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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아 플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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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밀리아 플라테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세기 초 러시아 제국에 대항한 11월 봉기에 참여한 여성 혁명가이다. 그녀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지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봉기를 위해 스스로 군대를 조직하고 지휘했으며, 문학과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그녀의 용감한 행적은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시 "대령의 죽음"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폐, 거리, 선박 등의 이름으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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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아 플라테르
기본 정보
에밀리아 플라테르, 익명의 19세기 판화
에밀리아 플라테르, 익명의 19세기 판화
이름에밀리아 플라테르
원어 이름 (폴란드어)Emilia Plater
원어 이름 (리투아니아어)Emilija Pliaterytė (에밀리야 플랴테리테)
신상 정보
출생일1806년 11월 13일
출생지빌뉴스, 러시아 제국
사망일1831년 12월 23일
사망지유스티나바스 장원, 콩그레스 폴란드
매장지캅치아미에스티스
가문플라테르 가문
아버지프란치셰크 크사베리 플라테르
어머니안나 폰 데어 몰 (Anna z Mohlów)
군사 정보
충성폴란드-리투아니아 반군
복무 기간1831년
계급대위
참전 전투11월 봉기
부대리투아니아 25 보병 연대

2. 생애

에밀리아 플라테르는 11월 봉기 당시 리투아니아 지역에서 반러시아 봉기를 주도한 인물이다. 182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문화유산을 탐방하는 여행을 떠났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곧 집으로 돌아왔다. 러시아 제국에 대항해 일어난 11월 봉기 초기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고, 러시아의 침략에 대항하는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1831년 3월 25일, 11월 혁명에 동참을 선언하는 에밀리아 플라테르의 성명서


이에 에밀리아 플라테르는 리투아니아에서 처음으로 그러한 세력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머리를 자르고, 특별히 맞춤 제작한 군복을 입은 뒤, 의용군을 조직했다. 그녀의 군대는 대략 280명의 보병, 60명의 기병과 으로 무장한 수백 명의 농민군으로 이루어졌다. 다우가프필스를 통해 리투아니아에 들어섰으며, 1831년 4월에는 자라사이 마을을 차지하였다. 그녀는 다우가프필스로 돌아오려 했으나, 점령지 일대를 정찰한 후 다른 도시들은 워낙 강한 주둔군이 있어서 현재의 작은 군단으로는 공격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계획을 포기하였다.

농민들을 이끄는 에밀리아 플라테르, 1831년


그 후 사모기티아로 돌아온 뒤, 파네베지스로 가, 카로우 자와스키가 이끄는 군단과 합병하였다. 얼마 후 데지데리 흐와포브스키 장군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전 대공국에서 싸우는 모든 군단의 통제권을 쥐었다.

흐와포브스키는 에밀리아 플라테르에게 그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완전히 해방될 때까지는 군복을 벗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결정은 받아들여져 폴란드리투아니아인 보병대의 부대장이 되었다. 뛰어난 전투 실력으로, 당시 여자에게 주어진 가장 높은 계급인 대장으로 승급되었다.

폴란드 군대가 러시아에게 패배한 이후, 데지데리 흐와포브스키 장군은 국경을 넘어 프로이센으로 가려 하였다. 에밀리아 플라테르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바르샤바로 들어가 전투를 계속하려 했으나, 중병에 걸려 1831년 12월 23일 사망하였다. 그녀의 시신은 라즈디야이 근처 작은 마을에 묻혔다.

2. 1. 유년 시절

에밀리아 플라테르는 빌뉴스에서 리보니아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조상은 베스트팔렌 출신이었으나, 가문은 철저히 폴란드화되었다. 15세기에 가문의 많은 구성원이 리보니아로 이주했고,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빌뉴스가 수도)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폴란드인, 폴란드-리투아니아인 또는 리투아니아인으로 묘사된다.

그녀의 부모인 프란치셰크 크사베리 플라테르와 안나 폰 데어 모홀(안나 z 모흘로브)은 1815년 그녀가 9살 때 이혼했다. 외동딸이었던 그녀는 먼 친척인 미하우 플라테르-지베르크와 이자벨라 헤레나 시베르크 주 비슐링에 의해 다우가프필스(드지나) 근처 Līksna(인플란티, 현재 라트비아)에 있는 그들의 가족 영지에서 양육되었다.

플라테르의 가정교사에는 다우가프필스 요새에서 일한 빌헬름 폰 달비크 대위와 군사 기술자가 포함되었다. 교육을 잘 받은 플라테르는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와 요제프 포니아토프스키 공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도록 길러졌다. 그녀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프리드리히 실러에 매료되었으며, 그들의 작품을 원어로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폴란드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환경에서 자랐으며, 그녀의 문학적 영웅에는 반다 공주와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그라지나''가 있었다. 그녀는 또한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에 맞선 라스카리나 부불리나, 폴란드 여성 투사 안나 도로타 크르자노프스카, 그리고 잔 다르크도 존경했다. 이러한 관심사와 함께 19세기 초 귀족 가문 출신 소녀들에게는 흔치 않은 승마사격에 대한 어린 시절의 관심도 있었다. 그녀는 또한 루테니아인과 벨라루스의 민속 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필라레트 협회와 교류하고 친구를 맺었다.

1823년, 그녀의 사촌 중 한 명이 5월 3일 헌법을 기념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아 강제로 러시아 제국군에 징집되었다. 이 사건은 그녀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으며, 그녀의 친 폴란드 및 반 러시아 태도를 촉진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829년, 플라테르는 역사적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전역을 여행하며 바르샤바크라쿠프를 방문했고, 라쉰 전투의 격전지를 방문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1년 후 사망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재혼하여 딸을 만나는 것조차 거부했다.

2. 2. 11월 봉기 참여

1829년, 에밀리아 플라테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문화유산을 탐방하는 여행을 떠났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곧 집으로 돌아왔다. 러시아 제국에 대항해 일어난 11월 혁명 초기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고, 러시아의 침략에 대항하는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에밀리아 플라테르는 리투아니아에서 처음으로 그러한 세력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머리를 자르고, 특별히 맞춤 제작한 군복을 입은 뒤, 의용군을 조직했다. 그녀의 군대는 대략 280명의 보병, 60명의 기병과 으로 무장한 수백 명의 농민군으로 이루어졌다. 1831년 3월 25일, 안타자베 영지에서 작성된 그녀의 메모에서 플라테르는 봉기에 참여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생각이며 평생 전쟁에 참여하기를 바랐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사촌 체자리 플라테르를 찾아 두세토스로 가서 3월 29일 미사 후 열정적인 연설을 했다. 다음 날, 그녀의 부대는 다우가일라이의 역을 공격하여 부대를 위한 말을 확보했다. 4월 4일, 그녀는 현지 봉기군에 합류하는 것을 나타내는 선언서를 작성했다.

다우가프필스를 통해 리투아니아에 들어선 그녀는, 1831년 4월 자라사이 마을을 차지하였다. 그녀의 군대는 다우가프필스로 돌아오려 했으나, 점령지 일대를 정찰한 후 다른 도시들은 워낙 강한 주둔군이 있어서 현재의 작은 군단으로는 공격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계획을 포기하였다. 같은 날, 그녀의 부대가 자라사이 마을을 점령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역사가들은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 후 사모기티아로 돌아온 뒤, 파네베지스로 가, 카로우 자와스키가 이끄는 군단과 합병하였다. 얼마 후 데지데리 흐와포브스키 장군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전 대공국에서 싸우는 모든 군단을 통제하게 되었다. 5월 4일, 그녀는 전투에 참전했고, 그 직후 마이시아가라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흐와포브스키는 에밀리아 플라테르에게 그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완전히 해방될 때까지는 군복을 벗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결정은 받아들여져 그녀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인 보병대의 부대장이 되었다. 그녀의 전투 실력은 다른 이들과 차별화되어, 곧 대장 계급으로 승급되었는데, 이는 당시 여자에게 주어진 가장 높은 계급이었다. 그녀의 동료 마리아 라샤노비치는 포루치크 (중위)로 진급했다.

폴란드 군대가 러시아에게 패배한 이후, 데지데리 흐와포브스키 장군은 국경을 넘어 프로이센으로 가서 잠시 숨어 있으려고 하였다. 에밀리아 플라테르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대신 바르샤바로 들어가 전투를 이어나갔다.

2. 3. 봉기 실패와 죽음

흘라포프스키 장군은 플라테르에게 전투 중단과 귀가를 권유했지만, 그녀는 조국이 완전히 해방될 때까지 군복을 벗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리투아니아 제25 보병 연대 제1 중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당시 여성에게 주어진 최고 계급인 대위로 진급했다. 마리아 라샤노비치는 포루치크(중위)로 진급했다. 6월 말 반란군이 후퇴하기 전까지 카우나스에서 시간을 보냈다. 7월 8일, 반란군은 샤울랴이를 점령하려 했지만 러시아군에게 패배했고, 플라테르 부대는 물자 수송대를 보호하다가 공격을 받아 반란군 약 300명이 사망하고 물자는 러시아군에게 점령되었다.

다음 날, 흘라포프스키 장군은 프로이센 국경을 넘어 억류되기로 결정했지만, 플라테르는 이 결정에 격렬하게 비판하며 명령에 불복, 바르샤바로 가서 전투를 계속하기로 했다. 그러나 주력 부대와 헤어진 후, 마리아 라샤노비치, 사촌 체자리 플라테르와 함께 심각한 병에 걸렸다. 10월에 봉기가 끝났고, 많은 전기 작가들은 그 슬픔이 그녀의 병을 악화시켜 1831년 12월 23일 아브라마비치 가문의 유스티나바스 영지(현재 )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라즈디야이 근처 캅치아미에스티스에 묻혔으며, 봉기 실패 후 그녀의 재산은 러시아 당국에 몰수되었다.

스테판 키에니에비츠는 폴란드 인명 사전에서 그녀의 많은 업적들이 제대로 기록되지 않아 전설과 사실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부대 지휘 여부는 불확실하며, 제25 연대 중대장 역할은 명예직에 가까웠다고 본다. 프라스타보니아이에서 피로로 기절했고, 카우나스에서 구조되었으며, 샤울랴이에서는 동료들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최전선 뒤에 머물게 했다.

3. 유산

에밀리아 플라테르는 11월 봉기의 상징적인 인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등 여러 나라에서 그녀의 용기를 기리고 있다. 그녀의 사후, 이야기는 널리 퍼져나가 다양한 예술 작품의 주제가 되었으며, 여러 기념물과 지폐, 거리 이름 등에 그녀의 이름이 사용되었다.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시 〈대령의 죽음〉을 비롯하여, 게오르크 뷔히너 등 많은 작가들이 그녀의 삶을 문학 작품으로 남겼다. 또한, 드베리아를 포함한 당대 화가들은 그녀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에는 그녀의 얼굴이 20 즈워티 지폐에 등장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여성 부대가 창설되기도 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여러 도시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으며, 카프치아미에스티스에는 그녀를 기리는 기념 박물관과 기념비가 세워졌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여러 학교들이 그녀를 후원자로 삼고 있다.

3. 1. 문학과 예술

그녀의 죽음은 얼마 안 가 널리 알려졌으며 에밀리아 플라테르는 11월 봉기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전투를 치르는 소녀의 상징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여러 나라에서 유명해졌다.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그의 시 〈대령의 죽음〉(''Śmierć pułkownika'')에서 그녀를 묘사하며 이름을 불후하게 만들었다.[4] 이 시에서 묘사된 그녀의 죽음은 실제로는 모두 허구이며 그녀의 실제 삶과 일치하는 부분은 일부뿐이다. 이 시는 플라테르를 대위에서 대령으로 승진시키고 봉기의 지도자로 칭한다. 미츠키에비치는 또한 그녀의 인격과 기술을 이상화하여, 병사들이 숭배하는 이상적인 지휘관으로 묘사했다.

에밀리아가 그려진 폴란드의 20 즈워티 지폐 (나치 독일이 점령했을 때의 1940년)


에밀리아가 그려진 폴란드의 50즈워티 지폐 (나치 독일이 점령했을 때의 1940년)


그녀의 삶을 기반으로 한 문학 작품들은 이외에도 많았는데, 폴란드 망명자나 외국인 등 외국 작품도 많았다. 게오르크 뷔히너 등이 그런 작가들의 한 예이다. 폴란드 문학에서 플라테르의 삶은 Wacław Gąsiorowskipl의 소설, 7편의 연극, 그리고 Antoni Edward Odyniec와 Maria Konopnicka를 포함한 여러 시에 등장한다.

에밀리아 플라테르를 기리는 리투아니아의 기념 리타스 화폐


그녀는 또한 Hippolyte Bellangé, Achille Deveria, Philipp Veit, Wojciech Kossak을 포함한 당대의 여러 예술가들의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그녀의 얼굴은 폴란드 제2공화국의 20 즈워티 지폐와 50즈워티 지폐에 그려져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의 보병대에 속한 한 여성 보급 팀의 이름에도 그녀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1959년에는 폴란드 해양 항로를 다니는 배가 그녀의 이름을 본따 M/S 에밀리아 플라테르라는 이름이 지어졌었다. 또 폴란드의 큰 도시 대부분에는 그녀의 이름을 붙인 거리가 존재한다.

폴란드 바르샤바금융가 "에밀리아 플라테르 거리"

3. 2. 기념과 추모

그녀의 죽음은 얼마 안 가 널리 알려졌으며 에밀리아 플라테르는 혁명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전투를 치르는 소녀의 상징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여러 나라에서 유명해졌다.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그의 시 〈장군의 죽음〉(''Śmierć pułkownika'')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 시에서 묘사된 그녀의 죽음은 실제로는 모두 허구이며 그녀의 실제 삶과 일치하는 부분은 일부뿐이다.[4] 이 시는 플라테르를 대위에서 대령으로 승진시키고 봉기의 지도자로 칭하며, 병사들이 숭배하는 이상적인 지휘관으로 묘사했다.

그녀의 삶을 기반으로 한 문학 작품들은 이외에도 많았는데, 폴란드 이민자나 외국인 등 외국 작품도 많았다. 게오르크 뷔히너 등이 그런 작가들의 한 예이다.

리투아니아에 있는 에밀리아 플라테르 기념비


그녀는 드베리아 등 당대의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1842년 J. K. 살로몬스키는 뉴욕에서, ''에밀리아 플라테르, 폴란드의 영웅; 에밀리아 플라테르 백작 부인의 삶'' 이란 제목으로 그녀의 짧은 전기를 출판하였다.

그녀의 얼굴은 폴란드의 20 즈워티 지폐에 그려져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의 보병대에 속한 한 여성 보급 팀의 이름에도 그녀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1959년에는 폴란드 해양 항로를 다니는 배가 그녀의 이름을 본따 M/S 에밀리아 플라테르라는 이름이 지어졌었다. 또 폴란드의 큰 도시 대부분에는 그녀의 이름을 붙인 거리가 있다. 바르샤바의 금융가 "에밀리아 플라테르 거리"는 을 능가하는 중동부 유럽 최대 규모의 금융가로, 바르샤바 중앙역 옆을 지나고 있다.

플라테르에 관한 첫 번째 시는 1831년 6월 Konstanty Gaszyński|콘스탄티 가신스키pl에 의해 쓰여졌다. 그녀의 삶과 죽음은 폴란드 언론에 의해 널리 알려졌고, 이는 그녀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소녀 전사의 이미지는 인기를 얻어 봉기의 상징이 되었다.

Kapčiamiestis에는 그녀를 기리는 작은 기념 박물관이 1984년에 개관되었고, 조각가 Antanas Ambrulevičius|안타나스 암브룰레비치우스lt의 플라테르 기념비가 1999년에 세워졌다.

에밀리아 플라테르는 폴란드의 14개 학교와 리투아니아의 여러 학교의 후원자이다.

에밀리아 플라테르를 기념하는 예술 및 역사 전시회가 벨라루스에서 열리고 있지만, 그녀의 인물은 루카셴코 정권의 공식적인 국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대체로 무시되고 있다.

참조

[1] 서적 Women, Communism, and Industrialization in Postwar Poland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06-21
[2] 간행물 Apocalyptic Feminism: Adam Mickiewicz and Margaret Fuller https://www.jstor.or[...] 2009
[3] 웹사이트 Эмилия Плятер в исторической памяти литовцев https://www.lituanis[...] 2018
[4] 서적 Wybór poezji http://worldcat.org/[...] Wydawnictwo Bauer 2020
[5] 웹사이트 Banknot 50 zł z 1 marca 1940 {{!}} Banknoty Polskie http://banknotypolsk[...]
[6] 문서 Taisiya Sukhotskaya. EMILIA PLATER’S FIGURE IN THE BELARUSIAN HISTORY AND CULTURE http://icbs.palityka[...] materials of the 5th Congress of Belarusian Studies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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