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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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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디난트 라살은 1825년 프로이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독일의 법학자, 철학자,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그는 헤겔 철학에 심취하여 브레슬라우 대학교에서 문헌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1848년 혁명에 참여하여 민주주의 운동을 지지했다. 1863년에는 전독일 노동자 동맹을 창립하여 보통 선거를 통한 노동자 권익 신장을 주장했으며, 비스마르크와도 교류하며 사회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라살은 1864년 결투로 사망했지만, 그의 사상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고, 국가 사회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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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라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860년의 라살
1860년의 라살
본명페르디난트 요한 고틀리프 라살
출생일1825년 4월 11일
출생지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 주 브레슬라우(현 폴란드 브로츠와프)
사망일1864년 8월 31일
사망지스위스 제네바 주 카루주
안장지브로츠와프 구 유대인 공동묘지
국적독일
정당전독일 노동자 협회
철학 정보
지역서양 철학, 독일 철학
시대19세기 철학
학파사회민주주의
주요 관심사정치 철학, 경제학, 역사
주요 사상임금 철칙, 라살주의
학자 정보
시대19세기 중반
학파국가 사회주의
주요 관심사헤겔 철학, 사회주의, 프로이센 노동 운동
출신 학교브로츠와프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주요 사상야경 국가, 보통 선거, 생산 조합, 사실적 권력 관계
주요 저서『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
『기득권의 체계』
『노동자 강령』
『공개 회답서』
『간접세와 노동자 계급』
영향을 준 인물헤라클레이토스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하인리히 하이네
루트비히 뵈르네
앙리 드 생시몽
샤를 푸리에
루이 블랑
리하르트 바그너
로렌츠 폰 슈타인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영향을 받은 인물오토 폰 비스마르크
고토쿠 슈스이
가타야마 센
게오르크 옐리네크
루돌프 슈탐러
기타 정보
서명

2. 생애

1825년, 페르디난트 라살은 프로이센 동부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부유한 유대인 비단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34][35][36][37] 그는 상업학교를 거쳐 김나지움에 진학했다. 상업학교 시절 하인리히 하이네와 루트비히 베르네 등의 저서를 통해 혁명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브로츠와프 대학교베를린 대학교에서 헤겔 철학을 공부했으며, 헤겔의 변증법과 유사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万物流転) 연구를 수행했다.

1846년부터 1854년까지 하츠펠트 백작 부인 조피 폰 하츠펠트의 이혼 소송을 대리하며 학문을 중단했다. 1848년 혁명 당시 이 이혼 소송은 반봉건주의 투쟁의 하나로 라인 지방의 혁명파로부터 주목받아 라살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카를 마르크스 등 다른 라인 지방 혁명가들과 연계하여 혁명을 지휘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라살은 6개월의 징역형을 살았다.

1854년 이혼 소송에서 승소한 후, 라살은 헤라클레이토스 연구로 돌아가 1857년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을 출판했다. 베를린 철학 학회의 총아가 되어 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후 금전 문제와 이탈리아 통일 전쟁 평가를 둘러싸고 마르크스와의 불화가 심화되었다.

1861년, 라살은 『기득권의 체계』를 출판하여 "법의 역사가 문화적 진보를 거듭하면 개인 소유권은 점차 제한된다"는 사회주의적 법사관을 설파했다. 같은 해 마르크스의 프로이센 일시 귀국을 주선했지만, 마르크스와의 관계는 호전되지 않았다.

1861년 11월,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주세페 가리발디와 회견하고, 그의 영향을 받아 학문보다 직접적인 정치 운동에 힘썼다. 로타르 부허 등을 동지로 얻어 노동자를 향한 연설을 시작했다. 1862년에는 그러한 연설을 정리한 『노동자 강령』을 출판했지만, 당국에 위험시되어 체포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862년 7월, 런던 만국 박람회 방문으로 런던을 방문하여 마르크스와의 교우 관계가 단절되었다.

1862년 9월,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총리가 되면서 프로이센 헌법 투쟁이 고조되었다. 라살은 진보당을 버리고, 1863년 3월 1일에 출판한 『공개 답변서』에서 노동 계급은 독자적인 노동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863년 5월에는 전독일 노동자 동맹을 결성하고, 그 지도자가 되었다. 이 무렵부터 총리 비스마르크와 비밀리에 회담을 하게 되었다.

1864년 8월 31일, 라살은 연애 문제에 얽힌 결투로 목숨을 잃었다. 이후 독일 노동 운동은 라살파와 마르크스 계열의 아이제나흐파로 분열했지만, 1875년에 이르러 양파는 통합되어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신)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브레슬라우(실레시아)(현재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페르디난트 요한 고틀리프 라살'''(Ferdinand Johann Gottlieb Lassal)로 태어났다.[34][35][36][37] 그의 아버지 하이만 라살은 유대인 비단 상인이었고,[38] 아들을 사업가로 키우려고 라이프치히의 상업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라살은 상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문학과 고전에 매료되었다. 괴테, 실러, 볼테르, 바이런, 하이네, 베르네 등의 작품에 몰두하였다.[46] 특히 같은 유대인인 하이네와 베르네로부터 민주주의, 공화주의, 혁명주의의 초기 영향을 받았다.[51][52]

1841년 8월, 라살은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아버지를 설득하여 상업학교를 중퇴하고 브레슬라우의 가톨릭계 김나지움에 전학했다.[53] 1842년, 김나지움에서 열심히 공부해 아비투어에 합격했다.[54][55] 이후 브레슬라우 대학교와 베를린 대학교에서 어원학철학을 공부했고, 헤겔의 철학에 심취했다. 라살은 어린 시절 유대교와의 연관성을 끊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다.

2. 2. 하츠펠트 백작 부인과의 관계

베를린 대학교 유학 중이던 1845년 가을부터 1846년 1월에 걸쳐 헤라클레이토스 연구를 위해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다.[68][69][70] 이 파리 체류 중에 "Lassal" 성을 프랑스식인 "Lassalle"로 변경했다.[75][76][77] 베를린으로 돌아온 후, 하츠펠트가의 소피 폰 하츠펠트 백작 부인과 친분을 맺었다.[34] 1846년부터 1854년까지 학업을 중단하고 그녀의 이혼 소송을 대리했으며,[34] 1854년 이혼 소송에서 승소하여 백작 부인이 거액의 자금을 얻게 되면서 라살의 재정 상황도 좋아졌다.[34]

2. 3. 1848년 혁명과 그 이후

1848년 독일 혁명 당시 라살은 혁명 민주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공개 집회에서 연설했고, 뒤셀도르프 시민들에게 프로이센 정부의 국민의회 해산 결정에 맞서 무장 저항을 준비할 것을 촉구했다.[120] 이로 인해 체포되어 국가에 대한 무장 반대 선동 혐의로 기소되었다.

라살은 이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공무원 저항 선동이라는 경미한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까지 감옥에 수감되었다.[121] 결국 이 경미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6개월 징역형을 살았다.[121]

베를린 거주가 금지된 라살은 라인란트로 이주하여 하츠펠트 백작 부인의 소송(1854년 해결)을 계속 진행했고, 헤라클레이토스철학에 대한 저술을 완성했다(1857년 완성, 이듬해 2권으로 출판).[123] 이 책은 엇갈린 반응을 얻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획기적인 작품이라 평가했지만, 칼 마르크스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헤겔의 공리 나열로 여겼다.[29] 그러나 비판적인 사람들조차도 이 책의 범위를 인정해야 했고, 독일 지식인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29]

이 기간 동안 라살은 정치적으로 활동하지 않았지만 노동 문제에 여전히 관심을 가졌다. 법률 업무와 철학을 버리고 극작에 매달려 "프란츠 폰 지킹겐, 역사적 비극"이라는 희곡을 집필했다.[33] 익명으로 왕립극장에 보낸 이 희곡은 관리자에게 거절당했고, 1859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다.[33]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이 작품을 서투르고 과도한 연설에 치우쳐 무대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했다.[33]

1859년, 라살은 변장하여 베를린으로 돌아왔다.[125] 그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에게 중재를 요청하여 베를린 거주 금지령을 해제받는 데 성공했다.[125]

2. 4. 정치 활동

1848년 혁명에 잠시 참여했던 라살은 1862년 프로이센의 헌법 투쟁을 계기로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1] 빌헬름 1세는 자유주의적 대의원회와 여러 차례 충돌하여 의회를 해산시켰는데, 저명한 법학자였던 라살은 헌법의 본질과 사회 내 사회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공개 연설을 요청받았다.[1]

라살은 헌법 문제는 권력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연설을 했고, 자유주의 언론은 그의 연설에 격분하여 라살은 같은 강연을 두 번 더 열었다.[1]

1862년 4월 12일 베를린에서 "노동자 프로그램"이라는 연설에서 라살은 노동 계급에 도덕적 우위를 부르주아지보다 부여했는데, 이는 프로이센 검열 당국에 위험한 주장으로 여겨졌다.[1] 라살의 연설 소책자 3,000부 전량이 당국에 의해 압수되었고, 라살은 공공의 평화를 위협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1]

라살은 1863년 1월 16일 베를린에서 이 혐의에 대한 재판을 받았고,[1] 자신의 변론을 제시한 널리 알려진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4개월의 징역형과 재판 비용을 부과받았다.[1] 이 형은 나중에 항소 후 벌금으로 대체되었다.[1]

2. 5. 사회주의 정당 창립

1862년, 런던을 방문했던 노동자 대표들이 좌익 사상을 가지고 돌아와 노동 계급의 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한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라살은 자신이 공개적으로 했던 사회주의적 발언보다 더 나아가는 사상을 가진 노동자들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자유주의적 독일 진보당과 무관한 노동자 정당을 창립할 것을 촉구했다.[2]

자유주의 정당으로부터 노동 계급이 얻을 것이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는 사실상 자유주의 정당 및 신문들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이는 그의 죽음까지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3] 라살은 곧 정치적 선동가로서 새로운 경력을 시작하여 독일 전역을 여행하며 연설을 하고 팜플렛을 작성하여 노동 계급을 조직하고 고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가 노동 계급으로 하여금 자유주의자들과 결별하게 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결국 반동적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의 동맹으로 이어졌다.

1864년, 라살은 나중에 사회주의자 탄압법의 주요 지지자가 된 비스마르크에게 보통선거제와 같은 진보적인 정책의 즉각적인 시행을 옹호하는 몇 가지 비밀 서한을 보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출판물이 경찰의 압수로부터 보호받을 것을 요청했다. 라살은 자신의 저서 ''Herr Basitat-Schulze''에서 보수적인 비스마르크와 공동의 대의를 이루려고 시도하면서 "각하께 이 작품이 자유주의자들과 전체 진보적 부르주아지를 완전히 파괴할 것임을 알려드려야 합니다."라고 선언했다. 라살은 비스마르크에게 사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책의 압수를 막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 책은 그 후 경찰의 간섭 없이 출판되었지만, 다른 문제에 몰두했던 비스마르크는 라살의 재회 요청을 거절했고,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직접적인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엘리 할레비는 훗날 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라살이 창립을 주도한 정당의 유일한 명시된 목적은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평등하고 보편적이며 직접적인 선거권을 얻는 것이었다.

2. 6. 사망

리기 칼트바트에서 라살은 헬레네 폰 되니게스라는 젊은 여성을 만났고, 1864년 여름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당시 제네바에 살고 있던 프로테스탄트 가정의 딸이었고,[6] 라살과의 관계를 원하지 않았다. 역사학자인 그녀의 아버지는 헬레네가 라살을 만나는 것을 막았고, 라살은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녀는 압력을 받은 듯, 이전에 약혼했던 왈라키아 출신의 이안쿠 라코비차를 선택하며 라살을 버렸다.[7]

라살은 헬레네의 아버지 폰 되니게스와 라코비차에게 결투 신청을 보냈고, 라코비차는 이를 받아들였다. 라살은 권총 사용 경험이 없었고, 연습할 시간은 하루뿐이었다. 제네바 교외인 카루주에서 8월 28일 아침 결투가 벌어졌다. 라살은 라코비차에게 복부를 맞았고, 3일 후인 8월 31일 사망했다.[7] 결투 후 라코비차는 병들어 헬레네 폰 되니게스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페르디난트 라살은 브로츠와프의 구 유대인 묘지에 묻혔다.
브레슬라우(현재는 브로츠와프) 구 유대인 묘지에 있는 라살의 묘

3. 사상

라살은 사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중시했으며,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아 국가를 도덕적 이상과 자유를 실현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의 자유 방임주의는 부도덕과 착취만을 야기한다고 비판하며, 이러한 자유 방임주의 국가를 "야경 국가"라고 칭하며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159]

라살은 노동자 계급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자 스스로 기업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가의 지원을 받는 "생산 조합" 설립을 통해 임금과 기업 이익을 일치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국가의 강력한 간섭을 위해서는 보통 선거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186][187][188]

1861년에 출판한 『기득권의 체계』에서는 특정 법제도는 특정 시점의 특정 민족 정신의 표현일 뿐이며, 권리는 전 국민의 보편 정신을 유일한 원천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보편 정신이 변화하면 노예제도, 부역, 조세, 세습 재산, 상속 등의 제도가 금지되더라도 획득권이 침해되었다고 할 수 없다고 보았다.[138] [139] 또한 법의 역사가 문화사적 진화를 거듭함에 따라 개인의 소유 범위는 점점 더 제한되고, 많은 대상이 사유재산의 틀 밖에 놓인다는 사회주의적 결론을 도출했다.[140][137]

1862년 봄, 프로이센 의회 해산 총선거 당시 라살은 두 번의 연설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더욱 구체화했다. 그는 "헌법 문제는 법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라고 주장하며, 국왕이 사실상의 권력을 쥐고 있는 한 자유주의적인 헌법은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156][157][158] 또한, 노동자 계급의 이념과 현대라는 역사적 시대의 특수한 관련성에 대해 연설하며, 자유 방임주의는 부도덕과 착취를 가져오므로 "야경 국가"와 같다고 비판했다. 그는 노동자 계급 전체의 개선을 도모하는 원리가 국가의 지배 원리가 되어야 하며, 이를 실현하는 수단은 보통 선거와 직접 선거라고 주장했다.[159][160]

1863년 3월 1일, 라살은 『공개 답변서』를 통해 노동 계급에게 진보당에서 벗어나 보통 선거를 기치로 한 독자적인 노동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동자의 자유로운 동맹과 국가의 지원에 의한 기업체 "생산 조합" 결성을 통해 "임금 철칙"에서 벗어나 노동자 계급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보았다.[183][185]

하지만, 『기득권의 체계』는 너무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마르크스는 전혀 읽으려 하지 않았고, 엥겔스는 "자연법에 대한 미신적 신앙"이라고 비판했다.[143]

3. 1. 철학적 배경

라살은 베를린 대학교에서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헤겔의 변증법과 유사한 부분이 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 연구를 수행했다.[16] 1857년에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을 출판하여 베를린 철학 학회의 총아가 되어 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16]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를 "모든 민족과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여겼으며,[16] 1862년 5월 연설에서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보내는 연설』을 "우리 민족이 소유한 가장 위대한 명예의 기념비 중 하나이며, 그 깊이와 힘에 있어서 모든 시대와 민족의 문학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모든 것들을 훨씬 능가한다"고 칭찬했다.[16]

3. 2. 국가관

마르크스와 그의 추종자들과는 달리, 라살은 국가가 기존의 계급 관계를 유지하는 기능을 가진 계급 기반의 권력 구조이며 미래의 계급 없는 사회에서 소멸될 운명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대신 라살은 국가를 독립적인 실체로 간주하며, 사회주의 프로그램 달성에 필수적인 정의의 도구로 여겼다.[91]

라살에 따르면, 헤겔에 따르면 국가는 도덕적 이상과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자유주의 부르주아의 자유 방임주의는 부도덕과 착취만을 가져온다. 이러한 자신의 이익만을 보전하려는 자유 방임주의 국가는 "야경 국가"이며 부적절하다고 했다.[159]

3. 3. 철의 임금 법칙

라살은 고전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르도가 처음 제시한, 장기적으로 임금 수준은 노동자의 생계 유지와 재생산에 필요한 최소 수준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지대 법칙에 따라 라살은 자신의 철의 임금 법칙을 만들었다. 라살은 임금 노동자의 자조적 조치는 실패할 운명이며, 국가의 재정적 지원으로 설립된 생산자 협동조합만이 노동자 삶의 경제적 향상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1] 이로부터 노동자의 정치적 행동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일시적인 임금 향상을 위해 노동 조합을 조직하는 것은 주요 투쟁에서 벗어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3. 4. 마르크스와의 관계

1848년 혁명 당시 마르크스와 라살은 친구였다. 혁명이 진압되자 라살은 투옥되었고, 마르크스는 독일을 떠났다.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1861년까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 사이 마르크스는 엥겔스의 영향을 받아 라살을 불신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라살의 따뜻한 편지에 답장을 하면서도,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라살을 "유대인 깜둥이 라살"이라고 부르며 반감을 드러냈다.[8] 라살은 적어도 1862년까지는 그들의 우정이 진실하다고 믿었다.[9] 프란츠 메링은 마르크스의 "라살에 대한 태도는 [...] 그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심리적 문제"라고 언급했다.[10]

1848년 혁명 지지에 대한 변호를 배심원 앞에서 해야 했을 때, 두 사람의 성격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는 간결하고 명료하게 자신의 입장을 전개한 반면, 라살은 감정적이고 화려한 표현을 사용하며 배심원이 아닌 군중에게 연설하는 듯했다고 평가했다.

이론적, 정치적 문제에서도 두 사람은 의견이 달랐다. 마르크스의 ''고타 강령 비판''은 독일 사회주의 정당 내 라살의 사상에 대한 반응으로 쓰여졌다. 라살은 독일 애국자였으며, 독일 통일을 추구하는 프로이센을 지지했다. 1864년 2월, 라살은 엥겔스에게 "나는 왕정이 사회주의적 왕정이 되기로 결심만 한다면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미래와 더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나는 열정적으로 그 깃발을 들고, 헌법 이론은 금방 쓰레기통에 처박힐 것이다."라고 썼다.[12] 게오르크 모리스 브란데스는 마르크스는 국제주의적인 반면, 라살은 국내 문제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평가했다.

3. 5. 비스마르크와의 관계

라살은 1863년 무렵부터 프로이센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비밀리에 회담을 가졌는데,[194] 이들은 진보당을 공통의 적으로 삼는다는 점과 "사회적 왕정", "칙임(欽定)"등을 논의했다.[194] 비스마르크는 라살에 대해 "지적이고 매우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고 평가했으며, 라살은 "군주주의자"라고 언급될 정도로 군주제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점들이 비스마르크와의 연계를 가능하게 했다. 다만,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비스마르크의 진술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4. 평가와 유산

페르디난트 라살은 피히테헤겔독일 관념론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하이네와 베르네를 통해 자유주의에서 사회주의 사상으로 이끌렸다.[250] 로렌츠 폰 슈타인의 저술과 마르크스엥겔스과학적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그는 국가 사회주의자가 되었다.[250] 22세의 젊은 나이에 3월 혁명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나, 혁명 실패 후에도 평생 혁명의 꿈을 추구했다.[251]

그는 사회주의 공화정 형태의 독일 통일 국가 건설을 이상으로 삼았지만, 헤겔의 영향으로 "국가는 논리적 전체 일체의 유기체"라고 보았다. 그래서 우선 독일 통일 국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252] "연방인가, 국민적 통일인가 하는 큰 대립에 비하면 군주정인가 공화정인가 하는 대립은 비교적 무의미하다"라고 말하며,[252] "군주는 모든 계급 투쟁과 당파 쟁의를 초월한 논리적 국가 의지의 전체 표현자"라며 군주제에 일정한 의미를 인정했다.[253] 빌헬름 1세를 중심으로 한 독일 통일을 추진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254]

이러한 군주제에 대한 유연한 생각은 비스마르크와의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 라살은 비스마르크와의 회담에서 "사회적 왕권"이나 "보통 선거의 칙령"과 같은 군주주의적인 요구를 했다. 비스마르크는 훗날 독일 제국 의회에서 "라살은 공화주의자가 아니라 군주주의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라살은 기본적으로 공화주의자였으며, "사회적 왕권"은 과도적인 것으로 주장했을 뿐이었다.[255] 그는 절대 군주제와 공화주의는 이해할 수 있지만, 입헌 군주제는 기형적이고 허위라고 생각했다.[256]

라살은 권력욕과 허영심이 강했고, 그의 노동 운동의 독재적인 지도는 거기에 기인한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나도 노동자 중 한 명"이라는 식의 아첨을 싫어하여 노동자들에게 항상 구세주처럼 대했다. 노동자 집회에는 정장을 하고 참석하여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했으며,[257] 항상 청중을 의식하여 연극적인 면이 강했다. 1864년 6월 27일 뒤셀도르프 법정에서는 연미복을 착용한 채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나타나 극적인 연설을 했다. 파울 린다우는 "마치 배우 같다"라고 평했다. 지식인들은 라살의 이러한 점을 싫어했지만, 대중들에게는 인기를 얻는 원인이 되었다.[258]

그는 화술이 능숙했으며, 비스마르크는 "저렇게 쾌활한 사람은 없다. 아무리 오래 이야기해도 지겹지 않았다", "우리의 회담은 수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 후로도 계속, 그것이 끝난 것이 아쉬웠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만난 사람 중에서 라살은 "가장 지적"이라고 평가했다.[259][260][261]

라살은 결심한 일에 대한 열정과 집중력이 대단했다. 하츠펠트 백작 부인의 이혼 소송을 위해 8년의 시간을 소비하고, 법학을 공부해 『기득권의 체계』라는 법학 저서를 쓸 정도였다.[262] 하츠펠트 백작 부인은 "하려고 하는 모든 일에 전력을 다했다. 한 점에 모든 존재를 건 그 집중력이야말로 큰 사업에서 그를 매우 위대하게 만들고, 훌륭한 성공을 거두게 했다"라고 말했다.[263]

마르크스처럼 프로이센 유대인이었지만, 라살은 봉건적인 프로이센 동부에서 태어나 유대인 차별 속에서 자랐다. 그의 반항심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길러졌다. 그러나 그는 압제자 이상으로 압제자에게 맞서지 않는 유대인의 민족성에 질려, 말년에는 유대인을 혐오했다. "내가 혐오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문인과 유대인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 둘 모두에 속해 있다"라고 말했다.[264][43] 한편, 그의 이상주의는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265]

라살의 키는 168cm였고, 머리카락은 곱슬머리의 밤색, 눈은 짙은 청색, 이마가 넓고 코는 긴 편이었다고 한다.[266]

독일 노동 운동의 선구자: 칼 마르크스(중앙), 아우구스트 베벨(좌상),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우상), (좌하), 라살(우하)




일반적으로 라살은 피히테나 로드베르투스의 국가 사회주의(Staatssozialismus) 계보를 잇는 인물로 평가된다.[268] 그러나 국가 사회주의는 사회를 국가에 예속시키지만, 라살은 노동 계급의 지배로 사회와 국가는 동일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국가 사회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269]

독일 사회주의 운동은 라살의 『공개 답변서』와 전독일 노동자 동맹 결성으로 흥성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1959년 국민 정당이 될 때까지 카를 마르크스를 사상적 아버지, 라살을 운동적 아버지로 삼았다.[270]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대신 라살의 국가 사회주의가 주목받아, “라살로 돌아가라”는 탈마르크스 주장이 나왔다.[271] 민족 사회주의 정권에서는 헤겔 정신의 부흥이 있었고, 국가 사회주의도 재평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72]

제2차 세계 대전 후, 세계는 마르크스주의의 동구권과 자본주의의 서구권으로 분열되어 라살의 국가 사회주의는 주목받지 못했다.[273] 그러나 서구권에서는 마르크스 계열이 아닌 사회주의자로서 재조명되었다.[274] 1963년 독일 사회민주당 창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독일 여론은 친라살, 반마르크스적이었다고 한다.[275] 서독 역사학자들의 라살 긍정 평가는 동독 역사학자들의 반박을 받기도 했다.[276]

라살은 이론가로서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경제 사상에서는 마르크스에게 “무뚝뚝한 차용”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완벽한 절충주의자”라는 평가도 있었다.[277] 프란츠 메링은 라살이 경제학에서 마르크스나 엥겔스에 필적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278] 철학에서도 헤겔 철학에 의존한다는 비판이 있었다.[279] 로베르트 미헬스는 라살이 이론가보다는 실천가로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280]

그러나 모리 사부로는 라살이 헤겔 철학을 비판하고, 칸트적 합리주의에 대한 역사주의적 입장을 취했으며, 게오르크 예리네크가 주목한 『사실적 권력 관계』 개념 등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했다고 옹호한다. 특히 국가와 노동을 결합한 '노동 계급의 국가 이념'은 루돌프 슈탐러의 '변화하는 내용의 자연법'의 원형이라고 주장한다.[281]

라살은 실천가로서 독일 노동 운동을 15년의 잠에서 깨웠다는 평가를 받는다.[282] 이누키 마사미치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아닌 라살의 『공개 답변서』에서 탄생했다는 점을 강조한다.[283] 카와이 에이지로는 라살이 대중을 사로잡는 매력, 열정, 웅변, 지모, 사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평가한다.[284]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라살이 자유주의 부르주아를 적대시하고 비스마르크에게 아첨했다고 비판한다.[285] 에가미 테루히코는 라살이 봉건적인 프로이센에서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운동을 지도해야 했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286] 프란츠 메링은 라살이 독일 통일이 왕조적 변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예견하고, 노동자당이 그 변혁을 추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옹호한다.[288],[289]

또한 라살이 보통선거를 만능으로 여기고, 국가 보조에 의한 생산 조합 구상을 제시한 것은 종파(宗派)적인 노동 운동 지도였다는 비판도 있다.[290] 그러나 메링은 라살이 보통선거를 마법의 지팡이로 보지 않았고, 생산 조합을 사회화의 단초로 보았으며, 동료를 얻지 못해 개인 숭배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반론한다.[291],[292],[293],[294],[295]

일본 메이지 시대에 라살은 사회주의자들의 스타였다.[297] 幸徳秋水(코토쿠 슈스이)는 라살의 전기를 저술하고, 吉田松陰(요시다 쇼인)과의 유사성을 주장하며 높이 평가했다.[298][299] 児玉花外(코다마 카가이)는 라살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지었고,[300] 片山潜(가타야마 센)도 라살의 국가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301][302]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주류가 되면서 라살은 이단시되었다.[303]

반면, 반마르크스주의자인 小泉信三(고이즈미 신조)와 河合栄治郎(카와이 에이지로)는 라살에 대한 평전을 썼다.[304] 고이즈미는 라살이 마르크스의 결함을 보완했다고 주장했고,[305] 카와이는 라살이 사회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였다는 점을 강조했다.[306] 이들과 林健太郎 (역사학자)가 전전 주요 라살 연구자였다.[307] 전후에는 猪木正道(이누키 마사미치)와 江上照彦(에가미 테루히코) 등이 연구를 계승했다.[308]

4. 1. 긍정적 평가

Ferdinand Lassallede는 독일 노동 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독일 최초의 대중적 사회주의 정당을 창립하여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자각과 조직화에 크게 기여했다.[270] 그의 사상과 활동은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초기 강령과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270]

Lassallede카를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며 사회와 국가, 개인의 관계에 대한 독자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이러한 그의 고민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269]

Lassallede피히테나 로드베르투스의 국가 사회주의(Staatssozialismus)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의 사상이 국가 사회주의와는 다르다는 의견도 존재한다.[268][269] 그는 노동 계급의 지배를 통해 사회와 국가가 동일시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269]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1959년까지 마르크스를 "이론상의 아버지", 라살을 "운동상의 아버지"로 존경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270]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 대신 라살의 국가 사회주의가 주목받기도 했다.[271]

프란츠 메링은 라살의 노동 운동 지도가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것이었다고 옹호하며, 라살이 보통선거와 생산 조합을 통해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추구했다고 평가했다.[291][292][294]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에 라살이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코토쿠 슈스이는 라살을 요시다 쇼인과 비교하며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298][299]

4. 2. 비판적 평가

라살은 39세의 젊은 나이에 결투로 사망하여 독일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기여는 크지 않다고 평가받는다. 리처드 T. 엘리는 라살을 혁신가라기보다는 다른 사상가들의 아이디어를 대중화한 인물로 평가했다.[15]

라살의 저술은 사회민주주의 이론을 실질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로도베르투스(Rodbertus)와 마르크스(Marx)의 사상을 노동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데 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라살은 리카르도의 임금 법칙을 "철의 임금 법칙(iron law of wages)"이라고 명명하고, 노동자들에게 임금제도의 폐지를 통해서만 이 법칙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못했다.[15]

라살은 피히테나 로드베르투스의 국가 사회주의(Staatssozialismus)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이견도 존재한다.[268] 그는 사회주의자이면서도 국가를 중시했고, 군주제에 대해서도 유연한 태도를 보였으며, 이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의 연계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권력욕과 허영심은 독재적인 노동 운동 지도로 이어졌다는 비판을 받는다.[269]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1959년까지 마르크스를 "이론상의 아버지", 라살을 "운동상의 아버지"로 여겼다.[270] 그러나 이론가로서 라살은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마르크스는 라살의 저술을 자신의 저서를 "무뚝뚝하게 차용"한 것이라고 비판했고, 카를 디히는 라살을 "완벽한 절충주의자"라고 평가했다.[277] 프란츠 메링조차도 라살이 철학 및 법학에서는 뛰어났지만, 경제학에서는 마르크스나 엥겔스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278]

철학 분야에서도 라살의 이론은 헤겔 철학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279] 테오발트 치글러는 라살의 의의가 개별 사상이 아닌 실천에 있다고 평가했고, 로베르트 미헬스는 라살이 이론가보다는 실천가로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280]

하지만 모리 사부로는 라살이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과 칸트적 합리주의에 대한 역사주의적 입장, 그리고 게오르크 예리네크가 주목한 '사실적 권력 관계' 개념 등을 통해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했다고 옹호한다. 특히 국가와 노동을 결합한 '노동 계급의 국가 이념'은 루돌프 슈탐러의 '변화하는 내용의 자연법'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281]

실천가로서 라살은 독일 노동 운동을 15년의 잠에서 깨웠다는 평가를 받는다.[282] 이누키 마사미치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아닌 라살의 『공개 답변서』에서 탄생했다는 점을 강조한다.[283] 카와이 에이지로는 라살이 대중을 사로잡는 인격적 매력, 열정, 웅변, 지모, 사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평가한다.[284]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라살이 자유주의 부르주아를 적대시하고 비스마르크와 같은 반동 보수에 아첨했다고 비판한다.[285] 이에 대해 에가미 테루히코는 라살이 봉건주의적인 프로이센에서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운동을 지도해야 했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286] 프란츠 메링은 라살이 독일 통일이 왕조적 변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견하고, 노동자당이 그 변혁을 추진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옹호한다.[288],[289]

또한 라살이 보통선거를 만능으로 여기고, 국가 보조에 의한 생산 조합 구상을 제시한 것은 종파(宗派)적인 노동 운동 지도였다는 비판도 있다.[290] 그러나 메링은 라살이 보통선거를 마법의 지팡이로 보지 않았고, 생산 조합을 사회화의 단초로 보았으며, 동료를 얻지 못해 개인 숭배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반론한다.[291],[292],[293],[294],[295]

4. 3. 한국 사회에 대한 시사점

페르디난트 라살의 사상과 활동은 19세기 독일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넘어,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조직화와 역할, 국가와 사회, 개인 간의 바람직한 관계 모색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 라살은 당시 프로이센의 억압적인 정치 환경 속에서도 보통 선거권 쟁취와 사회 개혁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다. 이는 권위주의적 질서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 사회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204]
  •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조직화와 역할: 라살은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정치 세력화되어야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전독일 노동자 동맹을 결성하여 노동자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고자 했다. 이는 노동 운동이 활발한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203]
  • 국가와 사회, 개인 간의 바람직한 관계 모색: 라살은 국가를 단순한 야경국가가 아니라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주체로 보았다. 그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생산 조합을 통해 노동자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가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 중인 한국 사회에서, 국가와 사회, 개인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정립하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215]


특히, 일본 사회주의 맹아기(黎明期)인 메이지(明治) 시대 후기에 라살은 일본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幸徳秋水(코토쿠 슈스이)는 라살의 전기를 저술하고, 吉田松陰(요시다 쇼인)과의 유사성을 주장하며 라살을 높이 평가했다.[298] 児玉花外(코다마 카가이)는 라살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지었으며,[300] 片山潜(가타야마 센)도 라살의 국가 사회주의에 깊이 경도되었다.[301] 이러한 사실은 라살의 사상이 한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초기 사회주의 운동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비록 러시아 혁명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주류가 되면서 라살은 잠시 잊혔지만, 그의 사상은 여전히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현대 한국 사회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30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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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서적 江上(1972)
[162] 서적 江上(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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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서적 カール・マルクスの生涯 朝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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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서적 小泉(1968) 1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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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서적 メーリング(1969)下巻
[185] 서적 メーリング(1969)下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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