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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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독일의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정치인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여 사회 개혁을 강조한 수정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1850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반사회주의법으로 인해 망명 생활을 했다. 1890년대부터 자본주의의 현실을 분석하며 마르크스주의의 일부 이론을 수정하는 주장을 펼쳤고, 저서 《사회주의의 전제조건》을 통해 수정주의 논쟁을 촉발했다. 그는 독일 제국 의회 의원을 역임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에 참여하기도 했다. 베른슈타인은 평화적인 수단과 점진적인 개혁을 통한 사회주의 실현을 주장했으며, 1932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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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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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
로마자 표기 | Eduard Bernstein |
출생일 | 1850년 1월 6일 |
출생지 | 베를린-크로이츠베르크, 프로이센 왕국 |
사망일 | 1932년 12월 18일 |
사망지 | 베를린, 프로이센 자유주, 독일 제국 |
거주지 | 독일, 영국 |
국적 | 독일 연방 → 바이마르 공화국 |
직업 | 철학자, 혁명가, 사회학자 |
정치 활동 | |
정당 | SDAP (1872년–1875년) SPD (1875년–1917년) USPD (1917년–1919년) SPD (1918년–1932년) |
국회의원 (브란덴부르크 선거구) | 임기 시작: 1920년 6월 7일 임기 종료: 1928년 5월 20일 선거구: 포츠담 (텔토우-베스코우-샬로텐부르크) |
제국의회 의원 (슐레지엔 선거구) | 임기 시작: 1912년 1월 13일 임기 종료: 1918년 11월 10일 이전: 오토 푼트너 이후: 제국의회 해산 선거구: 브레슬라우-베스트 |
철학 | |
주요 관심사 | 정치, 경제, 사회학 |
주요 사상 | 사회민주주의, 수정주의 |
시대 | 근대 철학 19세기 철학 20세기 철학 |
지역 | 서양 철학 독일 철학 |
학파 | 사회주의 |
2. 생애
1850년 1월 6일 베를린에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1872년 아이제나흐파 당원이 되었다. 1875년 아우구스트 베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아이제나흐파와 라살파의 통합을 결정한 고타 당대회를 준비했다.
1878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제정되자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하여 사회민주당의 후원자인 카를 헤히베르크의 비서가 되었다. 1888년 프로이센의 압력을 받은 스위스 정부의 추방령으로 런던으로 망명하여,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가까워졌다.
1880년부터 1890년까지 SPD의 불법 기관지 “Sozialdemokrat”를 발행했다. 1891년에는 에르푸르트 강령의 기초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엥겔스 사후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사회주의의 문제”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했다. 노동계급의 생활 개선과 중산계급의 발생을 근거로 혁명 불필요론을 주장했다. 1899년에는 “사회주의를 위한 전제 조건과 사회민주주의의 과제”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0년 “사회개량 또는 혁명?”을 발표하여 강하게 반박했다. 베벨, 리프크네히트, 카를 카우츠키 등과도 격렬하게 대립했다.
1901년 사회주의자 탄압법 폐지로 독일로 귀국했다. 1902년부터 1918년까지, 그리고 1920년부터 1928년까지 제국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1913년 사회민주당 좌파 의원들과 함께 군사력 증강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1917년 카를 카우츠키와 함께 독립사회민주당(USPD)에 참여했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19년 사회민주당(SPD)에 복귀했다. 1921년 겔리츠 강령 작성에 참여했다.
1932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
1850년 1월 6일 베를린에서 야코프 베른슈타인의 일곱째 자녀로 태어났다. 베른슈타인 가문은 유대인이었지만 유대교 신앙에 냉담했으며, 집안 내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등 독일인 사회에 많이 동화되어 있었다. 아버지 야코프는 본래 배관공으로 일하다가 철도 기관사로 직업을 바꿨지만 수입이 많지 않았으며, 에두아르트는 그 때문에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김나지움을 중퇴해야만 했다.[30] 16살부터 베를린에 위치한 은행의 수습사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으며, 1869년 수습 경력을 마치자 베를린의 다른 은행에서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이후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을 떠나기 전까지 이 은행에서 계속 근무를 이어나갔다.[30]1866년부터 1878년까지 은행원으로 은행에서 일했다.[1]
2. 2. 망명
1878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제정되자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하여 사회민주당의 후원자인 카를 헤히베르크의 비서가 되었다.[3] 1888년 프로이센의 압력을 받은 스위스 정부로부터 국외 퇴거 명령을 받고 다시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이즈음 마찬가지로 런던으로 망명한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가까워졌다.[4]베른슈타인은 취리히에서 ''더 조치알데모크라트''(사회민주당)를 위해 활동했고, 게오르크 폰 폴마르의 뒤를 이어 10년간 신문의 편집장을 맡았다. 1887년 독일 정부는 스위스 당국을 설득하여 ''더 조치알데모크라트''를 금지시켰다. 베른슈타인은 런던 켄티시 타운에서 출판을 재개했다. 엥겔스와의 관계는 곧 우정으로 발전했다. 그는 패비안 협회와 헨리 메이어스 하인드먼의 사회민주당 등 여러 영국 사회주의 단체와도 교류했다.[5]
2. 3. 영국에서의 사회민주주의 활동
1888년, 비스마르크는 스위스 정부를 설득하여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주요 인물들을 추방하게 만들었고, 베른슈타인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카를 카우츠키와 교류하며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4] 스위스에 도착한 직후 그는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로 여기기 시작했다.[4] 1880년, 그는 뢰흐베르크가 발표한 기사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베벨과 함께 런던을 방문했는데, 이 기사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 사상으로 가득 차 있다"고 비난받았다. 이 방문은 성공적이었고, 특히 엥겔스는 베른슈타인의 열정과 사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취리히로 돌아온 베른슈타인은 ''더 조치알데모크라트''(사회민주당)를 위해 점점 더 활발하게 활동했고, 나중에는 게오르크 폰 폴마르의 뒤를 이어 10년간 신문의 편집장을 맡았다. 1880년에서 1890년 사이에 베른슈타인은 주요 당 이론가이자 완벽한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그는 엥겔스와 맺은 긴밀한 개인적, 전문적 관계 덕분에 도움을 받았다. 이 관계는 그가 엥겔스의 전략적 비전을 공유하고 엥겔스가 그 사상이 수반한다고 믿었던 대부분의 특정 정책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1887년, 독일 정부는 스위스 당국을 설득하여 ''더 조치알데모크라트''를 금지시켰다. 베른슈타인은 런던으로 이주하여 켄티시 타운에 있는 건물에서 출판을 재개했다. 엥겔스와의 관계는 곧 우정으로 발전했다. 그는 또한 특히 페이비언 협회와 헨리 메이어스 하인드먼의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여러 영국 사회주의 단체와 교류했다.[5] 후년에 그의 반대자들은 그의 "수정주의"가 "영국식 안경"을 통해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이러한 주장을 부인했다.[6]
1895년, 엥겔스는 1850년 마르크스가 쓴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의 새판 서문을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가 편집하여 그가 평화적인 사회주의로의 길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사실을 알고 깊은 고통을 받았다. 4개월 후인 1895년 4월 1일, 엥겔스는 카우츠키에게 편지를 썼다.
2. 4. 독일에서의 사회민주주의 활동
1901년 비스마르크 시대에 만들어진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폐지되면서 독일로 귀국하였다. 1903년 드레스덴 전당 대회에서 수정주의 부인이 결의되어 베른슈타인은 공식적으로는 패배하였으나,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는 강력한 지지를 얻어냈다.[10] 1902년부터 1918년까지 제국의회 의원을 역임하였다. 1913년 사회민주당 좌파와 함께 군사력 증강법에 반대표를 던졌다. 1917년 카를 카우츠키와 함께 독립사회민주당(USPD)에 참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9년 사회민주당에 복귀하였다. 1920년부터 1928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 의원을 역임하였다. 1921년 괴를리츠 강령 기초를 도왔다.[10]1901년 독일 입국 금지가 해제되면서 베른슈타인은 독일로 돌아왔다. 같은 해 ''전진(Vorwärts)''의 편집자가 되었고,[3][10] 1902년부터 1918년까지 제국 의회 의원을 지냈다. 1913년 군비 증강에 반대표를 던졌는데, 이는 당시 사회민주당 좌파 의원들과 같은 입장이었다. 1914년 8월 전쟁비용 지출에 찬성표를 던졌지만,[11] 1915년 7월부터는 제1차 세계 대전에 반대했고, 1917년에는 베른슈타인과 같은 개혁주의자, 카우츠키와 같은 중도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같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를 포함한 반전 사회주의자들이 결합하여 결성된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9]
1919년까지 USPD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SPD에 복귀했다. 1920년부터 1928년까지 다시 제국 의회 의원이 되었다. 1920년 3월 4일, 독일 제국 시대 영국-독일 관계 전문가로서 제1차 세계 대전 책임 조사를 위한 의회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는 위원회에서 독일의 전쟁 발발 책임을 인정한 소수의 의원 중 한 명이었으며, 이는 부르주아 정당 소속 대부분의 제국 의회 의원들과 다른 입장이었다.[9] 1928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2. 5. 말년
1932년 12월 18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16]
베른슈타인은 191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베를린 쇠네베르크 보체너슈트라세 18번지에서 살았으며, 현재 그곳에는 그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아이작슈트라세 묘지에 있는 그의 묘는 베를린의 명예 묘소가 되었다.
3. 사상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역사 유물론과 계급투쟁이라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두 가지 핵심 요소를 비판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심화될수록 부의 집중과 사회적 궁핍화가 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가 복잡해지고 적응력도 커지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 대신, 자본주의 붕괴를 기다리기보다 현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계급투쟁의 필연성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을 약화시키므로, 중간계급과 농민들은 노동자들과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진 공동체를 형성한다고 보았다.[31]
베른슈타인은 칼 마르크스가 예측한 자본주의의 임박한 몰락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 산업의 집중화가 전면적이지 않으며 자본 소유는 오히려 분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10][11] 마르크스는 중개인이 소멸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베른슈타인은 기업가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꾸준히 충원되고 있으므로 노동 시간 규제, 노령 연금 제공과 같은 타협 조치를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
베른슈타인은 독일의 빠른 성장을 예로 들며, 중소기업이 번성하고 중산층의 규모와 힘이 커지면서 자본주의가 성공적으로 적응하여 붕괴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848년 프랑스와 같은 폭력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노동자들의 이익을 훼손할 뿐이라고 경고하며, 혁명 대신 점진적인 변화를 위한 지속적인 사회 운동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카를 카우츠키를 중심으로 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급진 세력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했다.[16] 룩셈부르크는 수정주의가 사회 혁명이라는 사회민주주의의 목표를 포기하고, 사회 개혁을 계급 투쟁의 수단이 아닌 목표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17]
3. 1. 주요 저서
- Ferdinand Lassalle as a Social Reformer.영어 엘리너 막스 애벌링(Eleanor Marx Aveling) 역, 런던: 스완 손넨샤인 앤드 컴퍼니(Swan Sonnenschein & Co.), 1893.
- Evolutionary Socialism: A Criticism and Affirmation.영어 [1899] 에디스 C. 하비(Edith C. Harvey) 역, 뉴욕: B.W. 휴브쉬(B.W. Huebsch), 1909. ''사회주의의 전제조건(The Preconditions of Socialism)''으로도 번역되었다.
- Cromwell and Communism: Socialism and Democracy in the Great English Revolution.영어 H.J. 스테닝(H.J. Stenning) 역, 런던: 앨런 앤 언윈(Allen and Unwin), 1930.
- My Years of Exile: Reminiscences of a Socialist.영어 베르나르 미알 역, 뉴욕: 하코트, 브레이스 앤드 하우(Harcourt, Brace and Howe), 1921.
- Selected Writings of Eduard Bernstein, 1900–1921.영어 프로메테우스 북스(Prometheus Books), 1996.
- 마리우스 S. 오스트로프스키 (편), Eduard Bernstein on Social Democracy and International Politics: Essays and Other Writings영어. 베이징스토크: 팔그레이브 맥밀란(Palgrave Macmillan), 2018.
- 마리우스 S. 오스트로프스키 (편), Eduard Bernstein on the German Revolution: Selected Historical Writings영어. 베이징스토크: 팔그레이브 맥밀란(Palgrave Macmillan), 2019.
- 마리우스 S. 오스트로프스키 (편), Eduard Bernstein on Socialism Past and Present: Essays and Lectures on Ideology영어. 베이징스토크: 팔그레이브 맥밀란(Palgrave Macmillan), 2021.
- 사회주의의 여러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과제한국어 (Eduard Bernstein, 1899)(한국어 번역: 佐瀬昌盛 역, 다이아몬드사, 1974)
- 사회주의란 무엇인가?한국어 (책세상 출판사를 통해 한국어로 번역됨)
3. 2. 수정주의 논쟁
1891년, 베른슈타인은 에르푸르트 강령 작성에 참여했고,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사회주의의 문제들》(Probleme des Sozialismusde)이라는 논문 연재를 통해 독일 사회민주당(SPD) 내 수정주의 논쟁을 일으켰다.[8] 1899년에는 《사회주의를 위한 전제들과 사회민주주의의 임무》(Die Voraussetzungen des Sozialismus und die Aufgaben der Sozialdemokratiede)를 발표했다. 이 책은 아우구스트 베벨, 카를 카우츠키,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입장과 매우 달랐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0년에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de)를 발표하여 베른슈타인의 주장에 반박했다.[10]베른슈타인은 저서 '''사회주의의 전제조건'''(1899)에서 칼 마르크스가 예측한 자본주의의 몰락이 필연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 산업 집중화가 전면적이지 않고 자본 소유가 분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10][11] 또한, 중개인이 사라질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믿음과 달리, 기업가 계급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꾸준히 충원되고 있으므로 노동 시간 규제, 노령 연금 제공과 같은 타협 조치를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
베른슈타인은 독일의 급속한 성장을 보면서 중소기업이 번영하고 중산층의 규모와 힘이 커지며, 자본주의가 성공적으로 적응하여 붕괴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848년 프랑스와 같은 폭력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노동자들의 이익을 훼손할 뿐이라고 경고하며, 혁명 대신 점진적 변화를 위한 지속적인 사회 운동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카를 카우츠키를 중심으로 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급진 세력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했다.[16] 룩셈부르크는 수정주의가 사회 혁명이라는 사회민주주의의 목표를 포기하고 사회 개혁을 계급 투쟁의 수단이 아닌 목표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17]
3. 3. 외교 정책
베른슈타인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외교 정책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Sozialistische Monatshefte)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그는 독일을 위해 공격적인 민족주의, 제국주의, 팽창주의적 입장을 옹호했다.[19][20]베른슈타인은 보호무역이 소수에게만 이익이 되고 대중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진보적 반대'(fortschrittsfeindlich)라고 비판했다. 그는 독일의 보호무역이 정치적 편의에만 근거하여 독일을 세계, 특히 영국으로부터 고립시키고, 독일과 다른 국가 간의 갈등만 초래하는 자급자족(autarky)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21] 베른슈타인은 독일의 보호무역을 종식시키고자 했으며, 관세가 곡물 생산을 증가시키지도, 영국과의 경쟁을 막지도, 농장 이윤을 증가시키지도, 농업 개선을 촉진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했다. 대신 지대, 금리, 물가를 인상시켜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보았다. 반대로 그는 자유무역이 평화, 민주주의, 번영, 그리고 모든 인류의 최고의 물질적, 도덕적 안녕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22]
베른슈타인은 반동적인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대신 세계주의적-자유주의적 민족주의를 요구했다. 그는 국민적 요소의 역사적 역할을 인정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외부 위험으로부터 자국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국가에 동화될 것을 촉구했는데, 이는 식민 정책과 제국주의 프로젝트에 대한 지지를 포함했다. 베른슈타인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긍정적이고 문명화된 사명으로 여기는 데 공감했고, 이는 반제국주의자 (Ernest Belfort Bax)와의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23] 베른슈타인은 식민주의가 후진 민족을 고양시키고 영국과 독일 모두에게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식민주의를 지지했다. 베른슈타인은 1896년에 "문명에 적대적이거나 문명에 무능한 종족은 문명에 반항할 때 우리의 동정심을 요구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야만인[들은] 정복되어 더 높은 문명의 규칙에 따르도록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극도로 인종차별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정책을 지지했다.[24] 그러나 그는 황제의 무모한 정책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특히 영국과 프랑스와의 강력한 우정과 독일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의 보호를 원했다. 그는 일종의 국제 연맹을 구상했다.[25][26]
3. 4. 시온주의와 동성애
베른슈타인은 유대인 문제에 대해 초기에는 완전한 동화주의적 해결책을 지지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시온주의에 대한 태도가 훨씬 더 호의적으로 바뀌었다.[27][28] 스스로를 시온주의자로 규정한 적은 없다.4. 평가와 영향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에 대한 평가는 그가 제기한 수정주의 논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의 사상과 활동은 사회민주주의 운동 내에서 다양한 해석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사회주의 사상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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