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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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피 전투는 기원전 42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로마 공화정을 지배하기 위한 세력 다툼의 일환으로 벌어진 전투이다. 카이사르 암살 주모자인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이끄는 해방자 군대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로 구성된 제2차 삼두정치 연합군 간의 대결로,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1차 전투에서 브루투스 군은 옥타비아누스 군을 격파했으나, 카시우스는 패배로 오인하여 자결했다. 2차 전투에서 브루투스 군은 패배했고 브루투스 또한 자결했다. 삼두정치 연합군의 승리로 카이사르 암살파는 제거되었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권력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필리피 전투는 로마 공화정 몰락과 로마 제정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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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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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 명칭 | 필리피 전투 |
관련 분쟁 | 로마 내전, 해방자 내전 |
![]() | |
날짜 | 기원전 42년 10월 3일 및 10월 23일 |
장소 | 필리피, 마케도니아 (현재의 그리스) 인근 |
결과 | 삼두정치파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대상 1 | 삼두정치파 |
지원 세력 1 |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 (전투 지원을 위해 배를 보냈으나 시기적으로 늦음) 파르티아 제국 (기병 부대) |
교전 대상 2 | 해방자파 |
지휘관 및 지도자 | |
삼두정치파 지휘관 |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루키우스 데키디우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
해방자파 지휘관 | 마르쿠스 브루투스(자살) 가이우스 카시우스(자살) 알리에누스 (미상) 세라피온 (티레로 퇴각)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
병력 규모 | |
삼두정치파 병력 | 53,000–108,000 보병: 19개 군단, 40,000–95,000명 기병: 13,000명 |
해방자파 병력 | 60,000–105,000 보병: 17개 군단, 40,000–85,000명 기병: 20,000명 |
피해 규모 | |
삼두정치파 피해 | 10월 3일: 16,000명 사망 |
해방자파 피해 | 10월 3일: 8,000명 사망 10월 23일: 전체 군대 항복 |
총 사망자 | 40,000명 |
2. 배경
카이사르 암살 이후,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비롯한 해방자들은 이탈리아를 떠나 동부 속주를 장악했다. 이들은 그리스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지역과 동맹 왕국들을 통제하며 세력을 확장했다.[3] 한편,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여 서부 로마 군대를 장악하고 원로원의 반대를 꺾었다.
삼두정의 첫 번째 임무는 카이사르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로마 세계의 완전한 장악을 위해 해방자들의 군대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레피두스는 이탈리아에 남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최정예 병력 28개 군단을 이끌고 북부 그리스로 이동했다.[9] 이들은 아드리아 해를 건너 군대를 수송했고, 노르바누스와 삭사가 지휘하는 8개 군단의 정찰대를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보내 해방자들의 군대를 수색하게 했다.
해방자들은 결전을 피해 방어 위치를 확보하고 해군 우위를 이용해 삼두정의 이탈리아 보급 기지와의 통신을 차단하려 했다. 그들은 그리스 도시들을 약탈하여 전쟁 자금을 모았고, 동부 속주의 로마 군단과 동맹국 징집병을 트라키아에 집결시켰다. 이후 우세한 병력으로 노르바누스와 삭스를 측면 공격하여 필리피 서쪽으로 후퇴하게 했다.[10]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에그나티아 가도 양쪽의 필리피에서 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 고지를 점령하고, 성벽과 참호로 위치를 강화했다. 브루투스는 북쪽에, 카시우스는 에그나티아 가도의 남쪽에 진지를 쳤다.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에그나티아 가도의 남쪽에, 옥타비아누스는 도로 북쪽에 배치했다.[10]
2. 1. 카이사르 암살과 그 여파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로마는 큰 혼란에 빠졌다. 암살 주모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등은 공화정을 복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들의 행동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이들은 이탈리아를 떠나 동부 속주를 장악하며 세력을 키웠다.[3]한편,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카이사르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워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제거하고 로마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려 했다.
삼두정치는 레피두스를 이탈리아에 남겨두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주력 부대를 이끌고 북부 그리스로 진군했다.[9] 이들은 아드리아 해를 건너 군대를 수송했고, 노르바누스와 삭사가 이끄는 선발대가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진군하며 해방자들의 군대를 수색했다.
해방자들은 정면 대결을 피하고, 해군력을 이용하여 삼두정치 군대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들은 그리스 도시들을 약탈하고 동부 속주에서 병력을 모아 트라키아에 집결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필리피 서쪽의 고지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와 대치했다.[10]
삼두정치 군대는 19개 군단, 약 9만 5천 명의 병력이었고, 해방자 군대는 17개 군단, 약 8만 5천 명의 병력이었다. 양측 모두 정예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특히 해방자 군대에는 카이사르의 옛 부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충성심은 의심스러웠고, 카시우스는 병사들에게 많은 돈을 지급하여 충성심을 확보하려 했다.
2. 2. 제2차 삼두정치의 등장
카이사르 암살 이후,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는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했다.[8] 이들은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프로스크립티오를 통해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등 반대파 원로원 의원들을 숙청했다.[8] 또한 무티나 전투 이후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를 암살하고,[8]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를 살해하는[6] 등 옵티마테스와 리베라토레스 세력을 약화시키며 로마 서부를 장악했다.삼두정의 주요 목표는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제거하고 로마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레피두스는 이탈리아에 남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28개 군단을 이끌고 마케도니아로 진군했다.[9]
2. 3. 양측의 세력 형성
카이사르 암살 이후, 해방자들로 알려진 공화주의자들의 지도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동부 속주와 동맹국들의 동방 왕국들을 장악했다.[3] 이들은 마케도니아 속주를 거점으로 삼고, 기원전 43년 2월 원로원으로부터 정식으로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받았다.[4][5] 마케도니아에서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를, 아시아 속주에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를 물리치고 그 군대를 빼앗는 등[6] 아카이아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로마의 동부 지역 지배권을 장악[6]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부터 군량 지원을 받는 등 동방의 전제 국가와도 동맹 관계를 맺었다.[7]한편,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제2차 삼두정치를 수립하고 서부 로마 군대를 통제하며 원로원의 반대를 꺾었다. 이들은 프로스크립티오를 통해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등 반대파 원로원 의원들을 살해했고,[8] 무티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 등과 싸운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는 안토니우스파 자객에 의해 암살,[8]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는 돌라벨라에게 아시아 속주에서 살해[6]되는 등,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제외한 각지의 옵티마테스 및 리베라토레스는 세력을 잃었고, 결과적으로 삼두 정치 측은 로마 서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삼두정의 첫 번째 임무는 카이사르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로마 세계의 완전한 장악을 위해 해방자들의 군대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레피두스는 이탈리아에 남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최정예 병력 28개 군단을 이끌고 북부 그리스로 이동했다.[9] 이들은 아드리아 해를 건너 군대를 수송했고, 노르바누스와 삭사가 지휘하는 8개 군단의 정찰대를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보내 해방자들의 군대를 수색하게 했다.
노르바누스와 삭사는 동마케도니아의 필리피 마을을 지나 좁은 산길에 강력한 방어 위치를 점했다. 안토니우스가 뒤따랐고, 옥타비아누스는 건강 악화로 디라키움에 늦어졌다. 삼두정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널 수 있었지만, 공화당 해군 제독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130척의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도착하면서 이탈리아와의 추가적인 통신이 어려워졌다.
해방자들은 결정적인 전투를 피하고, 방어 위치를 확보한 후 해군 우위를 사용하여 삼두정의 이탈리아 보급 기지와의 통신을 차단하려 했다. 그들은 그리스 도시들을 약탈하여 전쟁 자금을 모았고, 동부 속주의 로마 군단과 동맹국의 징집병들과 함께 트라키아에 집결했다. 이들은 우세한 병력으로 노르바누스와 삭스를 측면 공격하여 방어 위치를 포기하고 필리피 서쪽으로 후퇴하게 했다.[10]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에그나티아 가도 양쪽의 필리피에서 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 고지를 점령하고, 성벽과 참호로 위치를 강화했다. 브루투스는 북쪽에, 카시우스는 에그나티아 가도의 남쪽에 진지를 쳤다.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에그나티아 가도의 남쪽에, 옥타비아누스는 도로 북쪽에 배치했다.[10]
삼두정치 군대는 19개 군단을 투입했다. 기록된 군단은 제4군단뿐이지만, 제6군단, 제7군단, 제8군단, 제10군단, 제12, 제13, 제16, 제18, 제19, 제30 군단도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아피아누스는 삼두정치 군단이 거의 완전한 병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들은 13,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동맹 기병대도 보유했다. (안토니우스 20,000명, 옥타비아누스 13,000명)[11]
해방자 군대는 17개 군단(브루투스 8개, 카시우스 9개)으로 구성되었고, 2개 군단만이 정규 편성을 갖추었다. 동맹 왕국에서 징집된 병력으로 보강되었으며, 아피아누스에 따르면 총 8만 명의 보병을 징집했다. 동맹 기병은 2만 명이었으며, 여기에는 동방식 궁병 5천 명이 포함되었다.
이 군대에는 동방에 주둔했던 옛 카이사르 군단들(제27, 제36, 제37, 제31, 제33 군단 추정)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 대부분은 카이사르의 참전 용사였다. 그러나 제36 군단은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카이사르 군대에 입대했던 옛 폼페이우스의 참전 용사로 구성되었다. 카이사르의 상속자에게 대항하여 싸워야 했던 병사들의 충성심은 해방자들에게 민감한 문제였다. 카시우스는 강력한 연설과 군단병 1인당 1,500데나리우스, 백인대장 1인당 7,500 데나리우스를 지급하여 병사들의 충성심을 강화하려 했다.
고대 자료에는 두 군대의 전체 병력 수가 보고되지 않지만, 전력이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드리안 골즈워디는 완전한 전력을 갖춘 삼두정치 군단 19개가 9만 5천 명, 해방자 군단 17개는 8만 5천 명에 달했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양측 모두 4만에서 5만 명의 군단병만 있었을 것이다.
3. 전투의 전개
기원전 42년 10월 3일 벌어진 첫 번째 전투에서 브루투스군은 옥타비아누스군을 격파했으나, 안토니우스군은 카시우스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카시우스는 브루투스도 패배한 것으로 오인하고 자결했다.[15]
약 20일 후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 브루투스군은 전열을 정비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에게 패배했고, 브루투스 또한 자결했다.[15][21] 안토니우스는 늪지대를 통해 해방자들의 진지를 우회하려 시도했고, 이는 10월 3일의 전투로 이어졌다.
3. 1. 1차 전투 (기원전 42년 10월 3일)
thumb기원전 42년 10월 3일, 필리피에서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필리피 왼쪽 평원에서는 옥타비아누스와 브루투스군이, 좀 더 남쪽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카시우스군이 각각 진영을 편성하고 대치했다.
먼저 승기를 잡은 것은 브루투스군이었다. 브루투스는 옥타비아누스군의 진지를 급습하여 물리치는 데 성공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마침 진지에 없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전날 밤 꿈에서 적의 급습을 예언받았다고 한다.[13][15] 대 플리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늪 속에 숨어 무사했다고 기록했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의 진영지와 늪지 사이의 요새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와 동시에 브루투스의 병사들은 공격 암호 "자유"를 외치며, 공격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옥타비아누스 군을 기습했다.[12] 이 기습은 완벽하게 성공하여,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가 이끄는 브루투스 군은 옥타비아누스 군을 패주시키고 야영지까지 점령했다. 옥타비아누스 군의 군단 3개는 깃발을 빼앗기는 등 명백히 참패하였다.[14]
반대편에서는 안토니우스 군이 카시우스 군의 요새를 공격하여 울타리를 파괴하고 해자를 메웠다. 그 후, 소수의 병력만으로 방어하던 카시우스의 야영지를 쉽게 점령했다.[14] 남쪽으로 진격했던 카시우스 군대의 일부가 돌아오려 했지만, 안토니우스에게 쉽게 격퇴되었다.
전투는 무승부로 끝난 듯 보였다. 카시우스는 8,000명, 옥타비아누스는 약 16,000명의 사상자를 냈다.[16] 전투 지역이 매우 넓었고 먼지 구름 때문에 양측 모두 서로의 전황을 알 수 없었다. 카시우스는 언덕 꼭대기로 이동했지만, 브루투스 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15] 그는 자신이 대패했다고 믿고, 해방 노예 핀다루스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다.[15] 브루투스는 카시우스의 시신을 슬퍼하며 그를 "로마인 최후의 인물"이라고 불렀다. 그는 군대의 사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공개적인 장례를 피했다.[15][17]
브루투스 군대는 점령한 옥타비아누스 군의 진영에서 약탈을 일삼아, 옥타비아누스 군에게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주었고, 결국 결정적인 승기를 살리지 못했다.
3. 2. 2차 전투 (기원전 42년 10월 23일)
2차 전투는 1차 전투 후 약 20일 뒤에 벌어졌다. 브루투스는 전투 경험이 부족하여 대비 없이 진영에만 머물렀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공격해왔다. 브루투스군은 격전을 벌였지만 결국 패배했고, 브루투스는 자결했다.[15][21]안토니우스는 지속적으로 전투를 제안했지만, 해방자들은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안토니우스는 늪지대를 통해 해방자들의 진지를 우회하려 시도했고, 이는 10월 3일의 전투로 이어졌다.

브루투스는 고지를 점령하고 해상 우위를 이용해 적을 지치게 하는 전략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장교와 병사들은 지연 전술에 지쳐 전투를 요구했고, 일부 동맹군과 용병이 이탈하기 시작하자 브루투스는 10월 23일 오후 공격을 강행했다.[18] 그는 "나는 폼페이우스처럼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투는 양측 모두 훈련된 베테랑 병사들 간의 근접전으로, 원거리 무기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브루투스는 전선 서쪽에서 우세를 보였으나, 동쪽 측면은 수가 적어 포위당했다. 중앙에서 얇게 늘어진 브루투스 군단은 삼두정치의 돌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옥타비아누스 군대는 브루투스 진영을 점령했고, 브루투스는 패배를 인정하고 자결했다.[21]
플루타르코스는 브루투스가 전투 전 유령을 보았다는 일화를 전하며, 브루투스의 마지막 말을 인용했다. "오, 불쌍한 덕이여, 너는 단지 이름에 불과했지, 그러나 나는 너를 진실로 숭배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너는 단지 운명의 노예였구나."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필리피 전투 결과,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삼두정치파가 승리하여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했던 해방파는 완전히 몰락했다. 이 승리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권력을 장악하고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21][22][23]
4. 1. 삼두정치의 승리와 공화정의 몰락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의 유해를 거두어 화장하고 그의 어머니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에게 보냈다. 플루타르코스는 안토니우스가 브루투스의 시신에 경의를 표하여 자주색 망토를 덮어주었다고 전한다[21].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가 친구였던 점 외에도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 계획에 가담했을 때 안토니우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요구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수에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브루투스의 수급을 로마에 가져와 카이사르의 조상 아래에 전시했다고 전한다[22].해방자 측에서는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의 아들이 안토니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를 살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안토니우스에게 살해되었고[24], 카토의 아들 마르쿠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아들 마르쿠스, 후에 옥타비아누스의 아내가 되는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가 전사하는 등 많은 젊고 유력한 인물들이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25][26].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비불루스 등 해방자 측에서 도망친 인물들은, 아마도 젊고 냉혹한 옥타비아누스에게 대처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에게 항복했다.
해방군 잔존 병사 중 약 14,000명은 삼두 정치 측 군대에 편입되었지만, 고참 병사 대부분은 이탈리아 본토로 돌아가 군에서 제대했다. 또한, 고참 병사 일부는 로마의 식민 도시가 된 필리피(Colonia Victrix Philippensiumla)의 마을에 정착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전투에서 퇴역한 많은 베테랑 병사들을 정착시키는 복잡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이탈리아 본토로 돌아갔고,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 등이 지배하던 동방 지구의 치안 유지를 위해 그곳에 머물렀다[28].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를 세력권으로 두고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해군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해방자 측의 저항은 필리피에서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섹스투스와 도미티우스는 연대하여 삼두 정치 측과 싸웠지만[30], 기원전 40년에 도미티우스는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의 중재로 안토니우스에게 항복했고[31], 섹스투스는 기원전 39년에 옥타비아누스와 미세눔에서 휴전 협정을 맺었다[32]。
필리피 전투에서 승리에 가장 크게 기여한 안토니우스는 생애의 커리어에서 정점을 맞이했으며, 제2차 삼두 정치의 한 사람으로서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이 되었고, 안토니우스의 인생은 이때 결정되었다.
4. 2. 로마 제정의 시작과 권력 투쟁
이 전투의 승리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암살파를 완전히 제거하고 각각 로마의 권력을 잡기 위해 경쟁에 돌입했다.[21][22][23]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의 시신에 경의를 표하며 자주색 망토를 덮어주었고, 브루투스의 유해는 어머니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에게 전달되었다.[21][23]해방자 측에서는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의 아들이 안토니우스의 동생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안토니우스에게 살해되었고,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우티켄시스의 아들 마르쿠스 등 많은 젊고 유력한 인물들이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24][25][26]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등 해방자 측에서 도망친 인물들은 옥타비아누스보다 안토니우스에게 항복했다.[27] 해방군 잔존 병사 중 약 14,000명은 삼두 정치 측 군대에 편입되었고, 고참 병사 일부는 필리피에 정착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퇴역한 베테랑 병사들을 정착시키는 복잡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이탈리아 본토로 돌아갔고, 안토니우스는 동방 지구의 치안 유지를 위해 그곳에 머물렀다.[28]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를 세력권으로 두고 있었지만, 해방자 측의 저항은 필리피에서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섹스투스는 기원전 39년에 옥타비아누스와 미세눔에서 휴전 협정을 맺었다.[32]
필리피 전투에서 승리에 가장 크게 기여한 안토니우스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이 되었다.
4. 3. 역사적 교훈과 현대적 의미
필리피 전투는 권력의 정당성과 민주적 절차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을 남겼다. 플루타르코스는 브루투스가 전투 전 유령을 보았다는 일화를 전하며, 이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도 등장한다. 브루투스의 마지막 말은 덕과 운명에 대한 고뇌를 드러낸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전투를 통해 아버지의 복수를 완수하고 공화국에 대한 승리를 선언했다.[1]이 전투는 셰익스피어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극적으로 묘사되었으며,[2] HBO 드라마 ''로마''에서도 허구적으로 재현되었다.[3]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권력 찬탈과 극단적 행동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행태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특히 보수 진영의 권위주의적 행태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으며, 진보 진영은 민주적 가치를 수호하고 정치 개혁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필리피 전투는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끊임없는 감시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5. 주요 인물
필리피 전투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삼두정치 연합군과 브루투스, 카시우스가 이끄는 해방자 군대가 맞붙었다.
구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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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 19개 군단(제4군단, 제3, 제6, 제7, 제8, 제10 에퀘스트리스, 제12, 제26, 제28, 제29, 제30 군단 등), 13,000명 기병[11] |
브루투스, 카시우스 | 17개 군단(브루투스 휘하 8개, 카시우스 휘하 9개, 제27, 제36, 제37, 제31, 제33 군단 등), 20,000명 기병(동방 궁병 5천 명 포함)[11] |
기타 |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브루투스 어머니, 카이사르 연인), 호르텐시우스 아들, 소 카토 아들[2] |
카시우스는 병사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연설을 하고, 군단병에게 1,500 데나리우스, 백인대장에게 7,500 데나리우스를 지급했다.[11]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의 유해를 화장하여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에게 보냈다.[1]
5. 1. 삼두정치 연합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삼두정치 연합군은 필리피 전투에 19개 군단을 투입했다.[11] 이 중 이름이 명확히 기록된 군단은 제4군단 뿐이지만, 전투 이후 퇴역 군인들의 토지 정착에 참여한 기록을 바탕으로 제3, 제6, 제7, 제8, 제10 에퀘스트리스, 제12, 제26, 제28, 제29, 제30 군단도 참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피아누스는 삼두정치 군단들이 거의 완전한 병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기록했다.[11] 또한, 13,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동맹 기병대도 보유하고 있었다.[11]구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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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 | 제4군단을 포함한 19개 군단 (제3, 제6, 제7, 제8, 제10 에퀘스트리스, 제12, 제26, 제28, 제29, 제30 군단 등) |
기병 | 13,000명의 동맹 기병대 |
아드리안 골즈워디는 완전한 전력을 갖춘 삼두정치 군단 19개가 9만 5천 명에 달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몇 달 동안 지속된 이 군사 작전에서 양측 모두 10만 명 정도의 병력을 유지할 수 있는 군수 능력을 갖추기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실제로는 양측 모두 4만에서 5만 명의 군단병만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2. 해방자 군대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이끄는 해방자 군대는 17개 군단으로 구성되었으며, 브루투스 휘하에 8개, 카시우스 휘하에 9개 군단이 있었다.[11] 이 군대는 동방에 주둔했던 옛 카이사르 군단들을 포함했으며, 아마도 제27, 제36, 제37, 제31, 제33 군단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카이사르의 참전 용사였지만, 제36군단은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카이사르 군대에 합류한 옛 폼페이우스의 참전 용사들로 구성되었다.[11]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해방자 군대는 총 8만 명의 보병을 징집했다. 동맹 기병은 2만 명이었으며, 여기에는 동방식으로 무장한 궁병 5천 명이 포함되었다.[11] 카시우스는 병사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카이사르의 병사였던 것을 아무도 걱정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그때 그의 병사가 아니라, 우리 조국의 병사였습니다"라는 연설을 하고, 각 군단병에게 1,500 데나리우스, 각 백인대장에게 7,500 데나리우스를 지급했다.[11]
하지만 카이사르를 암살한 해방자군이 카이사르의 상속자를 자처하는 삼두정치파와 싸워야 했기에 병사들의 충성심은 큰 문제였다.
5. 3. 기타 인물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어머니이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연인이었다.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의 유해를 화장하여 그녀에게 보내주었다.[1]호르텐시우스의 아들, 소 카토의 아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해방자 군대의 일원으로 전투에서 목숨을 잃거나 패배 후 자살했다.[2]
6. 필리피 전투 관련 논란과 쟁점
필리피 전투에는 여러 논란과 쟁점이 존재한다. 1차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역할과 브루투스가 자결을 선택한 원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대표적이다.
이 전투는 로마 공화정 말기 내전에서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제정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6. 1. 1차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역할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이끄는 삼두정치 측의 증원군이 공화정 함대에 의해 격파당하면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전략적 입지는 위태로워졌다.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 지역은 이미 고갈되어 군대를 지원하기 어려웠던 반면, 브루투스는 해상 보급을 원활히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두정치는 보급품을 모으기 위해 한 군단을 아카이아 남쪽으로 보내야 했다. 병사 1인당 5,000 데나리, 백인대장 1인당 25,000 데나리를 추가로 약속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다.[36]한편, 브루투스가 이끄는 해방자들의 군대는 최고의 전략가였던 카시우스를 잃은 상태였다. 브루투스는 카시우스보다 군사적 경험이 부족했고, 병사들로부터 같은 존경을 받지 못했다. 전투 후 병사 1인당 1,000 데나리를 제공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3주 동안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 군대 남쪽으로 천천히 진격하여 카시우스의 이전 진영 근처 언덕을 요새화했다. 브루투스는 포위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전선을 확장하고 요새를 건설하며, 해상 우위를 이용해 적을 지치게 하는 전략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장교와 병사들의 압박,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의 패배 소식 미인지, 동맹군과 용병의 탈주 시작 등으로 인해 브루투스는 10월 23일 공격을 강행했다.
전투는 훈련된 베테랑 간의 근접전으로, 양측 모두 "평소의 전투 기동과 전술에 의존하지 않고" 즉시 근접전을 벌였다. 브루투스는 초반 우세를 보였으나, 전선이 얇아진 탓에 삼두정치의 돌파를 허용하고 측면과 후방을 공격당했다. 옥타비아누스의 병사들은 브루투스 진영의 문을 점령했고, 브루투스 군대는 재편성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브루투스는 자살했다.
6. 2. 브루투스의 자결 원인
카시우스가 죽은 후, 브루투스는 전투 경험이 부족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두 번째 전투에서 패배한 그는 피신 권유를 무시하고 자결을 택했다. 항복과 포로 생활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브루투스는 "나는 마치 폼페이우스 대왕처럼 전쟁을 수행하는 것 같으며,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병사들의 압박과 불리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했던 그의 심정을 드러낸다.6. 3. 필리피 전투의 역사적 의의
필리피 전투는 로마 공화정 말기 내전에서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연합군이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의 공화파 군대를 격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의 결과로 로마 공화정은 사실상 막을 내리고 제정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이 전투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다음 자료를 참고할 수 있다.
- 토마스 하보틀, ''전투 사전'' 뉴욕 1906
- 로널드 심, ''로마 혁명''. 옥스퍼드 1939
- 로렌스 케피, ''로마 군대의 창설''. 뉴욕 1984
참조
[1]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The Battle of Philippi 42 BCE
https://www.worldhis[...]
2023-06-08
[3]
서적
英雄伝
[4]
서적
ピリッピカ
[5]
서적
[6]
서적
[7]
서적
英雄伝
[8]
서적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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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雄伝
[10]
서적
英雄伝
[11]
서적
Civil Wars
[12]
서적
英雄伝
[13]
서적
英雄伝
[14]
서적
英雄伝
[15]
서적
[16]
서적
Civil Wars
[17]
서적
英雄伝
[18]
서적
英雄伝
[19]
서적
英雄伝
[20]
서적
[21]
서적
英雄伝
[22]
서적
皇帝伝
[23]
서적
英雄伝
[24]
서적
英雄伝
[25]
서적
英雄伝
[26]
서적
[27]
서적
皇帝伝
[28]
서적
Civil Wars
[29]
서적
英雄伝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英雄伝
[34]
서적
ジュリアス・シーザー
[35]
서적
Historia Romana
[36]
문서
アウグストゥス「Res Gesta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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