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산성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영원산성 전투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원주 목사 김제갑이 이끄는 조선군이 모리 요시나리의 왜군 제4진에 맞서 치른 전투이다. 김제갑은 험준한 지형의 영원산성에 4000명의 군민과 함께 들어가 방어 태세를 갖추었으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김제갑은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었다. 이 전투로 원주는 백성을 무사히 피난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김제갑의 결사항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패배하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영원산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분쟁 | 임진왜란 |
날짜 | 1592년 9월 28일(음력 8월 23일) ~ 9월 30일(음력 8월 25일) |
장소 | 강원도 원주시 영원산성 |
결과 | 영원산성 함락, 일본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선 |
교전국 2 | 일본 |
지휘관 | |
조선 지휘관 | 김제갑 원주 목사, 김시백, 박종남 |
일본 지휘관 | 모리 요시나리, 이토 스케타카 |
병력 규모 | |
조선 병력 | 군민 4,000명, 5,000명(영어 문서) |
일본 병력 | 3,000명, 최소 1,000명(영어 문서) |
피해 규모 | |
조선 피해 | 알려지지 않음 |
일본 피해 | 알려지지 않음 |
관련 전투 | |
임진왜란 전투 목록 | 부산진 동래성 밀양 김해 경주 상주 탄금대 한강 조선수군 제1출전 옥포 합포 적진포 해유령 임진강 기강 조선수군 제2출전 사천 당포 제1차 당항포 율포 용인 무계 정암진 여주 제1차 평양성 웅치 이치 조선수군 제3출전 한산도 안골포 제1차 금산 우척현 제2차 평양성 해정창 영천성 지례 제3차 평양성 청주 제2차 금산 영원산성 조선수군 제4출전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도 절영도 초량목 부산포 연안 북관 창원 제1차 진주성 독성산성 제4차 평양성 성주 벽제관 조선수군 제5출전 제1차 웅포 행주 조선수군 제6출전 제2차 웅포 제2차 진주성 송유진의 난 조선수군 제7출전 제2차 당항포 조선수군 제8출전 장문포 영등포 이몽학의 난 |
강원도 전투 목록 | 여강 회양 구미 철원 마진 금화 봉화 영원 |
위치 정보 |
2. 배경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전, 원주 목사 김제갑은 68세의 나이로 부임하여 충주 탄금대 전투에 병력과 무기를 지원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모리 요시나리가 이끄는 왜군 제4진은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태백산맥을 넘어 원주로 향하고 있었다. 김제갑은 원주에서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치악산 남쪽 기슭의 영원산성으로 군민 4000명과 함께 들어갔다.
영원산성은 세 면이 험준하여 접근이 어려운 천혜의 요새로, 소수의 병력으로도 방어가 용이했다. 김제갑은 이곳에 식량을 비축하고 성벽을 쌓아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일본군은 영원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인지하고 김제갑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김제갑은 이를 거부하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2. 1. 조선의 상황
1592년, 김제갑은 원주 목사로 부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주 탄금대 전투에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여 병력과 무기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때 왜 제4진 모리 요시나리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삼척을 거쳐 태백산맥을 넘어 강원도 정선, 영월, 영주, 단양, 홍천, 평창 등지를 거쳐 8월 중순 원주를 향하고 있었다.김제갑은 원주에서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치악산 남쪽 기슭 영원산성으로 군민 4000명과 식량과 무기 한 달분을 가지고 들어갔다. 영원산성은 세 면이 험준하여 접근이 어려워 소수의 병력으로도 방어가 용이한 천혜의 요새였다. 김제갑은 이곳에서 성벽을 쌓고, 성벽 꼭대기에는 돌을 쌓아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일본군은 영원산성의 방어력을 인지하고 김제갑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김제갑은 이를 거부하고 일본 사자를 처형하였다.
2. 2. 일본군의 진격
1592년 음력 11월 19일(1592년 1월 3일) 68세의 늙은 나이로 원주 목사로 부임한 김제갑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주 탄금대 전투에 무기와 병력을 많이 지원하여 병력과 무기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때 왜 제4진 모리 요시나리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삼척을 거쳐 태백산맥을 넘어 강원도 정선, 영월, 영주, 단양, 홍천, 평창 등지를 거쳐 8월 중순 원주를 향하고 있었다.김제갑은 원주에서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치악산 남쪽 기슭 영원산성으로 군민 4000명과 식량과 무기 한 달분을 가지고 들어갔다. 영원산성은 세 면이 험준하여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여 소수의 병력으로도 대군을 막을 수 있는, 한국 어느 곳과 비교해도 뛰어난 자연적인 방어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김제갑은 이곳에서 풍부한 식량을 비축하고 성벽을 쌓았으며, 성벽 꼭대기에는 높이를 오르려는 자들에게 던질 돌들을 쌓아 놓았다.
강원도 북부에서 일어난 일본 점령에 대한 봉기가 서울 자체를 위협하자, 일본군 사령관 이토 스케타카는 반란군의 주 근거지를 향해 진격했다. 일본 군인들은 영원산성의 강점을 인지하고 김제갑에게 싸움 없이 항복할 것을 설득하려 했다. 가파른 경사면 위로 편지가 보내져 성벽 너머로 전달되었는데, 그 내용은 "너희는 멸망할 것이다. 두 달을 버텨도 결국 함락될 것이다. 즉시 나와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제갑은 일본 사자의 머리 없는 시신을 절벽 아래로 굴려 보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2. 3. 영원산성의 전략적 중요성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전, 원주 목사 김제갑은 68세의 나이로 부임하여 충주 탄금대 전투에 병력과 무기를 지원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모리 요시나리가 이끄는 왜군 제4진은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태백산맥을 넘어 원주로 향하고 있었다. 김제갑은 원주에서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치악산 남쪽 기슭의 영원산성으로 군민 4000명과 함께 들어갔다.영원산성은 세 면이 험준하여 접근이 어려운 천혜의 요새로, 소수의 병력으로도 방어가 용이했다. 김제갑은 이곳에 식량을 비축하고 성벽을 쌓아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일본군은 영원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인지하고 김제갑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김제갑은 이를 거부하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3. 전투 과정
9월 28일(음력 8월 23일) 일본군이 침입하자 김제갑은 휘하 장수 박종남에게 군사를 주어 가리평에 매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박종남은 명령을 어기고 냇가에서 쉬다가 모리 요시나리 군사들의 기습 공격을 받아 병력을 잃었다. 모리 요시나리는 원주를 점령하고 총병력 3000명으로 영원산성을 공격했다. 김제갑은 혈전을 벌이다 왜군의 총에 맞았으나, 계속 활을 쏘며 싸우다가 접근한 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김제갑의 둘째 아들 김시백은 후퇴 도중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려다 총에 맞아 전사했고, 김제갑의 처 이씨도 남편과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
포위군은 산비탈을 기어올랐지만, 5,000명에 불과한 수비대는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밤이 되자 조선군은 가파른 경사로 일본군이 야간 기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경계병을 배치하지 않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소수의 일본군이 벼랑을 기어올라 성벽 기저에 도달, 작은 구멍을 뚫고 침투하여 잠에서 깨어나 공포에 질린 수비대를 공격했다. 성문이 열리고 한 시간 만에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항복을 거부한 김제갑은 참수되었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김제갑의 머리를 보내라고 요청했다.
3. 1. 일본군의 초기 공세와 영원산성 방어
9월 28일(음력 8월 23일) 일본군이 침입하자 김제갑은 휘하 장수 박종남에게 군사를 주어 가리평에 매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박종남은 명령을 어기고 냇가에서 쉬다가 모리 요시나리 군사들의 기습 공격을 받아 병력을 잃었다. 모리 요시나리는 원주를 점령하고 총병력 3000명으로 영원산성을 공격했다. 김제갑은 혈전을 벌이다 왜군의 총에 맞았으나, 계속 활을 쏘며 싸우다가 접근한 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김제갑의 둘째 아들 김시백은 후퇴 도중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려다 총에 맞아 전사했고, 김제갑의 처 이씨도 남편과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포위군은 산비탈을 기어올랐지만, 5,000명에 불과한 수비대는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3. 2. 김제갑의 전사와 영원산성 함락
9월 28일(음력 8월 23일) 일본군이 침입하자 김제갑은 휘하 장수 박종남에게 군사를 주어 가리평에 매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박종남은 명령을 듣지 않고 냇가에서 군사들과 쉬다가 모리 요시나리 군사들의 기습 공격을 받아 군사들을 잃고 돌아왔다. 모리 요시나리는 원주를 점령하고 영원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정,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영원산성을 공격했다. 김제갑은 혈전을 벌여 활을 쏘다가 왜군의 총에 맞았다. 부장 오항이 김제갑을 부축하려 했으나, 김제갑은 이를 거부하고 계속 싸우다가 접근한 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둘째 아들 김시백은 후퇴 도중 김제갑의 시신을 거두려다가 총에 맞아 전사했고, 김제갑의 처 이씨도 남편과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밤이 되자 조선군은 가파른 경사로 일본군이 야간 기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경계병을 배치하지 않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소수의 일본군이 벼랑을 기어올라 성벽 기저에 도달, 작은 구멍을 뚫고 침투하여 잠에서 깨어나 공포에 질린 수비대를 공격했다. 성문이 열리고 한 시간 만에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항복을 거부한 김제갑은 참수되었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김제갑의 머리를 보내라고 요청했다.
4. 결과 및 영향
이 전투로 원주는 강원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유일하게 백성을 무사히 피난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적은 이 전투로 위력이 반으로 줄어 강원도에서 왜군이 합류하는 데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4. 1. 원주 지역에 미친 영향
이 전투로 원주는 강원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유일하게 백성을 무사히 피난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적은 이 전투로 위력이 반으로 줄어 강원도에서 왜군이 합류하는 데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4. 2. 전황에 미친 영향
이 전투로 원주는 강원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유일하게 백성을 무사히 피난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적은 이 전투로 위력이 반으로 줄어 강원도에서 왜군이 합류하는 데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4. 3. 역사적 평가
이 전투로 원주는 강원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유일하게 백성을 무사히 피난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적은 이 전투로 위력이 반으로 줄어 강원도에서 왜군이 합류하는 데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5. 기념 및 추모 사업
5. 1. 충렬사
5. 2. 관련 문화 콘텐츠
6. 기타
6. 1.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관계
그날 밤, 힘든 노동에 지친 조선군은 가파른 경사 때문에 일본군이 야간 기습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경계병을 두지 않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소수의 일본군이 절벽을 기어 올라와 성벽 밑에 도착했다. 작은 구멍으로 소수의 병력이 침투하여, 잠에서 깬 조선군을 공격했다. 성문이 열리고 한 시간 만에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항복을 거부한 김재갑(金禢甲) 도호부사는 참수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울 주재 3인 중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이토에게 도호부사의 머리를 보내라고 요청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