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한묵
1. 개요
양한묵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전라남도 해남 출신이다. 지방 세무 관리로 일하다 천도교에 입교하여,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해 공진회, 헌정연구회를 조직하고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1909년 천도교 법도사로 약 20권의 교리서를 저술했으며, '인내천'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저서로는 《동경연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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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양한묵 |
|---|---|
| 원어 이름 | 梁漢默 |
| 로마자 표기 | Yang Han-muk |
| 호 | 지강(芝江) |
| 자 | 경조(景朝), 길중(吉仲) |
| 출생일 | 1862년 4월 29일 |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해남현 |
| 사망일 | 1919년 5월 26일 |
| 사망지 | 경성부 서대문감옥 |
| 본관 | 제주 |
| 직업 | 독립운동가, 종교인, 교육인 |
| 종교 | 천도교 |
| 아버지 | 양상태(梁相泰) |
| 어머니 | 낭주 최씨(朗州 崔氏) |
| 사망 원인 | 고문에 의한 옥사 |
| 소속 | 공진회 헌정연구회 |
|---|---|
| 활동 | 독립운동 |
| 주요 활동 | 민족대표 33인 |
| 훈장 | |
|---|---|
| 공훈록 | 양한묵(독립유공자 공훈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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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천도교 교역자 -
손병희
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일제강점기의 천도교 교역자 -
권동진
권동진은 조선 말기 개화파 관료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을미사변 가담 후 천도교에 입교, 3·1 운동 민족대표, 신간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
한국 사람에 관한 -
한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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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에 관한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1862년 출생 -
우겐 왕축
우겐 왕축은 1907년 부탄의 초대 세습 국왕으로 즉위하여 250여 년간의 이원 통치 체제를 종식시키고 내전을 종식시켜 "근대 부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며, 불교 진흥, 서구식 교육 도입, 영국과의 외교 강화 등의 업적을 남겼다. -
1862년 출생 -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상징주의 화가이자 빈 분리파 운동의 주요 인물로서, 빈 분리파 결성 및 초대 회장 역임, 금박을 사용한 작품 활동, 여성 및 에로티시즘 등을 주제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2. 생애
전라남도 해남의 문과 급제자를 다수 배출한 양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지방의 세무 관리로 일하다가 사직하고 베이징과 일본을 여행하던 중, 일본에 망명해 있던 천도교(당시 동학) 교주 손병희와 전직 개화파 관료 출신인 권동진, 오세창 등을 만나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손병희는 일본에 머무르면서 국내에 진보회를 결성하도록 지시하여 단발을 권하고 내정 개혁을 촉구하는 등 계몽 운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이용구가 이끌던 일진회 계열이 친일 노선으로 변절하는 사건이 있었다. 망명 중이던 다른 천도교 동료들보다 먼저 귀국한 양한묵은, 이러한 친일 세력에 맞서기 위해 이준, 윤효정과 함께 공진회와 헌정연구회를 조직했다. 헌정연구회는 근대적인 헌정 연구를 표방한 계몽 단체로서 입헌군주제 도입을 주장했으며, '헌정요의'라는 글을 저술하여 약 한 달간 황성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이 단체의 활동은 이후 장지연, 나수연 등이 중심이 된 대한자강회로 이어졌다.
또한 이기, 나인영, 오기호 등과 함께 미국에서 열리는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참여하여 대한제국의 입장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등이 귀국한 뒤로는 다시 천도교를 기반으로 한 계몽 운동에 힘썼다. 1909년에는 천도교 법도사로 임명되어, 천도교의 주요 교리서인 '대종정의', '무체법경' 등 약 20권의 책을 저술했다. 특히 '대종정의'에서는 '인내천(人乃天)'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손병희가 추진한 교육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보성전문학교, 보성중학교, 동덕여학교 등 근대 교육 기관의 인수와 경영에 관여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 만세 삼창 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고, 재판을 받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옥중에서 사망했다. 민족대표 33인에게 내려진 최고 형량이 징역 3년이었고 대부분 형기를 마치고 풀려났으나, 양한묵은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