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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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는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지정학자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정권에 협력하면서도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 뮌헨에서 태어나 뮌헨 대학교에서 지리학을 공부하고, 베를린 지리학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루돌프 헤스와 친분이 있었고, 나치 정권의 권력 장악 이후 지정학을 가르치며 외무부 자문으로 일했다. 나치 정권에 대한 통찰을 얻은 후, 저항 운동에 참여하여 7·20 음모 이후 체포되어 모아비트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1945년 적군이 베를린에 진입했을 때 SS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수감 중에 '모아비트 소네트'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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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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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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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3년 1월 7일 |
출생지 | 뮌헨 |
사망 | 1945년 4월 23일 (42세) |
사망지 | 베를린 |
국적 | 독일 |
직업 | 지리학자 외교관 작가 |
학력 | |
모교 | 뮌헨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
경력 | |
직책 | 베를린 대학교 지리학 교수 |
가족 | |
부모 | 아버지: 카를 하우스호퍼 어머니: 마르타 하우스호퍼 (née Mayer-Doss)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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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는 뮌헨에서 카를 하우스호퍼의 아들로 태어나 뮌헨 대학교에서 지리학과 역사를 공부했다. 베를린 지리학회 사무총장 및 기관지 편집자로 활동하며 국제적인 경험을 쌓았다. 나치 정권 하에서는 독일 정치 아카데미와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외무부에서도 일했다. 그는 나치 정권에 협력하는 듯 보였지만, 동시에 요하네스 포피츠, 크라이자우 서클, 붉은 오케스트라 등의 저항 운동에도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7·20 음모 실패 이후 은신 중 체포되어 모아비트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1945년 4월 SS에 의해 처형되었다.[1] 그는 감옥에서 《모아비트 소네트》를 집필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퇴역 장군이자 지리학자인 카를 하우스호퍼와 그의 아내 마르타(결혼 전 성은 마이어-도스)의 아들로 뮌헨에서 태어났다. 알브레히트에게는 하인츠라는 형제가 한 명 있었다. 그는 뮌헨 대학교에서 지리학과 역사를 공부했다. 1924년, "알프스 지역의 통과 국가(Paß-Staaten in den Alpen)"라는 논문으로 졸업했으며, 에리히 폰 드라이갈스키가 그의 지도교수였다. 이후 하우스호퍼는 알브레히트 펭크의 조교로 일했다.[1]2. 2. 나치 정권과의 관계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퇴역 장군이자 지리학자인 카를 하우스호퍼의 아들이었다. 그는 지정학 분야의 동료 학생이자 아돌프 히틀러의 초기 추종자였던 루돌프 헤스와 가까운 사이였다. 카를 하우스호퍼는 히틀러와 헤스가 맥주홀 폭동 실패 이후 투옥된 란츠베르크 감옥을 자주 방문했고, 이 과정에서 알브레히트도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2]1935년 뉘른베르크법(1936년 시행)에 따라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는 ''혼혈''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1933년부터 부총통을 맡고 있던 헤스는 하우스호퍼에게 독일 혈통 증명서를 발급받도록 했다.[2]
하우스호퍼는 베를린의 ''베를린 지리학회''의 사무총장 겸 기관지 편집자로 임명되어[1]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그는 이 직책을 통해 세계를 여행하며 강연하고 국제 문제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1933년 나치의 권력 장악으로 많은 교수를 잃은 ''독일 정치 아카데미''에서 지정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40년 아카데미가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통합되면서, 그는 외교학부(''Auslandswissenschaftliche Fakultät'')의 교수가 되었다.[1] 그는 또한 1934년부터 1938년까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외무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해체된 나치당의 ''Dienststelle Ribbentrop|딘스트슈텔레 리벤트로프de''에서 자문으로 일했다. 그 후 하우스호퍼는 1941년까지 때때로 독일 외무부의 선전부(''Informationsabteilung des Auswärtigen Amtes'')에서 일했다.[1]
2. 3. 저항 운동
1930년대 중반부터 하우스호퍼는 나치 정치에 대한 통찰력을 얻어 두 개의 독일 저항 단체에 접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하우스호퍼는 프로이센 재무부 장관 요하네스 포피츠를 중심으로 한 보수 반대 세력에 합류했으며, 크라이자우 서클의 페터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 헬무트 제임스 그라프 폰 몰트케는 물론 ''Hochschule für Politik''에서 가르쳤던 아르비트 하르나크와 하로 슐체-보이젠을 포함한 붉은 오케스트라 그룹 사람들과도 만났다.[3]하우스호퍼는 프랑스와 영국과의 평화를 협상하려는 헤스의 시도에 관여하여 중개인 역할을 했다. 그는 헤스의 1941년 스코틀랜드 비행을 장려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지만, 만약 그렇다면 위험한 행동이었다. 헤스의 독일 이탈과 그 이후 영국에 의한 체포는 하우스호퍼의 주요 보호자가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헤스를 도운 혐의로 하우스호퍼는 2개월 동안 투옥된 후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았다.[3] 나치당 고위 간부들은 그의 반유대인 어머니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완전한 군사적, 정치적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히틀러를 제거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하게 되었다. 1944년 실패한 7·20 음모 이후 하우스호퍼는 은신했지만, 1944년 12월 7일 바이에른의 한 농가에서 체포되었다.[1]
3. 작품 활동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는 지리학자이자 작가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 활동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알프스의 통행 국가》(1928), 《영국의 중국 침투》(1940), 《일반 정치 지리학 및 지정학》 1권 등이 있다.
희곡 작가로도 활동하여 《스키피오》(1934), 《술라》(1938), 《아우구스투스》(1939) 등 5막으로 구성된 역사극을 발표했으며, 《중국 전설》(1949)과 같은 드라마적 시도 창작했다. 미완성 비극인 《토마스 모루스》(1985)도 있다.
대표작 중 하나인 《모아비트 소네트》는 모아비트 감옥 수감 중에 쓴 시들을 모은 것이다.
3. 1. 모아비트 소네트
Moabiter Sonettede는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가 모아비트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쓴 시집이다. 이 시집은 그가 처형될 당시 감옥에서의 경험과 감정을 담고 있다. 특히 〈Schuldde〉(죄)라는 시는 그의 저항 정신과 고뇌를 잘 보여준다.[4]〈Schuldde〉에서 하우스호퍼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지만, 일반적인 방식과는 다른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의무를 더 일찍 깨닫고, 악을 더 날카롭게 비판했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너무 오랫동안 판단을 억제하고, 충분히 분명하게 경고하지 못한 것을 자신의 죄로 여기고 있다.[4]
3. 2. 기타 작품
- 《알프스의 통행 국가》 (Vowinckel, 베를린-그루네발트, 1928년)
- 《[https://nbn-resolving.org/urn:nbn:de:bvb:29-bv006470398-2 영국의 중국 침투]》 (Junker u. Dünnhaupt, 베를린, 1940년)
- 《일반 정치 지리학 및 지정학》 1권 (Vowinckel, 하이델베르크)
- 《스키피오. 5막의 극》 (드라마, Propyläen-Verlag, 베를린, 1934년)
- 《술라. 5막의 극》 (드라마, Propyläen-Verlag, 베를린, 1938년)
- 《아우구스투스. 5막의 극》 (드라마, Propyläen-Verlag, 베를린, 1939년)
- 《중국 전설. 드라마적 시》 (Blanvalet, 베를린, 1949년)
- 《토마스 모루스. 미완성 비극》 (Hubertus Schulte Herbrüggen 편집, 파더보른 외, Schöningh, 1985년)
- 《모아비터 소네트》 (Amelie von Graevenitz 편집, C. H. Beck, 뮌헨, 2012년, ISBN 978-3-406-64166-4)
-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 전집. 1부: 드라마 I [스키피오, 술라, 아우구스투스]》 (Hans-Edwin Friedrich, Wilhelm Haefs 편집, Peter Lang,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외, 2014년, ISBN 978-3-631-64478-2)
- 《꿈의 얼굴: 50개의 시대를 초월한 시》 (Martin Werhand Verlag, 멜스바흐, 2016년, ISBN 978-3-943910-75-9)
4. 유산과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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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과의 관계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는 한국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다.
참조
[1]
서적
Haushofer, Albrecht, in: Neue Deutsche Biographie, vol. 8
https://www.deutsche[...]
1969
[2]
논문
Geopolitik: Haushofer, Hitler and lebensraum
1999
[3]
서적
Trost und Erbauung aus der "schweren Strenge" des Sonetts, in Sonett-Gemeinschaften Die soziale Referentialität des Sonetts
Verlag Ferdinand Schöningh
2019
[4]
문서
This line is a play of words with the meanings of "schuldig". Another reading of this phrase would be "what had been my oblig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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