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의 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가의 난은 1874년,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족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봉건적 특권 상실, 징병제 실시, 급격한 서구화 등 배경 속에서, 사가현을 중심으로 정한론을 주장하는 정한당과 봉건 질서 복귀를 원하는 우국당이 연합하여 에토 신페이의 지휘 아래 봉기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진압으로 1874년 2월 22일 전투에서 패배하고, 에토 신페이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사족 반란의 종식과 메이지 정부의 권력 강화를 의미하며,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사족 계급의 몰락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74년 전투 - 모란사 사건
모란사 사건은 1871년 류큐 어용 선박의 대만 표류와 원주민 충돌을 계기로 일본이 대만을 출병하고 류큐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 1874년 분쟁 - 모란사 사건
모란사 사건은 1871년 류큐 어용 선박의 대만 표류와 원주민 충돌을 계기로 일본이 대만을 출병하고 류큐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 1874년 일본 - 메이로쿠 잡지
메이로쿠 잡지는 메이지 시대 메이로쿠샤에서 창간된 계몽주의 학술지로, 당대 지식인들이 사회, 경제, 철학 등 다양한 주제의 논설을 통해 서구 문물을 소개하고 일본 사회 개혁을 모색하며 메이지 시대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874년 일본 - 모란사 사건
모란사 사건은 1871년 류큐 어용 선박의 대만 표류와 원주민 충돌을 계기로 일본이 대만을 출병하고 류큐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사가의 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 | |
분쟁 | 사족 반란 |
시기 | 1874년 2월 16일 ~ 1874년 4월 9일 |
장소 | 사가현 |
결과 | 정부군 승리; 반란 진압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메이지 정부 일본 제국 육군 일본 제국 해군 |
교전국 2 | 옛 사가번 반란군 정한당 우국당 |
지휘관 | |
지휘관 1 | 오쿠보 도시미치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 노즈 시즈오 야마다 아키요시 |
지휘관 2 | 에토 신페이 시마 요시타케 아사쿠라 나오타케 |
병력 | |
병력 1 | 약 5,000명 군인 및 경찰 약 5,000명 사족 지원병 |
병력 2 | 사가 반란군 11,000명 정한당 및 우국당 3,00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사망 147명 부상 209명 |
사상자 2 | 사망 173명 부상 160명 기타 지도자들 나가사키 감옥에서 처형 |
기타 정보 | |
관련 사건 | 시족 반란의 일부 |
2. 배경
메이지 유신 이후 사족 계급은 특권적 지위와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고, 징병제 실시는 그들의 존재 이유를 없애버렸다. 또한 국가의 빠른 근대화(서구화)는 일본 문화, 언어, 복장과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고, 많은 사무라이들에게는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하는 데 사용된 ''손노 조이''(“오랑캐를 몰아내자”) 명분의 배신으로 보였다.[6]
히젠 국은 신정부에 대한 불만의 중심지였다. 나이 든 사무라이들은 해외 확장주의와 서구화를 모두 거부하고 옛 봉건 질서로의 복귀를 요구하는 정치 집단을 결성했다. 젊은 사무라이들은 군국주의와 조선 침략을 주장하는 ''세이칸토'' 정당을 조직했다.[3]
정한론 문제로 하야하기 전, 참의원 에토 신페이를 중심으로 나카지마 테조 등의 정한당과 전 시종 아키타현 현령 시마 요시타케, 소에지마 요시다카 등이 소속된 우국당은 구 사가 번 번사들을 중심으로 혼성군을 구성했으며, 이는 이후 이어진 사족 반란의 효시가 되었다.
에토 신페이와 시마 요시타케는 불평 사족을 진정시키기 위해 사가로 향했지만, 정부의 강경한 대응에 궐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한당과 우국당은 국가관과 문명관이 서로 달랐고, 주의와 주장, 같이 싸워야 하는 이유를 공유하지 않았다. 따라서 두 당은 사령부도 달랐으며, 협력은 소극적이었다.[1]
보신 전쟁 당시 데와 전선에서 참모로 이름을 날린 마에야마 세이이치로를 중심으로 한 중립적인 사가 사족들이 정부군에 협력하였고, 무사 영주 나베시마 시게마사 등 반란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도 많았다. 따라서 에토 등이 계획했던 "사가가 봉기하면 사쓰마의 사이고 등 각지의 불평 사족들이 속속 뒤따를 것"이라는 생각은 번 내에서조차 실현되지 않았다.
2. 1. 메이지 유신과 사족의 불만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봉건 질서가 해체되고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 체제가 수립되면서, 사족 계급은 특권적 지위와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6] 징병제 실시는 사족의 존재 이유를 약화시켰고,[6] 급격한 서구화 정책은 전통적 가치관을 중시하던 사족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6]2. 2. 사가 번의 특수성
메이지 유신 이후, 히젠 국은 신정부에 대한 불만의 중심지였다. 많은 사무라이들이 거주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봉건 질서에서 누리던 특권적 지위가 폐지되고 소득이 없어지면서 불만을 품었다. 또한 징병제 실시는 사무라이들의 존재 이유를 없애는 것으로 여겨졌다.사가 번은 일본 내에서도 특히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나이 든 사무라이들은 해외 확장주의와 서구화를 거부하고 옛 봉건 질서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정치 집단을 만들었다. 젊은 사무라이들은 군국주의와 조선 침략을 주장하는 ''정한당'' 정당을 조직했다.[3]
이러한 배경에서 정한론 문제로 하야한 전 참의 에토 신페이를 중심으로 나카지마 테이조 등의 정한당과, 전 시종·아키타현 권령 시마 요시타케, 소에지마 요시다카 등을 중심으로 한 우국당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구 사가 번 번사들을 중심으로 한 부대로, 이후 사족 반란의 시초가 되었다.
사가 번 출신 인사들은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소외되면서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컸다. 젊은 사족들은 군국주의와 조선 침략을 주장하는 정한당을 조직했고, 나이 든 사족들은 옛 봉건 질서로의 복귀를 요구하는 우국당을 결성했다.[4]
두 당은 원래 국가관과 문명관이 달랐다. 정한당은 조선 침략을 주장했고, 우국당은 봉건 질서 복귀를 주장했다. 따라서 사령부도 달랐고, 협력도 소극적이었다.[1]
3. 원인
1873년 정한론 문제로 참의원 에토 신페이를 끌어들인 나카지마 테조 등의 정한당과 전 시종 아키타현 현령 시마 요시타케, 소에지마 요시다카 등이 소속된 우국당이 혼성군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구 사가번 번사들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는 이후 이어진 사족 반란의 효시가 되었다.
에토 신페이와 나카지마 테조는 불평 사족을 진정시키기 위해 사가로 향했지만, 정부의 강경한 대응에 궐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한당은 반도 진출 시 선봉을 맡겠다고 주장했고, 우국당은 봉건제 복귀를 주장하는 등, 두 당은 국가관과 문명관이 달랐다. 따라서 주의와 주장을 공유하지 않았고, 사령부도 달라 협력에 소극적이었다.
보신 전쟁 당시 데와 전선에서 참모로 이름을 날린 마에야마 세이이치로를 중심으로 한 중립적인 사가 사족들은 정부군에 협력하였고, 무사(武雄) 영주 나베시마 시게마사 등은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다.
사가군의 총병력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전후 재판에서 사면된 자들을 포함하면 약 1만 1천 명 정도이지만, 메이지 5년 판적봉환 당시 제출된 사가번 무사의 총수가 약 1만 4천 명 정도이고 전사자 수가 200명 미만인 점을 고려하면, 모두가 난에 가담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3. 1. 정한론 대두와 메이지 6년 정변
1873년 조선과의 외교 문제 해결 방식을 둘러싸고 정한론이 대두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조선 파병을 주장했으나, 오쿠보 도시미치 등은 내치 우선을 주장하며 반대했다.[6] 정한론은 부국강병을 통해 조선을 개항시키고, 일본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침략적 사상이었다. 이는 훗날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으로 이어진다. 정한론 논쟁에서 패배한 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 등은 사직했고, 이른바 '메이지 6년 정변'이 일어났다.메이지 6년 정변으로 중앙에서 쫓겨난 에토 신페이는 이타가키 다이스케, 소에지마 다네오미, 고토 쇼지로의 설득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태정관의 "전 참의는 도쿄에 체류해야 한다"는 명령을 무시하고 사가로 돌아왔다. 오오키 다카토는 에토 신페이의 출발 소식을 듣고 사가 출신 관리 3명을 파견하여 강제로 데려오려 했지만, 요코하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배가 출항한 후였다. 이 무렵 사가는 정한론을 지지하는 반정부적인 "정한당"과 봉건적 지배층으로의 복귀를 목표로 하는 보수 반동적인 "우국당"이 결성되는 등 정세가 불안정하여 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3. 2. 에토 신페이의 귀향과 불평 사족 결집
에토 신페이는 1873년 정부가 정한론을 거부하자 항의하며 사직했다.[6] 이후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도와 애국공당을 조직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도사 상소 작성에 참여했다.[6] 1874년 1월, 정부가 그의 노력을 거부하자 고향인 사가현 사가시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정한론 지지자들과 보수파 사족들의 지지를 받았다.[6]내무대신 오쿠보 도시미치는 심복인 이와무라 다카토시를 사가에 파견하여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나, 이와무라 다카토시의 오만한 태도는 상황을 악화시켰다.[6] 사가로 가는 배에서 이와무라 다카토시는 아키타현 전 현령 시마 요시타케와 대립했고, 시마 요시타케는 에토 신페이와 반란군 측에 가담하기로 결심했다.[6]
에토 신페이는 이타가키 다이스케, 소에지마 다네오미, 고토 쇼지로의 설득과 경고를 무시하고 태정관의 명령을 어기고 사가로 돌아왔다.[6] 오키 다카토는 에토 신페이의 귀향 소식을 듣고 사가 출신 관리 3명을 파견해 강제로 데려오려 했지만, 에토 신페이가 탄 배는 이미 출항한 후였다.[6]
이 무렵 사가는 정한론을 지지하는 반정부적인 "정한당"과 봉건적 지배층으로의 복귀를 목표로 하는 보수 반동적인 "우국당"이 결성되는 등 정세가 불안정하여 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6]
4. 전개
1874년 2월 16일, 에토 신페이는 은행을 습격하고 구 사가성 내 정부 청사를 점거했다.[1] 에토는 사쓰마번과 도사번의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이 봉기를 일으킬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는 빗나갔다.[1]
오쿠보 도시미치는 2월 19일 후쿠오카시 하카타구에 본부를 설치하고 사가 반란군을 반역자로 규탄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다음 날 정부군은 사가로 진군했고, 2월 22일 사가와 후쿠오카현 경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1] 에토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더 이상의 저항은 불필요한 희생만 낳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군대를 해산했다.[1]
에토는 추종자들에게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가고시마로 도망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이고가 거부하면 토사로 가고, 거기서도 거부하면 도쿄로 가서 할복할 것이라고 했다.[1]
사가 반란군은 에토의 도주로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지만, 일부는 계속 싸웠다. 2월 27일 사가 거리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사가성에서 싸우다 죽을 것이라고 선언했던 시마 요시타케는 그날 밤 가고시마로 도망쳤다. 3월 1일, 정부군은 추가 유혈 사태 없이 사가성을 점령했다.[1]
4. 1. 우국당과 정한당의 연합
에토 신페이를 끌어들인 나카지마 테조 등의 정한당과 전 시종 아키타현 현령 시마 요시타케, 소에지마 요시다카 등이 소속된 우국당은 구 사가번 번사들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이후 이어진 사족 반란의 효시가 되었다.에토 신페이와 나카지마 데조는 원래 불평 사족을 진정시키기 위해 사가로 향했지만, 정부의 강경한 대응에 궐기하게 되었다.[1] 그러나 정한당과 봉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우국당은 국가관과 문명관이 서로 달라 협력에 소극적이었다.[1] 두 당은 사령부도 달랐다.[1]
4. 2. 사가 성 점령과 정부군의 반격
1874년 2월 16일, 에토 신페이는 은행을 습격하고 구 사가성 내 정부 청사를 점거했다.[1] 에토는 사쓰마번과 도사번의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이 봉기를 일으킬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는 빗나갔다.[1]2월 19일, 오쿠보 도시미치는 후쿠오카시 하카타구에 본부를 설치하고 사가 반란군을 반역자로 규탄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정부군은 다음 날 사가로 진군했다.[1] 2월 22일 사가와 후쿠오카현의 경계에서 전투에서 패한 후, 에토는 군대를 해산했다.[1]
일시적으로 사가성을 잃은 정부군이었지만, 오쿠보 도시미치는 도쿄진대 등을 이끌고 후쿠오카에 진입해 있었다. 그는 노즈 시게오 소장이 이끄는 정부군 본대를 제4대대(아츠토 타케나오 소좌), 제10대대(이바라키 유키아키 소좌) 및 제3포대(야마자키 시게타카 대위)로 구성하여 후쿠오카와의 현 경계에 있는 요충지인 아사히야마(현 토스시)로 진격시켰다. 한편, 사가군의 별동대를 미세 고개와 시이하라구치 등에서 발견했기에 제10대대 제3중대(오가사와라 요시쓰구 대위)를 본진 경호로 하카타에 남겨두었다.
또한, 후츄(구루메시 미이정)까지 후퇴한 제11대대는 치쿠고가와에서 센구리와 마메즈(현 미야키정) 주변의 사가군을 공격하고, 아사히야마에서 본대와 합류하기로 했다. 이 외에도 나가사키시에 상륙한 외무소보 야마구치 히사요시가 엔부 히데유키 해군비서관 외 현지 일본 해병대를 호위로 대무라에서 무사시로 향하여, 난에 참가에 소극적이었던 사가번 무사시 영지의 설득을 시키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사가군은 나가사키 가도를 정한당이, 치쿠고가와를 우국당이 각각 담당하기로 결정했다. 정한당은 아사히야마에 타지리 타네히로(보신 전쟁 당시 대대장), 이노우에 코우케이, 니시 요시타다 등을 보냈고, 2월 22일 이 정부군 부대를 공격했다. 우국당의 지휘는 무라야마 나가에가 맡아, 본대와의 합류를 목표로 하는 구마모토 진대 부대를 공격했다.
다음날 23일, 정부군은 제10대대를 선봉으로, 제3포대가 뒤따르고, 제4대대를 후위로 하여 중원(中原)에서 출발했다. 전날 합류한 전산청일랑(前山清一郎)대가 중원의 방어를 맡았다. 사가군은 간진촌(寒津村, 현 미야키정)에 본진을 설치하고 간진강(寒津川)변에서 저항하며, 나카지마 데이조(中島鼎蔵)의 지휘 아래 좌우에서 포위 공격을 가하여, 『사가정등전기(佐賀征等戦記)』에 “관병 거의 패할 뻔했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관군 지휘관인 육군소장(陸軍少将) 노즈 시게오(野津鎮雄)가 탄우(彈雨) 속에서 칼을 뽑아 들고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격려하며 싸웠고, 중원에서 북산(北山)으로 전투를 옮겼던 아츠토 무나오(厚東武直) 소좌의 제4대대가 반격하여 후방을 쳤기에, 사가군은 와해되어 패주했다.
그러나 본대가 된 제10대대 제2중대는 중대장 아베 마사미치(阿部正通) 대위가 전사했고, 그를 대신하여 지휘를 맡은 코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 대위도 중상을 입는 등 피해가 컸다. 이에 중원에 도착한 제11대대는 하나의 중대를 할당하여 증원으로 보냈다. 그 무렵, 아사히야마(朝日山) 함락 소식을 듣고 신사키(神埼)까지 나와 있던 에토 신페이는 간진에서도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타데(田手, 현 요시노가리정 타데)까지 달려가서 진두지휘를 했다. 에토는 타데가와(田手川)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일부 정예병을 이끌고 후방을 공격하려 했으나, 타데가와 하류를 건너온 아오야마 아키라(青山朗) 대위가 이끄는 제10대대 제4중대의 역습을 받고 패퇴했다. 더욱이 관군이 추격해 왔기 때문에, 사가군은 신사키(현 신사키시)를 불태우고 사카이바라(境原, 현 신사키시 치요다정 사카이바라)까지 후퇴했다.
이 패배로 승산을 잃었다고 판단한 에토는 정한당(征韓党)을 해산하고, 가고시마현으로 도망쳐 은거 중인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전장을 이탈했다. 에토가 우코쿠토(憂国党)에게 무단으로 사가를 떠났기에, 이 적전 탈영과 같은 행동에 후쿠시마 요시타카(副島義高) 등 우코쿠토 당원들은 격분했다.
4. 3. 주요 전투
2월 19일, 오쿠보 도시미치는 하카타에 본부를 설치하고 사가 반란군을 반역자로 규탄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정부군은 다음 날 사가로 진군했다. 2월 22일 사가와 후쿠오카의 경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한 후, 에토 신페이는 더 이상의 저항은 불필요한 희생만 낳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군대를 해산했다.에토는 추종자들에게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 가고시마로 도망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이고가 거부하면 토사로 가고, 토사에서도 거부하면 도쿄로 가서 할복할 것이라고 했다.
사가 반란군은 에토의 도주로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지만, 일부는 계속 싸웠다. 가장 격렬한 전투는 2월 27일 사가 거리에서 발생했다. 사가성에서 싸우다 죽을 것이라고 선언했던 시마 요시오는 그날 밤 가고시마로 도망쳤다.
4. 3. 1. 아사히야마 전투 (2월 22일)
2월 19일, 오쿠보 도시미치는 하카타에 본부를 설치하고 사가 반란군을 반역자로 규탄하는 선언을 발표했고, 정부군은 다음 날 사가로 진군했다. 2월 22일 사가와 후쿠오카의 경계에 있는 요충지인 "아사히야마"(토스시)에서 정부군과 사가군이 격돌했다.정부군은 노즈 시게오 소장이 이끄는 본대를 제4대대(아츠토 타케나오 소좌), 제10대대(이바라키 유키아키 소좌) 및 제3포대(야마자키 시게타카 대위)로 편성하여 아사히야마로 진격시켰다. 사가군은 아사히야마에 타지리 타네히로(보신 전쟁 당시 대대장)와 이노우에 코우케이를 선봉으로 니시 요시타다 등을 보내 정부군 부대를 공격했다.
사가군은 간진촌(寒津村, 현: 미야키정)에 본진을 설치하고 간진강(寒津川)변에서 저항하며, 나카지마 데이조(中島鼎蔵)의 지휘 아래 좌우에서 포위 공격을 가하여, 『사가정등전기(佐賀征等戦記)』에 “관병 거의 패할 뻔했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육군소장(陸軍少将) 노즈 시게오(野津鎮雄)가 탄우(彈雨) 속에서 칼을 뽑아 들고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격려하며 싸웠고, 중원에서 북산(北山)으로 전투를 옮겼던 아츠토 무나오(厚東武直) 소좌의 제4대대가 반격하여 후방을 쳐 사가군은 와해되어 패주했다.
정부군은 사가군을 포위 공격하여 승리했다. 그러나 본대가 된 제10대대 제2중대는 중대장 아베 마사미치(阿部正通) 대위가 전사했고, 그를 대신하여 지휘를 맡은 코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 대위도 중상을 입는 등 피해가 컸다.
4. 3. 2. 간진가와·다테가와 전투 (2월 23일)
2월 23일, 정부군은 제10대대를 선봉으로, 제3포대가 뒤따르고, 제4대대를 후위로 하여 중원(中原)에서 출발했다. 전날 합류한 전산청일랑(前山清一郎)대가 중원의 방어를 맡았다. 사가군은 간진촌(寒津村, 현 미야키정(みやき町))에 본진을 설치하고 간진강(寒津川)변에서 저항하며, 나카지마 데이조(中島鼎蔵)의 지휘 아래 좌우에서 포위 공격을 가했다. 『사가정등전기(佐賀征等戦記)』에는 “관병 거의 패할 뻔했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정부군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관군 지휘관인 육군소장(陸軍少将) 노즈 시게오(野津鎮雄)가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속에서 칼을 뽑아 들고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격려하며 싸웠고, 중원에서 북산(北山)으로 전투를 옮겼던 아츠토 무나오(厚東武直) 소좌의 제4대대가 반격하여 사가군의 후방을 쳤기에, 사가군은 와해되어 패주했다.하지만 본대가 된 제10대대 제2중대는 중대장 아베 마사미치(阿部正通) 대위가 전사했고, 그를 대신하여 지휘를 맡은 코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 대위도 중상을 입는 등 피해가 컸다. 그래서 중원에 도착한 제11대대는 하나의 중대를 할당하여 증원으로 보냈다. 그 무렵, 아사히야마(朝日山) 함락 소식을 듣고 신사키(神埼)까지 나와 있던 에토 신페이(江藤新平)는 간진에서도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타데(田手, 현 요시노가리정(吉野ヶ里町) 타데)까지 달려가서 진두지휘를 했다. 에토는 타데가와(田手川)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일부 정예병을 이끌고 후방을 공격하려 했으나, 타데가와 하류를 건너온 아오야마 아키라(青山朗) 대위가 이끄는 제10대대 제4중대의 역습을 받고 패퇴했다. 더욱이 관군이 추격해 왔기 때문에, 사가군은 신사키(현 신사키시(神埼市))를 불태우고 사카이바라(境原, 현 신사키시 치요다정 사카이바라)까지 후퇴했다.
이 패배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에토는 정한당(征韓党)을 해산하고, 가고시마현(鹿児島県)으로 도망쳐 은거 중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전장을 이탈했다.[7] 에토가 우코쿠토(憂国党)에게 무단으로 사가를 떠났기에, 이 적전 탈영과 같은 행동에 후쿠시마 요시타카(副島義高) 등 우코쿠토 당원들은 격분했다.
4. 3. 3. 미세 방면 전투 (2월 23일 ~ 27일)
사가군은 미세 고개에서 최고의 용병가로 일컬어지는 아사쿠라 나가타케(전 육군소좌)가 3개 소대를 이끌고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1] 하카타에는 히로시마 진대 등에서 지원군이 오고 있었으나, 당초에는 오가사와라 요시츠네의 1개 중대만 남아 있었다.[1] 방어를 담당하던 야마다 아키요시 소장은 지름길을 통한 공격을 고려하여 정찰병을 보냈는데, 이 정찰병이 이네바무라에서 사가군을 발견하여 22일 1개 분대를 진격시켰으나, 사가군은 이미 후퇴한 뒤였다.[1]23일에는 중대 전군이 미세 고개로 출격했고, 24일에는 후쿠오카 시족에 의한 관족대 6개 소대가 이네바무라에 출격했으나 반격을 받아 소대장 이쿠시마 토쿠(야스카와 케이이치로 남작의 형)가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고 가네무까지 후퇴했다.[1] 그러나 26일에는 오가사와라 부대가 세이진구치에서 사가군을 격파하고, 다음 날인 27일에는 미세 고개도 함락시켜 사가군을 궤멸시켰다.[1]
하지만 지형이 험준하여 예상치 못한 고전을 겪은 정부군은 하카타에 도착한 이다 유키 소장, 타나카 슌푸 중좌, 타카시마 노부시게 소좌, 후루카와 우지키요 소좌 등이 이끄는 히로시마 진대 제15대대의 3개 중대를 28일 미세 고개로 진격시켰다.[1] 이 히로시마 진대 부대는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지만, 아사쿠라는 정규군 4개 중대와 현지 징집한 시족병 6개 소대를 미세 방면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1]
3월 1일, 후쿠오카에 도착한 타니 시게요시 대좌가 이끄는 오사카 진대 제18대대와 제7포대 1개 소대도 미세 방면으로 향하려 했으나, 이미 사가군이 없다고 판단한 이다 소장은 타니 대좌에게 지원군은 불필요하며 본도로 진격하도록 지시했다.[1]
4. 3. 4. 사카이바라 전투 (2월 27일)
2월 27일, 사가군 주력 부대는 간진촌(현 미야키정)에 본진을 설치하고 간진강변에서 정부군에 저항했다. 나카지마 데이조의 지휘 아래 좌우에서 포위 공격을 가하여 정부군을 몰아붙였으나, 정부군 지휘관 노즈 시게오 소장이 직접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격려하며 싸웠고, 제4대대가 반격하여 사가군은 와해되어 패주했다.이후 에토 신페이는 타데(현 요시노가리정 타데)까지 달려가 진두지휘하며 타데가와에 방어진을 구축했으나, 아오야마 아키라 대위가 이끄는 제10대대 제4중대의 역습을 받고 다시 패퇴했다. 결국 사가군은 신사키(현 신사키시)를 불태우고 사카이바라(현 신사키시 치요다정 사카이바라)까지 후퇴했다. 이 패배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에토는 정한당을 해산하고 가고시마현으로 도망쳤다.
한편, 삼세고개에서는 사가군 최고의 용병가로 불리는 아사쿠라 나가타케가 3개 소대를 이끌고 있었으나, 27일 정부군에 의해 삼세고개가 함락되면서 사가군은 궤멸되었다.
5. 사가 군의 구성
사가의 난은 정한론을 주장하는 정한당(征韓党)과 봉건제 복귀를 주장하는 우국당(憂国党)으로 구성된 혼성군이었다.[3] 이들은 각각 별도의 사령부를 두고 협력에 소극적이었다.[3] 정한당은 에토 신페이를 중심으로, 우국당은 시마 요시타케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3] 두 당은 원래 국가관과 문명관이 달랐으며, 함께 싸워야 하는 이유를 공유하지 않았다.[3]
사가 군의 총병력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전후 재판에서 사면된 자들을 포함하면 약 1만 1천 명 정도가 되지만, 실제 전투에 참여한 인원은 이보다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약 3,000명에서 6,000명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5. 1. 우국당 (憂国党)
사가 성 남쪽에 위치한 보린원(宝琳院)을 본거지로 삼았으며, "보린원회(宝琳院会)", "우국대사(憂国大社)", "남조(南組)" 등으로 불렸다.[4] 정한당에 비해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 많았고, 장년층이 많았다.[4] 간부들은 구 번(藩) 시대에 조두(組頭), 대관(代官), 목부(目付) 등의 지위에 있었다.[4]- 주모(당수)
:* 시마 요시타케(島義勇) (전 아키타 현 권령)[4]
- 회축(간부)
:* 시게마쓰 모토키치(重松基吉) (시마 요시타케의 동생)[4]
:* 소에지마 요시타카(副島義高) (시마 요시타케의 동생)[4]
:* 무라야마 나가에이(村山長栄) (사가 번 일심대(佐賀藩一心隊) 대장)[4]
:* 나카가와 요시스미(中川義純) (전 사가 번사, 은퇴)[4]
:* 후쿠치 쓰네아키(福地常彰) (사가 번 극역(極役))[4]
우국당과 정한당은 개전 당시 양당의 정치적 사상에 자주적으로 모인 사족 유지 세력이었다.[5] 개전 후에는 구 사가 번 상급 가신의 삼지번, 친척, 친척 동격 등의 지배 지역 영역을 단위로 하는 세력[5]이 가세했다.[5]
우국당의 군사 편성은 4개 대대 편성이었다.[6]
- 대대는 용감대, 충분대, 신속대, 어오대 4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대대장, 감군, 부대대장, 사령, 변사 등의 역명이 보인다.[6]
- 번정 개혁에 따른 대대 편성은 6개 소대로 구성되지만, 1개 소대 인원은 영식 60명, 불식 80명이다. 대대는 524명에서 580명이다.[6]
- 소대장 사령이 28명이므로, 1개 소대 60명 기준 1680명, 80명 기준 2240명이다.[6]
- 출병한 세력은 가와쿠보단, 무슈단, 다쿠단, 스고단, 이사하야단이다.[6]
5. 2. 정한당 (征韓党)
정한론 문제로 하야한 전 참의 에토 신페이를 중심으로 한 나카지마 테이조(中島鼎蔵) 등의 징한당(征韓党)은 사가현 요가 정의 엔메이인(延命院)을 거점으로 하였다. 징한당은 "엔메이인당(延命院党)", "정한대사(征韓大社)", "개화당(開化党)", "북조(北組)" 등으로 불렸다.[6] 우국당(憂國黨) 간부와 비교하면 젊은 하급 사족을 중심으로 관료, 군인, 현관(縣官) 현직자가 많았다.메이지 7년(1874년) 1월 하순, 가쓰키 케이고로, 이시이 사다오키 등 정한파(征韓派) 현관이 사가현청(佐賀縣廳)을 장악했다. 정한파 현관은 무기, 탄약, 자금, 식량 등의 준비에 직권을 이용했다. 정한당은 현청 기구를 사유화했지만, 일상 업무는 계속되었다.
정한당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비고 |
---|---|---|
주재(당수) | 에토 신페이 | 전 참의(參議) |
간부 | 야마나카 이치로 | 해외 유학생 |
간부 | 가쓰키 케이고로 | 이와쿠라 사절단 통역·사가현 중속(中屬) |
간부 | 아사쿠라 나오타케 | 육군 소좌 |
간부 | 이시이 사다오키 | 사가현 대속(大屬) |
간부 | 야마다 헤이조 | 사가현 중속 |
간부 | 나카지마 테이조 | 좌원 봉직 |
간부 | 니시 요시카즈 | 사가현 대속·육군 중위 |
우국당과 정한당의 개전 당시 세력은 양당의 정치적 사상에 자주적으로 모인 사족 유지 세력이었다. 개전 후에는 구 사가번의 상급 가신의 삼지번, 친척, 친척 동격 등의 지배 지역 영역을 단위로 하는 세력이 가세하고 있다.
정한당의 군사 편성은 『「사가의 역」과 지역 사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당초는 15개 소대였지만, 25개 소대로 증가하고 있다.
- 25개 소대로 1소대 60명의 경우, 총병력 1500명이 된다.
- 출병한 세력은 렌케 3소대, 가시마 2소대, 오기 3소대, 가와쿠보 1소대, 시라이시단 6소대, 가라쓰대, 다쿠대, 오기대이다.
5. 3. 군사 편성
사가의 난은 에토 신페이를 중심으로 한 정한당과 시마 요시타케를 중심으로 한 우국당이 주축이 되어 일으켰다. 두 당은 서로 다른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고, 사령부도 별도로 운영되어 협력은 소극적이었다.[3]사가의 난에 참여한 병력 규모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여러 자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구분 | 병력 규모 (추정) | 비고 |
---|---|---|
우국당 | 1,680명 ~ 2,240명 | 4개 대대로 편성 |
정한당 | 약 1,500명 | 25개 소대로 편성 |
총 병력 | 3,000명 ~ 6,000명 | 다양한 추정치가 존재 |
6. 결과
사가의 난은 군사력으로 진압되었지만, 봉기를 일으킨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규슈 지역은 1870년대 내내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계속되었던 곳이었고, 결국 세이난 전쟁으로 이어졌다.
6. 1. 에토 신페이 등의 체포와 처형
1874년 2월 19일, 오쿠보 도시미치는 하카타에 본부를 설치하고 사가 반란군을 반역자로 규탄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정부군은 다음 날 사가로 진군했다. 1874년 2월 22일 사가와 후쿠오카의 경계에서 전투에서 패한 후, 에토는 추가 저항은 불필요한 사망자만 발생시킬 것이라고 판단하고 군대를 해산했다.에토는 추종자들에게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의 사쓰마 사무라이로부터 도움을 얻기 위해 가고시마로 도망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이고가 거부하면 토사로 갈 것이며, 토사도 거부하면 도쿄로 가서 할복할 것이라고 했다.
사가 반란군은 에토의 도주로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지만, 일부는 계속 싸웠고, 가장 격렬한 전투는 1874년 2월 27일 사가 거리에서 발생했다. 사가성에서 싸우다 죽을 것이라고 선언했던 시마는 그날 밤 가고시마로 도망쳤다. 정부군은 1874년 3월 1일 추가 유혈 사태 없이 사가성을 점령했다.
에토와 시마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고, 에토가 자신이 만드는 데 도움을 준 바로 그 경찰로부터 도망치는 도망자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에토는 가고시마에서 지원을 거부당하고 어선을 타고 토사로 도망쳤고, 거기서 냉대를 받았다. 도쿄로 가는 배를 찾으려던 중 1874년 3월 28일에 체포되었다.
에토에 대한 동정 여론이 높았고, 산조 사네토미는 오쿠보에게 에토의 동기가 악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편지를 썼고, 기도 다카요시도 에토를 다가오는 1874년 대만 원정에 고용할 것을 제안하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오쿠보는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에토와 시마는 1874년 4월 12일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다음 날 반란의 다른 11명의 지도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에토는 오쿠보의 명령으로 참수되었고, 그의 잘린 머리는 공개적으로 전시되었는데, 사무라이 계급의 사람에게는 굴욕적인 처벌로 여겨졌다. 사진이 찍혀 도쿄에서 판매되었지만, 도쿄 정부는 나중에 판매를 금지하고 사진을 구입한 사람들에게 반환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오쿠보는 이를 거부하고 내무성 접견실에 사진 사본을 걸어놓았다.

6. 2. 사족 반란의 종식과 메이지 정부의 권력 강화
사가의 난은 메이지 정부의 군사력으로 진압되었지만, 사족들이 봉기를 일으킨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규슈(九州)는 1870년대 내내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계속되었던 지역이었고, 결국 세이난 전쟁으로 이어졌다.7. 영향 및 평가
사가의 난은 군사력으로 진압되었지만, 봉기를 일으킨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규슈(九州)는 1870년대 내내 중앙 정부에 대한 불안의 온상이었고, 결국 세이난 전쟁으로 이어졌다.
7. 1. 일본 근대화에 미친 영향
사가의 난은 군사력으로 진압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규슈(九州)는 1870년대 내내 중앙 정부에 대한 불안의 온상이었고, 결국 세이난 전쟁으로 이어졌다.7. 2. 한국과의 관계
사가의 난은 군사력으로 진압되었지만, 봉기를 일으킨 근본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규슈(九州)는 1870년대 내내 중앙 정부에 대한 불안의 온상이었고, 결국 세이난 전쟁으로 이어졌다.[4]참조
[1]
서적
Samurai to Soldier: Remaking Military Service in Nineteenth-Century Japan
https://books.google[...]
[2]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Volume 5: The Nineteenth Century
[3]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4]
웹사이트
佐賀の役(佐賀戦争)
http://www.saga-otak[...]
[5]
웹사이트
「佐賀の乱」中学校歴史教科書の一部に「佐賀戦争」を併記|NHK 佐賀県のニュース
https://www3.nhk.or.[...]
日本放送協会
2024-09-03
[6]
웹사이트
記録材料・佐賀征討始末・乾・外史本課 福岡県電報
https://www.digital.[...]
太政官
2024-04-11
[7]
뉴스
英国で「佐賀の乱」公文書発見 駐日公使が母国に報告
http://www1.saga-s.c[...]
佐賀新聞
2009-10-26
[8]
웹사이트
佐賀の役(佐賀戦争)
http://www.saga-otak[...]
2015-11-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