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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진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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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이 전라도 점령을 위해 진주성을 공격하고 조선군이 이를 방어한 전투이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전라도 침략의 교두보로 삼고자 3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으나, 김시민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은 3,800명의 병력과 백성들의 협력으로 굳건히 저항했다. 조선군은 지형적 이점을 활용하고 다양한 무기와 심리전을 통해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의 지원도 있었다. 전투 결과, 조선군은 수성에 성공하여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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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진주성 전투
지도 정보
전투 개요
전투 이름제1차 진주성 전투
일부일본의 한국 침략
날짜1592년 11월 8일 ~ 13일 (그레고리력); 1592년 10월 5일 ~ 10일 (음력)
장소진주성, 한국
결과한국의 승리
전투 목표조선 관군의 진주성 방어 성공, 이후 영향으로 일본군(왜군)의 수륙 병진책 좌절 및 보급난 심화.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선
교전국 2도요토미 정권
지휘관 (조선)
총 지휘관김시민
주요 지휘관곽재우
김성일
이광악
성수경
최덕량
심대승
김준민
정기룡
임계영
최경회
유숭인
지휘관 (일본)
총 지휘관우키타 히데이에
주요 지휘관호소카와 다다오키
호소카와 겐바노조
가토 미쓰야스
하세가와 히데카즈
기무라 시게코레
신조 나오사다
가스야 다케노리
오타 가즈요시
모토시마 마타사부로
다구치 야스케
요네모토 스게지로
이쿠다 우베에
병력 규모
조선군3,800명 (정규군), 2,200명 이상 (의병), 170정 (총)
일본군30,000명
사상자
조선군1,000명 미만 (사망 또는 부상)
일본군10,300명 이상 (사망)
추가 정보
기타대부분 전멸. 전사자가 너무 많아 소각. 지휘관 대부분 전사.

2. 배경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가 위협받았다. 바닷길 이용이 어려워진 일본군은 부산포와 한양을 잇는 육로를 통해 물자를 보급하고 통신을 유지하려 했으나,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난 의병 활동으로 인해 이마저도 순탄치 않았다.[3]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은 전쟁 물자 확보와 전선 확대를 위해 곡창 지대인 전라도로 눈을 돌렸다.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길목에 위치한 진주성을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을 남부 지방 장악의 핵심 거점이자 전라도 침공의 발판으로 여기고 공략을 명령했다.[3] 일본군 지휘부 역시 진주성을 함락하면 전라도로 가는 길이 열리고, 배후에서 활동하는 곽재우 등의 의병 세력을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진주성은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 야욕을 저지하고 전쟁의 향방을 가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2. 1. 진주성의 전략적 중요성

진주성은 남쪽으로 남강이 흐르고 서쪽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으며, 북쪽에는 깊고 넓은 연못 형태의 해자가 있어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 조건을 갖춘 천혜의 요새였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일본군은 쉽게 진주성을 공략 대상으로 삼기 어려웠다.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는 사실상 차단되었다. 이에 일본군은 부산포와 한양을 잇는 육로 수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경상우도 지역에서 활발히 일어난 의병 활동으로 인해 육로를 통한 보급과 통신마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고 전선을 확대하기 위해 곡창 지대인 전라도로 진출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라도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진주성을 남부 지방 장악의 핵심 거점이자 전라도 침공을 위한 교두보로 판단하고 반드시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일본군 지휘관 우키타 히데이에호소카와 다다오키 등도 진주성을 함락하면 전라도로 가는 길이 열릴 뿐만 아니라, 배후에서 활동하는 곽재우와 같은 의병 세력을 제압하고 풍부한 물자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진주성은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 계획을 저지하고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3]

2. 2. 일본군의 침략 야욕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연이은 해전에서 승리하며 제해권을 장악하자 일본군의 해상 보급에 큰 차질이 생겼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부산포와 한양 사이의 연락을 육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경상우도 지역에서 의병 활동 등이 일어나면서 육로를 통한 통신마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은 경상도전라도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당시 경상감영이 위치했던 진주성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을 남부 지방 전체를 장악할 본거지이자 전라도 침략을 위한 교두보로 여겨 반드시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3] 진주성은 남강과 깊은 해자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기에 이전까지 일본군은 쉽게 공격하지 못했다. 일본군에게 진주성 함락은 곧 전라도 점령을 의미했으며, 이는 식량 확보와 전략적 교두보 마련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일본군 지휘관 우키타 히데이에호소카와 다다오키는 진주성을 함락하면 전라도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확보하고,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곽재우 의병 세력을 공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물자가 있는 전라도에서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진주성 공격에 동의했다. 이러한 침략적 야욕 아래, 일본군은 길목에 있는 창원을 먼저 점령한 뒤 진주성을 공격하기로 하고 총 3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3. 전투 경과

이순신수군 활동으로 해상 보급에 어려움을 겪던 일본군은 육로 확보 및 전라도 진출 교두보 마련을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경상우도의 중심지인 진주성 공략에 나섰다. 진주성은 남강과 해자로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1592년 11월 7일(음력 10월 4일), 일본군 약 3만 명이 진주성을 포위하며 공격을 개시했다. 성 안에서는 진주 목사 김시민의 지휘 아래 관군 약 3,800명과 백성들이 결사 항전을 준비했고, 성 밖에서는 곽재우, 최경회, 임계영 등이 이끄는 의병 부대들이 일본군의 배후를 교란하며 성 안팎에서 협력하는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3]

7일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조선 관군과 백성, 의병들은 화차, 현자총통 등 각종 무기와 유격전, 심리전 등을 활용하여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에 맞섰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던 11월 12일(음력 10월 9일), 김시민이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으나, 조선군의 저항은 계속되었다.[3]

결국 11월 13일(음력 10월 10일), 7일간의 공격에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퇴각하였다. 이 승리는 진주대첩으로 불리며,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일본군의 호남 진출 계획을 좌절시킨 중요한 전략적 승리였다.[3] 그러나 전투를 이끈 김시민은 총상 후유증으로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 향년 39세로 순국하였다.[3]

3. 1. 조선군의 방어 태세

일본군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 보급로가 위협받자 육로 확보를 위해 경상우도의 중심지인 진주성 공략을 결정했다.[3] 진주성은 남쪽에 남강이 흐르고 서쪽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었으며, 북쪽에는 깊고 넓은 해자(연못)가 파여 있어 방어에 매우 유리한 천혜의 요새였다.

1592년 11월 7일(음력 10월 4일) 일본군 약 3만 명이 성을 포위하자, 성 안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휘 아래 관군 3,800여 명과 백성들이 합세하여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이들은 화차현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총포화살로 무장하고, 돌과 뜨거운 물까지 동원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3]

한편, 성 밖에서는 의병 부대들이 일본군의 배후를 교란하며 성 안의 군사들을 지원했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의병을 이끌고 성 외곽에서 유격전을 펼쳤으며, 밤에는 나팔을 불고 큰 소리를 내어 일본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혼란에 빠뜨리는 심리전을 구사했다.[3] 또한, 최경회임계영이 이끄는 전라도 의병 2,000여 명도 진주성 외곽으로 이동하여 일본군의 후방을 기습 공격하며 성내의 조선군을 도왔다.[3] 이처럼 진주성 안팎에서 조선 관군과 의병, 백성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강력한 방어 태세를 구축하고 일본군의 침공에 맞섰다.

3. 2. 일본군의 공격과 조선군의 저항

1592년 11월 7일(음력 10월 4일) 일본군 3만여 명은 진주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전투 시작에 앞서, 성 안에는 진주 목사 김시민 휘하의 관군 3,800여 명과 백성들이 힘을 합쳐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성 밖에서는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끄는 경상도 의병들이 일본군의 배후를 견제하는 기각의 형세를 이루었다. 이러한 상황에 일본군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다가, 결국 주변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 총탄과 화살을 퍼부으며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성벽을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동원했으며, 높은 곳에서 공격하기 위해 공성탑까지 사용하는 등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러나 성 안의 조선 관군은 화차현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총포와 화살로 강력하게 맞섰고, 백성들 역시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쏟아부으며 필사적으로 대응했다. 성 안에 있던 기와와 돌, 심지어 우물물까지 거의 다 사용할 정도로 격렬한 방어전이 펼쳐졌다. 특히 김시민은 일본군의 조총에 대응하기 위해 최근에 확보한 약 170정의 화승총(arquebuse)으로 병사들을 훈련시켜 방어에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조선군은 일본군이 쏘아대는 총탄에도 굴하지 않고 돌과 도끼로 사다리를 부수며 일본군의 접근을 막았고, 비격진천뢰와 같은 폭탄을 던져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성 밖에서도 조선군의 활약은 거셌다. 임계영최경회가 이끄는 전라도 의병 2,000여 명은 성외에서 일본군의 후방을 기습 공격했으며,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 부대 역시 유격전을 벌이며 일본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단순한 무력 충돌뿐만 아니라 치열한 심리전도 벌어졌다. 일본군은 조선 군민을 동요시키려 했으나, 굳건한 저항 의지를 꺾지 못했다. 오히려 김시민을 중심으로 조선군은 고도의 심리전을 펼쳐 일본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는데, 이때 피리 소리를 이용해 일본군의 군심을 흔들기도 했다.[5] 곽재우 역시 피리를 불어 일본군의 혼란을 가중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약 닷새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1월 12일(음력 10월 9일) 새벽, 일본군은 잠시 퇴각하는 척하다가 다시 돌아와 총공격을 감행했다. 바로 이때 김시민이 일본군 저격수가 쏜 총탄에 머리 옆을 맞고 쓰러져 지휘 불능 상태에 빠졌다. 일본군 지휘관들은 조선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더욱 거세게 공격했지만, 김시민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은 끝까지 맞서 싸웠다.

결국 7일간의 끈질긴 공격에도 진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일본군은 11월 13일(음력 10월 10일), 싸움에 지쳐 퇴각하였다. 이 전투는 조선의 중요한 승리였으나, 전투를 이끈 영웅 김시민은 총상 후유증으로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 향년 39세로 순국하였다.[3]

3. 3. 김시민의 부상과 일본군의 퇴각

1592년 11월 12일(음력 10월 9일), 엿새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가 눈앞에 다가오는 듯했으나, 진주 목사 김시민일본군이 쏜 총탄에 맞아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전투 마지막 날 새벽, 일본군은 잠시 물러나는 척 위장 퇴각했다가 곧바로 돌아와 성을 향해 총공격을 감행했다. 성 안의 백성들은 김시민의 지휘 아래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쏟아붓는 등 최후의 힘을 다해 저항했으며, 이 과정에서 성 안의 기와와 돌, 심지어 우물물까지 거의 바닥이 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성 밖에서는 의병장 곽재우가 밤중에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다. 병력 수는 일본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지만, 곽재우는 기지를 발휘하여 부하들에게 나팔을 불고 큰 소리를 내게 하여 마치 대규모 지원군이 온 것처럼 위장, 일본군의 주의를 끌고 혼란에 빠뜨리는 심리전을 펼쳤다. 항우가 이끌던 초나라 군사와 장량의 고사를 본뜬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피리 소리 등으로 일본군의 군심을 흔들었다고도 한다. 약 3,000명의 의병과 비정규군이 도착하자, 일본군 지휘관들은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포위를 풀었다.

결국 진주성을 공격한 지 7일 만인 11월 13일(음력 10월 10일), 계속된 전투와 의병의 교란 작전에 지친 일본군진주성 공략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 공방전의 영웅인 김시민은 전투 후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 향년 39세로 끝내 순국했다.

4. 전투의 의의

제1차 진주성 전투는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평가받는 중요한 승리였다.[3] 이 전투는 일본군의 호남 진출 계획을 저지한 전략적 의미를 가지며,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이 거둔 최초의 본격적인 수성(守城) 성공 사례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4. 1. 전술적 승리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에서 최초로 수성에 성공한 전투였다. 이러한 승리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우선, 진주성은 남강과 깊은 해자로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한 지형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투에서 조선군은 군과 민이 하나 되어 싸웠다. 성 안에서는 김시민 목사가 이끄는 3,800여 명의 관군과 백성들이 결사 항전하며 화차현자총통 같은 총포와 화살을 효율적으로 사용했고, 백성들은 돌과 뜨거운 물까지 동원하여 저항했다. 성 밖에서는 곽재우, 임계영, 최경회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하는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었으며, 후방 기습과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단순한 무력 충돌뿐만 아니라 심리전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군은 조선군의 사기를 꺾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오히려 김시민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은 곽재우가 피리를 부는 등의 방법으로 일본군의 심리를 흔들어 혼란에 빠뜨렸다.[5]

이처럼 지형적 이점 활용, 군민의 합심, 효과적인 전술과 무기 사용, 심리전 수행 등이 어우러져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로 귀중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지휘관급 300명, 병사 10,000명에 달하는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3]

4. 2. 전략적 영향

제1차 진주성 전투는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히는 중요한 승리였다.[3] 이 전투의 가장 큰 전략적 의의는 일본군의 호남 진출 계획을 좌절시킨 데 있다. 당시 일본군은 전라도 지역을 점령하여 식량을 확보하고 전략적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진주성을 필사적으로 공격했으나, 조선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이는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군이 거둔 최초의 본격적인 수성(守城) 성공 사례였다. 진주성의 군관민은 지형적 이점을 활용하고 다양한 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일치단결하여 싸웠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지휘관급 300명, 병사 1만여 명에 달하는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으며, 이는 일본군의 전체적인 전략 수행에 차질을 빚게 했다.

비록 성 밖 의병의 규모가 결정적이지는 않았으나, 일본군의 후퇴는 조선 전체에 큰 용기를 주었으며, 특히 조선군의 사기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5. 병력 구성

조선군은 총 6,000명, 일본군은 총 30,000명의 병력으로 전투에 임했다.

5. 1. 조선군

조선군은 관군 3,800명과 의병 2,200명, 총 6,000명 규모로 구성되었다. 주요 지휘관과 소속 병력은 다음과 같다.

지휘관직책/구분병력
김시민진주 목사3,700명
유숭인경상우병사2,000명
이광악곤양 군수100명
곽재우의병장200명
최경회, 임계영의병장2,000명


5. 2.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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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병력 수
우키타 히데이에10,000명
호소카와 다다오키3,500명
하세가와 히데카즈5,000명
기무라 시게코레3,500명
가토 미쓰야스1,747명
신조 나오사다300명
가스야 다케노리200명
오타 가즈요시160명



총 30,000명

6. 일본의 반응

도요토미 정권은 진주성 전투에서 겪은 참패에 분노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에 2차전을 지시하였고 진주대첩에서의 승리의 주역인 목사 김시민을 참수하여 목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7. 무기 체계

진주성 전투 당시 양측의 무기 체계는 차이가 있었다. 일본군은 당시 신무기였던 조총[4]을 주력으로 사용하여 강력한 화력을 보유했다. 반면, 조선군은 의병과 관군 모두 전통적인 무기인 창과 활을 주로 사용했다. 다만 조선 관군은 일본군의 조총에 대응하기 위해 승자총통과 같은 화약 무기도 일부 갖추고 있었다.

7. 1. 조선군

조선 관군은 기본적으로 창과 활로 무장했으며, 일본군의 조총[4]에 대응할 만한 승자총통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김시민 장군은 전투 직전 일본군이 사용하는 것과 맞먹는 위력의 소총(arquebuse) 약 170정을 확보하여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제1차 진주성 전투 당시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은 약 3,800명의 병력으로,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일본군에 맞서 싸워야 했다. 일본군이 사다리를 놓고 공성탑을 앞세워 성벽을 넘으려 하자, 조선군은 대포화살, 그리고 승자총통 및 새로 확보한 소총 등 가용한 모든 화력을 동원하여 격렬하게 저항했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일본군 병사들에게는 큰 돌을 굴리고 도끼로 사다리를 부수며 필사적으로 맞섰다. 또한, 조선군은 박격포탄을 던져 일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전투가 사흘째 이어지던 중 김시민 장군이 머리에 총탄을 맞아 부상을 당해 더 이상 지휘할 수 없게 되었지만, 조선군은 사기가 꺾이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는 투지를 보여주었다. 일본군은 집중적인 조총 사격으로 공세를 이어갔으나, 조선군의 끈질긴 저항에 부딪혀 끝내 성벽을 넘지 못했다.

7. 2. 일본군

진주성 전투 당시 일본군은 조총[4]과 같은, 당시로서는 위력적인 신무기를 주력으로 사용하였다. 반면 조선 의병들은 주로 창과 활로 무장했고, 관군은 여기에 승자총통 정도를 추가로 갖추고 있었다.

일본군은 진주성에서 이전과 같은 손쉬운 승리를 예상하며 맹렬하게 공격을 시작했다. 성벽을 넘기 위해 사다리를 동원했으며, 고지를 점령하고 공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공성탑과 같은 공성 무기도 사용하였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조선군은 3,800명의 병력으로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확보한 약 170정의 조총대포, 화살 등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일본군 지휘관 중 한 명인 호소카와는 조총 사격으로 성벽을 오르는 병사들을 엄호하며 다른 방식으로 공격을 시도했으나, 조선군이 총탄을 무릅쓰고 돌과 도끼 등으로 사다리를 파괴하며 끈질기게 저항하여 성공하지 못했다. 특히 조선군이 사용한 박격포탄(비격진천뢰 등으로 추정)은 일본군에게 더 큰 피해를 주었다.

전투 사흘째, 조선군 지휘관 김시민이 머리에 총상을 입어 지휘 불능 상태에 빠지자, 일본군은 조선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더욱 거세게 공격했다. 그러나 집중적인 조총 사격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여전히 성벽을 넘지 못하고 고전하였다. 김시민의 부상과 탄약 부족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은 끈질기게 싸움을 이어갔다.

8. 기념물

(내용 없음)

8. 1. 김시민 장군 전공비

김시민 장군 전공비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비석이다. 1619년 (광해군 11년) 음력 7월에 진주성 안에 세워졌다. 비문은 성여신이 짓고 글씨는 한몽인이 썼다. 이 비석은 진주전상각적비(晉州全成却敵碑)라고도 불리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인 촉석정충단비와 나란히 서 있다. 1987년에는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비석 뒤편에 계사순의단을 건립했다.

8. 2. 계사순의단

1987년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김시민 장군 전공비 뒤편에 세워졌다.[1]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경상남도의 시도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1]

참조

[1] 서적 Japanese Castles in Korea 1592-98 Osprey Publishing
[2] 텍스트
[3] 웹인용 진주성 제1차 공방전 https://web.archive.[...] 국립진주박물관 2008-11-17
[4] 텍스트
[5]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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