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하우스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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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하우스호퍼는 독일의 지정학자이자 군인으로, 국가를 유기체로 보고 레벤스라움(생존권) 확보를 주장하며 나치 독일의 팽창주의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는 일본 주재 무관으로 근무하며 지정학 연구를 시작했고, 1919년 뮌헨 대학교에서 정치 지리학 강사로 활동하며 지정학을 학문적으로 발전시켰다. 하우스호퍼는 루돌프 헤스를 통해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생존권 이론을 나치당 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며, 1933년 뮌헨 대학교 정교수가 되어 독·일 관계 강화에 기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을 앞두고 아내와 함께 자살했으며, 그의 이론은 팽창주의와 인종주의적 요소로 인해 비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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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하우스호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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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카를 에른스트 하우스호퍼 |
출생일 | 1869년 8월 27일 |
출생지 | 뮌헨, 바이에른 왕국 |
사망일 | 1946년 3월 10일 |
사망지 | 페ール, 바이에른 자유주, 연합군 점령 독일 |
배우자 | 마르타 마이어-도스 (1896년 결혼, 1946년 사망) |
자녀 |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 하인츠 하우스호퍼 |
군사 경력 | |
소속 | 독일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87년 – 1919년 |
최종 계급 | 육군 소장 |
학문 경력 | |
근무 기관 | 뮌헨 대학교 |
직함 | 교수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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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카를 하우스호퍼는 1869년 뮌헨에서 예술가와 학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경제학 및 정치학 교수인 막스 하우스호퍼 주니어였고, 할아버지는 풍경 화가 막스 하우스호퍼 시니어였다.[2] 1887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바이에른군에 입대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으며, 여러 군사 학교를 수료했다.[2] 1896년에는 유대계 혈통의 마르타 마이어-도스(1877–1946)와 결혼하여 두 아들,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와 하인츠 하우스호퍼(1906–1988)를 두었다.[2]
1908년 일본 제국 도쿄에 무관으로 파견되어 일본 육군을 연구하고 군사 고문 역할을 수행했다.[2] 이 시기 일본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했으며, 한국과 만주를 여행하기도 했다.[2] 독일 귀국 후 폐 질환으로 요양하는 동안 일본에 관한 연구로 뮌헨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극동 전문가로 자리 잡았고, 이후 지정학 연구에 몰두하여 ''지정학 저널''(Zeitschrift für Geopolitik|차이트슈리프트 퓌어 게오폴리티크deu)을 공동 창간했다.[2]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서부 전선에서 여단을 지휘하며 참전했으나, 전쟁을 겪으며 독일에 대한 환멸과 함께 미국에 대한 강한 반감과 반유대주의 성향을 키웠다.[3] 그는 독일의 위기를 극복할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을 갈망했다.[3]
1919년 장군 계급으로 퇴역한 후 학계로 돌아와 뮌헨 대학교에서 정치 지리학을 가르쳤다.[2] 이 시기 제자였던 루돌프 헤스를 통해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의 생존권( Lebensraum|레벤스라움deu ) 개념은 히틀러와 나치 이데올로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3][1][55] 나치 정권 하에서 그는 헤스와의 친분 덕분에 유대계 아내를 보호받을 수 있었으나,[2][59] 1941년 헤스의 영국 비행과 1944년 아들 알브레히트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연루로 인해 정치적으로 몰락했다.[2][7] 알브레히트는 1945년 4월 처형되었다.[8]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을 앞두고 연합군에 의해 심문을 받았으며,[11][12] 1946년 3월 아내 마르타와 함께 바이에른의 자택 근처에서 동반 자살했다.[13][14]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1869년 8월 27일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 뮌헨에서 예술가와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경제학 및 정치학 교수이자 작가인 막스 하우스호퍼 주니어였고, 어머니는 아델 하우스호퍼(결혼 전 성은 프라스)였다. 할아버지는 풍경 화가인 막스 하우스호퍼 시니어였다.[2] 1887년 뮌헨 김나지움(고등학교)을 졸업한 후, 바이에른군 제1 야포 연대 'Prinzregent Luitpold|프린츠레겐트 루이트폴트de'에 1년간 지원병으로 입대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2][62]1888년에는 같은 연대의 사관후보생이 되었고, 이후 독일 육군사관학교(크리그슐레), 야포 학교(Artillerieschule|아르틸레리슐레de), 그리고 1898년에는 고급 장교 등용문인 바이에른 왕국 전쟁 아카데미를 수료했다.[2][62] 1896년 마르타 마이어-도스(1877–1946)와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담배 제조업자였으며, 마르타의 부계 혈통 역시 유대인이었다.[2][62] 부부는 두 아들,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와 하인츠 하우스호퍼(1906–1988)를 두었다.[2]
1899년부터 2년간 독일 제국 참모본부에서 근무했으며, 1901년 육군 대위로 진급하여 원 소속 부대로 복귀, 3년간 포병 중대장을 맡았다.[62] 1903년부터는 바이에른 전쟁 아카데미에서 군사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2][62] 1904년에는 다시 참모본부 중앙 사무국으로 이동했고, 이후 육군대학의 지령을 받아 전사 교관이 되었다. 그러나 1907년 학기 중 팔츠 지방 란다우의 바이에른 제3사단 참모로 발령받자 이를 징벌적 조치로 여기고 군인으로서의 출세보다는 지리 연구에 더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62]
1908년 11월, 주일본 독일 대사관의 무관으로 도쿄에 파견되어 1910년 6월까지 근무했다.[2][63] 그는 일본 제국 육군을 연구하고 포병 훈련에 대한 군사 고문 역할을 수행했다. 아내와 함께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1909년 2월 일본에 도착했으며, 메이지 천황을 접견하고 일본의 정치 및 군사 분야 주요 인사들과 교류했다. 1909년 가을에는 아내와 함께 철도 건설을 계기로 당시 일본 통치하에 있던 한국과 만주를 한 달간 여행하기도 했다. 1910년 6월 러시아를 거쳐 독일로 귀국했으나, 심각한 폐 질환으로 인해 3년간 군 복무를 쉬게 되었다.[2][63]
요양 기간인 1911년부터 1913년 사이, 하우스호퍼는 일본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논문 『Dai Nihon, Betrachtungen über Groß-Japans Wehrkraft, Weltstellung und Zukunft|다이 니혼, 대일본의 국방력, 세계적 지위 및 미래에 대한 고찰de』을 집필하여 뮌헨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2][63] 이를 통해 그는 극동 문제에 대한 독일 내 전문가로 자리 잡았다.[2]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서부 전선에 육군 소령으로 종군하여 여단을 지휘했으며, 전쟁 중 빠르게 승진하여 포병 연대장 등을 역임하고 종전 후 명예 육군 소장(Generalmajor|게네랄마요어de) 계급을 받았다.[64] 그러나 그는 전쟁을 겪으며 독일이 전쟁의 시련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꼈다.[3]
특히 미국의 참전은 하우스호퍼에게 미국에 대한 강한 반감을 심어주었다. 그는 미국을 "기만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위선적이고, 뻔뻔한 약탈 동물"이라 비난하며 깊은 증오심을 드러냈다. 동시에 그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 감정도 키워나갔다. 아내 마르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유대인들이 "민족, 인종, 국가에 대한 반역"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유대인들이 병역을 기피하고 전쟁으로 이익을 챙겼다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거짓된 비방을 반복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책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의 등장을 갈망했다.[3]
1919년 장군 계급으로 군에서 은퇴했다.[2]
2. 2. 일본 주재 무관 근무
1908년 11월, 하우스호퍼는 도쿄에 독일 제국 대사관의 무관으로 파견되었다. 그의 임무는 일본 제국 육군을 연구하고 포병 훈련에 대한 군사 고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내 마르타와 함께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1909년 2월 일본에 도착했다.[2] 일본에서 그는 메이지 천황을 접견하고, 일본의 정치 및 군사 분야의 여러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며 관계를 맺었다.1909년 가을에는 아내와 함께 당시 일본 제국의 통치 하에 있던 한국과 만주 지역을 한 달간 여행했다. 이 여행은 철도 건설 상황을 시찰하는 것을 계기로 이루어졌다.[2]
1910년 6월, 하우스호퍼 부부는 러시아를 경유하여 독일로 귀국길에 올랐고, 한 달 뒤 독일에 도착했다. 그러나 독일로 돌아온 직후 하우스호퍼는 심각한 폐 질환을 앓게 되어, 이후 3년 동안 군 복무를 쉬어야 했다.[2] 이 요양 기간 동안(1911년-1913년) 그는 뮌헨 대학교에서 일본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일본의 군사력, 세계에서의 지위, 장래에 대한 고찰」(Dai Nihon, Betrachtungen über Groß-Japans Wehrkraft, Weltstellung und Zukunftde)이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2]
2. 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1년부터 1913년까지 요양 기간 동안, 하우스호퍼는 뮌헨 대학교에서 일본에 관한 논문인 ''다이 니혼, 그로스-야판의 국방력, 세계적 지위 및 미래에 대한 고찰''(Dai Nihon, Betrachtungen über Groß-Japans Wehrkraft, Weltstellung und Zukunftde)으로 철학 박사( Doktor der Philosophiede ) 학위를 취득했다. 이를 통해 그는 극동 문제에 대한 독일 내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2]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서부 전선에 종군하여 여단을 지휘했으며, 독일 제국군에서 복무하며 소장( Generalmajorde ) 계급까지 올랐다. 그러나 전쟁을 겪으며 그는 독일이 전쟁의 시련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꼈다.[2][3]
특히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것은 하우스호퍼에게 두 가지 깊은 증오심을 심어주었다. 첫째는 미국에 대한 반감이었다. 그는 미국을 "기만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위선적이고, 뻔뻔한 약탈 동물"이라고 묘사하며 "미국인은 진정으로 내가 깊고 본능적인 증오심으로 여기는 이 세상의 유일한 사람들이다."라고 적었다.
동시에 하우스호퍼는 극심한 반유대주의 감정을 키웠다. 그는 아내 마르타(그녀의 아버지가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대인들의 "민족, 인종, 국가에 대한 반역"을 언급하며, 유대인들이 시민권을 가진 국가를 위해 싸우기를 거부하고 전쟁을 통해 부당한 이익을 챙겼다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거짓 비난을 되풀이했다.
하우스호퍼는 독일이 겪는 문제들의 해결책으로 강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등장을 갈망했다. 그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남자! 그 이름에 걸맞은 사람을 위한 왕국, 제국의 왕관!"이라거나 "내가 얼마나 카이사르를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런 사람을 갖고 그가 나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안다면 내가 그에게 얼마나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을지 보시오."라고 쓰며 독재적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했다.[3]
1919년 장군 계급으로 군에서 은퇴한 후, 그는 젊은 루돌프 헤스와 가까워졌는데, 헤스는 그의 조수가 되었고 훗날 나치당의 부지도자가 되었다.[3]
2. 4. 나치와의 관계
1919년 뮌헨 대학교에서 정치 지리학 사강사 자격을 얻은 하우스호퍼는[2] 같은 해 제자였던 루돌프 헤스를 알게 되었고, 1921년에는 헤스를 통해 아돌프 히틀러와 만나게 되었다. 히틀러는 하우스호퍼의 생존권(Lebensraum) 이론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생존권을 잃은 독일인은 살아남기 위해 군사적으로 확장 정책을 진행해야 한다'는 논리를 나치당의 핵심 정책으로 받아들였다.1923년 히틀러가 맥주홀 폭동 실패 후 란츠베르크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헤스도 자진하여 함께 수감되었다. 하우스호퍼는 1924년 6월부터 12월까지 매주 뮌헨에서 란츠베르크까지 이동하며 히틀러와 헤스에게 개인적인 멘토링을 제공했다.[5] 이 시기 하우스호퍼의 지정학적 개념들, 특히 동유럽 확보를 통한 생존권 확장, 방어 종심, 자연 국경, 육상 및 해상력 균형 등의 아이디어가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에 반영된 것으로 평가된다.[1][55] 히틀러는 훗날 한스 프랑크에게 "란츠베르크는 국비로 받은 나의 대학 교육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56] 하우스호퍼의 아들 알브레히트는 당시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장군이자 교수)와 인기를 고려할 때, 그의 란츠베르크 방문이 나치 운동에 상당한 신뢰성을 부여했다고 평가했다.[6]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1933년, 하우스호퍼는 뮌헨 대학교의 정교수가 되었으나 공식 직위와 급여는 거절했다.[2] 그는 나치 정권 하에서 정치, 군사, 외교 분야의 고문 역할을 수행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4년부터 1937년까지 독일 학사원 총장을 역임하는 동안, 주독 일본 대사관 무관이었던 오시마 히로시와 긴밀히 접촉하며 추축국의 한 축이 될 독일과 일본의 관계 강화에 기여했다.[2] 또한 1925년부터 1939년까지(1931-1933년 제외) 국제 정치 상황에 대한 월간 라디오 강좌를 진행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2]
하우스호퍼는 헤스와의 친분 덕분에 유대계였던 아내 마르타 마이어-도스를 나치의 인종 법률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2] 헤스는 그녀에게 '명예 독일인' 지위를 부여하도록 조치했다.[59] 그러나 하우스호퍼는 1939년 친위대(SS) 산하의 독일 민족 대책 본부(Volksdeutsche Mittelstelle, 해외 거주 독일계 주민 지원 기관)에 관여하기도 했다. 같은 해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고 이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지정학적 관점에서 소련과의 관계 유지를 주장했던 하우스호퍼와 히틀러 사이의 관계는 점차 멀어졌다.
1941년 5월, 그의 후원자이자 제자였던 헤스가 영국과의 단독 강화를 시도하며 스코틀랜드로 날아간 사건은 하우스호퍼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다. 헤스가 나치당에서 숙청되면서 헤스와 가까웠던 하우스호퍼 가족은 다시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44년 아들 알브레히트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인 7월 20일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카를 하우스호퍼는 1944년 7월 28일 체포되어 다하우에 한 달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7] 알브레히트는 은신했으나 12월 7일 체포되어 베를린의 모아비트 감옥에 수감되었고, 전쟁 종료 직전인 1945년 4월 22-23일 밤 SS에 의해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총살당했다.[8] 알브레히트는 옥중에서 쓴 시 '아버지'에서 다음과 같이 아버지를 비판했다.
> 내 아버지는 봉인을 깼다.
> 그는 악의 숨결이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 그는 악마가 세상으로 날아가게 했다.[9]
아들의 죽음과 독일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하우스호퍼는 여전히 "뉴욕의 금융 유대인"이 뮌헨 파괴의 원인이라고 비난했다.[10] 전후 그는 미군에 의해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준비하던 에드먼드 A. 왈시 신부는 하우스호퍼를 심문한 후, 그가 비록 직접적인 전쟁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지정학을 통해 나치의 침략 전쟁 준비를 정당화하고 교육을 타락시킨 점에서 도덕적, 법적 책임이 있다고 보고했다.[11][12]
하우스호퍼가 히틀러와 나치 이데올로기에 미친 영향의 정도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소 갈린다. 이언 커쇼는 "[그의] 영향력은 뮌헨 교수가 나중에 인정하려 했던 것보다 더 컸을 것이다."[45]라고 쓰고, 요아힘 C. 페스트는 하우스호퍼가 히틀러의 이념 형성에 기여한 바가 크지만 "히틀러의 [하우스호퍼의] 아이디어에 대한 해석은 분명히 그 자신의 것이었다."[46]라고 말한다. 하우스호퍼 자신은 왈시 신부에게 히틀러가 지정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반쪽짜리 교육을 받은 인물이며,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히틀러에게 지정학을 왜곡하여 전달했다고 주장했다.[47] 그는 자신이 히틀러를 가르쳤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나치당이 지정학 연구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48]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하우스호퍼의 가르침과 저술이 히틀러와 나치에게 지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들의 침략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정치적, 철학적 용어(특히 '생존권')를 제공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왈시 신부 역시 하우스호퍼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히틀러의 연설과 나치의 정책에서 하우스호퍼의 지도, 언어, 주장이 명백히 사용되었음을 지적했다.[50][51]
하우스호퍼는 나치당의 정식 당원은 아니었으며, 당의 노선과 다른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인종주의보다는 공간적 요인을, 인종 결정론보다는 환경 결정론을 강조했고,[57] 아내의 배경 때문에 국가 정책으로서의 반유대주의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5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총통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하기도 했다. 나치 좌파 인사들과 접촉하고 독일-러시아 동맹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의심을 받기도 했다. 하우스호퍼와 게오르기 구르지예프의 관계, 브릴 협회나 툴레 협회와의 연관성, 나의 투쟁 집필 관여설 등은 입증되지 않은 주장으로 간주된다.[52][53]
2. 5. 몰락과 죽음
1939년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지정학적으로 '소련과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하우스호퍼와 히틀러의 관계는 멀어지기 시작했다.설상가상으로 1941년 5월 10일, 그의 제자였던 루돌프 헤스가 영국과의 단독 평화 협상을 위해 비행했을 때, 하우스호퍼가 접촉 상대로 해밀턴 공작(더글러스 해밀턴)을 소개해 준 것이 문제가 되었다. 또한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가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되었다는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하우스호퍼 가족은 나치 정권의 강한 의심을 받게 되었다.[2] 알브레히트는 결국 1944년 체포되었고, 1945년 4월 베를린 함락 직전에 처형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하우스호퍼는 잠시 자취를 감추었으나, 1946년 1월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중죄인으로 재판받아 사형 선고(교수형)를 받았다고 전해진다.[2]
결국 1946년 3월 10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밤, 카를 하우스호퍼와 그의 아내 마르타는 푈 인근 암머제 호숫가의 하르치멜호프 영지 내 외딴곳에서 함께 목숨을 끊었다. 부부는 둘 다 비소를 마셨으며, 아내는 나뭇가지에 목을 매달았다.[13][14] 하우스호퍼는 아들 하인츠 하우스호퍼(1906–1988)가 시신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상세한 지도를 남겼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어떤 형태의 국가 장례식이나 교회 장례식, 부고, 묘비, 또는 내 무덤을 표시하는 어떤 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잊혀지기를 바란다."[15]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훗날 에드먼드 A. 왈시 신부는 그들의 묘소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는 이 밤의 깊은 비극, 외로운 협곡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마지막 지정학자! 19년 동안 하우스호퍼의 가르침에 대해 미국에 가르치고 경고한 후, 오늘날 바이에른에서 가장 외로운 장소 중 하나에서 그의 자살한 시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알 수 없는 운명인가!"[16]
3. 지정학 이론
하우스호퍼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지리적 지식과 지정학적 인식 부족이라고 판단하고, 독일의 부흥을 목표로 학계에 입문했다. 그는 오스발트 슈펭글러, 알렉산더 폰 훔볼트, 카를 리터, 프리드리히 라첼, 루돌프 첼렌, 핼퍼드 매킨더 등 다양한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17] 지리학, 역사, 경제학, 인구 통계학, 정치학, 인류학 등을 융합하여 지정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고자 했다. 그의 지정학의 핵심은 국가를 고유한 지리적, 역사적 특성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 또는 유기적 국가로 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건강하고 팽창하는 국가가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영토, 즉 레벤스라움(생존권)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개념은 이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에 의해 가장 공격적이고 군국주의적인 방식으로 해석되어 채택되었다.[4]
하우스호퍼의 지정학은 또한 국가의 자급자족(Autarky), 세계를 몇 개의 세력권으로 나누는 범지역(Pan-region) 구상, 그리고 세계 정치를 주도하는 육상 세력과 해양 세력 간의 이분법적 대립이라는 아이디어를 중요한 축으로 삼았다. 정치 지리학이 기술적이고 분석적인 데 반해, 하우스호퍼의 지정학은 국가 정책에 대한 전략적 처방이라는 규범적 요소를 강조했다.[18] 그의 아이디어 중 일부는 초기 미국과 영국의 지정학 이론에서 비롯되었지만, 독일 지정학은 국가 이익에 대한 본질주의적 관점을 채택하고 이를 만병통치약처럼 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로서 지정학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사회의 불안감 속에서 대중적 공감을 얻었다.[19]
하우스호퍼는 뮌헨 대학교 교수직을 기반으로 자신의 지정학적 아이디어를 확산시켰다. 1922년에는 뮌헨에 지정학 연구소를 설립했고, 1924년부터는 월간지 ''지정학 저널(Zeitschrift für Geopolitik)''을 창간하여 지정학 개념을 대중화하는 데 힘썼다. 그는 학문적 활동 외에도 라디오 강연 등을 통해 국제 정치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알렸고, 이는 그를 독일 사회의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2] 그의 저작들은 나치당과 독일 군부의 많은 지도자들에게 배포되었다.[2]
하우스호퍼의 지정학은 프리드리히 라첼과 루돌프 첼렌의 이론을 계승하고 확장한 것이다. 라첼과 첼렌이 국가를 지도자의 통치 아래 있는 공간 속 유기체로 본 반면, 하우스호퍼의 뮌헨 학파는 지리학을 전쟁과 제국 건설을 위한 도구로 연구했다.[29] 그는 지정학을 "토지에 대한 권리, 즉 제국의 국경 내 토지뿐만 아니라 더 광범위한 ''Volk'' 및 문화적 토지에 대한 권리를 보호해야 할 의무"라고 정의하며[31], 문화가 영토 확장을 정당화하고 안정시키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32]
이러한 그의 이론은 나치 외교 정책, 특히 레벤스라움 확보 전략에 중요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검사 측의 요청으로 하우스호퍼를 심문했던 에드먼드 A. 윌시 신부는 그가 나치 전쟁 범죄에 법적,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보고했다. 윌시는 하우스호퍼와 그의 동료들이 "전쟁 준비를 위한 교육을 타락시키는 데 있어서 지정학의 역할을 고려할 때, 더 잘 알려진 전쟁 범죄자만큼 근본적으로 유죄"라고 비판하며[11], 하우스호퍼의 비극은 학문 연구를 "국가화"하고 지정학을 "국제적 강도 행위에 대한 과학적 근거와 정당성"을 제공하는 무기로 만든 데 있다고 지적했다.[12]
3. 1. 레벤스라움(생존권)
하우스호퍼는 국가를 고유한 지리적, 역사적 특성을 가진 유기체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유기체적 국가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영토 확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레벤스라움'(Lebensraum), 즉 '생존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4] 이 개념은 프리드리히 라첼의 이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 개념은 단순히 인구 부양을 위한 공간 확보를 넘어, 독일 중심의 세계 질서 재편이라는 더 큰 구상과 연결되었다. 그는 세계를 몇 개의 '범 지역'(Pan-Region) 블록으로 나누고, 각 블록은 미국, 소련, 일본, 독일과 같은 핵심 국가가 주도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세력 균형 이론에 기반한 것이었으나, 궁극적으로는 독일이 이 모든 블록을 총괄하는 최상위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의 주요 지정학적 주장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프리드리히 라첼의 레벤스라움(생존권) 개념과 국가 확장 이론 계승
- 루돌프 첼렌의 아우타르키(경제 자립론) 강조
- 핼포드 매킨더의 하트랜드 이론에 기반한 대륙 세력(Land Power)과 해양 세력(Sea Power)의 대립 구도 인식
- 범 지역 이론 (통합 지역 구상) 제시
- 독소 동맹을 통한 유라시아 대륙 지배 구상 제안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 개념과 지정학 이론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레벤스라움은 나치 정권에 의해 동유럽 침략과 인종 청소를 정당화하는 핵심 논리로 왜곡되어 사용되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4] 하우스호퍼 자신은 이후 나치 정권의 소련 침공에 대해 명확히 실망감을 표했으나, 그의 이론이 결과적으로 파시즘적 팽창주의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3. 2. 자급자족(Autarky)
하우스호퍼는 스웨덴의 정치학자 루돌프 첼렌(Rudolf Kjellén)이 제시한 '아우타르키'(경제 자립론) 개념을 주요하게 주장했다. 아우타르키는 국가가 외부 세계에 의존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을 의미하며, 하우스호퍼는 이를 국가 생존을 위한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3. 3. 범지역(Pan-regions)
하우스호퍼는 세계를 몇 개의 '''범 지역 이론'''(통합 지역)에 따라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각 지역에서 미국, 소련, 일본, 독일과 같은 주요 국가가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며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구상은 세력 균형 이론에 기초하여 세계적 차원의 세력 균형을 확립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지만, 하우스호퍼는 궁극적으로 이 모든 범지역을 총괄하는 주도 국가는 독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범지역 이론은 그가 제시한 주요 지정학적 개념 중 하나였다.3. 4. 육상 세력과 해양 세력의 대립
하우스호퍼 지정학의 핵심은 매킨더의 하트랜드 이론을 받아들여, 육상 세력과 해양 세력 간의 대립을 세계사의 주요 동력으로 본 것이다.[4] 그는 이 구도를 바탕으로 독일의 생존과 부흥을 위한 전략을 제시했다.하우스호퍼는 자신의 지정학 이론을 정립하면서 여러 학자들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켰다.
- 프리드리히 라첼의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존권) 개념과 국가 유기체설 및 팽창 이론[4]
- 루돌프 첼렌의 아우타르키(Autarky, 경제적 자급자족) 개념
- 핼포드 매킨더의 하트랜드 이론
하우스호퍼는 이러한 이론들을 바탕으로 독일이 동유럽과 러시아를 포함하는 광대한 레벤스라움을 확보하여 국가 생존의 기반을 마련하고, 경제적 자립(아우타르키)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나치 정권의 동방 정책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4]
해양 세력(주로 영국과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하우스호퍼는 강력한 육상 세력 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특히 소련과의 동맹(독소 동맹)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이를 통해 유라시아 대륙의 핵심부(하트랜드)를 장악해야 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그는 일본을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독일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국가로 인정하고, 독일-소련-일본을 잇는 거대한 대륙 동맹(Continental Bloc)을 구상했다. 그의 저서 ''태평양 지정학''(''Geopolitik des pazifischen Ozeans'')은 이러한 구상을 담고 있으며, 실제로 추축국 동맹, 특히 독일과 일본의 연결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하우스호퍼는 '''범 지역 이론'''(Pan-region theory)을 제시했다. 이는 세계를 몇 개의 자급자족적인 경제 및 정치 블록(범 지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을 미국, 소련, 일본, 독일과 같은 중심 국가가 지도하며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세력 균형 이론에 기반한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독일이 유럽과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범 지역의 중심 국가로서 세계 질서를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4. 영향 및 평가
카를 하우스호퍼는 독일 제국의 패배 이후 독일의 부흥을 목표로 학문에 입문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의 원인을 독일인의 지리적, 지정학적 인식 부족으로 진단했다.[4] 그는 지리학, 역사, 경제학, 인구 통계학, 정치학, 인류학 등을 융합하여 지정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의 이론의 핵심 중 하나는 국가를 유기체적 존재로 보고,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필요한 영토, 즉 생존권(Lebensraum)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이 개념은 훗날 히틀러와 나치당에 의해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차용되었다.[4]
나치가 정권을 잡은 1933년 이후 하우스호퍼는 뮌헨 대학교 정교수가 되었고, 정치, 군사, 외교 분야에서 고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루돌프 헤스와의 친분을 통해 히틀러에게 접근할 수 있었으며, 맥주홀 폭동 실패 후 란츠베르크 감옥에 수감된 히틀러와 헤스에게 자신의 정치 및 철학 사상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다.[5] 학자 홀거 헤르비히는 "히틀러는 하우스호퍼가 제공하는 것을 마른 스펀지처럼 흡수했다"고 평가했으며, 전기 작가 요아힘 페스트는 헤스가 하우스호퍼를 히틀러에게 연결한 것이 국가사회주의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보았다.[5] 하우스호퍼는 1934년부터 1937년까지 독일 학사원 총장을 역임했으며, 라디오 강연과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2]
하우스호퍼는 소련과의 동맹(독소 동맹)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이는 국가 볼셰비즘 등 일부 좌파 세력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되자 히틀러와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또한, 제자였던 헤스가 영국과의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비밀리에 영국으로 날아간 사건과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가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알브레히트는 결국 1945년 4월 SS에 의해 처형되었다.[64][8]
하우스호퍼는 일본에서의 무관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지정학 연구를 시작했으며, 대체로 친일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는 주독일 일본 대사관 무관이었던 오시마 히로시와 접촉하며 독일과 일본의 관계 강화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저서 『태평양 지정학』(''Geopolitik des pazifischen Ozeans'') 등은 일본의 군사력 증강과 아시아에서의 패권 추구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했으며, 특히 일본의 남진론을 지지하고 북진론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일본 체류 중 일본어뿐 아니라 한국어, 중국어 등을 익혔고, 아시아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힌두교, 불교 등 동양 사상과 신비주의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전후 하우스호퍼는 뉘른베르크 재판과 관련하여 조사를 받았으며, 그의 이론이 나치 전쟁 범죄에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을 받았다.[11][12] 하우스호퍼 자신은 나치즘에 환멸을 느꼈으며 자신의 이론이 왜곡되었다고 주장했고, 유대인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나치즘에 완전히 동조하지는 않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64][2]
4. 1. 비판
하우스호퍼의 지정학 이론은 여러 측면에서 비판을 받는다. 그의 핵심 주장 중 하나는 국가를 유기체적 존재로 간주한 점이다. 그는 각 국가는 고유한 지리적, 역사적 특성에 따라 특정 민족성을 가지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형성되는 인격체와 같다고 보았다.[4]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건강하고 팽창하는 국가가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영토, 즉 생존권(Lebensraum)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 '생존권' 개념은 이후 히틀러와 나치당에 의해 가장 공격적이고 군국주의적인 방식으로 해석되어 채택되었으며, 이는 나치 독일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4] 또한, 하우스호퍼는 자신의 저서 ''태평양 지정학''의 이론을 바탕으로 일본을 추축국과 연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확전에 기여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하우스호퍼 개인의 행적과 사상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는 맥주홀 폭동 실패 후 란츠베르크 감옥에 수감된 루돌프 헤스와 히틀러에게 정치 및 철학 사상을 가르치는 스승 역할을 했다.[5] 이는 그의 사상이 나치 지도부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전쟁 말기, 하우스호퍼의 아들 알브레히트는 7월 20일 음모에 연루되어 SS 사살 부대에 의해 베를린의 모아비트 감옥에서 처형당했다.[8] 알브레히트는 죽기 전 남긴 시 "아버지"에서 아버지가 나치즘이라는 악마를 세상에 풀어놓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내 아버지는 봉인을 깼다. 그는 악의 숨결이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악마가 세상으로 날아가게 했다."라고 썼다.[9]
전후 하우스호퍼는 뉘른베르크 재판과 관련하여 에드먼드 A. 윌시 신부의 조사를 받았다. 윌시 신부는 하우스호퍼가 나치 전쟁 범죄에 법적, 도덕적으로 공모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윌시는 하우스호퍼와 그의 동료들이 "전쟁 준비를 위한 교육을 타락시키는 데 지정학이 기여했다"고 지적하며, "더 잘 알려진 전쟁 범죄자만큼 근본적으로 유죄"라고 비판했다.[11] 윌시는 또한 하우스호퍼의 비극이 학문적 연구를 "국가화"하고 지정학을 "국제적 강도 행위에 대한 과학적 근거와 정당성"을 제공하는 무기로 만든 데 있다고 주장했다.[12] 나치가 아들 알브레히트를 살해하고 독일을 폐허로 만들었음에도, 하우스호퍼는 여전히 뮌헨 파괴의 책임을 "뉴욕의 금융 유대인"에게 돌리는 등 반유대주의적 시각과 왜곡된 현실 인식을 보여주어 비판받는다.[10]
5. 저서
- 『대일본: 일본의 군사력, 세계에 있어서의 지위, 그리고 장래의 고찰』(Dai Nihon: Betrachtungen über Gross-Japans Wehrkraft, Weltstellung und Zukunftde, 1913)
- 『일본 및 아(亞)일본 지역의 지리적 발전에 있어서 독일의 역할과 전쟁 및 군정에 의한 그 촉진』(Der deutsche Anteil an der geographischen Erschließung Japans und des subjapanischen Erdraumes und deren Förderung durch Krieg und Wehrpolitikde, 1913)
- 『지리적 발전에 따른 일본 제국』(Das Japanische Reich in seiner geographischen Entwicklungde, 1921)
- 『일본 및 일본인』(Japan und die Japanerde, 1923)
- 『자결을 향해 가는 동남아시아』(Südostasiens Wiederaufstieg zur Selbstbestimmungde, 1923)
- 『태평양 지정학: 지리와 역사 간의 상호 관계에 대한 연구』(Geopolitik des Pazifischen Ozeans. Studie über die Wechselbeziehungen zwischen Geographie und Geschichtede, 1924)
- 『지리적, 정치적 중요성에 따른 경계』(Grenzen in ihrer geographischen und politischen Bedeutungde, 1927)
- 『지정학의 구성 요소』(Bausteine zur Geopolitikde, 1928) (오토 마울 등 공저)
- 『메이지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는 일본의 라이히 재생』(Japans Reichserneuerung von der Meiji-Ära bis heutede, 1930)
- 『범(泛)-이데안의 지정학』(Geopolitik der Pan-ideende, 1931)
- 『대국의 저편』(Jenseits der Großmächtede, 1932) (편저)
- 『세계에 있어서의 국가사회주의의 관념』(Der nationalsozialistische Gedanke in der Weltde, 1933)
- 『세계 강대국 및 제국으로서의 일본의 발전』(Japans Werdegang als Weltmacht und Empirede, 1933)
- 『무츠히토: 일본의 카이저』(Mutsuhito – Kaiser von Japande, 1933)
- 『오늘날의 세계 정치』(Weltpolitik von heutede, 1934) ([https://archive.org/details/Haushofer-Karl-Weltpolitik-von-heute 온라인])
- 『공간을 초월하는 힘』(Raumüberwindende Mächtede, 1934)
- 『나폴레옹 1세』(Napoleon Ide, 1935)
- 『키치너』(Kitchenerde, 1935)
- 『포슈』(Fochde, 1935)
- 『세계대전 전후의 대국』(Die Großmächte vor und nach dem Weltkriegde, 1935) (루돌프 혤렌 공저, 하우스호퍼, 후고 하싱어, 오토 마울, 에리히 옵스트 공편)
- 『세계의 바다와 세계 열강』(Weltmeere und Weltmächtede, 1937)
- 『발효하는 세계: 독일의 지정학자에 의한 현대의 보고』(Welt in Gärung. Zeitberichte deutsche Geopolitikerde, 1937) (구스타프 포클러-하우케 공편)
- 『인도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독일 문화 정책』(Deutsche Kulturpolitik im indopazifischen Raumde, 1939)
- 『지정학의 기초』(Geopolitische Grundlagende, 1939)
- 『일본은 제국을 건설한다』(Japan baut sein Reichde, 1941)
- 『독일 민족의 탄생: 다양한 부족으로부터 민족의 통일로』(Das Werden des deutschen Volkes. Von d. Vielfalt der Stämme zur Einheit der Nationde, 1941)
- 『대륙 블록: 중부 유럽, 유라시아, 일본』(Der Kontinentalblock: Mitteleuropa, Eurasien, Japande, 1941)
- 『국방 지정학: 국방학의 지리적 기초』(Wehr-Geopolitik: Geographische Grundlagen der Wehrkundede, 1941)
- 『제국: 서양 세계에서 대독일의 성장』(Das Reich. Großdeutsches Werden im Abendlandde, 1943)
- 『지정학에 관하여』(De la Géopolitique프랑스어, 1986) (프랑스어 출판)
- ''English Translation and Analysis of Major General Karl Ernst Haushofer's Geopolitics of the Pacific Ocean: Studi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Geography and History'' (2002) (영어 번역 및 분석)
'''주요 한국어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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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치학의 기초 이론』(다마키 하지메 역, 과학주의 공업사, 1941) - ''Bausteine zur Geopolitik'' 초역 등
- 『지정치학 입문』(히지카타 사다이치, 사카모토 토쿠마츠 역, 육성사, 1941) - ''Bausteine zur Geopolitik'' 초역
- 『대동아 지정치학』(이시지마 사카에, 키무라 타로 역편, 투자경제사 출판부, 1941)
- 『태평양 지정학』(태평양 협회 편역, 이와나미 서점, 1942) - ''Geopolitik des Pazifischen Ozeans'' 전역
- 『대일본』(와카이 린이치 역, 라쿠요 서원, 1942) - ''Dai Nihon'' 전역
- 『생명권과 세계관』(와카이 린이치 역, 하쿠분칸, 1942) - ''Raumüberwindende Mächte'' 전역
- 『일본』(사사키 노리오 역, 제일 서방, 1943) - ''Japans Reichserneuerung von der Meiji-Ära bis heute'' 초역
- 『대륙 정치와 해양 정치』(쿠보이 요시미치 역, 다이호샤, 1943) - ''Weltmeere und Weltmächte'' 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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