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제
1. 개요
안희제는 경상남도 의령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교육 사업과 계몽 운동을 펼쳤으며, 1909년 대동청년당 조직에 가담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시작했고, 자금 조달을 위해 귀국하여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3·1 운동 이후에는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했다. 1930년대에는 만주로 다시 망명하여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고 대종교에 입교하여 민족 정신을 고취했다. 1942년 임오교변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사망했으며, 대종교 순국십현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다. 사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생가 복원 및 백산기념관 건립 등 기념 사업이 이루어졌다.
| 한자 표기 | 安熙濟 |
|---|---|
| 본관 | 순흥(順興) |
| 호 | 백산(白山) |
| 로마자 표기 | An Hui-je |
| 출생 | 1885년 10월 7일 (음력) |
|---|---|
| 사망 | 1943년 8월 3일 |
| 주요 활동 | 백산상회 설립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지원 |
|---|
| 배우자 | 김맹련(金孟連) |
|---|---|
| 자녀 | 4남 2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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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 안씨 -
안철상
안철상은 대한민국의 법조인으로 2018년부터 2024년까지 대법관을 역임하며 법원행정처장 겸임 및 대법원장 권한대행을 맡았고, 현재는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사법부 독립과 민주적 사법 운영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
탐진 안씨 -
안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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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대종교인 -
김좌진
김좌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한국독립당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훈받았다. -
대한제국의 대종교인 -
박은식
박은식은 언론인, 역사학자, 정치인으로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내며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국외 망명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국무총리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을 저술하여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와 정당성을 알린 독립운동가이다. -
경성양정고등보통학교 동문 -
윤석중
윤석중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로서, 아동문학 운동을 이끌고 수많은 동요와 동시집을 발표하며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
경성양정고등보통학교 동문 -
손기정
손기정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육상 선수이자 체육인으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나 일본 대표로 출전해야 했으며, 광복 후에는 육상 지도자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체육 발전에 기여했다.
2. 생애
안희제는 경상남도 의령군 출신으로,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동래군과 고향 의령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힘쓰면서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09년 윤세복, 서상일, 남형우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 조직에 가담하였고, 이듬해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후 독립 운동을 위해서는 자금 모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귀국한 후 1914년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 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의령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백산무역주식회사를 통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했다. 또한 장학회인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1925년 중외일보를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1930년대 들어 가산을 정리해 만주로 다시 망명한 뒤 옛 발해 지역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였다. 망명 후 대동청년단 시절부터의 동지인 윤세복이 교주로 있는 대종교에 1931년 입교하고, 민족 정신을 고취했다.
1942년 11월 일제가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검거한 임오교변으로 체포되었고, 여러 차례 고문 끝에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몇 시간 뒤에 사망했다. 당시 헤이룽장성 액하감옥에서의 일제의 고문은 가혹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이로 인해 임오교변으로 체포된 21명 중 10명이 사망했다. 그는 이때 사망한 열 명의 대종교인을 가리키는 대종교 순국십현(殉國十賢)의 한 사람이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활동 (1885년 ~ 1909년)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양정의숙을 졸업하였다. 이후 동래군과 고향 의령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힘쓰면서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09년 윤세복, 서상일, 남형우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 조직에 참여하였다.
2.2. 독립운동 투신과 백산상회 설립 (1909년 ~ 1919년)
경상남도 의령군 출신으로,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동래군과 고향 의령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면서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09년 윤세복, 서상일, 남형우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 조직에 가담하였고, 이듬해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1차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이후 독립 운동을 위해서는 자금을 모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귀국한 후, 1914년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해 실업가로서 독립 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1919년 3·1 운동 발생 이후 의령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백산무역주식회사를 통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했다.
2.3.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과 국내 활동 (1919년 ~ 1930년)
1919년 3·1 운동 이후 안희제는 의령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백산무역주식회사를 통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했다. 이외에도 장학회인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1925년 중외일보를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2.4. 만주 망명과 대종교 활동 (1930년 ~ 1943년)
1930년대 들어 가산을 정리해 만주 지역으로 다시 망명한 뒤 옛 발해 지역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였다. 망명 후 그는 대동청년단 시절부터의 동지인 윤세복이 교주로 있는 대종교에 1931년 입교하고, 민족 정신의 창달에 힘썼다.
1942년 11월 일제가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검거한 임오교변으로 체포되었고, 여러 차례 고문 끝에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몇 시간 뒤에 사망했다. 이 당시 헤이룽장성 액하감옥에서의 일제의 고문은 가혹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이로 인해 임오교변으로 체포된 21명 중 10명이 살아나오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는 이때 사망한 열 명의 대종교인을 가리키는 대종교 순국십현(殉國十賢)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