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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커닝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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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더 커닝엄은 1814년 런던에서 태어난 스코틀랜드 시인의 아들로,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복무하며 고고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인물이다. 그는 벵골 공병대에서 28년간 복무하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1861년 퇴역 후 인도 고고학 조사국(ASI)을 설립하여 초대 국장으로 재직하며 고대 도시 발굴, 불교 유적 연구 등 인도 고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고고학적 자료를 활용하여 고대 인도사를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불교 유적 발굴을 통해 불교 전파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등 '인도 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커닝엄은 1893년 사망했으며, 여러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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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커닝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알렉산더 커닝엄
본명알렉산더 커닝엄
출생1814년 1월 23일, 영국, 런던
사망1893년 11월 28일, 영국, 런던
국적영국
직업공학자
고고학자
가족
아버지앨런 커닝엄
배우자앨리시아 마리아 휘시 (1840년 결혼)
자녀앨런 J. C. 커닝엄
알렉산더 F. D. 커닝엄 경
친척프랜시스 커닝엄 (형제)
조지프 데이비 커닝엄 (형제)
피터 커닝엄 (형제)
경력
소속영국 육군
직책기술자
고고학자
서훈
훈장KCIE
CSI
기타ADC

2. 생애 및 경력

커닝엄(오른쪽에서 네 번째)


알렉산더 커닝엄은 스코틀랜드 시인의 아들로 태어나 19세에 벵골 공병대에 입대하여 28년간 영국령 인도 정부에서 복무했다. 제임스 프린셉과의 교류를 통해 인도 고고학과 고대 유적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인도 총독의 부관, 아우드 국왕의 수석 엔지니어 등을 역임하며 카슈미르를 방문하고, 분델칸드 봉기 진압, 펀니아 전투, 괄리오르에서 모라르 강 다리 건설, 펀자브에서 비아스 강에 배 다리 건설, 제1차 앵글로-시크 전쟁 후 암리차르 조약에 따른 경계 획정 위원회 활동, 칠리안왈라 전투와 구자라트 전투 참전 등 다양한 군사 및 행정 경험을 쌓았다. 불교 기념물을 탐사하고, 버마와 북서부 주의 수석 엔지니어로 공공 사업부를 설립하기도 했다. 1860년 왕립 공병대 대령으로 임명되었고, 1861년 소장 계급으로 퇴역했다.[2]

커닝엄을 측량 책임자로 임명하는 1862년 1월 31일자 서한


퇴역 후 찰스 캐닝 (제1대 캐닝 백작)에 의해 영국령 인도 제국의 고고학 측량 책임자로 임명되어[2] 인도 고고학 조사국의 전신을 설립하고, 1865년까지 고대 유적 발굴 및 연구를 주도했다. 장바티스트 벤투라 장군에게 영감을 받아 고대 유물 발굴을 시작했고, 아시아 학회 저널에 만키알라 탑의 유물에 관한 내용을 제출했으며, 사르나트, 상카사, 산치 등에서 발굴을 진행했다. 1854년에는 "The Bhilsa Topes"를 출판하여 불교 역사를 확립하려 했다.

윌리엄 헨리 사이크스 및 동인도 회사와 고고학 조사의 가치에 대해 논의하고, 고고학 조사가 인도 정부와 영국 대중에게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했다.[3]

1861년 인도 고고학 조사국 설립 후 1865년까지 초대 국장을 역임하며, 아오르노스, 아히차트라, 바이라트, 코삼비, 날란다, 파드마바티, 상갈라, 상키사, 슈라바스티, 스루그나, 탁실라, 바이샬리 등 주요 도시를 식별하고, 탁실라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70년 인도 고고학 조사국 재설립 후 다시 국장으로 임명되어 1885년 은퇴할 때까지 활동하며 24개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주요 저서로는 "Corpus Inscriptionum Indicarum"(1877), "The Stupa of Bharhut"(1879), "Book of Indian Eras"(1883) 등이 있다.

방대한 화폐 수집품을 모았으나, 대부분 실론 해안에서 배가 난파되어 잃었다.[1] 하지만 대영 박물관은 금화와 은화 대부분을 입수했다.[1]

1840년 앨리시아 마리아 위시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1893년 사망하여 켄살 그린 묘지에 묻혔다.[2]

2. 1. 초기 생애 및 군 복무

커닝엄은 1814년 1월 23일 런던에서 스코틀랜드 시인 앨런 커닝엄과 그의 아내 진 워커 사이에서 태어났다.[1] 형인 조셉과 함께 런던 크라이스트 병원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다. 월터 스콧 경의 영향으로 조셉과 알렉산더는 모두 동인도 회사의 애디스콤 세미나리에서 사관생도가 되었고, 그 후 채텀에 있는 왕립 공병 학교에서 기술 훈련을 받았다.

알렉산더는 19세에 소위로 벵골 공병대에 입대하여 그 후 28년간 영국령 인도 정부에서 복무했다. 델리 주변의 홍수 피해 지역을 측량하여 공무원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고대 인도의 역사와 건축에 대한 커닝엄의 관심은 복무 중에 생겨났다. 1833년 6월 9일 인도에 도착한 직후 그는 제임스 프린셉을 만났다. 그는 1837년과 1838년 동안 프린셉과 매일 소통했으며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조력자이자 제자가 되었다. 프린셉은 그의 평생의 관심사인 인도 고고학 및 고대 유적에 대한 관심을 그에게 물려주었다.

1836년부터 1840년까지 그는 인도의 총독인 오클랜드 경의 부관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당시 잘 탐험되지 않았던 카슈미르를 방문했다. 그는 에밀리 에덴의 ''Up the Country''에서 이니셜로 언급된다.[2]

1841년, 커닝엄은 아우드 국왕의 수석 엔지니어가 되었다. 1842년, 그는 자이푸르 통치자에 의해 분델칸드에서 발생한 봉기를 막기 위해 군대에 소집되었다. 그 후 그는 1843년 12월 펀니아 전투에서 전투를 치르기 전에 인도 중부의 노옹에 배치되었다. 그는 괄리오르의 엔지니어가 되었고, 1844~45년에 모라르 강에 아치형 석조 다리를 건설하는 책임을 맡았다. 1845~46년에는 펀자브에서 복무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소브라온 전투 전에 비아스 강에 두 개의 배 다리를 건설하는 것을 도왔다.

1846년, 그는 P. A. 반스 애그뉴와 함께 경계를 획정하는 위원이 되었다. 하딩 경은 중국 및 티베트 관료들에게 서한을 보냈지만, 어떤 관료도 참여하지 않았다. 1847년, 커닝엄이 이끄는 두 번째 위원회가 설립되어 라다크-티베트 경계를 설정했는데, 여기에는 헨리 스트래치와 토머스 톰슨도 포함되었다. 헨리와 그의 형제 리처드 스트래치는 1846년에 마나사로바르 호수와 라카스 탈에 무단 침입했고, 그의 형제 리처드는 1848년에 식물학자 J. E. 윈터바텀과 함께 재방문했다. 이 위원회는 제1차 앵글로-시크 전쟁이 암리차르 조약으로 종결된 후 제국의 북쪽 경계를 획정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이 조약은 전쟁 배상금으로 카슈미르를 영국에 할양했다. 그의 초기 저서 ''아리아 건축 양식에 관한 에세이''(1848)는 카슈미르의 사원을 방문하고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동안 라다크를 여행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또한 1848~49년에 칠리안왈라 전투와 구자라트 전투에 참여했다. 1851년, 그는 불교 기념물을 탐사했고, 마이시 중위와 함께 탐사 기록을 작성했다.

1856년, 그는 영국에 합병된 지 얼마 안 된 버마의 수석 엔지니어로 2년 동안 임명되었고, 1858년부터 3년 동안 북서부 주에서 같은 직책을 역임했다. 두 지역에서 모두 그는 공공 사업부를 설립했다. 따라서 그는 1857년 반란 동안 인도에 없었다. 그는 1860년에 왕립 공병대 대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861년 6월 30일 소장 계급으로 퇴역했다.[2]

2. 2. 고고학 연구 및 인도 고고학 조사국 설립

커닝엄은 경력 초기부터 고대 유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장바티스트 벤투라 장군에게 영감을 받아 고대 유물 발굴을 시작했다.[3] 1834년 아시아 학회 저널에 만키알라 탑의 유물에 관한 내용을 제출했고, 1837년 사르나트에서 프레데릭 찰스 메이시와 함께 발굴을 진행했으며, 1842년에는 상카사, 1851년에는 산치에서 발굴을 진행했다. 1854년에는 "The Bhilsa Topes"를 출판했다.

1851년, 커닝엄은 윌리엄 헨리 사이크스 및 동인도 회사와 고고학 조사의 가치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고고학 조사가 인도 정부와 영국 대중에게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했다.[3]

1861년, 커닝엄은 찰스 캐닝 (제1대 캐닝 백작)에 의해 영국령 인도 제국의 고고학 측량 책임자로 임명되었다.[2] 1865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지만, 자금 부족으로 인해 고고학 조사국은 해체되었다.

커닝엄은 고대 그리스-로마 연대기와 현장, 법현과 같은 인도 여행자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고대 인도 텍스트에 언급된 주요 도시를 식별하고자 했다. 그는 아오르노스, 아히차트라, 바이라트, 코삼비, 날란다, 파드마바티, 상갈라, 상키사, 슈라바스티, 스루그나, 탁실라, 바이샬리 등을 식별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탁실라의 경우,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 오류에도 불구하고 현장 조사를 통해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다.

1865년 고고학 조사국이 폐지된 후 영국으로 돌아갔던 커닝엄은 1870년 마요 경에 의해 인도 고고학 조사국이 재설립되자 국장으로 복귀했다. 1885년 은퇴할 때까지 탁실라, 가우르 등지에서 발굴 및 조사를 진행했으며, 24개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주요 저서로는 "Corpus Inscriptionum Indicarum"(1877), "The Stupa of Bharhut"(1879), "Book of Indian Eras"(1883) 등이 있다.

2. 3. 화폐학 연구

커닝엄은 방대한 화폐 수집품을 모았지만, 그가 탑승했던 증기선 ''인더스''호가 1884년 11월 실론 해안에서 난파되면서 대부분 잃었다.[1] 하지만 대영 박물관은 금화와 은화 대부분을 입수했다.[1] 그는 박물관에 산치 대탑의 아치를 인도 역사에 대한 새로운 섹션 입구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1] 그는 또한 ''아시아 학회 저널''과 ''화폐 연대기''에 수많은 논문을 게재했다.[1]

2. 4. 말년

커닝엄의 형제들 중 프랜시스 커닝엄과 조셉 데이비 커닝엄은 영국령 인도에서, 또 다른 형제 피터 커닝엄은 《런던 핸드북》(1849)으로 유명해졌다.[2] 1840년 3월 30일, 커닝엄은 B.C.S. 출신 마틴 위시의 딸 앨리시아 마리아 위시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앨런 J. C. 커닝엄 (1842–1928)은 벵갈 및 왕립 공병 중령이었고, 차남 알렉산더 F. D. 커닝엄 경 (1852–1935)은 인도 공무원이었다.[2] 커닝엄은 1893년 11월 28일 사우스켄싱턴 자택에서 사망하여 켄살 그린 묘지에 묻혔다. 아내는 그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그는 두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2]

3. 주요 업적

커닝엄은 경력 초기부터 고대 유물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장바티스트 벤투라 장군의 활동에 영향을 받아 발굴을 통해 많은 유물을 발견했다.[3] 1834년 아시아 학회 저널에 만키알라 탑의 유물에 관한 내용을 제출했고, 1837년 사르나트, 1842년 상카사, 1851년 산치 등에서 발굴을 진행했다. 1854년에는 "The Bhilsa Topes"를 출판하여 건축 증거를 바탕으로 불교 역사를 확립하려 했다.

1851년, 커닝엄은 윌리엄 헨리 사이크스 및 동인도 회사와 고고학 조사의 가치에 대해 소통하며, 인도 정부와 영국 대중에게 중요한 사업이 될 것이라는 점을 들어 자금 지원을 제안했다.[3] 1861년, 찰스 캐닝 (제1대 캐닝 백작)은 커닝엄을 영국령 인도 제국의 고고학 측량 책임자로 임명했다.[2] 그는 1865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으며, 자금 부족으로 인해 종료되었다.

19세기 고고학자들은 고대 그리스-로마 연대기 및 현장, 법현과 같은 인도 여행자들의 여행기를 참고하여 고대 인도 텍스트에 언급된 주요 도시를 식별하려 했다. 커닝엄은 현장이 언급한 장소 중 일부를 식별했으며, 그가 식별한 주요 장소는 다음과 같다.



특히 탁실라의 경우,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 오류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으나, 커닝엄은 중국 순례자들의 여정, 특히 현장의 설명을 바탕으로 샤 데리 지역을 탐사하여 자신의 가설을 입증했다.[2]

1865년 부서가 폐지된 후 영국으로 돌아간 커닝엄은 "인도의 고대 지리학"의 첫 번째 부분을 저술했다.[2] 1870년 마요 경은 인도 고고학 조사국을 재설립하고 커닝엄을 국장으로 재임명했다. 그는 탁실라에서 가우르까지 발굴과 조사를 진행하며 24개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Corpus Inscriptionum Indicarum"(1877)의 첫 번째 권
  • "The Stupa of Bharhut"(1879)
  • "Book of Indian Eras"(1883)


1885년 은퇴 후 런던으로 돌아가 연구와 저술을 계속했다.[2]

커닝엄은 인도 고고학 조사단(ASI)에 필요한 조직과 전문 지식을 제공했다.[1] 초대 국장으로서 그는 중요한 고대 도시를 발굴하고 고고학 논문을 발행했으며, 725곳이 넘는 유적지를 평가했다. 그는 인도 고고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고고학적 자료를 사용하여 고대 인도사를 체계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한 최초의 인물이다.
  • 산치, 사르나트, 바르후트와 같은 지역에서 철저한 발굴을 통해 불교 전파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유물과 비문을 발견했다.
  • 그의 권위 있는 참고 문헌은 많은 사람들이 고고학 분야에서 경력을 쌓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 문서화, 지도 제작, 사진 촬영 및 보존 기술을 확립했다.
  • 토착 조수들을 훈련시켜 인도인들이 고고학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 고고학이 재정적 지원과 공식적인 인정을 받도록 하여 인도에서 이 분야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커닝엄은 방대한 화폐 수집품을 모았으나, 대부분 1884년 실론 해안에서 배가 난파되면서 잃었다. 대영 박물관은 그의 금화와 은화 대부분을 입수했다. 그는 산치 대탑의 아치를 인도 역사에 대한 새로운 섹션 입구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으며, ''아시아 학회 저널''과 ''화폐 연대기''에 수많은 논문을 게재했다.

4. 수상 및 서훈

커닝엄은 1870년 5월 20일에 CSI를, 1878년에 CIE를 받았다. 1887년에는 인도 제국 훈장 기사단장이 되었다.

커닝엄의 초상화, C. W. 월튼 작, KCIE 배지를 착용하고 다른 훈장을 보여준다.

5. 저서


  • Ladakh: Physical, Statistical, and Historical with Notices of the Surrounding Countries영어 (1854)
  • The Bhilsa Topes영어 (1854), 불교의 역사
  • The Ancient Geography of India영어 (1871)
  • 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Vol.I영어 (1871) Four Reports Made during the Years, 1862-63-64-65영어
  • 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Vol.II영어
  • 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Vol.III영어 (1873)
  • Corpus Inscriptionum Indicarum. Vol. I영어 (1877)
  • The Stupa of Bharhut: A Buddhist Monument Ornamented with Numerous Sculptures Illustrative of Buddhist Legend and History in the Third Century B.C.영어 (1879)
  • Book of Indian Eras영어 (1883)
  • Coins of Ancient India영어 (1891)
  • Mahâbodhi, or the great Buddhist temple under the Bodhi tree at Buddha-Gaya영어 (1892)
  • Coins of Medieval India영어 (1894)
  • Report of a Tour in Eastern Rajputana영어


추가 저작:

  • The First Archaeologist: Letters of Sir Alexander Cunningham to J.D.M. Beglar영어;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업인더 싱.

참조

[1] 웹사이트 Father of Indian Archaeology https://testbook.com[...]
[2] 간행물 Cunningham, Sir Alexander (1814–1893)
[3] 논문 Sir Alexander Cunningham (1814–1893): The First Phase of Indian Archaeology October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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