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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낫은 농업, 의식, 상징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도구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신석기 시대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농업 혁명에 기여했다. 낫은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에도 널리 사용되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로 제작된 낫이 발견되었다. 또한, 드루이드교 의식, 아메리카 원주민의 풀 베기, 네팔의 일상생활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낫이 활용되었다. 낫은 공산주의 상징, 저승사자의 상징으로도 사용되며, 헝거포드 가문의 문장이기도 하다. 현대에는 베깅 후크와 같은 낫이 사용되었으며, 한국에서도 낫은 농업 도구로 널리 사용되었다.

2. 역사

2. 1. 신석기 이전

메소포타미아에서 낫의 발달은 신석기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스라엘 주변 유적지에서 기원전 18000년~8000년의 구석기 후기 시대(Epipaleolithic era)로 거슬러 올라가는 다량의 낫날이 발굴되었다.[1] 요르단 와디 지클랍(Wadi Ziqlab)의 정식 발굴 조사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초기 낫날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유물은 길이가 약 10~20cm였으며, 톱니 모양의 날카로운 가장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7000년경의 초기 낫, 흑요석과 수지, 타후니안 문화, 나할 헤마르 동굴, 현재 이스라엘 박물관 소장.


이러한 복잡한 '이빨 모양' 디자인은 발견된 다른 유물들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설계 및 제작 기술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에 발견된 낫날은 흑요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직선형으로 현대의 곡선형 디자인보다 톱질하는 동작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낫에서 나온 흑요석 조각들이 카르멜 산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약 1만 년 전 그 지역에서 곡물을 수확했음을 시사한다.[2]

2. 2. 신석기 시대



낫은 농업과 곡물 기반 생활 방식으로의 전환을 돕는 도구로서 농업 혁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1] 현재 낫의 사용이 직접적으로 근동 야생 풀의 재배로 이어졌다는 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1] 원시적인 재배 하에서 야생 곡물의 재배 속도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수확에 낫을 사용하는 것이 초기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이 지역의 비교적 짧은 재배 기간과 신석기 시대 후기에 곡물의 중요한 역할은 다른 도구보다 낫의 설계 및 제작에 더 많은 투자를 하도록 만들었다.[2] 낫의 치수에 대한 표준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교체 또는 수리가 더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2] 곡물은 적절한 시기에 한 높이에서 수확되어 다음 높이가 적절한 시기에 수확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2] 낫은 곡물 수확에 더 효율적인 방법을 제공했고 초기 농업의 발전을 크게 가속화했다.[3]

2. 3. 청동기 시대

낫은 청동기 시대 근동유럽 모두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유럽의 우른필드 문화 유적지(예: 프랑클레벤 유물 매장지)에서 발견된 많은 낫들은 이 유물에 상징적 또는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었음을 시사한다.

고고학 용어에서 청동기 시대의 낫은 손잡이를 부착하는 방법에 따라 분류된다. 예를 들어, 손잡이 꾸미개 낫(Knopfsichelde)은 칼날 바닥에 돌출된 손잡이 꾸미개가 있어 칼날을 손잡이에 고정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4]

2. 4. 철기 시대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의 철낫은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의 『박물지(Natural History)』에 따르면, 드루이드(Druid)들의 참나무와 겨우살이 의식에서 낫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흰 옷을 입은 사제가 나무에 올라가 황금 낫으로 겨우살이를 베어내고, 흰 옷으로 받았으며, 희생제물을 바치고 신에게 기도를 했다. 그들은 겨우살이를 마시면 불임인 동물에게 생식력을 주고 모든 독의 해독제가 된다고 믿었다.

플리니우스가 이 이야기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 때문에 현대 드루이드교(Druidry)(네오드루이드)의 일부는 낫을 의식 도구로 채택했다.

2. 5. 아메리카 대륙

맨체스터 박물관에 전시된 콩고의 낫(트럼바시)(왼쪽)과 투척용 칼 모조품(오른쪽)


북아메리카 남서부에서는 고유한 디자인의 원주민 낫이 발견되었다. 코디악 섬 주민들은 풀을 베는 데 "날카롭게 간 동물 어깨뼈로 만든 낫"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다.[6] 오늘날 애리조나주와 뉴멕시코주에서 발견된 유물은 산양 뿔로 만든 곡선형 도구와 유사하다. 캐도 낫(Caddo Sickle)처럼 사슴 아래턱뼈로 만든 낫이 발견된 유적지도 있다. 초기 원주민들의 기록에는 이러한 낫을 풀을 베는 데 사용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도구들은 손잡이 끝에서부터 끝까지 13-16인치 정도의 길이였다. 애리조나 동부의 다른 여러 발굴 현장에서도 비슷한 모양의 나무 낫이 발견되었다. 도구의 손잡이는 도구를 어떻게 잡았는지를 보여주는데, 도구 안쪽의 절단면은 곡물을 모으는 표면으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6]

낫은 거친 도구로 경사면을 긁어서 날을 갈았으며, 이 작업으로 인해 발견된 유물에는 흔적이 남아 있다. 오랫동안 사용한 후 날이 무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날을 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날은 매우 광택이 나는데, 이는 풀을 베는 데 사용되었다는 증거이다. 풀을 베어 모은 후에는 매트와 침구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했다.[6] 낫은 일반적으로 풀을 베고 모으는 작업을 한 번에 할 수 있도록 편리함을 제공했다. 현대에는 남아메리카에서 쌀을 수확하는 도구로 낫을 사용하고 있다. 낫으로 벼 이삭을 수확하여 햇볕에 말린다.[7]

2. 6. 네팔

샤프타리(Saptari)에서 '하시야'(낫)를 들고 있는 네팔 마을 여성


하시야(Hasiya) 또는 아시(Aasi)라고 불리는 낫은 네팔에서 부엌과 밭에서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매우 흔하다.[8] 네팔의 많은 마을에서는 음식 준비 중 채소를 자르는 데 사용된다. 나무로 만든 하시야의 손잡이는 발가락으로 눌러 잡고, 곡선을 반대로 하여 채소를 흔들면서 양손으로 채소를 자를 수 있다. 집 밖에서는 수확에 사용된다.

하시야는 전통적으로 숯을 사용하는 대장간에서 가죽 풀무를 이용하여 공기를 불어넣어 지역 대장장이들이 만들었다. 하시야를 갈는 것은 매끄러운 바위에 날을 문지르거나 대장장이에게 가져가서 한다. 하시야 갈기는 일반적으로 수확철 초기에 이루어진다.

더 큰 하시야는 쿠르파(Khurpa) 또는 쿠르파(Khoorpa)라고 불리는데, 곡선이 덜 두드러지고 훨씬 무겁고 나뭇잎이 달린 나무 가지(사료용), 고기 자르기 등에 사용된다. 유명한 네팔 쿠크리(Khukuri) 또한 곡선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일종의 낫이다.

날카롭고 맨 하시야나 쿠르파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그래서 네팔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쿠르페토(Khurpeto)"라고 불리는 덮개/홀더를 만들었다(네팔어로 쿠르파 홀더라는 뜻). 하시야의 날을 끼울 수 있을 만큼 큰 구멍이 있는 간단한 나무 조각이거나, 식물로 만든 끈("하테우리(hatteuri)")으로 허리에 둘러맬 수 있는 정교하게 조각된 둥근 나무 조각일 수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하테우리 대신 면, 황마 또는 천 끈을 많이 사용하는데, 하테우리는 구하기 쉽지 않다.

3. 낫의 종류와 형태

톱니 모양 날을 가진 낫의 기원은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부싯돌 조각들을 나무나 뼈로 만든 "날 몸체"에 부착했다. (잘 기록된 후기 청동기 시대 표본의 대부분은 매끄러운 날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손으로 든 끌을 사용하여 철, 그리고 나중에는 강철 날 낫에 이빨을 새겼다. 아프리카 대륙의 많은 국가들, 중남미, 그리고 근동, 중동, 극동 지역에서 전통적인 마을 대장장이가 여전히 활동하는 지역에서는 이것이 ''여전히'' 사실이다.

영국은 톱니 모양 날을 만드는 ''산업적'' 공정을 개발한 최초의 국가로 보인다. 그런 다음 1897년, 당시 세계 최대 낫 제조업체였던 오스트리아 샤른슈타인의 레드텐바허(Redtenbacher) 회사는 이 작업을 위한 자체 기계를 설계하여 오스트리아에서 유일한 톱니 모양 낫 생산업체가 되었다. 1942년, 최근에 인수한 자매 회사인 크렌호프(Krenhof)도 이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레드텐바허의 낫 생산 부문이 에티오피아에 매각되기 1년 전인 1970년, 그들은 여전히 연간 150만 개의 톱니 모양 낫을 생산했는데, 주로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시장을 대상으로 했다. 물론 오스트리아에는 수세기 동안 매끄러운 날 낫을 생산한 다른 기업들도 있었다. 마지막 고전적인 "둥근" 낫은 1980년대 중반까지 단조되었고 2002년까지 기계 가공되었다.

중앙 유럽에서는 단조 또는 기계 가공(또는 "찍어내기"라고도 함)된 매끄러운 날 낫만 사용되었고(많은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알려진 낫이었고), 이베리아 반도, 시칠리아, 그리스에서는 오랫동안 양쪽 모두의 지지자들이 있었다. 현재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에 있는 많은 소규모 가족 소유 기업들은 20세기 중반까지 톱니 모양 모델의 이빨을 하나씩 손으로 잘라내는 방식으로 두 가지 버전의 낫을 생산했다.

1921년 여러 독립 단조 공장들의 연합으로 설립된 이탈리아의 팔치(Falci)社는 1965년 자체 고유의 ''산업 규모'' 톱니 모양 낫 생산 방식을 개발했다. 뒷면이 두껍고(강도를 위해) 가장자리로 갈수록 점점 얇아지는(쉽게 관통하기 위해) ''테이퍼형'' 블레이드 단면을 포함한 그들의 혁신은 나중에 스페인의 유럽 최대 낫 생산업체와 최근에는 인도의 한 회사에서도 채택했다.

수메르 낫, 기원전 3000년경


네팔 낫(하시야)과 그 운반대(쿠르페토)

4. 낫의 사용



낫날의 안쪽 곡선은 날카롭게 갈려 있어 사용자가 곡물의 밑동에 낫을 긋거나 휘둘러 줄기를 곡선에 걸어 동시에 잘라낼 수 있다. 자르는 재료는 다른 손으로 한 묶음으로 잡을 수도 있고 (예: 수확할 때), 나무 막대기로 고정하거나, 그냥 자유롭게 놓아둘 수도 있다. 묶음으로 잡을 때는 일반적으로 사용자를 향해 낫질을 한다(오른손잡이의 경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하지만 자유롭게 사용할 때는 반대 방향으로 휘두른다. 주로 같은 도구를 가리키는 다른 속어/지역 이름으로는 그래스훅(grasshook), 스왑 훅(swap hook), 립 훅(rip-hook), 슬래시 훅(slash-hook), 리핑 훅(reaping hook), 브리싱 훅(brishing hook) 또는 배깅 훅(bagging hook)이 있다.

톱니 모양의 낫은 밀을 수확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이삭을 자유로운 손으로 묶어서 쥐었다. 그 후에는 낫으로 짚을 잘랐다. 반면에 귀리와 보리는 단순히 낫으로 베었다. 그 이유는 보리나 귀리의 부드러운 짚은 깔짚이나 사료로만 적합했지만, 밀짚은 지붕을 이는 데 사용되는 귀중한 작물이었기 때문에, 탈곡기로 내리치면 이러한 용도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로 풀을 자르는 데 사용되는 낫날은 때때로 "크랭크형"으로 만들어지는데, 이는 손잡이에서 아래쪽으로 오프셋되어 있어 낫날을 지면에 더 가깝게 유지하기가 더 쉽다. 곡물 수확에 사용되는 낫은 곡물은 일반적으로 지표면에 매우 가까이 자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특징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신 이러한 후자 그룹을 구분하는 것은 종종(하지만 항상은 아님) 톱니 모양의 가장자리이다.

규칙적으로 규산이 풍부한 곡물 줄기를 자르는 데 사용되는 낫날에는 특징적인 낫 광택 또는 마모 패턴이 생긴다.

4. 1. 무기로서의 낫

다른 농기구와 마찬가지로 낫은 즉석 날붙이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 예로는 일본의 쿠사리가마와 카마, 중국의 닭 낫, 그리고 아프리카 중북부의 잔데족의 마크라카가 있다. 파울루스 헥토르 마이어가 저술한 독일 르네상스 시대의 무술 교본에도 낫을 이용한 전투에 관한 장이 있다. 특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무술에서 널리 사용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셀루릿'' 또는 ''클루릿''으로 알려진 토착 낫이 마두라족과 흔히 연관되어 있으며, 전투용과 일상 도구로 모두 사용된다.

5. 낫의 상징성

낫과 망치는 프롤레타리아 연대, 즉 농민 계급과 도시 노동 계급의 결합을 나타내는 공산주의 상징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 처음 채택되었으며, 망치는 산업 노동자를, 낫은 농민을 나타낸다.

때때로 더 전통적인 대신 낫을 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저승사자의 상징.

플리니우스는 황금 낫이 드루이드 의식에 사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파울루스 헥토르 마이어의 필사본 드레스덴 C 93에는 낫의 군사적 응용에 관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세 개(또는 두 개)의 얽힌 낫은 중세 헝거포드 가문의 문장이었다. 헝거포드 매듭도 참조.

5. 1. 공산주의 상징

낫과 망치는 농민 계급과 도시 노동 계급의 결합을 나타내는 공산주의 상징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 처음 채택되었으며, 망치는 산업 노동자를, 낫은 농민을 나타낸다.

5. 2. 드루이드교

플리니우스는 황금 낫이 드루이드 의식에 사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5. 3. 헝거포드 가문

세 개(또는 두 개)의 얽힌 낫은 중세 헝거포드 가문의 문장이었다. 헝거포드 매듭도 참조.

6. 현대의 낫

베깅 후크(bagging hook), 배징 후크(badging hook), 패깅 후크(fagging hook), 리프 후크(reap hook) 또는 립 후크(rip hook)는 손잡이가 엇갈려 있어 손목이 땅에 닿지 않도록 만든 큰 낫이다. 옥스퍼드 사전은 'bag' 또는 'badge'라는 단어를 손으로 곡식을 베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칼날은 일반 낫보다 무겁고 톱니가 없으며, 보통 약 40mm 너비에 약 45cm 너비의 열린 초승달 모양이다. 19세기 중후반 영국 대부분 지역에서 낫에서 발전하여 으로, 나중에는 곡물 수확기로, 그리고 그 후에는 스워서로 대체되었다.

기계식 곡물 수확기가 곡물이 이삭에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지 못하고 베는 것이 불가능할 때 여전히 사용되었다. 콩낫이나 완두콩낫 대신 들깨와 다른 콩과 작물을 베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작물은 가축의 사료와 깔짚으로 사용되었다.

빌후크와 혼동되는 경우가 있지만, 낫이나 베깅 후크의 칼날은 어린 싹을 제거할 만큼 충분히 무거웠지만, 나무 재료를 자르기에는 충분히 강하지 않았다. 영국의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모양의 칼날이 사용되었고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 모양과 용도가 비슷한 것은 그래스 후크와 리프 후크이다.

7. 한국의 낫

7. 1. 한국 낫의 특징

7. 2. 낫과 한국 사회

참조

[1] 논문 Microscopic Striations on Flint Sickle-Blades as an Indication of Plant Cultivation: Preliminary Results 1985-07-00
[2] 논문 The Neolithic Period: Triumphs of Architecture, Agriculture, and Art
[3] 논문 The Epi-Palaeolithic Southern Levant and the Origins of Cultivation
[4] 서적 Gerätegeld Sichel. Studien zur monetären Struktur bronzezeitlicher Horte im nördlichen Mitteleuropa Berlin/New York
[5] 서적 Natural History XVI, 95
[6] 논문 The Sickle in Aboriginal Western North America
[7] 논문 Aguaruna Agriculture in Eastern Peru
[8] 논문 Work-related injuries among farmers: a cross-sectional study from rural Nepal 201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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