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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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돌프 헤스는 1894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독일인으로, 1920년 나치당에 입당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최측근이 되었다. 1923년 뮌헨 폭동에 참여했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 집필을 도왔으며, 나치당 부총통과 무임소 장관을 역임하며 반유대주의 정책에 관여했다. 1941년 영국으로 단독 비행을 시도하여 포로가 되었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슈판다우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87년 자살했다. 그의 영국행과 죽음은 음모론의 대상이 되었으며, 사후 네오나치들에게 우상화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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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러 대리는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를 대리하는 직책으로, 루돌프 헤스와 마르틴 보어만이 역임했으며, 이들의 행적은 나치 정권의 비합리성과 붕괴 과정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 루돌프 헤스 - 볼프 뤼디거 헤스
볼프 뤼디거 헤스는 1937년 뮌헨에서 태어난 독일의 건축가이자 작가이며, 아버지 루돌프 헤스의 사망과 관련하여 영국 비밀 정보국의 살해 의혹을 제기하며 세 권의 책을 저술했고, 루돌프-헤스-게젤샤프트 e.V.의 대표를 역임하다가 63세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 무공십자장 (바이에른) 수훈자 - 테오도어 아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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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페어는 아돌프 히틀러의 총애를 받은 나치 독일의 건축가이자 군수장관으로, 제3제국의 주요 건축 프로젝트들을 담당하며 전쟁 물자 생산 극대화에 기여했으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석방 후 회고록을 통해 나치 시대를 회고했으나 책임에 대한 논란과 비판이 지속되고 있다.
루돌프 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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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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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루돌프 발터 리하르트 헤스 () |
출생일 | 1894년 4월 26일 |
출생지 |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부왕령 |
사망일 | 1987년 8월 17일 (93세) |
사망 장소 | 슈판다우 교도소, 서베를린, 서독 |
사망 원인 | 교수 자살 |
국적 | 독일 |
배우자 | 일제 프뢸 (1927년 12월 20일 결혼) |
자녀 | 볼프 뤼디거 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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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나치당 (1920년–1941년) |
추가 직책 | 국방 장관 회의 의원 (1939년–1941년) 나치당 제국 지도자 (1933년 6월–9월) 대독일 제국 의회 의원 (1933년–1941년) 나치당 중앙 정치 위원회 의장 (1932년–1941년) |
주요 직책 | |
퓌러 대리 | 시작: 1933년 4월 21일 종료: 1941년 5월 12일 상관: 아돌프 히틀러 후임: 마르틴 보어만 (당 관방부 부장) |
무임소 제국 장관 | 시작: 1933년 12월 1일 종료: 1941년 5월 12일 총리: 아돌프 히틀러 |
나치당 연락 사무실 부장 | 시작: 1933년 3월 20일 종료: 1941년 5월 12일 선임: (신설) 후임: 마르틴 보어만 |
나치당 퓌러 개인 비서 | 시작: 1925년 종료: 1935년 선임: (신설) 후임: 마르틴 보어만 |
군사 경력 | |
소속 | 독일 제국군 |
복무 기간 | 1914년–1918년 |
최종 계급 | (예비역 육군 소위) |
소속 부대 | 제7 바이에른 야전 포병 연대 제1 보병 연대 |
참전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이프르 전투 베르됭 전투 루마니아 전선 |
훈장 | 철십자 훈장, 2급 |
재판 정보 | |
범죄 | 평화에 대한 죄 모의 및 침략 전쟁 |
재판 | 뉘른베르크 재판 |
형벌 | 종신형 |
상태 | 사망 |
학력 | |
모교 | 뮌헨 대학교 |
2. 생애
루돌프 헤스는 1894년 4월 26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독일인 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바이에른 주 출신의 부유한 상인이었다.[3][4]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군에 입대하여 여러 전투에 참전했고, 부상도 입었다. 종전 후에는 뮌헨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툴레 협회등 극우 민족주의 단체에 가입했고, 1920년 나치당에 입당하여 히틀러의 최측근이 되었다.
1923년 뮌헨 폭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히틀러와 함께 란츠베르크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때 히틀러의 구술을 받아적어 《나의 투쟁》을 엮는 데 기여했다. 나치당 집권 후에는 당의 2인자인 퓌러 대리직에 임명되었고, 뉘른베르크법 입안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33][34]
그러나 헤스는 점차 기행을 보이면서 권력을 잃게 되었고, 영국 본토 항공전 시기에는 불안감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1941년 5월 10일, 그는 메서슈미트 Bf 110를 단독으로 조종하여 영국으로 향했으나, 영국군에게 사로잡혀 전쟁 포로로 억류되었다.[3][4] 헤스의 영국행은 나치당 지도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으며, 그의 자리는 마르틴 보어만이 이어받았다.
종전 후 헤스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97] 재판 후 슈판다우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1987년 8월 17일 감옥 내에서 목을 매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98]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타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사후 네오나치들에게 우상화되었으며, 그의 묘는 2011년 철거되었고 유골은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101][102]
2. 1. 초기 생애 (1894년 ~ 1914년)
루돌프 헤스는 1894년 4월 26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독일인 무역상 요한 프리츠 헤스 (Johann Fritz Heßde)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바이에른 주 출신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클라라 뮌히(Klara Münchde)였다.[3][4] 헤스 가(家)의 거실에는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황제의 생일에는 독일 본국과 마찬가지로 축하하는 전형적인 독일 가정이었다. 동생 알프레트(알프레트 헤스)와 여동생 마르가레테가 있었는데, 동생 알프레트는 정신장애인이었다.[5]헤스 가족은 원래 보헤미아 출신으로 1760년대에 상프랑켄의 운지델에 정착했다. 그의 할아버지 요한 크리스티안 헤스는 1861년 트리에스테에서 스위스 영사의 딸 마가레타 뷔러와 결혼했다. 아버지 요한 프리츠 헤스가 태어난 후 가족은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했고, 요한 크리스티안 헤스는 수입 회사인 헤스 & 코를 설립했으며, 아들 요한 프리츠 헤스가 1888년 이 회사를 물려받았다. 어머니 클라라는 호프(상프랑켄) 출신의 섬유 산업가이자 상업평의원이었던 루돌프 뮌히의 딸이었다. 헤스 가족은 알렉산드리아 근처 이집트 해안의 빌라에 살았고, 1900년부터 독일의 피히텔 산맥에 있는 라이홀츠그륀(현재 키르헨라미츠의 일부)에 있는 여름 별장에 자주 방문했다.[6]
알렉산드리아의 독일학교에 다니면서 가정교사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권위주의적이고 엄격한 아버지의 지배 아래에서 헤스는 신비주의에 매료되기 쉬운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랐으며, 명상의 호흡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응용하는 등 동양적인 사상에 물들었다. 1900년부터 1908년까지 알렉산드리아의 독일어 사용 프로테스탄트 학교에 다녔고, 그 후 독일 바트 고데스베르크 기숙학교에 유학을 갔다. 과학과 수학에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는 그가 가업인 헤스 & 코에 합류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1911년 스위스 뇌샤텔의 ''École supérieure de commerce''에 보냈다. 1년 후 헤스는 함부르크의 무역 회사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7] 이는 아버지의 무역상 사업을 물려받기 위한 수련이었다.[8]
이집트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헤스에게 강한 대영 제국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주었다.[1] 이블린 베어링의 "은폐된 보호령" 하에서 성장한 헤스의 유년 시절은 그를 나치 지도자들 중 독특하게 만들었는데, 그는 영국 통치하에서 성장했고, 그것을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1]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4년 ~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헤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이에른 왕국군 제1보병연대 예하 제1중대에 자원 입대하여[9] 서부 전선의 이프르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솜과 아르투아 전선에 주둔했다.[10] 그는 첫 참전에서 "마을들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전쟁이여!"라고 편지에 적을 정도로 전쟁에 흥분했다.[11]1915년 4월 병장으로 진급하고, 용감한 전투 행위로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12] 같은 해 여름 하사로 진급했다.[11] 1916년 베르됭 전투에 참전했으나, 6월 12일 수류탄 파편에 맞아 양다리와 등에 중상을 입었다.[13] 1916년 12월 제대 후 상사로 진급, 바이에른 제18예비보병연대 제10중대 예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루마니아 전선에 파병되었다.[13] 그러나 1917년 루마니아 폭샤니 전투에서 폐에 총상을 입는 중상을 입고 라이히스호프에서 장기 입원했다. 1917년 8월 8일 등기우편으로 소위 진급 명령을 받았다.[14]
1918년 봄, 제대 후 자원했던 항공대 전속이 허가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비행학교를 거쳐 1918년 11월 1일 바이에른 제35전투기중대의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15] 그러나 첫 출격 며칠 후 전쟁이 끝나 단 한 기도 격추하지 못하고, 1918년 12월 13일 제대했다.[15][16]
2. 3. 전후 혼란기와 나치당 입당 (1919년 ~ 1923년)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혼란에 빠졌다. 헤스의 가족이 운영하던 회사는 영국에 의해 재산이 몰수되었다.[15] 1919년 2월, 헤스는 뮌헨 대학교에 입학했다.뮌헨 대학교 입학과 거의 동시에 그는 민족주의 단체인 툴레 협회에 가입했다.[18] 그는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을 타도하기 위한 활동에 참여했고, 프란츠 폰 에프가 이끄는 의용군(프라이코르)에 참여하여 약 5개월간 장교로 복무했다.[19][20]
이후 헤스는 뮌헨 대학으로 돌아가 경제학, 역사, 정치학, 지정학을 공부했다. 그는 지정학의 권위자인 카를 하우스호퍼 교수의 지도를 받았고, "독일 민족에게는 생존권이 부족하며, 이는 동쪽에서만 찾을 수 있다"라는 하우스호퍼의 주장에 깊이 매료되었다.[21][22]

헤스는 많은 전직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혁명의 배후에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반공주의와 반유대주의 정치 운동에 몰두했으며, 패전으로 인한 독일의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유대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여론에 휩쓸려 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23][24]
루르 지역에서 스파르타쿠스단(독일 공산당의 전신)의 반란이 발생하자, 헤스는 1920년 3월 29일 다시 에프 의용군에 입대하여 진압에 참여했다. 4월 말 반란이 진압된 후, 헤스는 4월 30일 의용군에서 제대했다.[25]

1920년, 헤스는 뮌헨 집회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그에게 헌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배가 유대인과 볼셰비키의 음모 때문이라는 등에 꽂힌 칼 신화를 공유했다. 헤스는 1920년 7월 1일, 16번째 회원으로 나치당에 가입했다. 그는 모금 및 조직 활동에 주력했고, 1921년 11월 4일에는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히틀러를 보호하다 부상을 입기도 했다. 1922년에는 돌격대(SA)에 가입하여 조직과 모집을 도왔다.
초인플레이션과 프랑스군의 루르 지역 점령으로 인해 시민들의 불안이 커지자, 히틀러는 쿠데타를 시도했다. 1923년 11월 8일 밤, 헤스는 히틀러와 함께 구스타프 폰 카르가 주최한 집회에 난입하여 국가 혁명을 선언했다. 다음 날, 히틀러와 지지자들은 전쟁부로 행진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6명의 나치당원과 4명의 경찰관이 사망했다. 히틀러는 11월 11일에 체포되었다.
헤스는 몇몇 고위 인사들을 인질로 잡았다가 탈출시켰고, 이후 오스트리아로 도망쳤지만 체포되어 맥주홀 폭동 가담 혐의로 18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히틀러는 5년형을 선고받았고, 나치당과 돌격대는 불법화되었다.
두 사람은 란츠베르크 감옥에 수감되었고, 히틀러는 헤스와 에밀 마우리체에게 나의 투쟁을 받아쓰게 했다. 이 책은 1925년과 1926년에 출판되었고, 이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히틀러는 1924년 12월 20일, 헤스는 10일 후 석방되었다. 1925년 2월, 나치당과 돌격대에 대한 금지가 해제되었고, 당원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히틀러는 1925년 4월 헤스를 개인 비서로, 1929년 7월 20일에는 개인 부관으로 임명했다. 헤스는 히틀러의 연설에 동행하며 그의 친구이자 측근이 되었다. 1932년 12월 15일, 헤스는 당 연락 참모장과 당 중앙 정치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현역 군 생활이 끝난 후에도 비행에 대한 관심을 유지한 헤스는 1929년 4월 4일 사립 조종사 면허를 취득했다. 1930년에는 민족 관찰자가 후원하는 BFW M.23b 단엽기를 소유하게 되었고, 1930년대 초에는 메서슈미트 항공기를 두 대 더 구입하여 많은 비행 시간을 기록했다.
2. 4. 나치당 권력 장악과 부총통 임명 (1923년 ~ 1939년)
1923년 뮌헨 폭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란츠베르크 감옥에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히틀러가 구술한 내용을 받아적어 《나의 투쟁》을 엮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33][34] 히틀러의 개인 비서로서 히틀러의 일정 관리, 불만 접수, 접근자 관리 등 번거로운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35]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된 후, 헤스는 1933년 3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45] 4월 21일 나치당 부총통(Stellvertreter des Führersde)에 임명되었다.[34][46][47] 이 직위는 당의 모든 문제를 처리하고 독일의 모든 법 제정에 참여하는 권한을 가졌다.[48] 1933년 12월 1일에는 히틀러 내각에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하여 당을 대표하여 내각에 참여했다.[48]
하인리히 히믈러의 친위대(SS)에 접근하여 친위대 명예 지도자로 친위대에 입대하고, 히믈러로부터 친위대 대장 계급을 받았다. 1934년 6월 헤스는 부총통의 권한으로 친위대 정보부 SD를 나치당 유일의 정보기관으로 정했다.[50]
1934년 6월 30일 긴 칼의 밤 직전, 헤스는 돌격대에서 만연하던 제2혁명론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숙청 사실을 당일 아침에야 알게 된 헤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54]
1935년 제정된 반유대주의 법 뉘른베르크 법에는 헤스의 서명이 있다.[64][65] 그 후에도 많은 반유대 관련 법률에 서명했다.[66]
1939년 8월 괴링을 의장으로 하는 국방장관회의 의원이 되었으나,[68] 이 회의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69] 1939년 9월 1일 히틀러는 대폴란드 전쟁 개전 국회 연설에서 헤스를 괴링 다음의 후계자로 지명했다.[70][71]
2. 5. 영국으로의 단독 비행 (1939년 ~ 1941년)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선전포고를 받았다. 1940년 6월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했다. 히틀러는 영국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평화를 희망하고 있었고, 헤스도 같은 의견이었다.[4] 또한, 대영 평화론자였던 하우스호퍼와 1940년 8월 31일 회담했을 때, "헤스가 비행기를 타고 중요한 목적지로 여행을 떠난다", "헤스가 큰 성으로 들어간다"라는 꿈을 꾸었다고 전해 들어, 헤스는 단독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평화를 실현하려고 생각했다.[4]헤스는 하우스호퍼와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Albrecht Haushofer)와 자주 서신을 교환했다. 알브레히트는 영국 측 연락책으로 해밀턴 공작(Douglas Douglas-Hamilton, 14th Duke of Hamilton)을 추천했다. 해밀턴 공작은 국왕과 수상 윈스턴 처칠과 친분이 있었고, 헤스와 베를린 올림픽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헤스는 해밀턴 공작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영국 측 검열 때문에 도착하지 못했다.[4]
1940년 10월경부터 헤스는 비행 훈련을 시작했다. 훈련에는 Bf 110의 설계자인 빌리 메서슈미트(Willy Messerschmitt)도 협력했고, 이후 30회의 비행 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해외 조직 지도자 보레는 해밀턴 공작에게 편지 번역을 의뢰받았다. 이러한 준비는 비밀리에 행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저지되는 일은 없었다. 편지 번역이 끝날 무렵, 헤스는 비행을 시도했지만, 비행기 고장으로 인해 돌아왔다. 이때 비행의 이유와 "실패했을 경우를 고려하여 총통은 아무것도 모르는 입장에 놓아야 한다"고 부관 카를하인츠 핀치(Karlheinz Pintsch) 대위에게 말했다.[4]
1941년 5월 10일 정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가 헤스를 방문하여 히틀러에 대한 연락 여부를 상담했다. 오후 6시 10분, 헤스는 Bf 110으로 영국을 향해 날아올랐다. 이때 핀치가 공군에 전투기 유도 전파 발출을 요청했기 때문에, 괴링은 헤스의 탈출을 알게 되었다. 괴링은 제26 전투 비행 여단장 아돌프 갈란트(Adolf Galland)에게 헤스의 비행기 수색을 명령했지만, 이미 박명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갈란트는 형식적인 수색을 하고 "수색 실패"를 보고했다. 이후 독일 측이 헤스의 소식을 알게 되는 일은 없었다.[4]
영국에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을 격퇴한 강력하고 엄중한 레이더 방공망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겨우 몇 번의 훈련만 받은 헤스가 야간 비행을 하여 영국 본토에 도착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헤스는 기적적으로 방공망을 빠져나가 영국 시간 오후 8시 30분경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교외의 농장에 불시착했다. 헤스는 오른쪽 발목을 삐었지만 무사했다. 헤스는 신분을 숨기고 "알프레트 호른 대위"라고 자칭하며, 체포하러 온 홈 가드 대원에게 해밀턴 공작과의 면회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심야였기 때문에, 해밀턴 공작은 다음 날 면회하기로 했다.[4]
2. 6. 영국에서의 포로 생활과 뉘른베르크 재판 (1941년 ~ 1947년)
1941년 5월 10일 자정 직전, 헤스는 글래스고 남쪽 워터풋 근처 플로어스 농장에 착륙했고, 현지 농부 데이비드 맥린에게 발견되었다. 그는 자신을 "대위(Hauptmann) 알프레드 호른"이라고 밝히며 험버튼 공작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73] 맥린은 헤스를 근처 오두막으로 데려가 향토 방위대 부대에 연락했고, 헤스는 버스비를 거쳐 기프녹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그의 소지품은 수색, 압수되었고, 로열 관측대 지역 사령관 그레이엄 도널드 소령이 심문했지만, 헤스는 험버튼 공작과의 면담을 반복해서 요청했다. 심문 후 헤스는 글래스고의 메리힐 막사로 호송되어 부상 치료를 받았다. 이때부터 헤스의 진짜 신원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그는 계속 자신의 이름이 호른이라고 주장했다.[74]
헤스가 도착했을 때 험버튼은 RAF 턴하우스에서 근무 중이었고, 그의 부대는 비행 경로를 추적한 부대 중 하나였다. 다음 날 아침, 험버튼은 메리힐 막사에서 헤스와 면담했고, 헤스는 즉시 자신의 신원과 비행 이유를 밝혔다. 그는 험버튼에게 자신이 "인류애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으며 히틀러가 영국과의 "전투를 멈추고 싶어한다"고 말했다.[75] 험버튼은 영국 외무부를 통해 윈스턴 처칠과의 만남을 주선했고, 처칠은 외교 전문가 아이본 커크패트릭을 보내 헤스의 신원을 확인했다. 헤스는 히틀러의 팽창 계획과 영국이 나치에게 유럽에서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커크패트릭은 며칠간 헤스를 더 만났지만, 헤스는 자신의 임무가 실패했음을 깨닫고 자신의 치료가 부적절하며 독살 음모가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76]
헤스의 비행은 5월 12일 독일 뮌헨 라디오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5월 13일 영국 언론에도 공개되었다. 5월 14일, 헤스의 아내 일제는 독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남편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77]
헤스는 뷰캐넌 성에서 런던탑으로 잠시 이송된 후, 마이쳇 플레이스("캠프 Z")에서 13개월간 머물렀다.[78] 처칠은 헤스를 잘 대우하라고 명령했지만, 신문과 라디오는 허용하지 않았다. 헤스는 가족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지만, 해밀턴 공작에게 보내는 편지는 전달되지 않았고, 회의 요청도 거절되었다.[79] 헤스를 치료한 정신과 의사들은 그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며 건강염려증과 편집증 경향이 있다고 진단했다.[80] 헤스는 사이먼 1세 자작, 존 사이먼(당시 영국 대법원장)에게 평화 제안을 반복했지만, 사이먼 자작은 헤스의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고 언급했다. 헤스는 독살당하고 잠을 못 자게 방해받는다고 주장하며, 음식 샘플을 분석하려 했다.[81]
1942년 6월 16일 이른 아침, 헤스는 계단 난간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 대퇴골이 골절되었다. 이로 인해 헤스는 다리를 견인해야 했고, 목발을 사용해야 했다. 헤스는 기억상실을 호소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제네바 협약에 따라 본국으로 송환되기 위한 속임수였을 가능성이 있다.[82]
헤스는 1942년 6월 26일 메인디프 코트 병원으로 옮겨져 종전까지 머물렀다. 그는 구내 산책과 주변 시골 자동차 여행이 허용되었고, 신문과 읽을거리가 제공되었으며, 편지와 일기를 썼다. 헤스는 계속 기억 상실을 호소했고, 1945년 2월 4일 빵칼로 자해하는 두 번째 자살 시도를 했다. 상처는 심각하지 않았지만, 독일 패전이 확실해지자 그는 음식을 거부하다 강제로 먹게 되었다.[83]
1945년 5월 8일 독일 항복 후, 헤스는 전범으로 기소되어 국제군사재판소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5년 10월 10일 뉘른베르크로 이송되었다.[84]

종전 후 1945년 10월 10일, 헤스는 뉘른베르크 재판을 위해 뉘른베르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85] 그러나 헤스는 기억상실을 주장했다. 미국군이 헤스를 괴링과 하우스호퍼 교수와 만나게 해도, 헤스는 "이 사람을 모른다"고 주장했다.[86] 11월 7일, 그의 변호사 귄터 폰 로르샤이트 박사는 헤스의 정신 감정을 요구했다.[87] 미·영·소의 정신과 의사 10명이 헤스의 정신 감정을 실시, "헤스의 기억상실증은 변명을 하거나 과거의 일을 이해하는 그의 능력을 방해하는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재판을 받을 법적 능력이 있는지 여부는 재판부에 맡겨졌다.[88]
구스타프 길버트 대위가 실시한 웨슬러-벨뷰 성인 지능 검사에 따르면, 헤스의 지능 지수는 120이었다.[89]
11월 20일부터 뉘른베르크 재판이 시작되었다. 헤스는 모든 기소 사항(제1 기소 사항 "공모", 제2 기소 사항 "평화에 대한 범죄", 제3 기소 사항 "전쟁 범죄", 제4 기소 사항 "인도에 대한 범죄")으로 기소되었다. 11월 21일, 죄상 인정에서 헤스만 "나인(노)"이라고 답해 비웃음을 샀다.[90][91] 헤스는 이 외에도 멍한 눈을 하고, 바닥에 드러누워 식사를 하거나, 운동장에서 다리를 높이 들어 행진하거나, 법정에서 헤드폰 착용을 거부하거나, 음란한 말을 중얼거리거나, 공판 중에 소설을 읽는 등 기행이 두드러졌다.[92]
11월 29일, 헤스에게 법정 능력이 있는지 여부에 대한 심리에서 헤스는 갑자기 "앞으로 나의 기억은 외부 세계에 다시 반응할 것이다. 기억상실을 가장한 것은 전술적인 이유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기억상실이 아님을 밝혔다. 이에 법정과 전 세계 언론은 놀랐다. 재판부는 1945년 12월 1일 "헤스에게는 책임 능력이 있다"고 결론지었고, 그는 재판에 남게 되었다.[93]
1946년 2월 5일, 헤스는 로르샤이트를 해고하고, 한스 프랑크의 변호를 맡고 있는 알프레트 자이들을 지명했다.[94][95] 피고 측 변론에서 헤스는 스스로 나서지는 않았다. 자이들은 독소 불가침 조약의 비밀 조약 문제를 제기하며 소련이 재판관석에 앉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96]
1946년 10월 1일 판결에서, 헤스는 제3 기소 사항 "전쟁 범죄"와 제4 기소 사항 "인도에 대한 범죄"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반면에 제1 기소 사항 "공모"와 제2 기소 사항 "평화에 대한 범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97] 헤스는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다. 그는 사형 판결을 면한 10명의 피고인 중 한 명이었다. 10월 16일, 사형 판결을 받은 10명의 사형수(자살한 괴링 제외)의 형이 집행되었다. 헤스는 형 집행 시 튀긴 피가 묻은 바닥을 발견하자 오른손을 들어 나치식 경례를 했다.[98]
2. 7. 슈판다우 감옥 수감과 죽음 (1947년 ~ 1987년)
1947년 7월 18일부터 헤스는 다른 종신형을 선고받은 전범들과 함께 슈판다우 감옥에서 복역했다.[89][90] 슈판다우 감옥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의 공동 관리하에 있었으며, 매달 교도관이 교대되었다. 각 국가별 담당 월은 다음과 같다.국가 | 담당 월 |
---|---|
영국 | 1월, 5월, 9월 |
프랑스 | 2월, 6월, 10월 |
소련 | 3월, 7월, 11월 |
미국 | 4월, 8월, 12월 |
[91] 헤스의 수감 번호는 7번이었다.[92]
루돌프 헤스는 나치당의 주요 인물로,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을 받아 적고 편집하는 데 크게 기여하여 히틀러의 최측근이 되었다.[104] 그는 채식주의자였으며, 인지학을 주창한 신비주의자 루돌프 슈타이너의 신봉자였다. 슈타이너가 주창한 자연식과 호메오파시를 실천했고, 바이오다이내믹 농업에 관심을 가졌다.[104]
복역 중에도 헤스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다른 수감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명상하는 시간을 보냈다. 미군 감옥 관리관 유진 버드 대령(Eugene Bird)은 수감자들에게 비교적 관대했으며, 우주 계획에 관심이 많았던 헤스를 위해 NASA의 연구 성과를 구해 주거나, 버드 대령의 이름으로 헤스와 NASA 과학자들 간의 서신 교환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를 문제 삼았고, 결국 버드 대령은 해임되었다.[93]
1954년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1955년 에리히 레더, 1956년 카를 되니츠, 1957년 발터 푼크가 석방되었다. 1966년 9월 30일에는 알베르트 슈페어와 발두어 폰 시라흐가 형기 만료로 석방되면서 헤스는 슈판다우 감옥의 유일한 수감자가 되었다. 1981년 9월 1일 슈페어가 사망하면서 헤스는 뉘른베르크 재판 피고인 중 마지막 생존자가 되었다. 가족, 정치인, 학자들은 유엔 상임이사국에 헤스의 감형을 탄원했지만, 거부권을 가진 소련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었다.[94][95][96] 네오나치는 헤스를 "나치즘의 순교자"로 미화했지만, 정작 헤스 자신은 네오나치를 "정통 나치즘을 왜곡하고 오해한 결과물"이라며 조롱하고 혐오했다고 한다.
1987년 8월 17일, 93세의 헤스는 슈판다우 감옥 내 정원에 있는 피서용 오두막에서 전기 코드로 목을 매 자살했다. 헤스는 이전에도 두 차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의 주머니에서는 유서가 발견되었고, 우울증에 의한 자살로 결론 내려졌다.[98] 그러나 헤스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타살이며, 유서 또한 위조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헤스의 아들 볼프 뤼디거 헤스는 영국에 의한 암살설을 주장하며, "1980년대 소련이 석방에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단독 비행 당시 논의된 내용이 석방 후 폭로될 것을 우려한 영국이 아버지를 암살했다"고 주장했다.[99] 헤스의 죽음으로 슈판다우 감옥은 폐쇄되었다.
장례식에는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매장이 연기되었고, 이후 비밀리에 치러졌다. 매년 헤스의 기일마다 네오나치들이 그의 묘가 있는 분지델에서 집회를 열었다.[94][100] 2011년 7월 20일 밤, 묘지 관리인과 헤스의 친족, 루터교회 관계자들은 헤스의 묘비를 철거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헤스의 묘는 철거되었다. 헤스의 유골은 화장되어 7월 21일 새벽 바다에 뿌려졌다.[101][102] 독일 유대인 공동체 대표와 홀로코스트 생존자 단체는 이러한 조치를 환영했다. 네오나치는 30일에 항의 집회를 열었고(250명이 참가했으며, 칼을 소지한 몇몇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교회 관계자들에게는 200통의 협박 편지가 발송되었다. 극우 사상 추종자가 실행범이었던 노르웨이 연쇄 테러 사건과 관련하여 순례지화될 우려도 고려되었다.[103]
3. 사상과 신념
3. 1.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
루돌프 헤스는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를 옹호했다. 1919년 2월 16일, 뮌헨 대학교에 입학한 직후 민족주의 단체인 툴레 협회에 가입했다.[18] 헤스는 많은 전직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이 독일 혁명의 배후(11월의 범죄자)라고 확신했다. 대학 재학 중에도 반공주의와 반유대주의 정치 운동에 몰두했다. 헤스는 원래 유대인과 전혀 관계가 없었고, 반유대주의자도 친유대주의자도 아니었지만, 패전으로 인한 독일의 혼란 때문에 당시 유행하던 패전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는 여론에 휩쓸려 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23][24]
나치당 집권 후에는 유대인 등 비(非)아리아 인종들을 합법적으로 탄압하기 위한 뉘른베르크법 입안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64][65] 그 후에도 많은 반유대 관련 법률에 서명했다.[66] 1938년 11월 8일에 발생한 반유대주의 폭동인 “수정의 밤”에 대해서는, 주모자인 요제프 괴벨스와 사이가 좋지 않아 “문화적인 시가지를 약탈하고 더럽히는 것은 독일인답지 않다”고 반대했다.[67]
3. 2. 신비주의와 오컬트
아돌프 히틀러와 하인리히 히믈러처럼 채식주의자였으며, 인지학을 주창한 신비주의자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를 열렬히 신봉했다. 그러나 나치는 슈타이너를 적대시하고 공격했다.[104] 헤스는 슈타이너가 주창한 자연식과 호메오파시를 충실히 실천했고,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에 강한 관심을 보이며 나치당 내에서 해당 농법의 최대 옹호자였다.[104]
총통의 총애를 잃어가면서 헤스는 정부 대표로서 독일 전역을 순회하며 국민 및 당원과 교류하는 형식적인 직무를 주로 맡게 되었고, 실권은 점차 잃어갔다.[62] 날마다 냉대를 받던 헤스는 오컬트에 몰두하여 점성술, 대지탐사, 꿈 해몽, 천리안 전문가들을 불러 모았다.[63]
3. 3. 지정학과 생존권
헤스는 뮌헨 대학교에서 경제학, 역사, 정치학, 지정학을 공부했다. 이때 지정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를 하우스호퍼 교수의 지도를 받았는데, 하우스호퍼는 대전 중 장군으로 참전했고 설득력 있는 교수였기 때문에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헤스도 그에게 깊이 심취하여 강한 영향을 받았다.[21][22] 하우스호퍼는 "독일 민족에게는 생존권이 부족하며, 이는 동쪽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을 가지고 있었고, 헤스는 이 생존권 구상에 강하게 매료되었다.[21][22]
하우스호퍼 교수는 자주 란츠베르크 감옥에 있는 헤스를 방문하여 히틀러, 헤스, 하우스호퍼 세 사람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32]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의 구술 필기를 헤스가 담당했다. 헤스는 단순한 필기자가 아니라 히틀러 저술의 자문 역할도 했다. 『나의 투쟁』 속의 “생존권”이나 “역사에서 영국의 역할” 등의 항목은 헤스의 영향이 크다.[33][34]
4. 유산과 평가
루돌프 헤스는 나치 독일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기행과 1941년 영국으로의 비행으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1987년 감옥에서 사망한 후, 그의 죽음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헤스는 나치당 초기부터 히틀러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며, 나의 투쟁 집필을 돕고 뉘른베르크법 제정에 관여했다. 그러나 점차 권력을 잃고 오컬트에 심취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평화 협상을 시도하며 영국으로 건너갔다.
헤스의 영국행은 여러 음모론을 낳았으며, 그의 죽음 역시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다. 사후 네오나치들은 헤스를 순교자로 숭배하며 매년 그의 묘지에서 집회를 열었으나, 2011년 묘지가 철거되고 유해는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4. 1. 나치즘과의 연관성
루돌프 헤스는 1920년 뮌헨 집회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나치즘에 헌신하게 되었다.[26] 그는 히틀러와 함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것은 유대인과 볼셰비키의 음모 때문이라는 등에 꽂힌 칼 신화를 공유했다.[26] 1920년 7월 1일, 헤스는 나치당에 16번째 당원으로 가입했다.[27]1923년 뮌헨 폭동에 참가한 헤스는 체포되어 히틀러와 함께 란츠베르크 감옥에 수감되었다.[28],[29],[30],[31] 옥중에서 헤스는 히틀러가 구술하는 내용을 받아 적어 《나의 투쟁》을 엮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33],[34]
출소 후 헤스는 히틀러의 개인 비서가 되어[36] 밀접한 관계를 이어갔다.[35] 1932년 12월, 헤스는 나치당 중앙 정치국 국장이 되어 모든 당 기관을 감독하는 책임자가 되었다.[42],[43],[44]
1933년 히틀러가 총리가 되자, 헤스는 나치당 부총통에 임명되었다.[34],[46],[47] 이 직위는 당의 모든 문제를 처리하고 독일의 모든 법 제정에 참여하는 권한을 가졌다.[48] 그러나 헤스는 실권이 없었고, 그의 권력은 모두 히틀러로부터 나왔다.[49]
헤스는 하인리히 힘러의 친위대(SS)에 접근하여 친위대 대장 계급을 받았다.[50] 1934년 6월, 헤스는 친위대 정보부 SD를 나치당 유일의 정보기관으로 정했다.[50]
1933년 10월, 헤스는 나치당 해외조직(AO)의 총재가 되었고,[52],[53] 1933년 12월에는 히틀러 내각에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했다.[48]
1934년 긴 칼의 밤 사건 이후, 헤스는 신경증과 심기증에 걸리게 되었다.[59] 마르틴 보르만에게 실무를 맡기는 일이 많아졌고, 히틀러와도 점차 소원해졌다.[60]
헤스는 뉘른베르크법을 비롯한 많은 반유대 관련 법률에 서명했다.[64],[65],[66] 1939년 8월, 헤스는 국방장관회의 의원이 되었지만,[68] 이 회의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69] 1939년 9월 1일, 히틀러는 헤스를 헤르만 괴링 다음으로 두 번째 후계자로 지명했다.[70],[71]
그러나 헤스는 점차 권력을 잃고 오컬트에 몰두하게 되었다.[63]
4. 2. 음모론과 논쟁
루돌프 헤스의 영국행과 죽음은 여러 음모론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41년 5월 10일, 헤스는 단독으로 비행기를 몰고 영국으로 향했는데, 공식적으로는 평화 협상을 위한 것이었지만, 많은 의문점을 남겼다.[98]헤스의 영국행은 나치당 지도자들을 당혹스럽게 했고, 아돌프 히틀러는 헤스를 정신 이상자로 묘사하며 그의 흔적을 없애려 했다.[73] 헤스의 자리는 마르틴 보어만이 차지했다.[73] 미국 언론인 허버트 렌프로 니커보커는 히틀러가 헤스를 통해 윈스턴 처칠에게 협상된 평화 또는 반볼셰비키 파트너십을 제안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73]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헤스의 비행이 영국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믿었다.[73] 윈스턴 처칠은 헤스의 계획을 "광기 어린 자선"이라고 언급했다.[73] 알베르트 슈페어와의 대화에서 헤스는 "초자연적인 힘"에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며, 영국에 제국을 보장하고 유럽에서 독일의 자유로운 행동을 허용하는 것을 제안했다.[73]
헤스는 스코틀랜드에 불시착한 후 체포되어 종전 때까지 포로로 억류되었다.[73] 그는 런던탑에 유폐된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73] 헤스는 우울증과 강박관념에 시달렸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73]
종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헤스는 기억상실을 주장했지만, 나중에는 이는 전술적인 이유였다고 밝혔다.[78][79][82] 그는 "평화에 대한 범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87]
1987년 헤스는 슈판다우 감옥에서 목을 매 자살한 채 발견되었는데,[98]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타살설과 유서 위조설이 제기되었다.[98] 헤스의 아들 볼프-뤼디거 헤스는 영국에 의한 암살설을 주장하며, 1980년대 소련이 석방에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영국이 헤스의 폭로를 우려해 암살했다고 주장했다.[99]
헤스의 묘는 네오나치의 성지가 되었고, 매년 기일에 정치 집회와 관련된 충돌이 빚어졌다.[94][100] 결국 2011년 묘지는 철거되었고, 유골은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101][102]
영국의 역사가 휴 토머스는 1941년 5월 이후의 헤스는 대역이며, 진짜 헤스는 헤르만 괴링의 음모로 격추되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105][106][107]
4. 3. 네오나치와의 관계
헤스는 네오나치들에게 "나치즘의 순교자"로 미화되었다.[94][95][96] 그러나 헤스 자신은 네오나치를 "정통 나치즘의 왜곡과 오해의 산물"로 조롱하며 혐오했다고 한다.[96]매년 헤스의 기일에는 네오나치들이 그의 묘가 있던 바이에른주 뷜렌지델에서 집회를 열었다.[94][100] 그러나 묘지 관리인과 헤스의 친족, 루터 교회 관계자들은 헤스의 묘비를 철거하기로 합의했고, 2011년 7월 20일 헤스의 묘는 철거되었다. 헤스의 유골은 화장되어 7월 21일 새벽 바다에 뿌려졌다.[101][102]
독일 유대인 공동체 대표와 홀로코스트 생존자 단체는 이러한 조치를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네오나치는 7월 30일 항의 집회를 열었고, 교회 관계자들에게 200통의 협박 편지가 발송되었다. 극우 사상을 가진 자가 실행범이었던 노르웨이 연쇄 테러 사건과 관련하여 순례지화될 우려도 고려되었다.[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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