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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마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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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구치 마스카는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약한 일본의 관료이다.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어와 영어를 배우고, 삿초 동맹에도 관여했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신정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이와쿠라 사절단의 부사로 구미 각국을 시찰했다. 귀국 후에는 정한론 반대, 사가의 난 진압에 참여했으며, 겐로인 의관, 회계검사원장 등을 역임했다. 1890년 귀족원 의원이 되었으며, 189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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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마스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와쿠라 사절단에서 샌프란시스코 방문 시
이와쿠라 사절단에서 샌프란시스코 방문 시
이름야마구치 마스카
원어 이름山口 尚芳
출생일1839년 6월 21일
사망일1894년 6월 12일
칭호/훈장정3위
훈1등 서보장
정치 경력
소속 정당(정보 없음)
직책원로원 의관
임기 시작1875년 4월 25일
임기 종료1880년 3월 8일
재임 시작1881년 5월 28일
재임 종료1881년 10월 21일
재임 시작1885년 12월 22일
재임 종료1890년 10월 20일
직책원로원 간사
임기 시작1880년 3월 8일
임기 종료1881년 5월 28일
직책귀족원 칙선 의원
임기 시작1890년 9월 29일
임기 종료1894년 6월 12일
개인 정보
배우자(정보 없음)
친족 (정치인)(정보 없음)

2. 명칭

"尚芳"의 읽는 법은 일반적으로 "나오요시"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95년에 간행된 국립공문서관 소장의 『칙주임관 이력 원서』에 실린 읽는 법은 "마스카"였다. 해당 자료는 게재된 사람들 스스로 열람했기 때문에 신뢰성이 높아, "마스카"라는 읽는 법이 병기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5]

3. 생애

야마구치 마스카는 사가번 다케오 영주 나베시마 시게요시에게 장래성을 인정받아, 사가번나베시마 나오마사의 명으로 다른 번사 자제들과 함께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어영어를 배웠다.[6] 1865년에는 헤이레의 사숙에서 영어를 배웠고,[3] 오쿠마 시게노부, 소에지마 타네오미 등과 함께 구이도 후루베키에게 나가사키 영어 전습소에서, 치엔칸에서 영어와 성경을 배웠다.[4][7] 귀번 후 번역방 겸 훈련 담당으로 근무하며, 사쓰마번, 조슈번 무사들과 교류하며 삿초 연합에 힘썼고, 이와쿠라 도모미 등 조정 귀족에게 접근, 왕정복고 후 동정군에 종군, 에도 개성에 따라 고마쓰 다이토 등과 에도로 향했다.

신정부에서는 1868년 외국사무국 어용계, 외국관, 오사카부 판사 시보, 에치고부 판사, 도쿄부 판사 겸 외국 담당, 외국관 판사를 거쳐 하코다테부 재근을 명받고 종5위하에 서위되었다. 1869년 1월 나가사키의 풀베키에게 도쿄 대학 초빙 의사를 전했고, 4월 외국관 판사 겸 도쿄부 판사, 통상사 총괄, 5월 회계관 판사, 6월 회계관 판사로 오사카부 재근, 7월 오쿠마 시게노부를 보좌하여 대장대승 겸 민부대승이 되었다.

1870년 5월 홋카이도 개척 어용계를 명받고, 1871년 8월 외무 소보, 10월 종4위에 서위된 후 이와쿠라 사절단의 부사로 임명되어 1873년 9월까지 각국을 방문했다. 아들 슌타로를 영국에 유학시켰다.

1873년 정한론 논쟁에서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과 견한사절 파견에 반대했다. 1874년 사가의 난에서는 정부군 편에 서서 진압에 힘썼고, 나가사키에서 해군 경비병을 이끌고 사가에 입성했다. 다케오의 죄를 면하기 위해 노력했다.[8]

1875년 겐로인 의관, 1880년 겐로인 간사, 회사 및 조합 조례 심사 총재, 1881년 회계검사원 초대 원장, 훈2등에 서임되었다. 메이지 14년의 정변으로 회계검사원장 직을 사임하고, 산지인 의관, 외무부장 겸 군사부장에 임명되었다. 1882년부터 1883년에 걸쳐 계엄령 등에 대한 내각 위원에 임명되었다. 1885년 정4위, 겐로인 의관, 1886년 종3위, 1887년 고등법원 배석 재판관, 1890년 귀족원 의원에 칙선되었고, 겐로인 폐지로 의관 비직이 되어[8] 킨케이칸 시코를 받았다.[9]

1894년 5월 중병으로 정3위에 서임되었고, 6월 12일 사망했다. 향년 56세. 훈1등 서보장이 수여되었다. 묘소는 아오야마 영원에 있다.[8] 야마구치 나오요시의 저택 터는 다케오시의 하나시마에 있으며, 현재는 시민회관 부지가 되었다. 시민회관 옆에는 1930년에 지방 유지들이 건설한 기념비가 있다.[8]

3. 1. 막부 말기

어린 시절부터 사가번 다케오 영주 나베시마 시게요시에게 장래성을 인정받아 사가번나베시마 나오마사의 명령에 따라 다른 번사 자제들과 함께 나가사키로 유학하여 네덜란드어영어를 배웠다.[6] 1865년(겐지 2년)에는 헤이레의 사숙에서 영어를 배웠다.[3] 같은 번의 오쿠마 시게노부, 소에지마 타네오미 등과 함께 구이도 후루베키에게 나가사키 영어 전습소에서 영어를 배우고, 같은 번의 영학숙 "치엔칸"에서도 영어와 성경을 배웠다.[4][7] 귀번 후에는 번역방 겸 훈련 담당으로 근무했다. 막말의 정치 상황 속에서 사쓰마번조슈번의 무사들과 교류하며 삿초 연합에도 진력했다고 한다. 이와쿠라 도모미 등 조정의 귀족에게도 접근하여 왕정복고 후에는 동정군에 종군했다. 에도 개성에 따라 사쓰마번고마쓰 다이토 등과 함께 에도로 향했다.

3. 2. 메이지 유신과 신정부 출사

어린 시절부터 사가번 다케오 영주 나베시마 시게요시에게 장래성을 인정받아 사가번나베시마 나오마사(간소)의 명령에 따라 다른 번사 자제들과 함께 나가사키로 유학하여 네덜란드어영어를 배웠다.[6] 1865년(겐지 2년)에는 헤이레의 사숙에서 영어를 배웠다.[3] 오쿠마 시게노부·소에지마 타네오미 등과 함께 구이도 후루베키에게 나가사키 영어 전습소에서 영어를 배우고, 동번의 영학숙 "치엔칸"에서도 영어와 성경을 배웠다.[4][7] 귀번 후에는 번역방 겸 훈련 담당으로 근무했다. 막말의 정치 상황 속에서 사쓰마번조슈번의 무사들과 교류하며 삿초 연합에도 진력했다고 한다. 이와쿠라 도모미 등 공가에도 접근하여 왕정복고 후에는 동정군에 종군했다. 에도 개성에 따라 사쓰마번고마쓰 다이토 등과 함께 에도로 향했다.

신정부에서는 메이지 원년(1868년) 3월에 외국사무국 어용계, 4월에 외국관, 5월에 오사카부 판사 시보, 9월에 에치고부 판사, 이어서 도쿄부 판사 겸 외국 담당, 11월에는 외국관 판사가 됨과 동시에 하코다테부 재근을 명받아 종5위하에 서위되었다. 12월 말에는 나가사키 고토에서 일어난 기독교도 심문 당시의 고문에 관한 심의 조사를 위해 나가사키로 파견된다. 야마구치는 조사를 마치고 메이지 2년 3월에 귀경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고토 및 토미에의 합병 문제 중재에 나가사키부가 대응하고, 이노우에 가오루도 고토로 출장했다. 야마구치는 나가사키 파견 시(메이지 2년(1869년) 1월), 나가사키에 있던 풀베키에게 도쿄에 새로 대학을 만들기 위해 초빙하겠다는 뜻을 전했고, 풀베키는 이를 수락한다.

메이지 2년(1869년) 4월에 외국관 판사 겸 도쿄부 판사가 되어 통상사 총괄을 명받는다. 5월, 회계관 판사를 명받아, 6월에는 회계관 판사로 오사카부 재근을 명받는다. 7월, 오쿠마 시게노부를 보좌하여 대장대승 겸 민부대승이 된다.

메이지 3년(1870년) 5월, 홋카이도 개척 어용계를 명받아, 메이지 4년(1871년) 8월에는 외무 소보로 전임되었다. 같은 해 10월, 종4위에 서위된 후, 미국과 유럽 시찰 및 조약 개정의 준비를 위해 이와쿠라를 전권대사로 한 이와쿠라 견구 사절이 파견될 때 단원이 되어, 오쿠보 도시미치·키도 다카요시·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부사로 임명되어, 메이지 6년(1873년) 9월까지 각국을 방문했다. 그 때, 아들 슌타로를 동반하여, 그를 영국에 유학시킨 채 귀국한다.

3. 3. 이와쿠라 사절단

메이지 4년(1871년) 10월, 종4위에 오른 후, 미국과 유럽 시찰 및 조약 개정 준비를 위해 이와쿠라 도모미를 전권대사로 한 이와쿠라 사절단의 단원으로 임명되었다. 오쿠보 도시미치, 키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부사로 임명되어 메이지 6년(1873년) 9월까지 각국을 방문했다. 이때 아들 슌타로를 동반하여 영국에 유학시킨 채 귀국했다.

3. 4. 귀국 후

1873년 정한론 논쟁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과 함께 遣韓使節(견한사절) 파견에 반대했다. 1874년 2월, 정한론을 주장한 에토 신페이 등이 일으킨 사가의 난에서는 정부군 편에 서서 진압에 힘썼다. 고향 다케오의 전 영주 나베시마 시게하루 및 그 가신이었던 사족들을 설득하여 반란에 가담하지 않도록 했다. 또한, 스스로는 2월 12일, 나가사키에 들어가 해군 경비병을 이끌고 오무라, 다케오를 거쳐 3월 1일에 사가에 입성, 난 진압에 임했다. 사가의 난 당시, 다케오는 반란군의 협박에 굴복하여 64명의 병사를 어쩔 수 없이 난에 파견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지만, 나오요시는 나베시마 시게하루가 신정부군에 제출할 예정이었던 사죄문을 첨삭하는 등 다케오의 죄를 면하기 위해 노력했다.[8]

1875년 4월, 겐로인 의관이 되었다. 1880년에는 겐로인 간사가 되어 회사 및 조합 조례 심사 총재가 되었다. 1881년 5월, 전년에 설치된 회계검사원의 초대 원장에 취임하여, 7월에 훈2등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오쿠마 시게노부가 신정부에서 추방된 메이지 14년의 정변의 영향으로 같은 해 10월에 회계검사원장 직을 사임하고, 산지인(내각법제국의 전신)의 의관이 되어 외무부장 겸 군사부장에 임명되었다. 1882년부터 1883년에 걸쳐, 계엄령, 청한 양국 재류 노 어국인 단속 규칙, 징병령 개정안이 겐로인 심의에 부쳐질 때 내각 위원에 임명되었다. 1885년 10월, 정4위에 서임되고, 12월, 산지인이 폐지된 후 다시 겐로인 의관이 되었다. 1886년 10월, 종3위에 서임되고, 1887년 2월, 고등법원 배석 재판관이 되었다. 1890년 9월 29일, 귀족원 의원에 칙선되었고, 같은 해 10월 20일, 겐로인이 폐지되어 의관 비직이 되어[8]킨케이칸 시코를 받았다[9]

1894년 5월, 중병에 걸려 정3위에 서임되고, 6월 12일 사망했다. 향년 56세(만 54세). 훈1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 묘소는 아오야마 영원에 있다.

야마구치 나오요시의 저택 터는 다케오시의 하나시마에 있으며, 현재는 시민회관 부지가 되었다. 시민회관 옆에는 1930년에 지방 유지들이 건설한 기념비가 있다.

3. 5. 만년

1873년 정한론 논쟁이 벌어졌을 때,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과 함께 遣韓使節(견한사절) 파견에 반대했다. 1874년 2월, 에토 신페이 등이 정한론을 주장하며 일으킨 사가의 난에서는 정부군 편에 서서 진압에 힘썼다. 그는 고향 다케오의 전 영주 나베시마 시게하루와 그 가신이었던 사족들을 설득하여 반란에 가담하지 않도록 했다. 또한, 1874년 2월 12일, 나가사키에 들어가 해군 경비병을 이끌고 오무라, 다케오를 거쳐 3월 1일에 사가에 입성하여 난 진압에 참여했다.[8] 사가의 난 당시, 다케오는 반란군의 협박으로 64명의 병사를 파견했으나, 나오요시는 나베시마 시게하루가 신 정부군에 제출할 예정이었던 사죄문을 첨삭하는 등 다케오의 죄를 면하기 위해 노력했다.[8]

1875년 4월, 겐로인 의관이 되었다. 1880년에는 겐로인 간사가 되어 회사 및 조합 조례 심사 총재가 되었다. 1881년 5월, 전년에 설치된 회계검사원의 초대 원장에 취임하고, 7월에 훈2등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오쿠마 시게노부가 신 정부에서 추방된 메이지 14년의 정변의 영향으로 같은 해 10월 회계검사원장 직을 사임하고, 산지인(내각법제국의 전신)의 의관이 되어 외무부장 겸 군사부장에 임명되었다.[8] 1882년부터 1883년에 걸쳐 계엄령, 청한 양국 재류 노 어국인 단속 규칙, 징병령 개정안이 겐로인 심의에 부쳐질 때 내각 위원에 임명되었다.[8] 1885년 10월, 정4위에 서임되고, 12월, 산지인이 폐지된 후 다시 겐로인 의관이 되었다. 1886년 10월, 종3위에 서임되고, 1887년 2월, 고등법원 배석 재판관이 되었다. 1890년 9월 29일, 귀족원 의원에 칙선되었고, 같은 해 10월 20일, 겐로인이 폐지되면서 의관직에서 물러나[8] 킨케이칸 시코를 받았다.[9]

1894년 5월, 중병으로 정3위에 서임되었고, 6월 12일 사망했다. 향년 56세(만 54세). 훈1등 서보장이 수여되었다. 묘소는 아오야마 영원에 있다.[8]

야마구치 나오요시의 저택 터는 다케오시의 하나시마에 있으며, 현재는 시민회관 부지가 되었다. 시민회관 옆에는 1930년에 지방 유지들이 건설한 기념비가 있다.[8]

4. 영전

참조

[1] 간행물 官報 第2182号 1890-10-06
[2] 웹사이트 太政類典・第一編・慶応三年~明治四年・第十八巻・官制・文官職制四 https://www.digital.[...] 国立公文書デジタルアーカイブ
[3] 논문 長崎唐通事何礼之の英語習得 https://hdl.handle.n[...] 関西大学東西学術研究所 2011-04
[4] 웹사이트 一 二十年前の学校設立経験 https://chronicle100[...]
[5] 서적 ここまで変わった日本史教科書 吉川弘文館 2016
[6] 간행물 明治二年における長崎県の財政について https://www.city.nag[...] 長崎市長崎学研究所 2022-10-25
[7] 뉴스 <20>蘭学から英学へ ~米英台頭いち早く対応~ https://web.archive.[...] 佐賀新聞
[8] 서적 国立公文書館所蔵 勅奏任官履歴原書 下巻
[9] 간행물 官報 第2195号 1890-10-22
[10] 간행물 官報 第678号「賞勲叙任」 1885-10-02
[11] 간행물 官報 第994号「叙任及辞令」 1886-10-21
[12] 간행물 官報 第3266号「叙任及辞令」 1894-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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