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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설레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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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애설레드 2세는 '준비 안 된 왕'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잉글랜드의 왕으로, 978년부터 1016년까지 통치했다. 덴마크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데인겔드(조공)를 지불하고, 1013년에는 스벤 1세에게 왕위를 빼앗겨 노르망디로 망명했다. 이후 복위했지만, 1016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에드먼드 2세와 크누트 사이의 전쟁은 크누트의 승리로 끝났다. 애설레드의 통치 기간에는 법률 제정 및 문서 행정이 강화되었으나, 후대에는 무능한 군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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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설레드 2세
기본 정보
에ゼル레드 2세
에젤레드 2세 (13세기 초 Abingdon Chronicle 사본)
직위잉글랜드의 왕
통치 기간978년 3월 18일 – 1013년
대관식알 수 없음
이전 통치자에드워드 순교왕
후임 통치자스벤 쌍차수염왕
섭정엘프스리스 (978–984)
통치 기간1014년 – 1016년 4월 23일
이전 통치자스벤 쌍차수염왕
후임 통치자에드문드 2세
왕가웨식스 왕가
배우자
에마 오브 노르망디
자녀
에크베르트 아델링
에드문드 강용왕


에드거 아델링
에드기타 (머시아 영주 부인)
엘프기프 (노섬브리아 영주 부인)
윌프힐드 (이스트 앵글리아 영주 부인)
에드워드 참회왕
앨프레드 아델링
부친에드거 평화왕
출생일966년경
출생지잉글랜드
사망일1016년 4월 23일 (약 50세)
사망지런던, 잉글랜드
매장지런던, (현재는 소실)
이름
고대 영어Æþelræd
고대 노르드어Aðalráðr
별칭에젤레드 무책왕

2. 이름

애설레드(Æthelred)라는 이름은 고대 영어로 '고귀한 조언'을 뜻하는 æðele|애설레ang와 ræd|래드ang의 합성어이다.[3] 이는 웨섹스 왕가 사람들의 일반적인 복합 이름과 같으며, 그의 조상들의 이름과 두운을 이룬다. 예를 들어 Æthelwulf|애설울프ang('고귀한 늑대'), Ælfred|앨프레드ang('요정의 조언'), Eadweard|에드워드ang('부유한 보호'), Eadgar|에드가ang('부유한 창') 등이 있다.

그의 별명인 'Unræd'는 고대 영어로 '나쁜 조언', '나쁜 계획' 또는 '어리석음'을 의미하며,[3] 현대 영어로는 'The Unready'(준비 안 된)로 번역된다.[4] 이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데인인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Unræd|운래드ang의 ræd|래드ang 요소는 애설레드의 이름에서 '조언'을 의미하는 요소와 동일하다. 따라서 Æþelræd Unræd|애설래드 운래드ang는 "고귀한 조언, 조언 없음"이라는 모순 어법이 된다.

3. 초기 생애

애설레드는 잉글랜드 왕 에드거와 앨프스리스의 아들로, 966년경에 태어났다.[1] 975년 아버지 에드거 왕이 사망하면서, 이복형인 에드워드가 왕위에 올랐으나,[1] 978년에 암살당했다.[2] 그 결과 10세의 어린 나이로 애설레드가 왕위에 올랐다.[1]

애설레드의 초기 통치는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던스탄 등 주요 고문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에드워드 왕의 죽음 이전, 에드거 왕은 교회 개혁의 일환으로 수도원에 토지를 기증하였는데, 이로 인해 귀족 가문의 후원이 약화되었다. 에드거 왕 사후, 귀족들은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거나 새로운 재산을 압수하려 하였고, 이는 던스탄의 반대에 부딪혔다.[1]

4. 덴마크와의 갈등

980년부터 햄프셔, 타넷 섬, 체셔 등 잉글랜드 해안 지역에 소규모 데인인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덴마크의 공격은 더욱 심각해졌으며, 1006년1007년1009년1012년에는 매우 파괴적인 공격이 발생했다.[6]

991년 맬던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은 덴마크 군에 패배했고, 이후 잉글랜드는 덴마크에 '데인겔드'라는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다.[6] 잉글랜드는 데인겔드를 지불하여 일시적인 평화를 얻었지만, 반복되는 지불은 잉글랜드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노르망디 공국은 잉글랜드를 약탈하고 돌아오는 덴마크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고, 이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간의 긴장을 유발했다. 교황 요한 15세의 중재로 991년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간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8]

997년 덴마크의 습격이 재개되어 콘월, 데번, 서머싯, 웨일스 남부, 도싯, 햄프셔, 서식스 등지를 약탈했다. 1001년에는 서식스를 황폐화시키고 와이트 섬을 거점으로 삼았다. 엑서터에서 잉글랜드 군의 성공적인 방어가 있었지만, 1002년 잉글랜드는 약 10886.21kg로 덴마크와 휴전을 맺었다.[6]

1002년 11월 13일 성 브라이스의 날, 애설레드는 잉글랜드 내의 모든 덴마크 남성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성 브라이스의 날 학살)[9] 이 학살로 덴마크 왕 스벤 1세의 여동생 군힐드가 사망하는 등, 덴마크의 침략을 더욱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003년 스벤 1세는 서부 잉글랜드를 침공했고, 1004년에는 이스트 앵글리아의 노리치를 약탈했다. 이스트 앵글리아 귀족 울프키텔 스닐링르가 덴마크 군에 맞섰으나 테트퍼드 외곽에서 패배했다. 1005년 덴마크 군은 잉글랜드를 떠났는데, 이는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입은 손실이나 그 해 유럽 대륙과 영국 제도에 큰 피해를 입힌 기근 때문일 수 있다.[6]

1007년 잉글랜드는 약 16329.31kg의 공물을 지불하고 2년간 공격을 받지 않았다. 1009년 토르켈 키가 큰 자가 이끄는 덴마크 군은 잉글랜드를 침략하여 1012년까지 잉글랜드를 괴롭혔고, 결국 약 21772.42kg로 매수되었다.[6]

4. 1. 맬던 전투 (991년)

991년 8월, 상당한 규모의 덴마크 함대가 잉글랜드 남동부에서 지속적인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함대는 포크스톤 근처 켄트에 도착하여 남동부 해안을 따라 블랙워터 강을 거슬러 올라가 결국 하구에 이르러 노시 섬을 점령했다.[1] 노시 섬에서 약 2km 서쪽에는 맬던이라는 해안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는 에식스의 족장인 버흐트노스가 테인 무리와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인과 덴마크인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는 고대 영어 시 ''맬던 전투''에 의해 불멸의 기록으로 남았으며, 이 시는 압도적인 적 앞에서 에식스 해안을 방어하려는 버흐트노스의 비극적이지만 영웅적인 시도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잉글랜드가 겪은 일련의 끔찍한 패배 중 첫 번째였다. 처음에는 덴마크 약탈자들에게 패배했고, 나중에는 조직적인 덴마크 군대에 의해 패배했다.

스텐톤은 시의 사건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육지로 가기 위해 그들(덴마크인)은 만조 때 물에 잠기는 제방에 의존했는데, 이는 노시에서 하구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뻗어 있었다. 그들(덴마크인)이 섬에 있는 그들의 진영을 떠나기 전[,] 버흐트노스는 그의 종자들과 지역 민병대를 이끌고 제방의 육지 쪽 끝을 점령했다. 조수가 높은 동안 물 건너에서 외쳐진 공물 요구를 거부한 버흐트노스는 둑을 따라 병사들을 정렬시키고 썰물을 기다렸다. 물이 빠지자 약탈자들이 제방을 따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버흐트노스의 종자 셋이 그들을 막아섰고, 결국 그들은 방해받지 않고 육지에서 동등한 조건으로 싸울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를 가장 칭찬하는 사람들조차 '지나친 용기'라고 부르는 행동으로 버흐트노스는 이에 동의했고, 해적들은 썰물 속으로 돌진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는 버흐트노스의 죽음으로 결정되었다. 그의 병사들 중 많은 사람들조차 즉시 도망쳤고 잉글랜드 대열은 무너졌다. 전투에 지속적인 흥미를 부여하는 것은 전투가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군주를 복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죽음을 자처한 버흐트노스의 테인 집단의 뛰어난 용기이다.[2]

4. 2. 성 브라이스의 날 학살 (1002년)

1002년 11월 13일 성 브라이스의 날, 애설레드는 잉글랜드 내의 모든 덴마크 남성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를 성 브라이스의 날 학살이라 부른다. 이 학살로 덴마크 왕 스벤 1세의 여동생 군힐드가 사망했으며, 이는 덴마크의 침략을 더욱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9]

5. 노르망디와의 관계

애설레드 2세는 데인인노르망디를 거점으로 잉글랜드를 공격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 때문에 노르망디 공국과의 우호 관계 수립을 꾀하여 1002년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의 딸 에마와 결혼했다.

6. 스벤 1세의 침략과 망명 (1013년)

1013년, 덴마크 왕 스벤 1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애설레드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애설레드는 노르망디로 망명했다.[3] 1013년 말까지 잉글랜드의 저항은 붕괴되었고 스벤이 이 나라를 정복하면서 애설레드는 노르망디로 망명해야 했다. 그러나 1014년 2월 3일 스벤이 사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스벤을 지지했던 트렌트 강에 있던 덴마크 선박의 선원들은 즉시 스벤의 아들 크누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잉글랜드의 유력 귀족들은 애설레드에게 사절단을 보내 그의 왕위 복귀를 협상했다.

7. 복위와 사망 (1014년 ~ 1016년)

1014년 스벤 1세가 급사하자 애설레드 2세는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복위했다. 그러나 스벤 1세의 아들 크누트(훗날 덴마크 왕 크누트 2세)가 잉글랜드 원정을 이어갔기 때문에 데인인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10] 1015년에는 3대에 걸쳐 왕을 섬기며 "데인겔드" 정책 추진의 중심 인물이었던 중신 에어드리치가 크누트에게 내응하여 배반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측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1016년 4월 23일, 애설레드 2세는 병사했다. 이후 애설레드 2세의 아들 에드먼드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에드먼드 2세와 크누트 사이의 전쟁은 1016년 10월 18일 아산던 전투에서 크누트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에드먼드 2세의 전사로서의 명성이 워낙 컸기에 크누트는 잉글랜드를 분할하는 데 동의하여 에드먼드 2세는 웨섹스를 차지하고 크누트는 템스 강 너머의 모든 지역을 차지했다. 그러나 에드먼드 2세는 11월 30일에 사망했고, 크누트가 온 나라의 왕이 되었다.

애설레드 2세는 런던의 올드 세인트 폴 대성당에 묻혔다. 올드 세인트 폴 대성당의 성가대석에 있던 그의 무덤과 기념비는 1666년 런던 대화재로 대성당과 함께 파괴되었다. 지하 묘실의 현대 기념비에는 그의 묘가 사라진 중요한 무덤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10]

8. 유산 및 평가

애설레드 2세는 덴마크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데인겔드'라는 임시방편적인 정책에 의존한 '준비 안 된 왕'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3] 그의 이름 '애설레드(Æþelræd)'는 '고귀한 조언'을 뜻하지만, 별명인 'Unræd'는 '나쁜 조언'을 뜻하는 모순 어법이다. 이는 그의 통치에 대한 후대의 부정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맨크스 금화에 그려진 애설레드 2세의 초상


그러나 애설레드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문서 행정 및 법전 편찬이 강화되어 이후 잉글랜드 정치의 본보기가 된 요소도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특히 1010년 칙령을 통해 교회가 십일조의 3분의 1을 빈민 구제를 위해 지출하도록 명령한 것은, 이후 헨리 8세 및 엘리자베스 1세의 구빈 제도의 기원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연구들은 애설레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주로 후대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으며, 당시 어려웠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8. 1. 법률 및 제도

애설레드는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여러 법전을 제정하고 행정 제도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5]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최소 6개의 법전 기록이 남아 있으며,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그의 의회(Witanang) 구성원 중 한 명은 유명한 설교가인 요크의 울프스탄 2세 대주교였다. 애설레드 재위 기간의 마지막 세 법전은 울프스탄에 의해 초안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법전들은 교회 문제에 대해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으며, 울프스탄의 수사적인 스타일을 보여준다. 울프스탄은 크누트 왕을 위해 법전을 초안했고, 애설레드의 법전에서 사용된 많은 법률을 재활용했다.

애설레드는 997년 원티지에서 제정된 원티지 법전(''III Æthelred'')에서 배심원 제도의 초기 형태로 보이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 법전에서는 각 와펜테이크에 회합을 열고, 12명의 맏이 테인과 리브가 성유물에 맹세하여 무고한 사람을 고발하거나 유죄인 사람을 숨기지 않을 것을 맹세하도록 규정했다.[15]

그러나 이 제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제도가 앵글로색슨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관습을 개조하거나 재확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스칸디나비아프랑크 왕국에서 영향을 받아 도입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9. 가족 관계

애설레드는 두 번 결혼했다. 985년경 첫 번째 부인은 앨프기푸로, 노섬브리아 백작 토레드의 딸이었다.[1] 1002년 두 번째 부인은 노르망디의 엠마로, 노르망디 공작 리처드 2세의 여동생이었다.[1]

두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부인자녀 이름생몰년비고
앨프기푸애설스탄 애델링? ~ 1014년[1]
에그베르트 애델링? ~ 1005년경
에드먼드 2세? ~ 1016년잉글랜드 왕[1]
에드레드 애델링? ~ 1013년 이전[1]
에드위그 애델링? ~ 1017년크누트에 의해 처형
에드가 애델링? ~ 1008년경[1]
에드기스 (에디스)? ~ ?에드릭 스트레오나와 결혼[1]
앨프기푸? ~ ?노섬브리아의 앨더맨 올트레드와 결혼
울프힐드? ~ ?울프키텔 스닐링르와 결혼
웨르웰 수도원의 수녀원장? ~ ?
노르망디의 엠마참회왕 에드워드? ~ 1066년잉글랜드 왕[1]
알프레드 애설링? ~ 1036~37년[1]
고다? ~ ?첫 번째로 망트 백작 드로고와 결혼, 두 번째로 불로뉴 백작 유스타스 2세와 결혼[1]



애설레드의 모든 아들은 잉글랜드 왕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참조

[1] 서적 Britain's Royal Families Vintage 1989
[2] 문서 Different spellings of this king's name most commonly found in modern texts are "Ethelred" and "Æthelred" (or "Aethelred"), the latter being closer to the original [[Old English]] form {{lang|ang|Æþelræd}}. Compare the modern dialect word {{Wikt-lang|en|athel}}.
[3] 서적 The History of England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Norman Conquest https://archive.org/[...] Longmans, Green, and Company
[4] 문서 For this king's forebear of the same name, see [[Æthelred of Wessex]].
[5] 서적 Swein Forkbeard's Invasions and the Danish Conquest of England, 991–1017 https://books.google[...] Boydell Press
[6] 서적 The Formation of the English Kingdom in the T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7] 서적 Swein Forkbeard's Invasions and the Danish Conquest of England, 991–1017 https://books.google[...] Boydell Press
[8] 웹사이트 John XV – the Scholarly Pontiff http://www.stsmartha[...]
[9] 서적 History of the Vikings and Norse Culture https://books.google[...] Spangenhelm 2022-12-05
[10] 웹사이트 Remarkable monuments from Pre-Fire St Paul's – St Paul's Cathedral https://www.stpauls.[...] 2020-05-30
[11] 간행물 Encyclopædia Britannica
[12] 서적 William of Malmesbury's Chronicle of the kings of England. From the earliest period to the reign of King Stephen https://archive.org/[...] H. G. Bohn 1847
[13] 웹사이트 Constantine V https://www.worldhis[...] World History Encyclopedia 2021-10-26
[14] 서적 The Wiley Blackwell Encyclopedia of Anglo-Saxon England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22-12-05
[15] 문서 Note that this terms specifies the north and north-eastern territories in England which were at the time largely governed according to Danish custom; no mention is made of the law's application to the [[Hundred (country subdivision)|hundred]]s, the southern and English equivalent of the Danish wapentake.
[16] 서적 Britain's Royal Families Vintage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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