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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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진은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군으로, 조조의 먼 친척이거나 친구의 아들로 조조에게 입양되었다는 두 가지 출생 설화가 전해진다. 조조의 양자로 성장하여 호표기를 이끌고 영구현의 난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으며, 한중 공방전에서 유비군과 싸워 중견장군으로 승진했다. 위나라가 건국된 후에는 진서장군, 대장군 등을 역임하며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내는 데 기여했다. 231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원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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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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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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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진 |
원어 이름 | 曹真 |
로마자 표기 | Cáo Zhēn |
자 | 자단(子丹) |
시호 | 원후(元侯) |
신상 정보 | |
출생 | 생년 미상 |
사망 | 231년 5월 |
사망 장소 | 낙양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조소 / 진보난 |
형제자매 | 조빈 (형제) 하후상의 아내 (자매) |
조카 | 하후현 |
질녀 | 하후휘 |
자녀 | 조상 조희 조순 조칙 조연 조애 |
관직 정보 | |
관직 | 편장군 중견장군 중령군 정촉호군 진서장군 도독옹양주제군사 상군대장군 도독중외제군사 중군대장군 급사중 대장군 대사마 |
봉작 | 영수정후 동향후 소릉후 |
주군 | 조조 조비 조예 |
활동 정보 | |
소속 국가 | 후한 → 위나라 |
적 | 제갈량 |
참여 전투 | 한중 공방전 조비의 남정 제갈량의 북벌 |
2. 생애
조조의 족자(族子)이다. 190년(초평 원년)[45], 아버지 조소가 조조가 거병했을 때 일족으로서 호응했으나, 동탁 측이었던 황완과 갈등을 일으켜 살해당했다.[46][47] 조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조진을 불쌍히 여겨 거두어 자신의 아들 조비와 함께 살게 했다.[48]
어느 날, 조진이 사냥을 하던 중 호랑이에게 쫓기게 되었는데, 말 위에서 뒤를 돌아보며 활을 쏘아 단 한 발에 호랑이를 쓰러뜨렸다.[6] 조조는 그의 용맹함을 칭찬하며, 조휴와 함께 자신의 친위 부대인 "호표기"의 대장으로 삼았다. 이후 조진은 산서성 영구현(靈丘縣, 현재 영구현 동쪽)에서 산적을 격파하여 첫 승리를 거두었고, 조정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영수정후(靈壽亭侯)로 봉했다.[7]
217년부터 219년까지 조조의 경쟁자인 유비가 한중군을 장악하기 위해 공세를 펼치자, 조진은 한중군에서 유비와 싸웠다. 조휴, 조홍과 함께 하변현(下辯縣, 현재 간쑤성 청현 서북쪽)에서 오란을 격파했고,[9] 그 공로로 중견장군(中堅將軍)으로 승진했다.[10]
조진이 장안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그를 중령군(中領軍)으로 임명했다. 정군산 전투에서 하후연이 전사했기 때문에, 조조는 유비가 양평관(陽平關, 현재 산시성 닝창현에 위치)을 공격할까 걱정했다. 그는 정촉호군(征蜀護軍)으로 임명하고 서황에게 군대를 이끌고 양평관에서 유비의 부하인 고상을 공격하게 했다. 조진과 서황은 고상을 격파하여 물리쳤다. 219년, 유비와의 오랜 전쟁 끝에 조조는 한중군 방어를 포기하고[8] 모든 병력을 철수시켰다. 무도군(武都郡, 현재 간쑤성 청현 주변)으로 보내 조홍과 만나 그들에게 진창(陳倉, 현재 산시성 바오지시 동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게 했다.[11]
220년 3월, 조조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조비가 뒤를 이어 위(魏)의 왕(王)이자 재상이 되었다.[12]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임명하고, 서부 중국의 옹주와 양주에서 군사 작전을 감독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향(鄕)의 정후(亭侯)에서 동향후(東鄕侯)라는 작위의 현후(縣侯)로 승격시켰다.[13] 재임 중, 주천군에서 장진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하 비요에게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비요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장진을 죽였다.[14]
220년 말, 조비는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동한(東漢) 왕조를 끝내고, 스스로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여 조위를 건국했다.[12] 222년, 위나라 수도 낙양으로 소환하여, 상군대장군(上軍大將軍)으로 재임명하고 의장용 도끼를 하사했으며, 위나라 전역의 군사 문제를 감독하도록 했다.[15]
223년, 조비는 조진, 하후상, 장합 등에게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의 경쟁 국가인 동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자신은 완(宛; 현재의 허난성, 난양시)에 주둔하여 지원군을 제공했다. 위나라 군대는 강릉(江陵; 현재의 후베이성, 장링 현)을 공격하여 포위했는데, 이곳은 오나라 장군 주연과 약 5,000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위나라 군대는 주연을 돕기 위해 온 손성, 반장, 양찬 등이 이끄는 오나라의 지원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포위 기간 동안 병사들에게 땅굴을 파고 작은 언덕을 쌓고 망루를 세워 강릉의 수비병들에게 화살을 쏟아붓도록 명령했다. 주연과 그의 부하들은 자리를 지켰고 심지어 반격하여 위나라 진영 두 곳을 파괴할 작은 기회를 잡았다. 약 6개월간의 포위 공격 후, 위나라 군대는 강릉의 성벽을 뚫을 수 없었고 퇴각했다.[16]
전쟁 중 조진과 하후상은 우저(牛渚; 현재 안후이성, 당도 현 북서쪽)에 있던 오나라 수비대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후 중군대장군(中軍大將軍)으로 재임명되었고, 급사중(給事中)의 직함을 추가로 받았다.[17]
226년 조비가 임종에 이르러 진군, 조휴,[71] 사마의와 함께 그 유조를 받았다. 명제가 즉위하며 소릉후(邵陵侯)에 봉해지고 12월(음력)[72] 대장군에 올랐다.
228년(태화 2년)[73] 제갈량이 북벌을 처음 시작하자 안정, 남안, 천수 3군이 촉나라에 호응하였다. 명제는 관서(關西) 군대를 맡겨 미현(郿縣)에 주둔하게 하고, 장합은 가정(街亭)으로 나아가게 했다.[74] 제갈량은 야곡도(斜谷道)로 간다는 소문을 내고 위군 주력을 붙잡아둘 미끼로 조운과 등지를 기곡(箕谷)으로 보낸 후 자신은 기산(祁山)으로 진출하였다. 조운과 등지를 격파하고,[75] 장합이 가정 전투에서 마속을 격파하여 제갈량이 퇴각하였다. 안정 주민 양조(楊條)가 촉나라에 호응하여 월지성(月支城)에서 농성하였으나, 직접 쳐서 항복을 받아내 3군을 다시 평정했다.
기산 루트가 공고해졌으므로 제갈량이 다음에는 반드시 진창 쪽으로 올 것이라 예상하고 학소와 왕생(王生)에게 대비하게 했다. 12월(음력),[65]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하자 비요 등을 원군으로 보냈다. 229년 봄, 진창은 이미 방비가 철저했을 뿐만 아니라 학소가 20여 일을 버텨내,[76] 제갈량은 공성을 중단하고 퇴각하였다. 이 공으로 식읍이 늘어나 모두 2,900호가 되었다.
230년 대사마까지 올라 낙양으로 불려갔고, 칼을 찬 채 전각에 오르거나[30] 입조할 때 종종걸음을 안 해도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56] 이 해 촉한을 여러 길을 따라 칠 것을 조예에게 권하여 그 전송을 받으며 군을 일으켰다. 음력 8월 장안을 출발하여 자오도를 따라 남쪽으로 갔고, 사마의는 한수를 거슬러 올라와 남정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야곡도와 무위 방면에서도 군이 움직였고 장합[77] 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큰 비가 30여 일 내리고 잔도도 끊어져 회군했다.[33]
병이 들어 낙양으로 돌아오자 조예가 친히 찾아가 그 병세를 살폈다. 231년 3월[78] 결국 죽어서 시호는 원후(元侯)라 하고 아들 조상이 후사를 이었다. 다른 아들인 조희, 조훈(曹訓), 조칙(曹訓), 조언(曹彥), 조애(曹皚)도 열후에 봉해졌다.
2. 1. 조조의 양육과 초기 활약
조조의 족자(族子)이다. 초평 원년(190년)[45], 아버지 조소가 조조가 거병했을 때 일족으로서 호응했으나, 동탁 측이었던 황완과 갈등을 일으켜 살해당했다.[46][47] 조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조진을 불쌍히 여겨 거두어 자신의 아들 조비와 함께 살게 했다.[48]어느 날, 조진이 사냥을 하던 중 호랑이에게 쫓기게 되었는데, 말 위에서 뒤를 돌아보며 활을 쏘아 단 한 발에 호랑이를 쓰러뜨렸다.[6] 조조는 그의 용맹함을 칭찬하며, 조휴와 함께 자신의 친위 부대인 "호표기"의 대장으로 삼았다. 이후 조진은 산서성 영구현(靈丘縣, 현재 영구현 동쪽)에서 산적을 격파하여 첫 승리를 거두었고, 조정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영수정후(靈壽亭侯)로 봉했다.[7]
2. 2. 한중 공방전
217년부터 219년까지 조조의 경쟁자인 유비가 한중군을 장악하기 위해 공세를 펼치자, 조진은 한중군에서 유비와 싸웠다. 유비가 부하인 오란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하변현(下辯縣, 현재 간쑤성 청현 서북쪽)에 주둔하게 하자, 조조는 사촌 조홍에게 군대를 이끌고 적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조진은 조휴, 조홍과 함께 하변현에서 오란을 격파했고,[9] 그 공로로 중견장군(中堅將軍)으로 승진했다.[10]조진이 장안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그를 중령군(中領軍)으로 임명했다. 당시 하후연이 정군산 전투에서 유비군과 싸우다 전사했기 때문에, 조조는 유비가 양평관(陽平關, 현재 산시성 닝창현에 위치)을 공격할까 걱정했다. 그는 조진을 정촉호군(征蜀護軍)으로 임명하고 서황에게 군대를 이끌고 양평관에서 유비의 부하인 고상을 공격하게 했다. 조진과 서황은 고상을 격파하여 물리쳤다. 219년, 유비와의 오랜 전쟁 끝에 조조는 한중군 방어를 포기하고[8] 모든 병력을 철수시켰다. 철수하는 동안 조진을 무도군(武都郡, 현재 간쑤성 청현 주변)으로 보내 조홍과 만나 그들에게 진창(陳倉, 현재 산시성 바오지시 동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게 했다.[11]
2. 3. 위나라의 중진
220년(연강 원년)[65]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진서장군(鎭西―), 가절(假節), 도독옹양주제군사(都督雍凉州諸軍事)에 임명되고 동향후(東鄕侯)에 봉해졌다. 같은 해 5월(음력) 주천군에서 황화(黃華), 장액군에서 장진(張進) 등이 반란을 일으켜 금성 태수(金城―) 소칙이 토벌할 때[65] 비요를 보내 도왔다. 장합과 함께 안정(安定)의 노수호(盧水胡)와 동강(東羌)을 정벌하였다.[66]222년(황초 3년) 조비가 남정을 개시하면서 상군대장군(上軍―), 가절월(加節鉞),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에 임명되어 하후상, 장합 등과 남군으로 진격하였다. 주연이 지키던 강릉(江陵)은 손성(孫盛), 제갈근, 양찬(楊粲), 반장이 원군으로 달려왔으나, 손성은 장합이, 제갈근은 하후상이[67] 쫓아내고 강릉 주변을 점령하였다.[68] 반장과 제갈근 등은 위군의 기세에 접근하지 못하고 멀찍이 주둔하였다.[69]
오직 강릉성만이 고립된 채 항전하자, 조진은 흙산을 쌓고 땅굴을 파고 누로를 세워 성에 바짝 붙어서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댔다. 성안의 병사들은 대부분 질병을 앓아 싸울 수 있는 자가 5,000명밖에 안됐음에도 끈질기게 버텼고 역습을 해와 진지를 부수기도 하였다. 강릉현령 요태(姚泰)는 줄어드는 군사와 식량에 내통해왔지만 주연에게 발각되어 죽었다.[65] 강릉을 포위한 지 6달이 지난 223년 3월(음력)[70] 강물이 차올라 반장과 제갈근이 공격할 움직임을 보이고[65] 전염병까지[65] 겹쳐 철수하였다.
중군대장군(中軍―)에 급사중(給事中)을 겸했다. 226년 문제가 임종에 이르러 진군, 조휴,[71] 사마의와 함께 그 유조를 받았다. 명제가 즉위하며 소릉후(邵陵侯)에 봉해지고 12월(음력)[72] 대장군에 올랐다.
220년 3월, 조조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조비가 뒤를 이어 위(魏)의 왕(王)이자 재상이 되었다.[12] 조비는 조진을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임명하고, 서부 중국의 옹주와 양주에서 군사 작전을 감독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조진을 향(鄕)의 정후(亭侯)에서 동향후(東鄕侯)라는 작위의 현후(縣侯)로 승격시켰다.[13] 조진 재임 중, 장진(張進)이 주천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진은 부하 비요에게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비요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장진을 죽였다.[14]
220년 말, 조비는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동한(東漢) 왕조를 끝내고, 스스로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여 조위를 건국했다.[12] 2년 후, 조비는 조진을 위나라 수도 낙양으로 소환하여, 상군대장군(上軍大將軍)으로 재임명하고 의장용 도끼를 하사했으며, 위나라 전역의 군사 문제를 감독하도록 했다.[15]
223년, 조비는 조진, 하후상, 장합 등에게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의 경쟁 국가인 동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자신은 완(宛; 현재의 허난성, 난양시)에 주둔하여 지원군을 제공했다. 위나라 군대는 강릉(江陵; 현재의 후베이성, 장링 현)을 공격하여 포위했는데, 이곳은 오나라 장군 주연과 약 5,000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위나라 군대는 주연을 돕기 위해 온 손성(孫盛), 반장, 양찬(楊粲) 등이 이끄는 오나라의 지원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포위 기간 동안 조진은 병사들에게 땅굴을 파고 작은 언덕을 쌓고 망루를 세워 강릉의 수비병들에게 화살을 쏟아붓도록 명령했다. 주연과 그의 부하들은 자리를 지켰고 심지어 반격하여 위나라 진영 두 곳을 파괴할 작은 기회를 잡았다. 약 6개월간의 포위 공격 후, 위나라 군대는 강릉의 성벽을 뚫을 수 없었고 퇴각했다.[16]
전쟁 중 조진과 하후상은 우저(牛渚; 현재 안후이성, 당도 현 북서쪽)에 있던 오나라 수비대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후 조진은 중군대장군(中軍大將軍)으로 재임명되었고, 급사중(給事中)의 직함을 추가로 받았다.[17]
황초 원년 (220년), 조비(문제)가 선양으로 위 제국을 일으켜 즉위하자, 진서장군·가절·도독옹량주 제군사가 되어, 동향후에 봉해졌다.
주천의 장진이 반란을 일으키자, 비요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게 했다. 또한, 장합·곽회·양추 등을 지휘하여 안정의 노수호와 동강을 토벌했다. 일이 있을 때마다 여러 군을 지휘하여, 옹주·양주의 반란을 진압했다.
황초 3년 (222년)에는 낙양으로 돌아와 상군대장군·도독중외제군사·가절월이 되었지만, 계속해서 옹주·양주의 군사도 도독하고 있다.
같은 해부터 이듬해 (223년)에 걸쳐, 조비가 오를 세 방향에서 침공하자, 하후상 등[49]과 함께 주연이 지키는 강릉을 공격했다. 양주의 우저에서 승리했다는 기술도 있다. 또한 조진은 별동대를 보내 강릉의 중주에서 요새에 웅거하고 있던 손성을 격파하여 요새를 점령하고 (『오지』「오주전」에 따르면 223년 봄 정월), 제갈근의 수군을 불태워 오의 원군을 막았다. 한편 강릉성에 흙산을 쌓아 화살을 쏘거나 지하도를 파는 등 다양한 수단을 사용했지만, 주연은 이를 잘 막아 병사를 격려하고 틈을 엿보았으며, 위 진영 2개를 격파했다. 포위는 반년에 걸쳐, 오군으로부터 내통자도 나왔지만, 주연은 내통자의 존재를 알아내 사형에 처했다. 최종적으로 주연이 지키는 강릉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223년 3월에 철퇴했다[50]. 중군대장군으로 승진하고, 급사중이 더해졌다.
황초 7년 (226년), 조비가 붕어할 때, 조휴·진군·사마의와 함께 조예를 보좌하도록 위임되었다[51]. 조예(명제)가 즉위하자 개부를 허락받고 (「진군전」), 조진은 대장군이 되었으며[52], 소릉후로 승격했다[53].
태화 2년 (228년) 봄, 제갈량이 지휘하는 촉군이 쳐들어와 기산을 포위하자, 일시적으로 남안·천수·안정의 세 군이 촉에 항복했지만, 조진은 조예의 명령으로 미에 포진하여 이를 격퇴했다. 조진은 별도로 장안을 노리는 조운·등지의 군대에 대비하여, 대군[54]을 파견하여 이를 격파했다 (『촉지』「조운전」). 가정에서 장합이 마속을 격파하자 (가정 전투), 촉군은 철수했다. 그러나 안정의 주민이었던 양조가, 다른 주민들을 이끌고 월지성에 웅거했다. 이 때문에 조진이 직접 출진하여 성을 포위하자, 양조는 대장군이 직접 왔다는 이유로 항복을 요청했다.
조진은 제갈량이 패전의 반성을 바탕으로, 다음에는 창끝을 돌려 진창으로 침입해 올 것이라고 예측하여, 학소·왕생에게 진창의 수비를 굳게 하고, 성을 수리하게 했다. 같은 해 겨울[55], 조진의 예측이 적중하여, 제갈량이 쳐들어와 진창을 포위했다. 학소는 얼마 안 되는 병사로 제갈량의 군세를 접근시키지 않고, 완강하게 방어했다. 이 때문에 조진은 비요 등을 원군으로 파견했다. 제갈량은 진창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병량이 떨어지고, 장합의 원군도 달려오자 철수했다 (진창 전투). 그 후, 2900호까지 봉지를 더 증액받았다.
태화 3년 (229년) 봄에 제갈량이 다시 움직여, 진식에게 무도·음평의 두 군을 공격하게 했기에, 곽회가 구원에 나섰지만, 제갈량이 직접 출격하여 곽회를 막았다. 이로 인해 곽회는 구원에 실패했고, 두 군은 촉에 의해 함락되었지만, 이때 조진이 총지휘관으로서 어떤 지시를 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2. 4. 제갈량의 북벌 저지
228년(태화 2년)[73] 제갈량이 북벌을 처음 시작하자 안정, 남안(南安), 천수 3군이 촉나라에 호응하였다. 명제는 조진에게 관서(關西) 군대를 맡겨 미현(郿縣)에 주둔하게 하고, 장합은 가정(街亭)으로 나아가게 했다.[74] 제갈량은 야곡도(斜谷道)로 간다는 소문을 내고 위군 주력을 붙잡아둘 미끼로 조운과 등지를 기곡(箕谷)으로 보낸 후 자신은 기산(祁山)으로 진출하였다. 조진이 조운과 등지를 격파하고,[75] 장합이 가정 전투에서 마속을 격파하여 제갈량이 퇴각하였다. 안정 주민 양조(楊條)가 촉나라에 호응하여 월지성(月支城)에서 농성하였으나, 조진이 직접 쳐서 항복을 받아내 3군을 다시 평정했다.조진은 기산 루트가 공고해졌으므로 제갈량이 다음에는 반드시 진창 쪽으로 올 것이라 예상하고 학소와 왕생(王生)에게 대비하게 했다. 12월(음력),[65]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하자 비요 등을 원군으로 보냈다. 229년 봄, 진창은 이미 방비가 철저했을 뿐만 아니라 학소가 20여 일을 버텨내,[76] 제갈량은 공성을 중단하고 퇴각하였다. 조진은 이 공으로 식읍이 늘어나 모두 2,900호가 되었다.
2. 5. 촉한 공격과 최후
230년 대사마까지 올라 낙양으로 불려갔고, 칼을 찬 채 전각에 오르거나[30] 입조할 때 종종걸음을 안 해도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56] 이 해 촉한을 여러 길을 따라 칠 것을 조예에게 권하여 그 전송을 받으며 군을 일으켰다. 음력 8월 조진은 장안을 출발하여 자오도를 따라 남쪽으로 갔고, 사마의는 한수를 거슬러 올라와 남정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야곡도와 무위 방면에서도 군이 움직였고 장합[77] 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큰 비가 30여 일 내리고 잔도도 끊어져 회군했다.[33]병이 들어 낙양으로 돌아오자 조예가 친히 찾아가 그 병세를 살폈다. 231년 3월[78] 결국 죽어서 시호는 원후(元侯)라 하고 아들 조상이 후사를 이었다. 다른 아들인 조희, 조훈(曹訓), 조칙(曹訓), 조언(曹彥), 조애(曹皚)도 열후에 봉해졌다.
3. 성품과 평가
조진은 젊을 적부터 조조를 섬기던 일족 조준(曹遵)과 같은 고향 사람 주찬(朱讚)이 일찍 죽은 것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식읍 일부를 둘의 아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청했다. 조예는 ‘조진이 숙향의 인(仁)과 안영의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모두 가지고 있다’[80] 며 그 아들들을 관내후에 봉하고 식읍 100호를 나누어주었다.[36]
조진은 출정할 때마다 장병들과 노고를 함께하고 줄 상이 부족하면 집안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사졸들은 모두 조진을 따르기를 원했다.[37] 그는 어린 시절의 고생을 생각해 정으로 보답했고, 은상이 부족한 자가 있으면 자신의 재산을 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장병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었으며, 지휘하는 군대의 단결력도 강고했다고 한다.
사후 조예는 조진을 추념하며 “충절을 행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필했으며 안으로는 종친임을 빙자하지 않고 밖으로는 가난한 선비들을 경시하지 않았다. 행동을 조심히 하고[81] 큰 공로가 있으면서도 겸손했으니 가히 덕이 있는 자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조진은 비만이었기 때문에 오질로부터 술자리에서 그 일로 놀림을 받아 격노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59]
4.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조소 | |
본인 | 조진 | |
동생 | 조빈(曹彬) | 조비 때 열후에 봉해짐[38] |
여동생 | 덕양향주 | 하후상에게 시집감, 하후현과 하후휘를 낳음[39][40] |
장남 | 조상 | 소릉후[41], 고평릉의 변 이후 반역죄로 처형[42] |
차남 | 조희 | 열후[41], 고평릉의 변 이후 반역죄로 처형[42], 가평 연간에 조진의 공적을 참작하여 종손 조희가 가계를 이음 (신창정후) |
삼남 | 조훈 | 열후[41], 고평릉의 변 이후 반역죄로 처형[42] |
사남 | 조칙 | 열후[41], 고평릉의 변 이후 반역죄로 처형[42] |
오남 | 조언 | 열후[41], 고평릉의 변 이후 반역죄로 처형[42] |
육남 | 조애 | 열후[41], 고평릉의 변 이후 반역죄로 처형[42] |
조카 | 조문숙 | 하후령녀의 남편 |
5. 삼국지연의에서의 조진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조진은 조비가 남정을 개시할 때 처음 등장한다. 제갈량이 북벌을 시작하자 하후무를 대신하여 맞서지만 패한다. 서강까지 끌어들이나 또 패하고 조정에 도움을 요청한다. 사마의가 와서 가정에서 마속을 격파하여 제갈량을 퇴각시킨다. 사마의가 학소로 하여금 진창을 방비하도록 하고, 제갈량이 진창으로 진군하니 조진이 원군으로 가지만 또 패한다. 학소가 진창은 지켜냈기에 제갈량이 보급 곤란으로 물러가는 와중에도 조진에게 큰 피해를 입는다.[14]
사마의가 제갈량이 기산으로 올 것이라며 막자고 하는데, 조진은 그럴 리가 없다고 자신한다. 사마의가 내기까지 걸어오니 응하여 각자 다른 길목을 막지만 방심한다. 제갈량의 급습에 또 패하고 죽을 뻔한 것을 사마의가 구해준데다 내기는 잊고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자는 말에 몹시 부끄러워 병이 난다. 제갈량의 조롱하는 편지를 받고 한스러운 마음이 가슴에 가득 차 죽는다.[14] 역사에서는 제갈량에게 승리한 조진이지만, 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압도적으로 뛰어난 지략 앞에 연전연패를 겪고, 복심인 왕쌍을 위연에게 참수당하며, 동료인 사마의와의 내기에서 지고, 자신의 능력 차이에 아연실색한다. 제갈량의 이간계로 인해 많은 신하들이 사마의를 의심할 때, "촉이나 오의 계략이 아닌가"라며 홀로 그를 변호하거나, 병 치료 중 오와 촉이 연합하여 위나라를 침공해 왔다는 소식을 듣자, 스스로 도독의 인수를 사마의에게 양도하여 전권을 위임하는 등, 조진의 활약은 사마의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로 그려진다.[27]
6. 기타
조진은 뚱뚱한 체형으로 알려져 있다. 224년 조비가 주최한 연회에서 오질이 광대를 시켜 조진을 놀리자, 화가 난 조진은 칼을 빼 들고 광대를 죽이려 했다. 조홍과 왕충까지 오질 편을 들며 조진에게 살을 빼라고 하자, 오질 역시 조진을 조롱하며 맞섰다. 주삭이 중재에 나섰으나, 오질이 주삭까지 꾸짖으면서 연회는 결국 엉망이 되었다.[79]
6. 1. 조진의 출생에 대한 이설
조진의 출생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첫 번째 이야기는 《삼국지》와 왕침(王沈)의 《위서》(魏書)에 따른 것으로, 조진은 후한 말기에 권력을 잡고 한나라 중앙 정부를 장악한 군벌 조조의 먼 친척이었다.[2] 조진의 아버지 조삭(曹邵)은 조조의 측근으로 지략과 충성심으로 알려졌다. 191년경, 조조가 관동 연합에 참여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을 때, 조삭을 여러 군에서 군사를 모집하도록 보냈다. 당시 예주 자사 황완(黃琬)은 조조를 암살하려 했으나, 조삭은 조조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3][4]두 번째 이야기는 《위략》에 따른 것으로, 조진의 본래 성은 진(秦)이었으며 조씨 가문에 입양되었다고 한다. 조진의 아버지 진백남(秦伯南)은 조조의 절친한 친구였다. 195년경, 조조가 경쟁 군벌 원술 휘하의 군사들에게 공격받았을 때, 진백남의 집에 몸을 숨겼다. 병사들이 들이닥쳐 조조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진백남은 자신이 조조라고 주장하며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조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백남에게 감사를 표하며 그의 자녀들을 양자로 삼아 조씨 성을 쓰도록 했다.[5]
6. 2. 대장군조진잔비
청나라 도광 연간(1821년~1850년)에 산시성 시안 교외에서 조진의 업적을 칭송하는 석비가 발굴되었다. 석비는 조진 사망 후 수년 뒤인 235년~236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내용은 일부만 남아 있지만, 촉한의 제갈량이 쳐들어오자 조진이 이를 맞이하여 격퇴했다는 내용이다. 문장의 서체(위나라 시대의 예서)도 서도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참고로, 문장 중 '촉'과 '제갈량' 사이의 글자가 깎여 있는데, 이는 3세기 건립 당시에는 위나라 입장에서 '촉적 제갈량'이라고 적혀 있던 것을, 발굴 후 《삼국지연의》의 제갈공명의 대활약을 사랑하는 지역 주민들에 의해 '적' 자가 깎여 나간 것이다.
참조
[2]
서적
Sanguozhi vol. 9
[3]
서적
Sanguozhi vol.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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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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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lǜ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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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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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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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zhi Tongjian vol.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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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9
[10]
서적
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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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12]
서적
Zizhi Tongjian vol.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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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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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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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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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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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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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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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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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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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zhi Tongjian vol.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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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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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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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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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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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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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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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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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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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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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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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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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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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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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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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Jin Shu vol.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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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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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Zizhi Tongjian vol. 75
[43]
서적
魏志「明帝紀」
[44]
서적
魏志「曹真伝」にある裴松之註の『魏書 (曖昧さ回避)|魏書』による
[45]
서적
魏志「曹真伝」の裴松之の注に引用される『魏書』には、曹真の父は初平年間において、曹操が挙兵した時に呼応して兵を集め曹操に従ったが、豫州牧黄琬が曹操を殺そうとした際、曹操が難を逃れたが父は殺された、とある。ただしこれは黄琬が189年中に豫州牧から司徒に遷っていると記されている『後漢書』・『献帝紀』の記述と矛盾する
[46]
서적
裴松之が注釈として引く『魏略』によると、曹真の姓は元来は秦氏で、父の秦伯南は曹操と親しい間柄であった。興平 (漢)|興平の末年、曹操は袁術とともに盗賊の討伐に向かったところ、逆に盗賊に追われることになり、秦伯南の邸に逃げ込んだ。盗賊が邸に来ると秦伯南は自ら門を出て、盗賊に「私が曹操だ」と名乗ったため殺害された。曹操はその功績から子の真に曹姓を名乗らせたとある
[47]
서적
または黄琬配下の沛郡|沛国の相の{{仮リンク|袁忠|zh|袁忠}}によって討たれた説もある
[48]
서적
魏志「曹真伝」
[49]
서적
呉志「呉主伝」によると、張郃・徐晃が従軍
[50]
서적
魏志「文帝紀」、『呉志』「呉主伝」・「朱然伝」
[51]
서적
魏志「文帝紀」。役職は中軍大将軍となっている
[52]
서적
魏志「明帝紀」によると12月の出来事
[53]
서적
裴松之は注で、父の諱が入っている「'''邵'''陵」の封地名はあまりにも不自然で、これを誤りだと指摘している
[54]
서적
漢晋春秋』によると、趙雲と鄧芝の方が数は多かったという
[55]
서적
魏志「明帝紀」によると12月
[56]
서적
ただし、死後の235年ころに作られた「大将軍曹真残碑」では大将軍であることから、大司馬はさらに後の追贈の可能性がある
[57]
서적
魏志「明帝紀」によると、詔勅が出たのは秋7月
[58]
서적
魏志「明帝紀」によると9月
[59]
서적
魏志「王粲伝」の伝中に附伝された「呉質伝」の注に引く『呉質別伝』
[60]
서적
본래 성씨가 진(秦)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본전, 《위서》와는 맞지 않다. 어환, 《위략》 ; 배송지 주석, 《삼국지》9권 위서 제9 조진에서 인용
[61]
서적
《삼국지》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
[62]
서적
《삼국지》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
[63]
서적
《삼국지》36권 촉서 제6 황충
[64]
서적
《구주춘추》》 ; 배송지 주석, 《삼국지》1권 위서 제1 조조에서 인용
[65]
서적
《삼국지》2권 위서 제2 문제 조비 연강 원년
[66]
서적
《삼국지》17권 위서 제17 장합
[67]
서적
《삼국지》9권 위서 제9 하후상
[68]
서적
《삼국지》56권 오서 제11 주연
[69]
서적
《삼국지》55권 오서 제10 반장, 《오록》(吳錄) ; 배송지 주석, 《삼국지》52권 오서 제7 제갈근에서 인용
[70]
서적
《삼국지》47권 오서 제2 오주 손권 황무 2년
[71]
서적
삼국지 2권 위서 제2 문제 조비 황초 7년
[72]
서적
삼국지 3권 위서 제3 명제 조예
[73]
서적
삼국지 35권 촉서 제5 제갈량
[74]
서적
삼국지 3권 위서 제3 명제 조예 태화 2년
[75]
서적
삼국지 36권 촉서 제6 조운
[76]
서적
위략
[77]
서적
삼국지 33권 촉서 제3 후주 유선
[78]
서적
삼국지 3권 위서 제3 명제 조예 태화 5년
[79]
서적
위략
[80]
문서
有叔向撫孤之仁 篤晏平久要之分
[81]
문서
能持盈守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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