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설 배리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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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설 배리모어는 1879년 미국에서 태어난 배우로, 연극, 무성 영화, 영화, 텔레비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녀는 배우 집안 출신으로, 오빠 라이오넬 배리모어, 동생 존 배리모어와 함께 "배리모어 가문"으로 불리며 명성을 얻었다. 1894년 연극 배우로 데뷔하여 1944년 영화 《고독한 마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1959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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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설 배리모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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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에설 메이 블라이드 |
로마자 표기 | Ethel Mae Blythe |
출생일 | 1879년 8월 15일 |
출생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
사망일 | 1959년 6월 18일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직업 | 배우 |
활동 기간 | 1895년–1957년 |
가족 | 배리모어 |
배우자 | 러셀 그리스월드 콜트 (1909년 결혼, 1923년 이혼) |
자녀 | 3명 |
부모 | 모리스 배리모어 (아버지) 조지아나 드류 (어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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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
아카데미 상 | 여우조연상 1944년 『고독한 마음』 |
2. 생애
에설 배리모어는 필라델피아 출신의 배우로, 모리스 배리모어(본명 허버트 블라이스)와 조지아나 드류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3] 로마 가톨릭 학교를 다녔으며, 1884년에는 가족과 함께 2년간 영국에 거주했다. 1886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아버지를 따라 야구 경기를 보며 평생 야구 팬이 되었다.[4][5]
1894년부터 연극 배우로 활동했으며, 무성 영화에도 출연했다. 1895년 브로드웨이 극장 데뷔, 1897년 런던에서 연극 ''비밀 첩보'' 등에 출연하며 경력을 쌓았다. 1901년 ''기병대장 징크스''로 스타덤에 올랐고, 이후 다양한 연극과 영화에 출연했다.
배우 노조 협회의 지지자로, 1919년 파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0] 배우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으나, 이로 인해 제작자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윈스턴 처칠의 청혼을 받은 적이 있으나, 정치인의 아내가 되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1909년 러셀 그리즈월드 콜트와 결혼, 세 자녀를 두었다. 1932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재선을 지지했다.[24]
만년에 심혈관 질환을 앓았으며, 1959년 6월 18일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 자택에서 79세로 사망했다. 캘버리 묘지에 안장되었고, 뉴욕 에설 배리모어 극장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25]
2. 1. 초기 생애
배리모어는 필라델피아에서 배우 모리스 배리모어(본명은 허버트 블라이스)와 조지아나 드류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3] 그녀의 이름은 아버지 모리스 배리모어가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의 소설 ''뉴컴즈''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그녀는 배우 존과 라이오넬 배리모어의 누이였으며, 배우 존 드류 배리모어의 이모였고, 배우 드류 배리모어의 증고모였다. 또한 배우이자 극장 매니저였던 루이자 레인 드류의 손녀였고, 브로드웨이 마티네 아이돌이었던 존 드류 주니어와 비타그래프 스튜디오의 무대 및 스크린 스타였던 시드니 드류의 조카였다.
필라델피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그곳의 로마 가톨릭 학교에 다녔다.
1884년, 배리모어 가족은 2년 동안 영국으로 이사했다. 배리모어의 아버지는 런던의 헤이마켓 극장에서 연극을 공연하고 주연을 맡았다.[4] 1886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처음으로 야구 경기에 데려갔고, 이를 통해 그녀는 평생 야구를 사랑하게 되었다.[5]
2. 2. 배우 활동
에설 배리모어는 1894년부터 연극 배우로 활동했으며, 무성 영화에도 출연했다. 1893년 여름, 결핵으로 고생하던 어머니 조지와 함께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에서 안식년을 보냈으나, 어머니는 회복하지 못하고 1893년 7월 3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에설과 오빠 라이오넬은 십 대에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일을 해야 했다.에설, 라이오넬, 동생 존 배리모어는 모두 배우였으며, 이들은 "배리모어 가문"으로 불리는 명배우 가문이었다. 1932년 영화 『괴승 라스푸틴』에서 세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출연했다. 존 배리모어 사망 후, 라이오넬과 에설은 1953년 영화 『브로드웨이로 가는 길』에 함께 출연했지만, 이 영화는 라이오넬의 유작이 되었다.
에설은 영화, 연극, TV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1951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는 주디 홀리데이를 대신해 오스카 트로피를 받기도 했다. 그녀는 종종 병약한 여성을 연기하거나, 침대 위에서 죽는 배역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에설과 라이오넬은 최초로 오스카를 수상한 남매이다. 1944년 영화 『고독한 마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후, 에설은 주로 영화에서 품위 있는 노부인 역할을 맡았다.
2. 2. 1. 연극
에설 배리모어는 1895년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삼촌 존 드루 주니어와 모드 애덤스가 출연한 연극 ''무분별한 젊은 부부''로 데뷔했다. 1896년에는 ''로즈마리''에서 다시 드루, 애덤스와 함께 출연했다.[6]1897년에는 윌리엄 질레트와 함께 런던으로 건너가 그의 연극 ''비밀 첩보''에서 미스 키트리지 역을 연기했다. 헨리 어빙과 엘렌 테리의 제안으로 ''벨스''에서 아네트 역을 맡았고, 1898년 신년에는 리시움 극장에서 로렌스 어빙의 ''표트르 대제''에서 에우프로시네 역으로 데뷔했다. 런던 시절, 그녀는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많은 남성들의 구애를 받았으나, 정치인의 아내가 되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런던 시즌 후 미국으로 돌아온 배리모어는 찰스 프로먼에 의해 ''캐서린''과 ''각하 지사''에 캐스팅되었다.[7] 이후 프로먼은 1901년 2월 4일 런던 웨스트엔드 극장의 개릭 극장에서 개봉한 ''기병대장 징크스''에서 마담 트렌토니 역을 맡겼고, 이 역할로 스타덤에 올랐다.[8] 보스턴 투어가 끝날 무렵에는 패트릭 캠벨 부인과 미니 매더 피스크를 능가하는 흥행을 기록했다.

''기병대장 징크스''의 성공 이후, 배리모어는 토마스 라케워드의 ''선데이''에서 "그게 전부야,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라는 유명한 대사를 남겼다.[9]
그녀는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1905)에서 노라 역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1922)에서 줄리엣 역을 연기했다.
2. 2. 2. 영화
배리모어는 1914년 첫 장편 영화인 ''나이팅게일''에 출연했다. 그녀의 가족들은 이미 영화계에 진출해 있었다. 삼촌 시드니 드류와 그의 아내 글래디스 랭킨, 라이오넬 배리모어는 1911년에 영화에 데뷔했고, 존 배리모어는 1912년 루빈 단편 영화로 데뷔한 후 1913년에 첫 장편 영화를 찍었다.[13] 그녀는 1914년부터 1919년까지 15편의 무성 영화에 출연했으며, 대부분 메트로 픽처스 스튜디오에서 제작했다. 이 영화들의 대부분은 그녀의 브로드웨이 경력과 자녀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동부 해안에서 제작되었다. 그녀의 무성 영화 중 몇 편이 남아 있는데, 의회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는 ''헬레나 리치의 각성''(1916)의 한 릴과 조지 이스트만 하우스에 소장된 ''그녀의 사람들의 부름''(1917) 등이 있다.[13]세 형제(에설, 존, 라이오넬)가 모두 출연한 두 편의 영화는 ''국립 적십자 페이지언트''(1917)와 ''라스푸틴과 황후''(1932)뿐이었다. 전자는 현재 유실 영화로 여겨진다.[13]
배리모어는 캐리 그랜트와 함께 출연한 영화 ''고독한 마음 외에는''(1944)에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지만, 그다지 감명받지 못했다고 밝혔다.[13]
그녀는 로버트 시오드맥 감독의 ''나선 계단''(1946),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파라딘 부인''(1947)에 출연했으며, 두 작품과 1949년 영화 ''핑키''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13] 그녀는 찰스 로턴이 연기한 인물의 억압된 아내 역할을 맡았다. 그녀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제니의 초상''(1948), 그리고 "붉은 다뉴브"(1949) 등에서였다. 그녀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은 ''조니 트러블''(1957)이었다.[13]
2. 2. 3. 기타 활동
배리모어는 야구와 권투 팬이었다. 1919년 7월 4일 뎀프시/윌라드 경기에서 뎀프시가 윌라드의 턱뼈를 부러뜨리고 여러 개의 이를 뽑는 잔혹한 장면을 목격한 후 권투에 대한 애정을 끊었다. 에설은 다시는 권투 경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나중에 텔레비전으로 권투 경기를 시청하곤 했다.[13]1928년, 슈베르트는 오늘날까지 그 이름으로 운영되는 에설 배리모어 극장을 열었다.[14]
1938년, 에설은 메릴랜드주 올니에 있는 올니 극장 센터의 초대 예술 감독이 되었다.[15] [16]
배리모어는 1944년부터 1945년까지 ABC에서 "단명한 상황 코미디"로 묘사된 ''미스 해티''에 출연했다.[17] 한 에피소드에서 배리모어의 캐릭터는 "롭 톰슨으로부터 그의 전쟁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전쟁 채권을 위해 돈을 모으기 위해 발표하는 연극을 연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18] 배리모어는 1949년 6월 1일 방영된 서스펜스 에피소드에서 진 켈리와 함께 "도움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출연했다.
배리모어는 1950년대에도 여러 차례 텔레비전에 출연했는데, 1951년 12월 1일 NBC의 ''올스타 리뷰''에서 코미디언 지미 듀란테와 잊을 수 없는 만남을 가졌고, 이는 키네스코프에 보존되어 있다. 1956년에는 듀몬트 텔레비전 네트워크가 제작하고, 네트워크가 해체될 무렵 WABD를 통해 방영된 TV 시리즈 ''에설 배리모어 극장''의 14개 에피소드를 진행했다. 불행히도 에피소드는 키네스코프로 보존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라디오 방송 외에도 1952년 ''왓츠 마이 라인?'' 출연분은 남아 있다.
2. 3. 배우 노조 활동
배리모어는 친구 마리 드레스러와 함께 배우 노조 협회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1919년 파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업 기간 동안 에설과 라이오넬 배리모어는 렉싱턴 애비뉴 오페라 하우스에서 배우 노조 협회가 주최한 자선 공연에 출연했다.[10] 배우 노조 협회는 주로 공연자들이 무대 제작 수익의 더 큰 몫을 차지하고, 노령이나 병든 배우들에게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생겨났다. 배리모어가 배우 노조 협회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오랫동안 배우로 활동했던 부모님의 운명, 즉 적절한 의료 지원이 필요했던 어머니와 수년간 시설 치료를 받아야 했던 아버지의 영향일 수 있다. 그녀의 파업 지지는 많은 제작자들을 화나게 했고, 배우이자 작곡가, 제작자였던 조지 M. 코한과의 우정을 잃게 만들었다.[11]2. 4. 개인사



에설 배리모어(본명: 에설 메이 프라이스)는 필라델피아 출신의 배우로, 잉글랜드인[29] 배우 아버지 모리스 배리모어(본명 허버트 아서 체임벌린 블라이스)와 미국인[30] 배우 어머니 조지아나 드류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였다.[3] 그녀의 이름은 아버지 모리스 배리모어가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의 ''뉴컴즈''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배리모어는 배우 존과 라이오넬 배리모어의 누이였으며, 배우 존 드류 배리모어의 이모이자 배우 드류 배리모어의 증조할머니였다. 또한 배우이자 극장 매니저였던 루이자 레인 드류의 손녀였고, 브로드웨이 마티네 아이돌이었던 존 드류 주니어와 비타그래프 스튜디오의 무대 및 스크린 스타였던 시드니 드류의 조카이기도 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로마 가톨릭 학교에 다녔다. 1884년, 가족은 2년 동안 영국으로 이주했는데, 이는 아버지 배리모어가 런던의 헤이마켓 극장에서 연극을 공연하고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다.[4] 1886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아버지는 그녀를 처음으로 야구 경기에 데려갔고, 이를 계기로 그녀는 평생 야구를 사랑하게 되었다.[5]
윈스턴 처칠은 잉글랜드에서 배리모어가 사귄 많은 새로운 친구 중 한 명이었다. 1900년에 처칠은 그녀에게 청혼했으나, 배리모어는 자서전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1899년 블레넘 궁전 잔디밭에서 그녀와 처칠이 함께 찍은 사진을 포함했다.[19] 19세에 잉글랜드를 여행하던 중, 그녀는 맨체스터 공작, 배우 제럴드 뒤 모리에, 작가 리처드 하딩 데이비스, 그리고 처칠과 약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20] 로렌스 어빙(헨리 어빙 경의 아들)과 약혼했지만, 결혼에 이르지는 못했다.[4]
1909년 3월 14일, 배리모어는 러셀 그리즈월드 콜트(1882–1960)와 결혼했다.[21] 부부는 슬하에 세 자녀를 두었다.
배리모어는 1932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선거운동을 했다.[24]
2. 5. 사망
에설 배리모어는 여러 해 동안 심장 질환을 앓은 후, 1959년 6월 18일 캘리포니아 할리우드 자택에서 심혈관 질환으로 사망했다. 80번째 생일을 두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녀는 캘버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뉴욕에 있는 에설 배리모어 극장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25]3. 유산 및 평가
크리스토퍼 리브가 출연한 로맨틱 영화 ''어딘가에''(1980)에는 1928년 연극 ''신의 왕국''에서 수녀 복장을 한 배리모어의 사진이 등장한다.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1952)에서 진 켈리는 데비 레이놀즈에게 진지한 배우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을 하며 배리모어를 고상한 배우의 예시로 언급한다.
1960년, 배리모어는 영화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에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영화 부문 스타로 헌액되었다. 그녀의 스타는 할리우드 대로 7001번지에 있다. 배리모어는 오빠들인 존과 라이오넬과 함께 미국 극장 명예의 전당 회원이었다.[29][30]
금성의 한 분화구는 배리모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금성의 분화구는 유명한 여성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다.
4. 출연 작품
(원제)
(The Greatest Power)
(None But the Lonely Heart)
(The Spiral Staircase)
(The Farmer's Daughter)
(Night Song)
(The Paradine Case)
(Portrait of Jennie)
(The Red Danube)
(Pinky)
(The Secret of Convict Lake)
(Deadline - U.S.A.)
(The Story of Three Loves)
(Main Street to Broadway)
(Young at He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