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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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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장은 602년 중국 뤄저우에서 태어난 불교 승려로, 17년간의 구법 여행을 통해 657편의 산스크리트 불교 경전을 입수하여 번역했다. 그는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며 138개국의 풍토와 관습을 기록한 《대당서역기》를 저술했으며, 1,330권의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동아시아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유가행파 불교에 관심을 갖고 법상종을 창시했으며, 그의 생애는 소설 《서유기》의 삼장법사 캐릭터에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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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4세기 현장 그림, 일본 가마쿠라 시대
본명진휘 (陳褘) 또는 진의 (陳禕)
법명목샤데바 (Mokṣadeva)
승명현장 (Xuanzang)
출생일602년 4월 6일
출생지뤄양, 수나라
사망일664년 2월 5일
사망지퉁촨, 당나라
종교불교
학파동아시아 유가행
스승계현
제자규기
주요 저서대당서역기 외 다수의 불교 경전
중국어 정보
간체玄奘
번체玄奘
병음Xuánzàng
주음부호ㄒㄩㄢˊㄗㄤˋ
발음슈엔장
로마자 표기Hsüan2-tsang4
민난어Hiân-tsòng
객가어Hian2-tsong4
오어Yeu-tsaõ
중고음ɣwen-dzáng
산스크리트어ह्वे॒न् साङ्, मोक्षदेवः
로마자 표기 (본명)
본명 (진휘)Chén Huī
본명 (진의)Chén Yī
일본어 정보
이름현장 (げんじょう)
존칭삼장법사 (三蔵法師)
소속 종파법상종
사원대자은사
제자기, 도쇼
기타 정보
관련 인물당삼장 (소설 서유기의 등장인물, 현장을 모델로 함)

2. 생애

현장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실했으며,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효를 실천하여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10] 형의 영향으로 불교 승려가 되기를 원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낙양 정토사에서 형과 함께 대승불교와 초기 불교 학파를 공부했다.[10] 수나라가 멸망한 뒤 장안과 성도로 피난하여 학업을 이어갔다.[11]

20세에 정식 승려가 된 현장은[12] 중국어 번역 불경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인도에서 원전을 구하기로 결심했다.[1] 법현(法顯)의 인도 방문기를 알고 있었던 그는 번역되지 않은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구하고자 했다.[1]

2. 1. 출생과 출가

현장(玄奘)은 602년 4월 6일 뤄저우(洛州, 현재의 낙양 허난성 부근 구시진(緱氏鎮) 천허향(陳河村))에서 진혜(陳惠) 또는 진의(陳藝)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9] 그의 가문은 대대로 학문에 밝았으며, 현장은 네 형제 중 막내였다.[1] 증조부 진흠(陳欽)은 동위 시대에 상당(上黨, 현재의 창지 산서성) 태수를 지냈고, 조부 진강(陳康)은 북제 시대에 태학(太學, 국립대학) 교수였다. 아버지 진휘(陳惠)는 수나라 시대에 강릉현(江陵縣) 현령을 지냈다.[10]

어린 시절 현장은 형처럼 불교 승려가 되고자 했다. 611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5년 동안 낙양 정토사(淨土寺)에서 형 진소(陳素, 장제(長捷)로도 알려짐)와 함께 살며 대승불교와 다양한 초기 불교 학파를 공부했다.[10]

618년 수나라가 멸망하자 현장과 형은 당나라 수도로 선포된 장안과 남쪽 사천성 성도로 피난했다. 두 형제는 공휘(孔暉)의 사찰에서 2~3년간 『아비달마코사 샤스트라(Abhidharma-kośa Śāstra)』 등을 공부했다.[11]

622년 현장이라는 법명을 받고 스무 살에 정식 승려가 되었다.[12] 당시 중국어 번역본의 수많은 모순과 불일치를 발견한 현장은 불교 발상지인 인도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법현의 인도 방문을 알고 있었던 그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번역되지 않은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인도에서 구하고자 했다.[1]

현장은 수(隋)나라 인수(仁壽) 2년(602년) 낙양 근처 낙주(洛州) 규씨현(緱氏縣)[72][73][74](현재의 허난성 낙양시 연사구(偃師区) 규씨진(緱氏鎮))에서 진혜(陳慧, 또는 진혜(陳恵))의 넷째 아들[72][74]로 태어났다. 어머니 송씨(宋氏)는 낙주 장리(長吏)를 지낸 송흠(宋欽)의 딸이다.[72] 자(字)는 현장(玄奘)[72][74]이며, 계명(戒名)으로 이를 휘(諱)로 삼았다.

진씨(陳氏)는 후한의 진식(陳寔)[72][73][74]을 시조로 하는 진류(陳留) 출신 사대부(士大夫) 가문으로, 여러 지방관을 역임했다. 증조부 진흠(陳欽, 또는 진산(陳山))은 북위 시대에 상당태수(上黨太守)를 지냈다.[72][74] 조부 진강(陳康)은 북제에 벼슬하고 규씨로 이주했다.[72][73][74]

8세 때, 아버지에게서 『효경(孝經)』을 배우던 현장은 “증자피석(曾子避席)” 구절을 듣고 “증자(曾子)조차 자리를 피했는데, 나 또한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라며 옷깃을 바로잡고 일어선 채로 가르침을 받았다. 이 일화로 현장의 신동다운 모습이 유명해졌다.[74]

10세[75]에 아버지를 여읜 현장은, 형[74] 장첩(長捷, 속명은 진소(陳素)[73])이 출가하여 낙양 정토사(淨土寺)에 머물게 된[72][73][74] 것을 계기로, 자신도 정토사에서 배우며 11세에 『유마경(維摩經)』과 『법화경(法華經)』을 암송했다.[73] 얼마 후 승려 시험에 응시하려 했으나 너무 어려 시험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문 앞에서 기다렸다. 이를 알게 된 수(隋)나라 대리경(大理卿) 정선과는 현장에게 여러 질문을 한 후, 왜 출가하려는지 물었고, 현장은 “멀리는 여래(如來)를 계승하고, 가까이는 유법(遺法)을 빛내고 싶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74] 정선과는 “이 기품은 얻기 어려운 것이다.”라고 평가하며 특례를 인정했고,[72][74] 현장은 도첩(度牒)을 얻어 출가했다. 형과 함께 정토사에 머물게 된 현장은 13세에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과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웠다.[72][73][74]

618년, 수(隋)나라가 쇠퇴하고 낙양 정세가 불안해지자, 17세의 현장은 형과 함께 장안 장엄사(莊嚴寺)[73]로 옮겼다. 그러나 장안은 온 도시가 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있어, 현장이 바라던 강석(講釋)은 없었다.[72][73][74] 과거 양제(煬帝)가 낙양에 모았던 명승(名僧)들이 주로 이주(益州)에 흩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현장은 이주 순례를 계획, 619년에 형과 함께 성도에 이르러 『아비담(阿毘曇)론』을 배웠다.

622년, 21세의 현장은 성도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72][74] 함께 행동했던 장첩은 성도 공혜사(空慧寺)에 머물게 되었으므로, 현장은 홀로 떠나 상인들과 함께 삼협(三峽)을 내려가 경주(荊州) 천황사(天皇寺)에서 배웠다.[72][73][74]

2. 2. 구법 여행

현장은 불교 경전 연구에 원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불교 유적 순례를 희망했다. 629년(정관 3년), 그는 당나라에 출국 허가를 요청했으나, 당시 당나라 건국 초기라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여 허가를 받지 못했다.[13] 현장은 국법을 어기고 몰래 출국하여 관리의 감시를 피해 하서회랑을 거쳐 고창에 도착했다.

고창왕 국문태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에 현장을 국사로 삼으려 했으나, 현장의 인도행 의지가 강하여 금전과 인력을 지원하고 여러 왕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문서를 써 주었다. 현장은 서역 상인들과 함께 실크로드(오아시스의 길) 남쪽 길에서 산맥을 넘어 북쪽 길로 가는 경로로 중앙아시아를 여행하여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에 도착했다.

627년(일설에는 629년) 인도로 출발한 현장은 쿠차와 투르판 등 서역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지나 천축의 날란다 사원에 도착했다.[13] 그의 여정은 《대당서역기》에 잘 나타나 있으며, 《만화 십팔사략》에 따르면 불교를 믿는 관리들이 통행증을 내주고 위험한 길을 안내해 주었다고 한다.

630년경, 현장은 투르판(염기)에 도착하여 불교 신자인 왕을 만났다.[14] 왕은 현장에게 여행을 포기하고 불교 지식을 가르쳐 줄 것을 설득하려 했으나, 현장은 거절하고 여행을 계속했다. 현장은 투르판에 설일체유부 계열 사찰이 10개 이상 있으며, 2,000명의 승려들이 세 가지 깨끗한 고기를 먹는다고 기록했다.[14] 이는 대승불교의 채식과 달랐다.

현장은 쿠차에 도착하여 1,000리에 600리 크기의 이 나라에 5,000명의 승려와 100개가 넘는 사찰이 있다고 기록했다.[15]

현장은 카라호자에서 한 달간 《인왕반야경》을 설법했고, 국문태 왕에게 많은 선물을 받았다. 10여 년 후 불경을 가지고 카라호자에 들러 귀환하려 했으나, 이미 당나라에 멸망한 뒤였다.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크수를 지나 토크마크에 이르러 돌궐(Göktürks)의 카간(Khagan)을 만났다. 이후 타슈켄트(Tashkent)(우즈베키스탄(Uzbekistan))로 향했다. 현장은 동쪽 차쿠리 사원과 아스카리아 사원 등 여러 사찰을 묘사하며 부처의 발자국과 불상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발루카에서는 설일체유부(Sarvastivada) 계열이 유행했다. 그는 사마르칸트, 부하라 등 여러 나라를 거쳤다.[16]

파미르 고원을 건너 박트라(Bactra)(발크)로 진입했다.[16] 박트라 수도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불상과 귀중품이 가득한 사찰이 있었고, 비슈라바나(Vaishravana) 신이 수호신으로 모셔져 있었다. 이 사찰은 투르크 추장들의 습격을 받았다. 현장은 부처의 치아 사리와 빗자루가 있는 사찰, 오래된 비하라와 탑(stupa)들을 언급했다.[17]

박트라 남쪽의 대설산맥을 넘어 바미얀에 도착했다.[17] 현장은 바위에 새겨진 높이 약 140피트의 거대한 석불상과 보석 장식을 기록했다. 계곡에는 불교 사찰과 높이 100피트가 넘는 청동 불상이 있었다. 그는 이 불상이 여러 부분으로 주조된 후 합쳐졌다고 들었다. 바미얀 계곡 동쪽에는 1,000피트 길이의 열반에 든 불상이 있었다.[17]

현장은 바미얀 지역 바위에 새겨진 거대한 불상들을 묘사하고 있다 (위: 19세기 스케치, 2001년 탈레반에 의해 파괴됨).


동쪽으로 흑색 산맥을 넘어 카피샤를 묘사하며, 대승불교가 유행했다고 기록했다.[18] 100개가 넘는 사찰과 탑, 6,000명이 넘는 승려들이 있었다. 현장은 "알몸으로 다니며 먼지를 바르는 이단 신자들"이 있는 10개가 넘는 데바 사원(힌두교)도 언급했다.[18]

현장은 이 나라 백성들이 2세기경 쿠샨 제국의 간다라 카니슈카 왕을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동쪽에는 자주 눈사태가 나는 아루나 산과 "스베타바트 사원 도시"가 있다. 현장은 부처의 유골 조각, 아소카 왕이 건설한 네 개의 탑을 언급했다.[18]

629년에서 645년 사이에 현장이 인도를 여행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로. 그는 비하르주에 있는 날란다를 비롯하여 현재 카슈미르, 구자라트, 마디아 프라데시, 오디샤, 타밀나두, 방글라데시에 있는 지역들을 방문하였다.


현장은 흑산맥을 넘어 람파(Lampa)에 들어감으로써 인도에 진입했다고 기술한다. 그는 인도에 대한 내용을 중앙아시아와 구분하여 다룬다. 그는 인도를 "Tianzhu", "Shengdu", "Xiandou"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으며, 최근 학계에서는 "Indu"가 가장 가까운 발음이라고 제시한다.[19]

현장은 인도가 9만 리가 넘는 광대한 나라이며, 70개의 왕국이 있고, 삼면이 바다이며 북쪽은 눈 덮인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말한다. 비옥하고 습윤한 땅이며, 경작이 잘 되고 초목이 무성하다.[19] 그는 인도가 고유한 관습을 가지고 있으며, 거리를 측정하는 단위로 "요자나(yojana)"를 사용한다고 덧붙인다.

인도의 왕국들은 수많은 마을과 도시들을 가지고 있다. 도시들은 네모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거리는 구불구불하고 좁으며,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술은 골목길 상점에서 판매된다. 도살업자, 어부, 사형 집행자, 청소부는 도시 안에 살 수 없다. 도시는 벽돌로 지어졌으며, 가옥들은 대부분 벽돌이나 "엮은 대나무 또는 나무"로 지어졌다. 오두막은 짚과 풀로 지붕을 덮었다.[20]

인도 주민들은 바닥을 청소한 후 소똥으로 바닥을 칠하고 꽃으로 장식한다. 아이들은 일곱 살에 학교에 가서 오지(五知)를 배우는데, 문법, 기술, 의학, 논리학, 인과론 등이다.

현장은 인도 문화의 다양한 측면, 패션, 헤어스타일, 맨발 선호, 배설 후 손 씻기, 특별한 나무 가지로 이 닦기, 사원 방문 전 목욕, 사원 예배, 47개 문자의 알파벳, 다양한 언어 등을 소개한다.[20][21][22]

현장은 소승불교대승불교 공동체의 차이를 언급한다. 불교에는 18개 종파가 있으며, 서로 대립하고 논쟁한다. 각 종파는 승려들을 위한 다른 규칙을 가지고 있다.[20] 경전 하나를 설명할 수 없는 승려는 일상 업무를 해야 하고, 한 권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승려는 면제된다. 여러 권의 경전을 설명할 수 있는 승려는 더 좋은 방, 시중, 평신도 하인, 여행용 코끼리, 경호원 등을 제공받는다.[20]

현장은 람파카(라그만 주, 카불 강 상류)를 북인도 영토로 묘사하며, 모든 사찰에서 대승불교를 연구했다고 기록했다.[23] 이곳에는 이단자들이 자주 찾는 수십 개의 데바 사원(힌두교 사원)이 있었다. 람파카 남동쪽 낭가르하르 주 지역에는 많은 불교 사찰과 다섯 개의 데바 사원이 있었으나, 승려 수는 적었다.

탑들은 버려져 낡은 상태였다. 현지 불교도들은 부처가 공중을 날아 이곳에서 설법했다고 믿었다. 낭가르하르에는 아소카 왕이 세운 높이 300피트의 탑이 있었다. 람파카와 낭가르하르는 모두 자체 왕을 가진 독립 국가였지만, 바미얀 근처 카피사 왕국의 속국이었다.[23]

이들 왕국의 사찰들은 웅장했으며, 네 개의 탑과 3층 전당이 있었다. 이음매, 서까래, 처마, 지붕 서까래에는 조각상들이 있었다. 인도인들은 벽, 문, 창문에 색깔과 그림을 칠했다. 사람들은 외부는 단순하고 내부는 화려하게 장식된 집을 선호했으며, 집을 동쪽으로 향하게 지었다.[20]

현장은 부처의 빛나는 바위 발자국, 용, 나가 이야기, 부처의 눈알이 "사과만큼 크고 빛나는" 탑, 기적을 행하는 흰 돌 부처상 등 사건들을 기록했다.[24] 현장이 어두운 동굴에서 ''Srimaladevi Simhanadasutra''를 낭송하자 위험한 존재들이 불교도가 되었다는 내용도 있다.

남동쪽으로 약 500리(7세기 기준 약 200km) 떨어진 곳에는 간다라 지역이 있는데, 수도는 푸루샤푸라이다. 이곳은 고대 현자와 인도 ''샤스트라'' 저술가들의 땅이며, 나라야나데바, 아상가, 바수반두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24] 푸루샤푸라 남동쪽에는 카니슈카 황제가 세운 탑이 있다. 간다라에는 수많은 성스러운 불교 유적지가 있으며, 현장은 이 모든 곳을 방문하여 예배를 올렸다. 그는 이 지역의 탑과 불상을 "웅장하고 완벽한 장인정신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불렀다.[24]

카슈미르(Kashmir)로 북쪽으로 이동하던 그는 푸시칼라바티(Pushkalavati) 시에 도착하여 "웅장한 탑과 큰 사찰들"에서 예배를 드렸다. 현장은 스와트 강(Swat River)이 흐르는 우다야나(Udayana)국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초기 불교 5종파의 사찰 1400개가 있었으나, 대승불교의 발전으로 인기를 잃었다. 현장에 따르면 이들 초기 불교 종파의 사찰들은 황폐해져 승려들의 수도 적다고 한다. 그는 히로(Hi-lo)와 망글라우르(Manglaur) 시에 도착했다.

망글라우르 북동쪽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있는 불교 사찰이 있다. 1000리(里)를 더 지나 그는 우다야나의 옛 수도인 다라다 계곡(Darada valley)에 도착했는데, 100피트 높이의 금빛 목조 마이뜨레야 보살상이 있었다. 그의 여행기에 따르면 이 불상은 하늘에 세 번 올라간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현장은 인도 북서부에 수천 개의 사찰과 탑이 있다고 기록했다. 위: 탁실라(Taxila)의 다르마라지카 탑(Dharmarajika stupa) 유적


현장은 "독이 있는 용과 사악한 동물들"이 있는 강을 건넌 후 탁실라(Taxila)에 도착했다. 거기서 2200리를 이동한 후 싱하푸라(Simhapura)(칼라바그(Kalabagh)), 우라사(Urasa)(하자라), 카슈미르(Kashmira)를 거쳐갔다.[25] 그는 왕과 자이엔드라 사찰(Jayendra monastery)의 많은 승려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카슈미르는 매우 추운 기후를 가진 땅이며, 종종 바람 없이 고요하다. 이 지역에는 호수가 있으며, 많은 꽃과 과일, 사프란, 약초가 자란다. 카슈미르에는 100개가 넘는 사찰과 5000명이 넘는 승려가 있다. 주민들은 아소카에 의해 건설된 네 개의 큰 탑을 존경한다.

가니시카 황제도 이곳에 많은 불교 사찰을 건설했다. 그는 구리판에 96만 자의 논문을 쓰고 새로 지은 큰 탑에 보관했다. 현장은 카슈미르 지역에는 삼장(Tripitaka)에 정통한 많은 승려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카슈미르에 2년 동안 머물면서 그들과 논문을 연구했다.[25]

현장은 불교도와 비불교도 모두의 도움을 받은 사건들을 묘사한다. 예를 들어, 사칼라(Sakala)와 나라심하(Narasimha) 도시를 떠나 큰 팔라샤 숲(Great Palasha forest)을 지나가다 강도를 만나 죽을 위기에 처한다. 한 승려와 그는 도망쳐 마을 근처에서 브라만(Brahmana)을 만난다. 브라만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현장의 동료들을 구출한다.

다른 구출된 동료들이 재산 손실에 통곡하는 동안, 현장은 그들이 살아있음을 기뻐해야 한다고 일깨워 준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여정을 돕는다. 현장은 700세의 브라만과 100세가 넘는 두 명의 동료를 만나는데, 그들은 모든 베다와 불교의 『중론(Madhyamika sastra)』을 숙달했다. 현장은 그들을 이단자(비불교도)라고 부른다. 이들은 현장과 동료들이 새 옷과 음식을 얻도록 돕는다. 현장은 이 브라만과 한 달 동안 머물며 『중론(Madhyamika sastra)』을 공부했다.

카냐쿠브자(Kusumapura)는 서쪽으로 갠지스 강을 끼고 있으며, 꽃, 맑은 물, 번영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현장에 따르면, 그들은 소박하고 정직하며, 잘생기고 우아하다. 그들은 예술과 문학을 소중히 여기며, 명료하게 말한다. 인구의 절반은 불교도이고, 절반은 이단이다. 불교도들은 대승불교소승불교를 모두 연구한다. 이단들은 200개가 넘는 데바(deva) 사원을 가지고 있다.[31]

현재 군주는 바이스 크샤트리아 혈통의 힌두교도인 하르샤바르다나 (Harshavardhana)이다. 현장은 쉴라디티아 왕자의 이야기를 묘사하며, 그가 사찰과 사원을 건설하고, 축제일에 승려와 사제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고 한다. 그는 수도 남동쪽에 있는 사찰들과 돌과 벽돌로 지어진 높이 30피트의 불상이 있는 불교 사원을 묘사한다. 현장에 따르면, 이 사원 남쪽에는 청석으로 지어진 수르야(Surya) 사원이 있다. 수르야 (Surya) 사원 옆에는 마헤슈바라(시바 (Shiva)) 사원도 있는데, 청석으로 만들어졌다. 두 사원 모두 조각으로 가득 차 있다.[32] 쉴라디티아의 수도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리 떨어진 곳에는 갠지스 강 동쪽 강둑에 나바데바쿨라(Navadevakula) 도시가 있다.[32]

남동쪽으로 약 600리 떨어진 곳에는 아요디아 (Ayodhya)가 있다. 곡물이 생산되고, 과일과 꽃이 풍부하다. 사람들은 온화하고 예술과 공예에 헌신적이다. 아요디아에는 100개가 넘는 사찰과 소승불교대승불교를 연구하는 3,000명이 넘는 승려가 있다. 수도에는 10개의 데바(deva) 사원이 있다. 이곳은 소승불교 (Sautrantika) 학파의 샤스트라(shastras)가 편찬된 곳이다.[32] 아요디아에서 동쪽으로 수백 리 떨어진 곳에는 아야무카(Ayamukha)가 있다. 현장에 따르면, 이곳 사람들도 정직하고 소박하다. 대부분 소승불교를 연구하는 1,000명이 넘는 승려가 있는 다섯 개의 사찰이 있다. 그 근처에는 10개의 데바(deva) 사원이 있다.[33]

현장은 프라야가를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이 만나는 위대한 도시로 묘사하며,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금식하고 목욕하고 시주하는 곳이라고 한다.


남동쪽으로 약 700리 떨어진 곳에는 야무나 (Yamuna) 강변에 프라야가 (Prayaga)가 있다. 과일 나무와 곡물 작물이 있고, 사람들은 친절하고 도움이 된다. 대부분 이단 종교를 믿으며, 프라야가에는 수백 개의 데바(deva) 사원이 있다.[33] 이 도시 남쪽에는 참파카 (champaka) 꽃으로 가득한 숲이 있는데, 기초가 무너진 100피트 높이의 고대 스투파가 있다. 이 스투파는 아쇼카 (Ashoka)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 도시에는 장식된 건물이 있는 큰 사원이 있다. 이 도시 동쪽에는 두 강이 만나 10리 이상 넓이의 모래톱을 형성하는데, 이곳은 시주 장소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목욕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34]

프라야가 (Prayaga)에서 500리 떨어진 곳에는 카우삼비 (Kausambi)가 있다. 쌀과 사탕수수를 생산한다. 시민들은 대담하고 격렬하며, 선행에 헌신적이다. 300명 정도의 승려가 있는 10개의 황폐한 불교 사찰이 있다. 이 지역에는 50개의 데바(deva) 사원과 비불교도들이 있다. 수도의 궁궐 안에는 불상이 있는 불교 사원이 있다. 현장은 카우삼비 (Kausambi)는 불교 경전에서 불법 (Buddha Dharma)이 끝나는 곳으로 예언된 곳이라고 덧붙인다.[35]

그는 북동쪽으로 갠지스 강을 건너 비샤카(Vishaka)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 사람들이 성실하고 정직하며, 학문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20개의 사찰과 소승불교를 연구하는 3,000명의 승려가 있다. 비샤카에는 비불교도와 50개가 넘는 데바(deva) 사원이 있다.[35]

현장법사의 여행기 6권에서는 불교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 중 일부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사바스티(Śrāvastī)(우타르프라데시주 북동부)부터 시작하여, 그곳이 6천 리가 넘는 둘레를 가진 나라라고 묘사한다. 현장법사에 따르면 수도는 황폐해졌지만, 일부 주민들은 여전히 살고 있다. 수도에는 100개가 넘는 사찰이 있지만, 대부분 낡았으며, 승려들은 소승불교를 연구하고 있다. 이 나라에는 100개의 데바(deva) 사원이 있다.[36] 그는 프라세나지트(Prasenajit)의 궁전 폐허, 대법당 탑, 부처의 외숙모를 위한 사원을 보았다. 현장법사에 따르면, 이들 옆에는 앙굴리말라(Angulimala)의 큰 탑이 있다. 도시에서 남쪽으로 약 5리(7세기 기준 약 2km) 떨어진 곳에는 제다반나(Jetavana) 정원이 있으며, 높이 70피트의 기둥 두 개가 서 있지만, 사찰은 폐허가 되어 있다. 현장법사는 부처와 관련된 사바스티(Śrāvastī) 전설과 관련된 기념물들을 보았지만, 대부분 낡은 상태였다. 그는 높이 60피트의 석가모니불상이 있는 불교 사찰과 부처 사찰과 크기가 거의 같은 데바(deva) 사원을 보았는데, 두 사찰 모두 양호한 상태였다. 사바스티 수도의 북서쪽으로 60리 이상 떨어진 곳에서 아소카(Aśoka)가 카샤파 불(Kashyapa Buddha)을 위해 세운 탑들을 보았는데, 현장법사에 따르면 카샤파 불은 "2만 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36]

현장법사는 깨달음을 얻은 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인 사바스티 유적(위)을 방문했다.


사바스티(Śrāvastī)에서 현장법사는 남동쪽으로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로 여행했다. 그는 이 나라에는 통치자가 없으며, 모든 도시에는 각자의 지배자가 있다고 말한다. 이 지역에는 1천 개가 넘는 사찰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낡았다. 약 3천 명의 승려들이 소승불교를 연구하고 있다. 이 나라는 두 개의 데바(deva) 사원을 가지고 있다. 그는 흰 말을 탄 왕자의 그림이 있는 불교 사찰과 부처의 초기 생애에 대한 유적과 전설, 샤크야(Shakya) 족에 대한 전설들을 묘사했다.[37]

카필라바스투 이후, 그는 동쪽으로 라마그라마(라마) 지역으로 갔다. 이 지역은 인구 밀도가 낮고, 도시와 마을은 낡은 상태이다. 그는 뱀과 용이 연못에서 나와 탑을 돌고, 코끼리가 꽃을 따서 이 탑에 뿌린다는 이야기를 언급했다. 현장법사에 따르면, 이 탑 근처에는 소승불교를 연구하는 승려들이 있는 사찰이 있다. 동쪽으로 약 100리 떨어진 곳에는 아소카가 건설한 또 다른 거대한 탑이 있다.[38] 숲 너머에는 쿠시나가라(Kushinagara) 지역이 있는데, 도시와 마을은 황폐하고 낡은 상태이다. 그는 누워있는 부처상이 있는 큰 벽돌 사찰을 묘사했다. 그는 부처의 수많은 전설이 전해지는 기념물과 유적지를 보았다고 묘사했는데, 그중에는 부처가 화장된 장소도 포함된다.[38]

7권에서 현장법사는 다섯 개의 나라를 묘사한다. 그는 바라나시(Varanasi)로 시작하여, 이 나라의 서쪽에는 갠지스강(Ganges)이 있다고 말한다. 도시는 인구 밀도가 높고, 골목길에는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사람들은 "매우 부유하고", 성격이 온화하고 예의 바르다. 여기서는 불교를 믿는 사람이 거의 없고, 대부분 이단(힌두교)이다. 이 나라에는 3천 명의 승려들이 소승불교를 연구하는 30개가 넘는 불교 사찰이 있다. 100개가 넘는 데바(deva) 사원이 있는데, 대부분 마헤슈바라(시바(Shiva)])]에게 봉헌되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알몸으로 다니고 재를 온몸에 바른다.[39] 바라나시 근처 바라나 강 서쪽 강둑에는 높이 100피트의 탑이 있는데,

2. 3. 귀국과 번역 사업

645년 현장은 귀국하여 큰 영예를 누렸지만, 당 태종이 제안한 모든 고위직을 거절했다. 대신 절에 은퇴하여 사망할 때까지 불경 번역에 전념했다. 섬서성 통천시의 유화궁(玉華宮)에서 664년 2월 5일에 사망했다. 전기에 따르면 그는 "600권이 넘는 대승과 소승 경전, 불상 7구, 그리고 100개가 넘는 사리"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56] 당 고종은 현장의 불경 번역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추수량과 완문소(萬文韶)에게 대안탑에 "황제가 성스러운 가르침에 쓴 서문"(雁塔聖教序)으로 알려진 두 개의 비석을 세우도록 명령했다.[57]

낙양의 룽먼석굴에 있는 현장의 동상


현장은 여행 중 많은 유명한 불교 스승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특히 날란다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 산스크리트어 경전 657권을 가져왔고, 황제의 지원을 받아 장안(현재의 시안)에 대규모 번역소를 설립하여 동아시아 전역에서 학생과 협력자를 모았다. 1,330권의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그는 유가행파(瑜伽行派), 또는 유식(唯識)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으며, 중국에서 그 전통을 계승하는 학파를 창시했다.[2] 그의 7세기 유가행파에 대한 학문은 중국 불교, 나아가 동아시아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58]

그의 연구, 번역, 그리고 이러한 전통의 경전에 대한 주석은 동아시아에서 법상종(法相宗)의 발전을 이끌었다. 규기(窺基)와 원측(元測) 등 현장의 제자 일부는 영향력 있는 저술가가 되었다.[59][60] 법상종 자체는 오랫동안 번영하지 못했지만, 인식, 의식, , 윤회 등에 대한 이론은 다른 더 성공적인 학파의 교리에 스며들었다. 현장의 가장 가깝고 뛰어난 제자는 규기였는데, 그는 법상종의 초대 조사로 인정받았다. 규기가 설명한 현장의 논리는 인도 논리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부족했던 중국 불교 학자들에게 종종 오해되었다.[60]

현장은 인도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광범위하고 신중하게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통해 이후 번역된 중국어 사본에서 유실된 인도 불교 경전을 복구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경전에 대한 주석으로 ''성유식론(成唯識論)''을 저술하거나 편찬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그의 반야심경 번역은 모든 동아시아 불교 종파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61]

현장은 귀국 후 가져온 방대한 경전 번역에 여생을 모두 바쳤다. 태종의 칙명에 따라, 645년 2월 6일부터 홍복사의 번경원(翻經院)에서 번역 사업을 시작했고, 이후 대자은사로 옮겨졌다. 고종에게 경전과 불상 등을 보존하는 건물 건설을 진언하여 652년 대자은사에 대안탑이 건립되었다. 이후 옥화궁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번역 작업은 현장이 죽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린덕 원년 2월 5일(664년 3월 7일), 현장은 경전 중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대반야경』 번역을 완성한 백일 후에 옥화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2. 4. 입적

당 태종의 제안을 거절한 현장은 절에서 은퇴하여 불경 번역에 전념하다가 664년 2월 5일 유화궁(玉華宮, 현재 섬서성 통천시)에서 입적하였다.[56] 그는 대승과 소승 경전 600여 권, 불상 7구, 사리 100여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56] 당 고종은 현장의 뛰어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추수량과 완문소(萬文韶)에게 대안탑에 "황제가 성스러운 가르침에 쓴 서문"(雁塔聖教序)으로 알려진 두 개의 비석을 세우도록 명했다.[57]

3. 주요 저서 및 업적

현장은 주로 불경 번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몇몇 독창적인 저술도 남겼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대당서역기』, 『성유식론』, 『팔식규구송』 등이 있다.


  • 대당서역기: 646년 황제의 요청으로 완성되었으며, 현장이 17년간(629-645)의 구법 여행 동안 직접 경험한 138개국의 풍토, 전설, 관습 등을 기록한 책이다. 고대 및 중세 초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특히 인도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64] 1857년 스탕니슬라스 쥘랭에 의해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 성유식론: 유가행(瑜伽行) 불교 철학에 관한 논문이다.[65]
  • 팔식규구송(八識規矩頌): 『팔식의 구조에 대한 운문』[65]


현장의 전기인 惠立|혜립중국어 스님이 쓴 『대자은사삼장법사전』과 『속고승전』을 통해서도 그의 생애와 업적을 알 수 있다. 이 책들은 1884년과 1911년에 새뮤얼 비얼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고,[66][67] 1905년에는 토마스 윌리엄 라이스 데이비드와 스티븐 우튼 부셸이 편집한 토마스 와터스의 주석이 담긴 영어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3. 1.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대당서역기중국어는 646년, 당나라 황제의 요청으로 현장이 저술한 책으로, 중세 중앙아시아인도 연구의 주요 자료 중 하나이다.[64] 1857년 한학자인 스탕니슬라스 쥘랭에 의해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현장은 17년에 걸친 여정의 기록을 大唐西域記|대당서역기중국어로 남겼으며, 이는 당시 중앙아시아와 인도 사회의 모습을 전하는 귀중한 역사 자료이다.

《대당서역기》는 총 12권으로, 현장이 629년부터 645년까지 17년간 구법 여행을 하며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138개국의 풍토, 전설, 관습 등을 정리한 방대한 서적이다. 이는 고대 및 중세 초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역사나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문헌 기록이 미흡한 인도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일차 사료로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현장은 5천축 80개국 중 75개국을 방문하며 사실적인 기록을 남겨, 할거로 점철된 인도 역사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3. 2. 경전 번역



현장은 여행 중 날란다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불교 학문을 공부했다. 귀국 후 산스크리트어 경전 657권을 가져왔고, 황제의 지원으로 당나라 수도 장안(현재의 시안)에 대규모 번역소를 설립, 동아시아 전역의 학자들과 협력했다. 1,330권의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했으며,[2] 7세기 유가행파에 대한 그의 학문은 중국 및 동아시아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58]

현장의 연구, 번역, 주석은 동아시아 법상종 발전을 이끌었다. 규기(632~682), 원측(613~696) 등 그의 제자들은 영향력 있는 저술가가 되었다.[59][60] 법상종은 오래 번영하지 못했지만, 인식, 의식, , 윤회 이론은 다른 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현장의 가장 뛰어난 제자 규기는 법상종의 초대 조사로 인정받았다. 규기가 설명한 현장의 논리는 인도 논리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부족했던 중국 불교 학자들에게 종종 오해되었다.[60]

현장은 인도 불교 경전을 신중하고 광범위하게 중국어로 번역하여 유실된 경전 복구에 기여했다. 그는 ''성유식론''을 저술 또는 편찬했고, 반야심경 번역은 동아시아 불교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61] 현장은 《대반야바라밀다경》(Mahāprajñāpāramitā Sūtra) 세 권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다.[62] 660년경부터 제자들과 함께 세 권 모두를 사용하여 원본의 무결성을 보장하며 번역을 시작했다.[62] 요약본 제안에도 불구하고, 현장은 꿈을 꾼 후 원본 600장에 충실한 완전한 번역을 결정했다.[63]

현장은 생전에 가져온 경전의 약 3분의 1만 번역했지만, 『대반야경』 16부 600권(약 480만 자)을 포함, 76부 1347권[76](약 1100만 자)을 번역했다.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며 적합한 번역어를 선택, 이전 구마라즙 등의 번역을 '''구역'''(舊譯), 이후 번역을 '''신역'''(新譯)이라 한다.

반야심경 번역에서 관자재보살은 구마라즙의 구역에서는 관음경 취지를 의역한 관세음보살이다. 구역이 간결성과 유려함에서 낫다고 평가되지만, 산스크리트어 "Avalokiteśvara|아발로키테슈바라sa"는 "자유롭게 볼 수 있다"는 의미로, 관자재보살이 더 정확하며 현장도 구역을 비판했다.

당시 황제 태종의 본명이 "이세민"이라 "세(世)"자 사용을 피휘했다는 설도 있다.

현장이 번역한 경전은 다음과 같다.

구분목록
경장대반야바라밀다경, 금강반야경, 반야심경, 대보살경, 유마경, 해심밀경,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아미타경, 여시어경
론장유가사지론, 섭대승론, 인명입정리론, 유식이십론, 유식삼십송, 성유식론, 아비달마발지론,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아비달마구사론, 아비달마순정리론


3. 3. 법상종 창시

현장은 인도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광범위하고 신중하게 번역하여, 이후 번역된 중국어 사본에서 유실된 인도 불교 경전을 복구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경전에 대한 주석으로 ''성유식론(成唯識論)''을 저술하거나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반야심경 번역은 모든 동아시아 불교 종파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61] 현장 자신은 명확하게 특정 종파를 세운 것은 아니지만, 그가 가르친 유식사상(唯識思想)과 가지고 온 경전은 일중(日中)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연구, 번역, 경전에 대한 주석은 동아시아에서 법상종(法相宗)의 발전을 가져왔다. 규기(窺基)(632~682)와 원측(元測)(613~696) 등 현장의 제자 일부는 영향력 있는 저술가가 되었다.[59][60] 법상종 자체는 오랫동안 번영하지 못했지만, 인식, 의식, , 윤회 등에 대한 이론은 다른 학파의 교리에 스며들었다. 현장의 가장 가깝고 뛰어난 제자는 규기(窺基)였는데, 그는 법상종의 초대 조사로 인정받았다. 규기가 설명한 현장의 논리는 인도 논리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부족했던 중국 불교 학자들에게 종종 오해되었다.[60]

법상종의 실질적인 창시자는 현장의 제자인 기이다. 그러나 『불조통기』 등은 현장과 ナーランダー(나란다) 유학 시절의 스승인 계현까지 포함한 세 사람을 법상종의 종조로 하고 있다.

4. 한국 불교와의 관계

遣唐使의 일원으로 당나라에 건너간 도소(道昭)는 현장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도소(道昭)의 제자로 알려진 인물이 바로 행기(行基)이다.

5. 평가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중국 불교 순례자가 남긴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가장 길고 상세한 기록이다. 그의 주요 목적은 인도에서 불경을 구하고 불교를 배우는 것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이 방문한 지역의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현장이 벵골에서 방문한 카르나수바르나 근처의 락탐리티카(Raktamrittika), 푼드라나가라(Pundranagara)와 그 주변, 사마타타(Samatata), 탐랄립티(Tamralipti), 하리켈라(Harikela) 등에 대한 기록은 벵골의 고고학적 역사 기록에 매우 유용하다. 그의 기록은 7세기 벵골, 특히 고다 왕국의 샤샨카(Shashanka) 통치 시대의 역사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때로는 매우 편향적일 수 있다.

현장은 657편의 산스크리트 불교 경전을 구해 번역했다. 그는 인도 전역에서 최고의 불교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활동의 상당 부분은 『대당서역기』의 부록인 혜리(Huili)가 저술한 현장의 전기, 『현장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의 반야심경 번역본은 중국, 한국, 베트남, 일본에서 모든 반야심경 주석과 염송의 기초가 되었다.[68] 그의 문체는 중국 기준으로 다소 어색하고 지나치게 직역적이며, 용어의 학문적 혁신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이전 번역가 구마라집(Kumārajīva)의 다른 번역본이 존재하는 경우 구마라집의 번역본이 더 인기가 있다.[68]

6. 대중문화

서유기》에서 현장은 삼장법사로 묘사된다. 불경을 구하러 천축으로 가던 도중 손오공의 형벌을 면제해주고 그를 통제하기 위해 금고아를 머리에 씌운다. 그 후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을 만나 일행에 포함시켜 함께 천축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 도중 여러 요괴를 만나지만 손오공의 활약으로 위기를 모면한다.[27]

현장의 실크로드 여정과 그 주변에서 생겨난 전설은 명나라 소설 《서유기》에 영감을 주었다. 소설 속 당삼장은 석가모니불의 제자이자 금빛 귀뚜라미의 환생으로, 네 명의 강력한 제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여정을 떠난다. 그중 원숭이인 손오공은 대단히 인기가 많았고 중국 문화와 현대 일본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드래곤볼》, 《최유기》 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아서 웨일리의 번역과 TV 시리즈 《서유기》를 통해 서구에서도 잘 알려지게 되었다.

원나라 시대에는 오창령이 현장의 경전 획득에 관한 연극을 쓰기도 했다.

2016년에는 중국과 인도 합작 영화 《현장》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뛰어난 촬영 기법으로 제89회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 후보로 출품되었으나, 최종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다.

서유기》는 《대당서역기》와 《대자은사삼장법사전》을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현장은 삼장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삼장법사는 경, 율, 논 세 가지에 정통한 승려에게 황제로부터 내려지는 경칭이며, 현장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구마라습, 진제, 불공금강, 영선 등도 “삼장법사”라는 경칭을 얻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삼장법사”는 주로 현장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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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학술지 Xuanzang's proof of idealism
[61] 서적 The Prajna Paramita Heart Sutra https://books.google[...] Sutra Translation Committee of the U.S. & Canada 2021-09-20
[62] 서적 (Unspec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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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뉴스 Relic of famous Chinese monk moved to new memorial hall in N India http://english.china[...] China.com, Xinhua 2007-02-11
[70] 웹사이트 Yakushiji offers peace of mind http://www.buddhistc[...] 2009-05-23
[71] 서적 『全唐文』「大唐三藏大遍覺法師塔銘(並序)」
[72] 서적 『大正新修大蔵経』故三蔵玄奘法師行状 http://21dzk.l.u-tok[...] 大蔵出版株式会社
[73] 서적 『大正新修大蔵経』続高僧伝 卷第四 http://21dzk.l.u-tok[...] 大蔵出版株式会社
[74] 서적 『大正新修大蔵経』大慈恩寺三蔵法師伝 http://21dzk.l.u-tok[...] 大蔵出版株式会社
[75] 서적 玄奘三蔵 史実西遊記 岩波新書
[76] 서적 開元録、貞元録、仏書解説大辞典
[77] 문서 당시 일본 불교 연합회의 倉持秀峰 부회장의 자방. 중국에서의 위령법요에 참례해 유골을 일본으로 가져왔다.
[78] 웹사이트 玄奘灵骨移供印度那烂陀寺 http://www.tjwh.gov.[...] 天津市文化メディア局 2018-03-13
[79] 서적 玄奘法師 西域紀行 桃源社
[80] 백과사전 현장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
[81] 백과사전 현장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
[82] 백과사전 서유기(西遊記)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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