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유소
1. 개요
어유소는 1434년 평안도 병마수군 도 절제사 어득해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 문종 때 음서로 내금위에 임명되었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적개공신 1등으로 예성군에 봉해졌으며 공조판서에 특진되었다. 이후 함경북도 절도사, 평안북도 절도사, 의정부우참찬, 병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했다. 1479년 건주위 정벌 중 작전상 회군한 죄로 유배되기도 했으나, 이후 다시 기용되어 이조판서, 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489년 성종을 호종하던 중 포천 영평현에서 사망했으며, 시호는 정장이다. 어우동 스캔들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현재 동두천시에는 그의 시호를 딴 도로와 지하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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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9년 사망 -
월산대군
월산대군은 조선 세조의 장손이자 덕종의 맏아들, 성종의 친형으로, 뛰어난 문장과 예술적 재능을 지녔으나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후 풍류로운 삶을 살며 시와 《풍월정집》 등의 저서를 남겼다. -
1489년 사망 -
조려
조려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켜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서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정절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
1434년 출생 -
영응대군
영응대군은 조선 세종의 여덟째 아들로, 이름은 염이며, 서예, 그림, 음악에 능했고, 영흥대군, 역양대군을 거쳐 영응대군에 봉해졌으며, 1467년에 사망하여 시호는 경효이다. -
1434년 출생 -
아시카가 요시카쓰
아시카가 요시카쓰는 1434년에 태어나 1442년 9세의 나이로 무로마치 막부의 7대 쇼군이 되었으나, 정치적 능력 부족으로 실권을 호소카와 모치유키 등이 장악했고, 1443년에 1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적개공신 -
윤필상
윤필상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조와 성종 때 활약하며 이시애의 난 평정에 기여하고 좌의정을 거쳐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 토벌에 공을 세웠으나, 무오사화를 주도하여 사림을 숙청하고 갑자사화 때 사사된 후 중종반정으로 복권되었다. -
적개공신 -
김국광
김국광은 조선 초 세조의 측근 문신으로, 《경국대전》 편찬에 기여하고 이시애의 난 토벌에 공을 세워 광산군에 봉해졌으며, 병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사후 불천지위의 은전을 받았다.
2. 생애
2.1. 생애 초반
어유소는 1434년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지행리(현 동두천시 지행동)에서 평안도 병마수군 도 절제사를 지낸 어득해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자유(子遊)이다. 문종 원년(1451년)에 18세에 음서로 출사하여 내금위에 임명되었다.
2.2. 이시애의 난 진압과 공신 책봉
1456년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사복시직장(司僕寺直長)과 감찰을 역임하였다. 1460년에는 야인 정벌에 큰 공을 세워 승진, 통례문통찬(通禮文通贊)이 되고, 1463년 회령부사를 거쳐 이시애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다. 이시애는 판영홍대부사를 지낸 이인화의 아들이자 검교문하부사를 지낸 양반가의 자제로, 회령부사를 퇴임하고 집에 있다가 아우 이시함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1467년 좌대장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 1등이 되어 예성군에 봉해지고 공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그 해 겨울 명나라가 건주위를 칠 때 좌대장으로 큰 공을 세웠고 그해 12월 군공 2등(軍功二等)에 녹훈되었다. 예종 즉위 후 1469년 함경북도 절도사가 되고, 성종 2년 (1471년) 좌리공신 4등이 되고 두 차례나 평안북도 절도사를 지냈다.
2.3. 관료 생활
의정부우참찬으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임했고 이듬해 병조판서, 성종 9년(1478년) 의정부우찬성을 지냈다. 성종 10년(1479년)에는 건주위를 정벌할 때 서정대장으로 출정했으나 작전상 회군한 죄목으로 한때 유배되었다. 다시 풀려나 도총관, 이조판서, 동지중추부사, 평안도 순찰사를 역임했다.
성종 12년(1481년) 이조판서, 지중추부사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성종 19년(1488년)에는 판중추부사 겸 도총관에 이르렀다. 성종 20년(1489년) 10월 왕이 경기에 열무할 때 성종을 호종하여 포천 영평현에 도착했을 때 원내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시호는 정장(貞莊)이다.
2.4. 사후
성종은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을 크게 슬퍼하여 조회를 거두고 부의를 후하게 내려주었다. 묘는 경기도 양주시 동두천읍(현 동두천시 광암동) 산72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6년 4월 28일 동두천시의 향토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3. 논란
3.1. 어우동 스캔들
1480년 스캔들 사건으로 의금부에 압송된 어우동과 방산수의 진술에 의하면 "어유소는 일찍이 어울우동의 이웃집에 피접(避接)하여 살았는데,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그 집에 맞아들여 사당(祠堂)에서 간통하고, 뒤에 만날 것을 기약(期約)하여 옥가락지[玉環]를 주어 신표(信標)로 삼았다"는 것이다. 어우동은 방산수의 설득으로 어유소(魚有沼)·노공필·김세적·김칭·김휘·정숙지 등을 언급했으나, 뒤에 모두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석방되었다.
어우동과 인접하던 그는 어우동을 불러들여 그와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국문을 당할 때 그는 어우동과의 관계를 부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