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사르나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르나트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슴의 주"를 의미하며, 부처가 처음 설법을 한 곳으로 불교의 중요한 순례지이다. 초기 불교 시대부터 굽타 제국 시대를 거치며 번성했으나, 12세기 후반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 18세기 이후 재발견되어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다메크 스투파, 아쇼카 석주, 사르나트 박물관 등 주요 유적이 있다. 현재는 불교 신자뿐 아니라 자이나교 신자들에게도 중요한 순례지이며, 다양한 사찰과 수도원이 건립되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인도의 유적 -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샤 자한이 뭄타즈 마할을 기리기 위해 1632년부터 1653년까지 건설한 페르시아, 무굴, 인도 이슬람 양식이 혼합된 묘소로, 순백색 대리석, 대칭 구조, 웅장한 돔이 특징적인 인도의 상징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지만 환경 문제에 직면해 있다.
  • 인도의 유적 - 골콘다
    골콘다는 인도 남부 데칸 고원에 위치한 요새 도시로, 과거 다이아몬드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유명 다이아몬드 산지이자 쿠투브 샤히 왕조의 수도로서 번성했고 현재는 폐허가 되었으나 역사 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 팔대성지 - 룸비니
    룸비니는 네팔에 위치한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지로, 아쇼카 왕의 기둥 비문과 마야데비 사원 발굴 조사로 역사적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국제적인 불교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지만, 탄생지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에 대한 논쟁도 존재한다.
  • 팔대성지 - 바이샬리
    바이샬리는 인도 비하르 주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리차비 공화국의 수도였으며 석가모니 부처와 마하비라가 활동했던 불교 및 자이나교의 중요한 유적지이다.
  •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도시 및 마을 - 바라나시
    바라나시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갠지스 강변에 위치한 힌두교 성지이자 문화 중심지로, 고대 카시 왕국의 수도였으며 종교 관광 중심지이자 전통 공예와 문화 활동이 활발하지만, 도시화와 관광객 증가로 인한 환경 문제와 빈곤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도시 및 마을 - 브린다반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에 위치한 브린다반은 크리슈나 신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힌두교 바이슈나바교의 중요한 순례지이자, 5,500여 개의 사원과 라다 크리슈나 신화 유산을 지닌 '과부들의 도시'로도 알려져 있으나, 도시화로 인한 환경 문제도 안고 있다.
사르나트 - [지명]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이름사르나트
별칭녹야원 (사슴 공원)
유형역사적인 마을
위치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바라나시 구
지역 언어보이푸리어
시간대UTC+5:30
불교적 의미
산스크리트어 명칭사란가나타 (saraṅga-nāthá)
중국어 명칭루예위안 (鹿野苑)
일본어 명칭사루나토/로쿠야온 (サールナート/鹿野苑)
한국어 명칭사르나트/녹야원(鹿野園)
싱할라어 명칭සාරනාත් (사라나트)
태국어 명칭สารนาถ (사라나트)
베트남어 명칭Sarnath
역사적 중요성
의미부처가 처음으로 설법한 장소, 불교 8대 성지 중 하나
관련 유적다메크 스투파
고대 불교 수도원 유적
사르나트 박물관
이미지
다메크 스투파 기념지 근처의 고대 불교 수도원
다메크 스투파에서 바라본 사르나트 전경
다메크 스투파
다메크 스투파
다르마 차크라
다르마 차크라
관련 링크
인도 정부 웹사이트사르나트에 대한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정부 웹사이트
불교 교육 협회 웹사이트부처넷 - 부처의 생애
액세스 투 인사이트 웹사이트마하 파리닙바나 숫타: 완전한 해탈에 대한 위대한 담화 (발췌)
액세스 투 인사이트 웹사이트 2마하 파리닙바나 숫타: 부처의 마지막 날들 (5부)

2. 어원

사르나트(Sarnath)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 Sāranganātha|사랑가나타sa(팔리어로는 'Sārangnāth')에서 유래하며, "사슴의 주(Lord of the Deer)"를 의미한다.[11] 이 이름은 고대 불교 전설을 가리키는데, 이 전설에서 보살은 사슴이었고 왕이 죽이려던 암사슴 대신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왕은 감동하여 그곳에 사슴 보호구역을 만들었다.[11] 산스크리트어로 "사슴 공원"을 뜻하는 말은 Mriga-dāva|므리가다바sa이며, 팔리어로는 'Miga-dāya'이다.

''Isipatana''는 팔리어 팔리 대장경에서 사르나트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이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Rishipattana|리쉬파타나sa에 해당한다. ''isi''(팔리어)와 리시|리쉬sa(산스크리트어)는 뛰어나고 깨달은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Isipatana''와 Rishipattana|리쉬파타나sa는 "성인들이 내려온 곳" 또는 "성현들이 내려온 언덕"으로 번역된다.

3. 역사

사르나트는 오랜 역사를 가진 불교 성지이다. 불교는 인도의 제2차 도시화 시대(기원전 600년경 ~ 기원전 200년경)에 바라나시에 기반을 둔 왕들과 상인들의 후원으로 사르나트에서 번성했다. 3세기경에는 삼마티야 불교의 중심지이자 예술과 건축의 중심지가 되었다.

굽타 제국 시대(4세기~6세기)에 불교는 인도에서 더욱 확장되었다. 중국 승려 법현은 400년~411년에 사르나트에서 네 개의 큰 탑과 두 개의 비하라를 보았다고 기록했다. 후굽타 왕조 시대에도 불교의 영향력은 계속 커졌으며, 현장은 640년경 사르나트에서 수백 개의 사원과 탑, 61m 높이의 불상이 있는 비하라를 보았다고 기록했다.[1] 현장은 또한 1500여 명의 승려들이 소승 불교를 연구하고, 아소카가 세운 기둥이 있다고 기록했다.[2][3]

팔라 제국(8세기~11세기) 시대에는 새로운 마하비하라들이 건설되고 기존 사찰들이 후원받았다. 이 시기 아시아 전역에서 불교 순례자들과 승려들이 사르나트를 방문했다. 팔라 왕조는 가하다발라 왕조로 대체되었는데, 이들은 힌두교도였지만 불교를 관용했다. 12세기 중반의 비문에는 쿠마라데비 왕비가 승려들을 위한 비하라 건설 또는 복원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12세기 후반, 무함마드 고르의 인도 원정으로 인도 북부에 약탈과 파괴가 일어났다. 꾸트브 앗딘 아이박은 1194년 바라나시와 사르나트를 파괴하고, 무함마드 바크티야르 칼지는 빅라마실라, 오단타푸리, 날란다를 파괴했다. 살아남은 불교도들은 네팔, 시킴, 티베트 등으로 피신했고, 12세기 말까지 불교 수도원과 도서관은 인도에서 거의 사라졌다.[16]

18세기 후반, 유럽인들의 인도 방문이 증가하면서 사르나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윌리엄 호지스는 다메크 스투파를 힌두 사원의 폐허로 잘못 묘사하기도 했다.[18] 조나단 던컨은 1794년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해체 과정에서 유물함을 발견했다고 묘사했다.[19]

1815년 콜린 맥켄지가 사르나트 유적 탐사를 처음으로 기록했고, 1835년부터 1836년까지 알렉산더 커닝험이 최초로 체계적인 발굴을 실시했다. 1851년부터 1852년까지 마크햄 키토는 추가 발굴을 통해 사르나트에 네 개의 스투파가 있음을 기록했다. 19세기 중반에는 바루나 강 다리 건설과 협궤 철도 건설을 위해 유적지에서 벽돌과 돌이 반출되면서 사르나트가 파괴되기도 했다.[20]

프리드리히 외르텔은 1904년부터 1905년까지 광범위한 발굴 작업을 수행하여 아쇼카 기둥 근처에서 사자상과 ''다르마차크라'' 조각의 잔해를 포함한 주요 유물을 발굴했다.

3. 1. 초기 불교 시대 (기원전 5세기 ~ 기원후 6세기)

불교는 인도의 제2차 도시화 시대(기원전 600년경 ~ 기원전 200년경, 마하자나파다 시대부터 난다 왕조와 마우리아 왕조 시대까지) 동안 사르나트에서 번영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바라나시에 기반을 둔 왕들과 부유한 상인들의 후원 덕분이었다. 3세기경에는 사르나트가 삼마티야 불교(초기 불교 종파 중 하나)의 중요한 중심지이자 예술과 건축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헤루카와 타라(마하비디야)의 이미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밀교 불교가 (나중에) 이곳에서도 실천되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시바와 브라마와 같은 힌두교 신들의 이미지가 이곳에서 발견되었고, 자이나교 사원이 다메크 스투파 바로 근처에 있었다.

불교는 굽타 제국(4세기~6세기) 시대에 인도에서 더욱 확장되었다. 법현은 400년~411년에 인도 북부 전역을 널리 여행한 중국 불교 승려였다. 그는 사르나트에 대한 묘사에서 네 개의 큰 탑과 두 개의 비하라(승려들이 거주하는)를 보았다고 언급했다.

3. 2. 불교의 지속적인 영향력 (6세기 ~ 8세기)

후굽타 왕조 시대에 불교의 영향력은 계속 커졌다. 당나라의 승려 현장이 640년경 사르나트를 방문했을 때, 그는 수백 개의 작은 사원과 탑, 그리고 높이 약 61m에 달하는 대규모 불상이 있는 비하라(vihara)를 보았다고 기록했다.[1] 현장은 또한 "약 1500명의 승려들이 삼마티야(Sammatiya) 학파에 따라 소승(Hinayana)을 연구하고 있다"고 기록했다.[2] 현장의 저술에는 붓다가 법륜(Dharmachakra)을 굴린 곳을 표시하는 탑 근처에 아소카가 세운 기둥이 언급되어 있다.[3]

3. 3. 팔라 제국과 가하다발라 왕조 시대 (8세기 ~ 12세기)

팔라 제국(8세기~11세기) 시대 통치자들은 오단타푸리, 소마푸라 마하비하라, 자가달라 마하비하라, 빅라마실라와 같은 새로운 마하비하라(mahavihara)들을 건설하고, 날란다와 사르나트 같은 기존의 사찰들을 후원했다. 이 기간 동안 아시아 전역에서 온 불교 순례자들과 승려들이 명상과 학업을 위해 사르나트를 방문했다. 팔라 왕조는 인도 아대륙을 지배한 마지막 주요 불교 왕조였다. 팔라 왕조는 바라나시에 수도를 둔 가하다발라 왕조에 의해 대체되었다.

가하다발라 왕들은 힌두교도였지만 불교를 관용했다. 20세기 초 사르나트에서 발굴된 비문들은 그곳의 사찰 중 일부가 가하다발라 통치자들의 왕실 후원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12세기 중반의 비문은 쿠마라데비 왕비(고빈다찬드라 왕의 왕비)이자 보드가야 피티파티 왕조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것으로, 그녀는 승려들을 위한 주거지인 비하라 건설 또는 복원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쿠마라데비 비문에서 언급된 구조물이 다르마 차크라 지나 비하라라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결정적이지 않다. 어떤 경우든, 그것은 1194년 파괴되기 전 사르나트에 건설된 마지막 구조물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1908년 3월 사르나트에서 발굴된 비문[12]은 현재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3. 4. 이슬람 세력의 침입과 사르나트의 파괴 (12세기 후반)

12세기 후반, 인도의 주요 불교 마하비하라(mahavihara)는 사르나트 외에 현재 비하르(Bihar) 주에 위치한 빅라마실라, 오단타푸리, 날란다였다. 이 네 곳의 교육 중심지는 12세기 내내 번영했는데, 이는 팔라(Pala) 왕조와 가하다발라(Gahadavala) 왕조 통치자들의 보호, 지원, 관용 덕분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쿠마라데비(Kumaradevi) 비문
은 고빈다찬드라(Govindachandra) 왕이 12세기 초중반에 투루시카(Turushkas)라 불리는 가즈나비드(Ghaznavids)의 침략으로부터 바라나시를 보호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인도 북부를 제외하고는 불교는 인도 아대륙 전역에서 쇠퇴하여 11세기까지 사실상 사라졌다.

12세기 후반 인도 아대륙에 대한 무슬림 정복은 인도 북부에 엄청난 약탈과 파괴를 가져왔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가즈니(Ghazni) 출신 구리드(Ghurid) 왕조 통치자 무함마드 고르의 인도 원정이었다. 무함마드 고르의 군대 사령관인 꾸트브 앗딘 아이박은 1194년 가즈니에서 바라나시와 사르나트로 군대를 이끌었다.[13][14] 당시 가하다발라(Gahadavala) 왕조의 왕이었던 자야찬드라(Jayachandra, 재위 약 1170~1194년)는 찬다와르 전투(Battle of Chandawar)에서 사망했다.[15] 바라나시와 사르나트의 귀중한 모든 것은 파괴되거나 약탈당했다.

꾸트브 앗딘 아이박은 약 1400마리의 낙타에 실을 만큼의 보물을 가져갔다고 한다. 13세기 페르시아 역사가 하산 니자미(Hasan Nizami)에 따르면, "거의 1000개의 사원이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모스크가 세워졌으며, 힌두의 라자(Rai)와 수장들은 구리드(Ghurids)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꾸트브 앗딘 아이박이 사르나트를 파괴한 반면, 무함마드 고르의 또 다른 노예 장군이었던 무함마드 바크티야르 칼지(Muhammad Bakhtiyar Khalji)의 군대는 불교 성지들을 계속 파괴했다. 그들은 1193년 빅라마실라, 1197년 오단타푸리, 1200년 날란다를 파괴했다. 인도 북부에서 이 학살을 피해 살아남은 불교도들은 네팔, 시킴, 티베트, 또는 인도 남부로 피신했다. 12세기 말까지 불교 수도원과 그들의 방대한 도서관은 인도 아대륙에서 거의 사라졌다.[16]

3. 5. 재발견과 약탈 (18세기)

18세기 후반, 유럽인들의 인도 방문이 증가했다. 1778년, 윌리엄 호지스는 인도를 방문한 최초의 영국 풍경화가였을 가능성이 있다.[17] 그는 인도에서 만난 예술과 건축물을 주의 깊게 관찰했고, 1794년에 인도 여행에 대한 삽화가 있는 책을 출판했다. 그의 책에는 모스크와 다른 이슬람 건축물, 힌두 사원, 그리고 그리스풍 기둥이 묘사되어 있다. 호지스는 다메크 스투파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묘사했지만, 힌두 사원의 폐허로 잘못 이해했다.[18]

사르나트 유적에 대한 최초의 확실한 현대적 언급에서, 조나단 던컨(아시아 학회의 창립 회원이자 후일 봄베이 총독)은 그곳의 벽돌 스투파 유물실에서 사암 상자에 든 녹색 대리석 유물함을 발견했다고 묘사했다. 이 유물함은 1794년 1월, 잠인다르 자가트 싱(바라나시의 라자인 마하라자 차이트 싱의 데완)의 직원들이 스투파(알렉산더 커닝엄은 이를 스투파 "K" 또는 "자가트 싱 스투파"라고 언급했다. 나중에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로 확인됨)[19]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던컨은 1799년에 그의 관찰 결과를 발표했다.

유물함에는 몇 개의 뼈와 진주가 들어 있었는데, 이후 갠지스 강에 버려졌다. 유물함 자체는 사라졌지만, 바깥쪽 사암 상자는 유물실에 다시 놓였고, 1835년 커닝엄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스투파의 벽돌은 운반되어 자가트간지, 바라나시의 시장 건설에 사용되었다. 자가트 싱과 그의 부하들은 다메크 스투파의 외벽의 상당 부분을 제거했고, 그가 자가트간지에 있는 자신의 집에 보관했던 여러 부처상도 제거했다.

3. 6. 본격적인 발굴과 약탈 (19세기)

18세기 후반, 유럽인들의 인도 방문이 증가하면서 사르나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1778년, 윌리엄 호지스는 인도를 방문한 최초의 영국 풍경화가 중 한 명으로, 인도의 건축물과 예술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17] 그는 1794년에 출판한 책에서 다메크 스투파를 힌두 사원의 폐허로 잘못 묘사하기도 했다.[18]

사르나트 유적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언급은 조나단 던컨(아시아 학회 창립 회원이자 후일 봄베이 총독)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1794년 1월, 잠인다르 자가트 싱(바라나시 라자의 데완)의 직원들이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알렉산더 커닝엄은 이를 "자가트 싱 스투파" 또는 스투파 "K"라고 언급)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녹색 대리석 유물함이 든 사암 상자를 발견했다고 묘사했다.[19] 이 유물함 안에는 뼈와 진주가 들어 있었는데, 이는 갠지스 강에 버려졌다. 유물함은 사라졌지만, 바깥쪽 사암 상자는 1835년 커닝엄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다. 스투파의 벽돌은 자가트간지 시장 건설에 사용되었고, 자가트 싱은 다메크 스투파 외벽과 여러 불상을 제거하여 자신의 집에 보관했다.

1813년경, 프랜시스 부캐넌 해밀턴은 사르나트(당시 불교 카시)의 개략적인 지도를 그렸다. 1815년에는 콜린 맥켄지 (영국 동인도 회사 장교이자 훗날 인도 최초의 측량국장)가 사르나트 유적 탐사를 처음으로 기록했다.

1835년부터 1836년까지, 알렉산더 커닝험은 사르나트에서 최초로 체계적인 고고학 발굴을 실시했다. 그는 법현과 현장의 저술, 그리고 던컨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밀한 측정과 발굴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수도원 "L"과 사찰 "M"에서 많은 조각상을 발굴하고,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에서 던컨이 보고한 사암 상자를 발견했다. 이 유물들은 콜카타 인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836년, 커닝험은 사르나트가 붓다의 첫 설법 장소임을 확실히 밝혔다.

1851년부터 1852년까지 마크햄 키토(Markham Kittoe)는 추가 발굴을 통해 사르나트에 네 개의 스투파가 있음을 기록하고, 병원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발굴했다. 그는 자가트 싱의 집에서 발견한 앉은 붓다 조각상의 비문을 기록하고, 사르나트가 대화재로 파괴되었다고 추측했다.

19세기 중반, 바루나 강 다리 건설을 위해 48개의 조각상과 많은 벽돌, 돌이 유적지에서 제거되었다.[20] 1898년경에는 협궤 철도 건설에 사용될 자갈을 위해 벽돌과 돌이 반출되면서 사르나트는 또다시 파괴되었다.

3. 7. 광범위한 발굴과 복원 (20세기)

18세기 후반, 유럽인들의 인도 방문이 증가하면서 사르나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1778년 인도를 방문한 최초의 영국 풍경화가인 윌리엄 호지스는 1794년 자신의 인도 여행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 그는 책에서 다메크 스투파를 힌두 사원의 폐허로 잘못 묘사하기도 했다.[18][17]

조나단 던컨(아시아 학회의 창립 회원이자 후일 봄베이 총독)은 1794년 1월, 잠인다르 자가트 싱(바라나시의 라자인 마하라자 차이트 싱의 데완)의 직원들이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알렉산더 커닝엄은 이를 스투파 "K" 또는 "자가트 싱 스투파"라고 언급했다.[19])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벽돌 스투파 유물실에서 사암 상자에 든 녹색 대리석 유물함을 발견했다고 묘사했다. 던컨은 1799년에 그의 관찰 결과를 발표했다.

유물함에는 몇 개의 뼈와 진주가 들어 있었는데, 이후 갠지스 강에 버려졌다. 유물함 자체는 사라졌지만, 바깥쪽 사암 상자는 유물실에 다시 놓였고, 1835년 커닝엄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스투파의 벽돌은 자가트간지 건설에 사용되었다. 자가트 싱과 그의 부하들은 다메크 스투파의 외벽의 상당 부분을 제거했고, 여러 부처상도 제거했다.

프리드리히 외르텔은 1904년부터 1905년까지 광범위한 발굴 작업을 수행했다.
프리드리히 외르텔의 발굴 계획. 사자상은 1905년 주요 사원의 서쪽(자갓 싱 스투파 북쪽)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팀은 다메크 스투파,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수도원, 사원, 병원, 아쇼카 기둥 근처 지역에 집중했다. 1905년 3월, 팀은 기둥의 기단과 기둥의 일부를 발굴했는데, 여기에는 분열 칙령, 사자상과 ''다르마차크라'' 조각의 잔해가 포함되어 있었다. 기원전 241~233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유물들은 지금까지 사르나트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유물이다. J. Ph. 포겔은 마우리아 시대브라흐미 문자로 쓰여진 비문을 번역했고, 기원전 249년으로 추정했다.

4. 주요 유적

불교는 인도의 제2차 도시화 시대(기원전 600년경 ~ 기원전 200년경)에 바라나시에 기반을 둔 왕들과 부유한 상인들의 후원으로 사르나트에서 번영했다. 3세기경에는 삼마티야 불교의 중요한 중심지이자 예술과 건축의 중심지가 되었다.[1]

굽타 제국 시대(4세기~6세기)에 불교는 더욱 확장되었다. 중국 불교 승려 법현은 사르나트에 네 개의 큰 탑과 두 개의 비하라(승려들이 거주하는 곳)를 보았다고 기록했다. 후굽타 왕조(6세기~8세기) 시대에 현장은 수백 개의 작은 사원과 탑, 대규모 불상이 있는 비하라를 보았다고 기록했으며, "약 1500명의 승려들이 삼마티야 학파에 따라 소승을 연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장의 저술에는 아소카왕이 세운 기둥이 언급되어 있다.[1]

팔라 제국 시대(8세기~11세기) 동안 통치자들은 새로운 마하비하라들을 건설하고, 날란다와 사르나트와 같은 기존의 사찰들을 후원했다. 이 기간 동안 아시아 전역에서 온 불교 순례자들과 승려들이 사르나트를 방문했으며, 팔라 왕조는 인도 아대륙을 지배한 마지막 주요 불교 왕조였다.[1]

가하다발라 왕들은 힌두교도였지만 불교를 관용했다. 12세기 중반의 비문은 쿠마라데비 왕비가 승려들을 위한 주거지인 비하라 건설 또는 복원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1]

12세기 후반, 무함마드 고르의 군대 사령관인 쿠트브 앗딘 아이바크는 1194년 가즈니에서 바라나시와 사르나트로 군대를 이끌었다. 당시 왕이었던 자야찬드라는 찬다와르 전투에서 사망했고, 바라나시와 사르나트의 귀중한 모든 것은 파괴되거나 약탈당했다.[1] 무함마드 바크티야르 칼지의 군대는 빅라마실라, 오단타푸리, 날란다를 파괴했으며, 살아남은 불교도들은 네팔, 시킴, 티베트, 또는 인도 남부로 피신했다.[1]

18세기 후반, 윌리엄 호지스는 다메크 스투파를 힌두 사원의 폐허로 잘못 묘사했다. 조나단 던컨은 스투파 유물실에서 유물함을 발견했다고 묘사했으며, 19세기 초 프랜시스 부캐넌 해밀턴이 사르나트의 개략적인 지도를 그렸고, 콜린 맥켄지는 유적에 대한 탐사를 처음으로 기록했다.[1]

1835년에서 1836년 사이에, 알렉산더 커닝험이 사르나트에서 최초의 체계적인 고고학 발굴을 실시했다. 그는 수도원 "L"과 사찰 "M"에서 많은 조각상들을 발굴하여 반출했으며, 던컨이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에서 보고한 사암 상자도 발견했다. 1861년, 커닝험은 인도 고고학 조사국의 창립자이자 초대 국장이 되었다.[1]

1851년에서 1852년 사이에 마크햄 키토가 사르나트에서 추가 발굴을 실시하여 네 개의 스투파가 있음을 기록했고, 병원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발굴했으며, 자가트 싱의 집에서 앉은 붓다 조각상을 발견하여 그 비문을 기록했다.[1]

프리드리히 외르텔은 1904년부터 1905년까지 광범위한 발굴 작업을 수행했다. 그의 팀은 아쇼카 기둥 근처 지역에 집중하여 기둥의 기단과 기둥의 일부, 사자상과 ''다르마차크라'' 조각의 잔해를 발굴했다.[1]

《마하파리니바나 수타》에 따르면, 부처는 사르나트를 그의 독실한 신자들이 방문하고 숭배해야 할 네 곳의 순례지 중 하나로 언급했다.[1] 그 결과, 사르나트는 불교도와 자이나교도 모두에게 순례지로서의 이전 지위를 회복했으며, 1998년 세계유산 목록 등재를 위한 후보로 지정되었다.[1]

주요 유적지는 다음과 같다.


  • 다메크 스투파: 부처의 첫 번째 설법 장소를 표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아쇼카 이전의 탑 중 하나이지만, 기초만 남아 있다.
  • 차우칸디 스투파: 부처가 그의 첫 다섯 제자를 다시 만난 곳을 기념한다.
  •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 아쇼카 사자상등 주요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분류:사르나트

4. 1. 다메크 스투파

다메크 스투파(Dhamek Stupa영어)는 부처가 처음으로 설법한 장소에 있다.[1] 뮬라간다 쿠티 비하라(초전법륜사)에는 야생사 향설이 그린 벽화가 있다.[1] 아소카왕의 석주에는 네 마리의 사자상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인도 국장의 원형이 되었다.[1]
인도 국장

4. 2. 아쇼카 석주



아소카왕의 석주에는 네 마리의 사자상이 장식되어 있다.

4. 3. 뮬라간다 쿠티 비하라 유적

뮬라간다 쿠티 비하라는 초전법륜사의 유적이다. 이곳에는 야생사 향설이 그린 벽화가 있다. 또한 아소카왕의 석주가 있는데, 네 마리의 사자상이 장식되어 있다. 이 사자상은 인도의 국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4. 4.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

제시된 원본 소스에는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으므로, 해당 섹션에 내용을 추가할 수는 없습니다. 이전 답변과 동일하게, 섹션 내용은 비어있게 됩니다.

5. 현대의 예배 장소

《마하파리니바나 수타》(《디가 니카야》의 수타 16)에 따르면, 부처는 사르나트를 그의 독실한 신자들이 방문하고 숭배하는 마음으로 바라봐야 할 네 곳의 순례지 중 하나로 언급했다.[9][10] 영국 동인도 회사의 식민 통치 기간 동안, 사르나트와 같은 고대 유적지는 광범위한 고고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수십 년 후 어느 정도의 복원이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사르나트는 불교도와 자이나교도 모두에게 순례지로서의 이전 지위를 회복했다. 1998년, 사르나트는 세계유산 목록 등재를 위한 후보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유엔 교육 과학 문화 기구)의 세계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 이 지명에는 두 그룹의 기념물이 포함된다. "A" 그룹은 차우칸디 탑으로 대표되며, 다른 모든 기념물(예: 사찰, 탑, 수도원, 아쇼카의 기둥)은 "B" 그룹에 포함된다.[21]

불교 순례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유적지는 다음과 같다.


  • 다메크 탑은 부처의 첫 번째 설법 장소를 표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학자들은 이 탑의 이름이 '다르마 차크라'(법륜을 돌림)라는 단어의 조합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22] 부처가 입멸한 후 그 자리에 사리탑이 세워졌고, 기원전 249년 부처의 사리를 모아 재분배하던 아쇼카에 의해 개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2] 내부에는 사리함이 보관되어 있었다. 높이 39m, 지름 28m의 인상적인 구조물이다.
  • 다르마라지카 탑은 사르나트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아쇼카 이전의 탑 중 하나이지만, 기초만 남아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광범위한 파괴와 고고학적 발굴의 대상이 되었다.
  • 여기에 세워진 아쇼카 기둥은 12세기 침략으로 부서졌지만, 많은 조각들이 원래 위치에 남아 있다. 기둥에는 원래 아쇼카 사자상이 얹혀 있었고, 그 위에는 큰 32개의 바퀴살이 있는 사암 법륜이 있었다. 현재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자상과 법륜은 현대 인도 국가를 상징한다. 이 두 가지 모두 인도 대법원의 문장에 등장하며,[23] 법륜은 인도 국기에도 포함되어 있다.
  • 고대 뮬라간다 쿠티 비하라의 유적은 부처가 첫 번째 우기철을 보낸 곳을 표시한다. 이곳은 나중에 정면에 아쇼카 기둥이 있는 주요 사원이 되었다. 5세기경의 사암 조각인 ''부처의 첫 설법''이 인근에서 발견되었다. 1930년대에 건립된 현대 뮬라간다 쿠티 비하라에는 현재 부처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다.
  • 다르마 차크라 지나 비하라는 거대한 수도원이며, 승려들의 거처로서 12세기 중반에 쿠마라데비(고빈다찬드라(가하다발라 왕조)의 아내, 서기 1114~1155년경)의 명에 의해 건설되거나 복원된 것으로 여겨진다.
  • 사슴공원 밖 0.8km에 위치한 차우칸디 탑은 부처가 그의 첫 다섯 제자 카운디냐, 아사지, 바디야, 바파, 마하나마를 다시 만난 곳을 기념한다. 1588년에 그의 아들인 악바르에 의해 후마윤 황제를 기념하여 세워진 팔각형 벽돌 탑으로 덮여 있다.
  •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에는 아쇼카 기둥 꼭대기에서 45피트 아래로 떨어진 후에도 온전하게 남은 유명한 아쇼카 사자상이 소장되어 있으며, 이는 인도의 국장이자 인도 국기의 국가 상징이 되었다. 이 박물관에는 5세기경의 사암 조각인 ''부처의 첫 설법''과 쿠마라데비 비문도 소장되어 있다.[12]


사르나트의 불교 승려


고고학적 유적지 외에도 사르나트에는 여러 순례지와 예배 장소가 있다.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 현대식 뮬라간다 쿠티 비하라 사원은 마하보디 협회가 건립한 사원으로 1931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부유한 하와이 출신의 자선가이자 후원자였던 메리 로빈슨 포스터가 이 프로젝트의 재정적 지원을 상당 부분 제공했으며,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건설을 감독했다. 다르마팔라는 스리랑카 출신의 불교 승려로, 7세기 동안 사실상 멸종 상태에 있던 인도 불교의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사원에는 5세기경의 ''붓다의 최초 설법'' 조각의 금박을 입힌 복제품이 있다. 내부 벽에는 일본의 화가 고세쓰 노스(1885-1973)가 그린 붓다의 삶의 중요한 사건들을 묘사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박물관 및 마하보디 협회 사무소(다르마팔라 로드에 위치, 현대식 뮬라간다 쿠티 비하라 남쪽)
  • 바미얀 석불에서 영감을 받은 높이 24.3m의 입상 불상이 사르나트의 태국 사찰과 수도원 부지에 있다.[24] 건설은 1997년에 시작되어 2011년에 마침내 공개되었다.[25]
  • 불교가 주요 종교인 여러 국가와 지역(캄보디아, 중국, 일본, 한국,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 티베트, 베트남 등)에서는 각 문화에 특징적인 스타일로 사르나트에 사찰과 수도원을 세웠으므로, 방문객들은 여러 다른 문화의 관점에서 불교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26]
  •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심은 보리수(보드가야의 보리수 묘목에서 자란 나무)
  • 팔덴 삼예 초코르 링 수도원, 오르갼 삼예 초코르 링 비구니암, 켄첸 팔덴 세랍 린포체 탑이 있는 팜삼바바 불교 센터
  • 바즈라 비디야 고등 불교 연구소
  • 차우칸디 탑 부지에 위치한 영적 지혜의 정원


사르나트 자이나 순례지


사르나트에서 북서쪽으로 약 1.7km 떨어진 싱푸르(심하푸리) 마을은 자이나교의 11번째 티르탄카라인 슈레얀사나타의 탄생지로 여겨진다. 또한 슈레얀사나타의 다섯 가지 길상의 삶의 사건들 중 네 가지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자이나 우주론에 따르면, 다섯 번째 길상의 사건은 묵사(解脫, moksha)의 성취이다. 슈레얀사나타는 사메트시카르에서 묵사를 성취한 20명의 자이나 티르탄카라들 중 한 명이었다.

사르나트는 수세기 동안 자이나교도들에게 중요한 순례지였다.[27] 17세기 자이나교 문서에는 바라나시에 있는 자이나 사원이 "유명한 보디사트바 성역" 근처에 있는 "다르멕사(dharmeksā)"라는 곳에 위치해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 산스크리트어 단어는 "법에 대한 사색"으로 번역되며, 분명히 다메크 스투파를 가리킨다. 현재의 건물—사르나트 자이나 순례지(슈리 디감바라 자이나 사원 또는 슈레얀사나타 자이나 사원으로도 알려짐)—는 1824년에 건설되었다. 다메크 스투파의 남서쪽으로 약 7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사원은 슈레얀사나타에게 봉헌되어 있다.[27] 이 사원의 주요 신상은 높이 75cm의 청색 슈레얀사나타 동상으로, 연화좌에 앉아 있다.

6. 자이나교 순례지



사르나트에서 북서쪽으로 약 1.7km 떨어진 싱푸르(심하푸리) 마을은 자이나교의 11번째 티르탄카라인 슈레얀사나타의 탄생지로 여겨진다.[27] 이곳은 슈레얀사나타의 다섯 가지 길상의 삶의 사건들 중 네 가지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자이나 우주론에 따르면, 다섯 번째 길상의 사건은 묵사(解脫, moksha)의 성취이다. 슈레얀사나타는 사메트시카르에서 묵사를 성취한 20명의 자이나 티르탄카라들 중 한 명이었다.

사르나트는 수세기 동안 자이나교도들에게 중요한 순례지였다.[27] 17세기 자이나교 문서에는 바라나시에 있는 자이나 사원이 "유명한 보디사트바 성역" 근처에 있는 "다르멕사(dharmeksā)"라는 곳에 위치해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 산스크리트어 단어는 "법에 대한 사색"으로 번역되며, 분명히 다메크 스투파를 가리킨다. 현재의 건물—사르나트 자이나 순례지(슈리 디감바라 자이나 사원 또는 슈레얀사나타 자이나 사원으로도 알려짐)—는 1824년에 건설되었다. 다메크 스투파의 남서쪽으로 약 7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사원은 슈레얀사나타에게 봉헌되어 있다.[27] 이 사원의 주요 신상은 높이 75cm의 청색 슈레얀사나타 동상으로, 연화좌에 앉아 있다.

7. 교통

사르나트 공원 지역의 남서쪽 끝에 있는 공원 지역 입구에서 동쪽으로 직선 도로를 따라 약 1.5km 지점에 인도 철도 사르나스(Sarnath) 역이 있으며, 도보 거리에 있다. 사르나스 역은 다음 역인 바라나시 시티(Varanasi City) 역을 경유하여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바라나시(Varanasi)의 중심역인 바라나시 정션(Varanasi Junction) 역과 연결되어 있다. 바라나시 정션 역에는 뉴델리와 8시간 만에 연결하는 고속열차인 반데 바라트 익스프레스(Vande Bharat Express)가 정차한다.

8. 기타

사르나트의 불교 및 영성과 관련 없는 관광 명소로는 사르나트 사슴공원(Sarnath Deer Park)과 어류 수로(Fish Canal), 그리고 사르나트 거북이 번식 및 재활 센터(Sarnath Turtle Breeding and Rehabilitation Centre)가 있다.[28]

사르나트 관광객 수[28]
연도국제 관광객국내 관광객총계
2013362,113838,5661,200,679
2014374,268899,4571,273,725
2015388,102924,5521,312,654
2016409,242957,3201,366,562
2017430,6821,024,5891,455,271
2018435,7521,070,0351,505,787
2019336,1361,132,6151,468,751



1832년 레티시아 엘리자베스 랜던(Letitia Elizabeth Landon)은 사무엘 프라우트(Samuel Prout)의 그림에 붙인 시적 삽화 ''Sarnat, a Boodh Monument''에서 세계의 4대 종교를 비교하고 인도에서 불교도들이 박해받고 추방당한 사실을 언급했다.

사르나트는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의 1901년 소설 ''킴''의 배경 중 한 곳이다. 테슈 라마(Teshoo Lama)는 순례를 떠나지 않을 때 사르나트의 "티르탄카라 사원"에 머문다.

"이름 없는 도시"는 H. P.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가 1921년에 발표한 허구의 단편 소설이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이름 없는 도시의 폐허를 보면서 "인류가 젊었을 때 Mnar 땅에 서 있던 파멸된 사르나트와 인류가 존재하기 전에 회색 돌로 조각된 Ib를 생각했다."고 말한다. 러브크래프트는 이전에 1920년 작품 "사르나트에 온 파멸"에서 허구의 도시 사르나트를 묘사했다.

참조

[1] 뉴스 History: The Mesmeric Deer Park of Sarnath Maps of India 2013-09-16
[2] 뉴스 Deer Park Times of India 2017-01-11
[3] 웹사이트 About Sarnath https://nri.up.gov.i[...] NRI Department, Government of Uttar Pradesh, India 2023-01-01
[4] 간행물 Sarnath: The First Turning of the Dharma Wheel Samye Translations
[5] 뉴스 Sarnath struggles for recognition as heritage bid gathers dust The Times of India 2024-04-19
[6] 웹사이트 The First Five Monks https://www.buddhane[...] Buddha Dharma Education Association Inc. 2023-01-01
[7] 서적 The Great Pilgrimage Sites in India
[8] 문서 Sarnath Varanasi on Line
[9] 웹사이트 Maha-parinibbana Sutta: The Great Discourse on the Total Unbinding (excerpt) https://www.accessto[...] Barre Center for Buddhist Studies 2023-01-01
[10] 웹사이트 Maha-parinibbana Sutta: Last Days of the Buddha (Part Five) https://www.accessto[...] Barre Center for Buddhist Studies 2023-01-01
[11] 웹사이트 Buddha Tales, Volume 1 http://www.buddhanet[...] Buddha Dharma Education Association Inc. 2023-01-03
[12] 웹사이트 Accession Number: 33 (Kumaradevi inscription) http://www.sarnathmu[...] 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 Sarnath Circle 2023-01-02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웹사이트 Disappearance of Buddhism in India https://www.original[...] 2024-12-13
[17] 뉴스 India's past on canvas https://www.tribunei[...] Tribune Trust 2023-01-02
[18] 서적
[19] 웹사이트 Dhamek Stupa https://www.asisarna[...] 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 Sarnath Circle 2023-01-01
[20] 서적
[21] 웹사이트 Ancient Buddhist Site, Sarnath, Varanasi, Uttar Pradesh https://whc.unesco.o[...]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2023-01-01
[22] 웹사이트 Dhamek Stupa in Sarnath https://guidevaranas[...]
[23] 서적
[24] 뉴스 Thai Temple & Monastery https://timesofindia[...] 2023-01-01
[25] 뉴스 Sarnath gets country's tallest statue of Buddha https://timesofindia[...] 2023-01-01
[26] 뉴스 Centuries of Pilgrimage:Buddhists Still Flock to Sarnath https://www.nytimes.[...] 2023-01-01
[27] 뉴스 Digambar Jain Temple https://timesofindia[...] 2017-01-11
[28] 웹사이트 Annual Tourist Visits Statistics - 2017, 2018, 2019, 2020 & 2021 https://www.uptouris[...] Department of Tourism, Uttar Pradesh 2023-01-01
[29] 서적 世界の聖地バイブル : パワースポット&スピリチュアルスポットのガイド決定版 ガイアブックス、産調出版
[30] 서적 岩波 仏教辞典 第2版 岩波書店
[31] 서적 仏教、本当の教え 中央公論新社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