를 버리게 되었다고도 전했다.
[171] 문서 Grant(1972, p.3)는 클레오파트라가 기원전 70년 말이나 69년 초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172] 문서 일각에서는 클레오파트라 6세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이거나 아내로, 클레오파트라 5세와 동일인이라고 생각한다. Jones(2006, p.28)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여섯 명의 자식을 가졌다고 서술하나, Roller(2010, p.16)는 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다고 언급한다.
[173] 문서 Schiff(2011, p.28)와 Kleiner(2005, p.22)도 참고하라. 이와 반대되는 가설에 대해서는 Burstein(2004, p.11)과 Roller(2010, pp.15, 18, 166)도 보라.
[174] 문서 Grant(1972, pp.3–4, 17), Fletcher(2008, pp.69, 74, 76), Jones(2006, p.xiii), Preston(2009, p.22), Schiff(2011, p.28), Burstein(2004, p.11)은 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이나를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아내라고 적어놓은 반면, Dodson & Hilton(2004, pp.268–269, 273)과 Roller(2010, p.18)에서는 그녀를 클레오파트라 6세 트뤼파이나로 부른다. 이러한 혼동은 초기 사료의 서술 방식에서 오는 것으로, 두 인물에 대한 기록을 융합하여 기록했다고 보기도 하는 반면 한 명의 인물을 두 인물처럼 기록했다고 보기도 한다. Whitehorne(1994, p.182)에서 설명한대로, 클레오파트라 6세는 기원전 58년에 자매로 의심받는 베레니케 4세와 공동 통치를 하는 것으로 처음 나타난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이었을 수도 있다. (이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로 추방당하여 지내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아내 클레오파트라 5세가 기록에서 사라진 시기인 기원전 69년~68년 겨울 전에 죽었을 수도 있다. Roller(2010, pp.18–19)에서는 클레오파트라 6세라 명명된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아내가 원인 불명의 사건으로 추방되고 10여년 동안 부재하다가 딸 베레니케 4세와의 공동 통치를 통해 돌아온 것으로 추정한다. Fletcher(2008, p.76)에서는 알렉산드리아인들이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폐위하고 "그의 장녀 베레니케 4세와 공동 통치자로 10여년 간 쫓겨나 있었던 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이나"를 옹립했다는 설명이 있다. 이 책에서는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그녀가 아울레테스의 또다른 딸이었을 거라 추정하고 '클레오파트라 6세'란 이름을 붙여왔으나, 그녀는 단순히 오빠이자 전 남편이었던 아울레테스를 대체하기 위한 사람들 중 다섯 번째였을 뿐이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원문:"his eldest daughter, Berenike IV, and as co-ruler recalled Cleopatra V Tryphaena from 10 years' exile from the court. Although later historians assumed she must have been another of Auletes' daughters and numbered her 'Cleopatra VI', it seems she was simply the fifth one returning to replace her brother and former husband Auletes.")
[175] 문서 더 자세한 정보를 얻고싶다면 Grant(1972, pp.12–13)를 보라. 그랜트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로부터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이라는 칭호를 얻기 위해 6천 달란트를 뇌물로 주었다고 추산했는데, 1972년 기준으로 1,700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으로 당시 이집트의 1년 조세에 근접한다.
[176] 서적 (추정)
[177] 서적 (추정)
[178] 서적 (추정)
[179] 서적 (추정)
[180] 서적 (추정)
[181] 서적 (추정)
[182] 서적 (추정)
[183] 서적 (추정)
[184] 서적 (추정)
[185] 서적 (추정)
[186] 서적 Natural History https://www.perseus.[...] 2020-06-20
[187] 서적 Kleopatra Diederichs
[188] 서적 (추정)
[189] 서적 (추정)
[190] 서적 (추정)
[191] 서적 (추정)
[192] 서적 (추정)
[193] 서적 (추정)
[194] 서적 (추정)
[195] 서적 (추정)
[196] 서적 Pensées
[197] 서적 (추정)
[198] 서적 (추정)
[199] 서적 (추정)
[200] 서적 (추정)
[201] 서적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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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서적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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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서적 (추정)
[209] 서적 (추정)
[210] 서적 (추정)
[211] harvtxt 클레오파트라의 생모에 대한 논의
[212] harvtxt 클레오파트라의 가문 유지 역할 및 이집트 관료 문화
[213] harvtxt 클레오파트라의 사생아설 반박
[214] harvtxt 클레오파트라 가계도 및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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