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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평양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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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평양성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이 평양성을 점령하기 위해 벌인 전투이다. 일본군은 개성을 함락한 후 평양으로 진격하여,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고 윤두수 등이 지키던 평양성을 공격했다. 조선군은 대동강 방어에 실패하고 야간 기습마저 실패하여 평양성을 잃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평양성을 점령하고, 명나라의 참전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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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평양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제1차 평양성 전투
일부임진왜란
날짜1592년 7월 21일 ~ 7월 22일 (음력 6월 13일 ~ 음력 6월 14일)
장소평안도 평양성
결과일본군의 승리, 평양성 함락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선
교전국 2도요토미 정권
지휘관 및 지도자
조선광해군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이조판서 이원익
고언백
김침
허숙
김억추
일본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히다카 고노무
병력 규모
조선4,000명
일본30,000명 (고니시 유키나가의 18,000명, 구로다 나가마사의 12,000명 총합)
사상자 규모
조선3,000명 전사
일본350명 전사

2. 역사적 배경

임진강 전투 이후 개성이 함락되자 일본군은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군대를 서쪽으로 이끌고 황해도로 진격했고, 가토 기요마사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함경도로 향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주력군은 6월 1일 북쪽으로 진격하여 평안도로 진입했다. 그의 선봉대는 7월 16일 대동강 남안에 도달하여 평양성의 성벽을 볼 수 있었다. 며칠 후, 그는 황해도에서 저항 없이 작전을 완료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와 합류했다. 강을 건너지 못한 그들은 그곳에서 기다리며 선조에게 항복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강 한가운데에서 열린 회담은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음력 6월 9일, 평양을 목표로 하는 고니시 유키나가 등 제1군은 평양의 대동강 건너편에 도착하자, 류천 조신과 승려 경철현소를 시켜 조선군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조선군은 이를 거부했다.

선조는 7월 19일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향했다. 비록 그 도시는 강력한 요새와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갖추고 있었지만, 국왕의 퇴거는 수비대의 사기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음력 6월 11일, 선조는 일본군의 총공격이 임박하자 윤두수에게 평양성을 맡기고 녕변으로 도망쳤다. 조선의 장군 김명원, 정부 대신 윤두수, 이원익이 명목상 1만 명의 병력을 지휘하며 방어를 책임졌다.

2. 1. 조선의 상황

임진강 전투 이후 개성이 함락되자 일본군은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구로다 나가마사황해도로, 가토 기요마사함경도로 향했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주력군은 평안도로 진입했다.[1] 7월 16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봉대는 대동강 남안에 도달하여 평양성을 마주 보았고, 며칠 후 황해도에서 작전을 마친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와 합류했다.[1] 이들은 선조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강 한가운데에서 열린 회담은 결렬되었다.[1]

선조는 7월 19일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피난갔다.[1] 평양성은 강력한 요새였고 충분한 병력과 물자가 있었지만, 왕의 퇴각은 수비대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다.[1] 조선의 장군 김명원, 정부 대신 윤두수, 이원익이 명목상 1만 명의 병력을 지휘하며 방어를 책임졌다.[1]

2. 2. 일본군의 진격

임진강 전투 이후 개성이 함락되자 일본군은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군대를 서쪽으로 이끌고 황해도로 진격했고, 가토 기요마사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함경도로 향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주력군은 6월 1일 북쪽으로 진격하여 평안도로 진입했다. 그의 선봉대는 7월 16일 대동강 남안에 도달하여 평양성의 성벽을 볼 수 있었다. 며칠 후, 그는 황해도에서 저항 없이 작전을 완료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와 합류했다. 강을 건너지 못한 그들은 그곳에서 기다리며 선조에게 항복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강 한가운데에서 열린 회담은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음력 6월 9일, 평양을 목표로 하는 고니시 유키나가 등 제1군은 평양의 대동강 건너편에 도착하자, 류천 조신과 승려 경철현소를 시켜 조선군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조선군은 이를 거부했다.

선조는 7월 19일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향했다. 비록 그 도시는 강력한 요새와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갖추고 있었지만, 국왕의 퇴거는 수비대의 사기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음력 6월 11일, 선조는 일본군의 총공격이 임박하자 윤두수에게 평양성을 맡기고 녕변으로 도망쳤다. 조선의 장군 김명원, 정부 대신 윤두수, 이원익이 명목상 1만 명의 병력을 지휘하며 방어를 책임졌다.

3. 전투 전개

한양을 함락시키고 맹렬한 속도로 진격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7월 9일(음력 6월 1일) 개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으로 출발했다.[11] 7월 19일(음력 6월 11일) 조선선조는 다시 평양에서 의주로 피란하고 평양은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이조판서 이원익 등이 지키게 되었다. 성 안에서는 군민 3,000 ~ 4,000명이 을밀대 부근 숲에 옷을 걸치게 하여 군사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7월 21일(음력 6월 13일) 대동강에 도달한 고니시의 부대는 진을 치고 양각도를 건너 대동관을 조총으로 사격했다. 이에 윤두수이원익, 김침 등이 동대원의 일본군 진영을 기습 공격해 수백 명을 죽이고 말 수십 필을 빼앗았다. 그러나 다른 일본군들이 석회탄에 진을 쳐 여기를 지키던 조선군이 크게 패해 도망쳤다.[11]

7월 22일(음력 6월 14일) 새벽, 윤두수허숙김억추에게 대동강을 지키게 하고, 고언백에게 400명의 병력을 주어 부벽루 밑 능라도로 강을 건너 기습 공격을 하게 했다.[11] 그러나 군령을 지키지 못해 패배하고, 대동강에서 가장 얕은 여울인 왕성탄을 건너 평양성으로 퇴각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대동강의 가장 수심이 얕은 왕성탄을 알게 되었고, 그곳으로 강을 건너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12] 15일 밤에 고언백과 유경령은 소 요시토시의 진영을 기습했으나, 소 요시토시는 직접 칼을 뽑아 적병을 베는 등 분전했고[4], 조선군은 이선과 임욱경이 전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구로다 나가마사의 군세가 덮쳐오자 조선군은 대패하여 익사하는 자가 잇따랐다.[6] 구로다군은 이 전투에서 부장 구로다 마사요시를 잃었고, 나가마사 자신도 부상을 입었지만, 화살을 쏜 조선군 부장을 직접 쳐서 조선병을 수없이 베었다.[7]

결국 윤두수김명원은 군사들을 내보낸 뒤 무기를 모두 풍월루의 연못에 버리고 순안으로 빠져나왔다.[9] 일본군은 정찰병을 통해 조선군이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되자 평양성을 접수하고, 입간판을 세워 백성을 안심시켰으며, 성내의 병량 수십여 만 석을 압수했다.[10] 이로써 일본군은 평양성에 무혈입성하였고, 이는 전쟁 개전 60일 만에 일본군이 거둔 큰 성과 중 하나였다.

3. 1. 대동강 도하 시도와 조선군의 저항

김응서는 일본군의 야간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 소규모 병력으로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어둠 속에서 강을 건너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실제 공격은 새벽에 이루어졌고, 초기에는 성공하여 일본군 수백 명을 살해했다. 그러나 구로다 나가마사가 반격하여 조선군을 강가로 밀어냈고, 뱃사공들이 도망가 배가 사라진 상황에서 조선군은 상류의 얕은 곳을 통해 강을 건너 도주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군에게 평양성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게 되었다. 15일 밤, 고언백과 유경령은 소 요시토시의 진영을 기습했으나, 소 요시토시가 직접 칼을 들고 싸웠고[4] 이선과 임욱경이 전사하는등 고전했다.[5] 고니시 유키나가구로다 나가마사의 군세가 덮쳐오면서 조선군은 대패했고, 많은 병사들이 익사했다.[6] 구로다군은 이 전투에서 부장 구로다 마사요시를 잃었고, 나가마사 자신도 부상을 입었지만 조선군 부장을 죽이고 많은 조선군을 베었다.[7]

일본군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깨달은 김응서는 남은 병력에게 대포와 무기를 연못에 빠뜨리게 하고 순안으로 도주했다. 16일, 얕은 여울을 통해 대동강을 건넌 일본군은 텅 빈 평양성을 발견했다.[8] 고니시와 구로다는 정찰병을 보내 확인한 후 빈 성에 진입하여, 몇 달 동안 군대를 먹일 수 있는 7천 톤의 쌀을 발견했다. 일본군은 정찰병을 통해 조선군이 도망쳤음을 알고 평양성을 접수했으며, 백성을 안심시키는 한편 성내의 병량 수십여만 석을 압수했다.[10]

3. 2. 야간 기습과 실패

김응서는 일본군의 야간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 소규모 병력으로 야간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어둠 속에서 강을 건너는 데 시간이 지체되어 실제 공격은 새벽 무렵에 이루어졌지만, 초기에는 성공하여 일본군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수백 명을 살해했다. 구로다 나가마사가 반격하여 조선군을 강가로 밀어냈으나, 조선군은 배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일본군의 총성을 듣고 뱃사공들이 도망갔기 때문이다. 강을 건너 도망갈 수 없게 된 조선군은 상류로 물러나 걸어서 강을 건넜다. 이는 일본군에게 도시로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결과가 되었다.

15일 밤, 고언백과 유경령은 소 요시토시의 진영을 기습했다.[4] 기습당한 소 요시토시군은 스기무라 도시키요를 잃고 고전했지만, 요시토시가 직접 칼을 뽑아 적병을 베는 등 분전했다.[4] 조선군 역시 이선과 임욱경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5] 소 요시토시군의 병사들이 집결하자 조선군은 패주하기 시작했고, 고니시 유키나가구로다 나가마사의 군세가 덮쳐 조선군은 대패했다.[6] 이 과정에서 많은 조선 병사들이 익사했다.[6] 구로다군은 이 전투에서 부장 구로다 마사요시를 잃었고, 나가마사 자신도 부상을 입었지만 조선군 부장을 직접 처치하는 등 활약했다.[7] 패주한 조선군은 왕성탄을 거쳐 평양성으로 들어갔다.[7]

일본군은 조선군의 야간 기습 실패와 도주를 통해 대동강을 도보로 건널 수 있는 경로를 파악하고, 16일 얕은 여울을 통해 평양성을 향해 진격했다.[8]

3. 3. 평양성 함락

한양을 함락시키고 맹렬한 속도로 진격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7월 9일(음력 6월 1일) 개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으로 출발했다.[11] 7월 19일(음력 6월 11일) 조선선조는 다시 평양에서 의주로 피란하고 평양은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이조판서 이원익 등이 지키게 되었다. 성 안에서는 군민 3,000 ~ 4,000명이 을밀대 부근 숲에 옷을 걸치게 하여 군사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7월 21일(음력 6월 13일) 대동강에 도달한 고니시의 부대는 진을 치고 양각도를 건너 대동관을 조총으로 사격했다. 이에 윤두수이원익, 김침 등이 동대원의 일본군 진영을 기습 공격해 수백 명을 죽이고 말 수십 필을 빼앗았다. 그러나 다른 일본군들이 석회탄에 진을 쳐 여기를 지키던 조선군이 크게 패해 도망쳤다.[11]

7월 22일(음력 6월 14일) 새벽, 윤두수허숙김억추에게 대동강을 지키게 하고, 고언백에게 400명의 병력을 주어 부벽루 밑 능라도로 강을 건너 기습 공격을 하게 했다.[11] 그러나 군령을 지키지 못해 패배하고, 대동강에서 가장 얕은 여울인 왕성탄을 건너 평양성으로 퇴각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대동강의 가장 수심이 얕은 왕성탄을 알게 되었고, 그곳으로 강을 건너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12] 15일 밤에 고언백과 유경령은 소 요시토시의 진영을 기습했으나, 소 요시토시는 직접 칼을 뽑아 적병을 베는 등 분전했고[4], 조선군은 이선과 임욱경이 전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구로다 나가마사의 군세가 덮쳐오자 조선군은 대패하여 익사하는 자가 잇따랐다.[6] 구로다군은 이 전투에서 부장 구로다 마사요시를 잃었고, 나가마사 자신도 부상을 입었지만, 화살을 쏜 조선군 부장을 직접 쳐서 조선병을 수없이 베었다.[7]

결국 윤두수김명원은 군사들을 내보낸 뒤 무기를 모두 풍월루의 연못에 버리고 순안으로 빠져나왔다.[9] 일본군은 정찰병을 통해 조선군이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되자 평양성을 접수하고, 입간판을 세워 백성을 안심시켰으며, 성내의 병량 수십여 만 석을 압수했다.[10] 이로써 일본군은 평양성에 무혈입성하였고, 이는 전쟁 개전 60일 만에 일본군이 거둔 큰 성과 중 하나였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小西(こにし) 등 제1부대는 평양성을 함락시키자 평양성 개축 등을 실시하며 진격을 멈췄다. 제3부대인 구로다 나가마사는 평양성 개축을 마치자 담당 방어 구역인 황해도 방면으로 귀환했다.

녕변으로 도망쳤던 조선 국왕 선조는 함흥도의 경성으로 피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항웅 등은 함흥도로 가면 일본군이 쳐들어올 경우 도망갈 길이 없다고 간언했고, 그보다는 만약의 경우 요동으로의 퇴로를 확보할 수 있는 의주로의 피난을 진언했다. 선조는 이를 받아들여 류성룡 등과 함께 험로와 종자들의 도망 등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음력 6월 21일, 의주로 피신해, 이전부터 원군 파견을 요청했던 명나라로부터의 원군을 기다렸다. 그 사이에 조선의 사신 이덕형은 구원을 명나라 요동부총병 조승훈에게 요청하여 쾌락을 얻었다. 조승훈은 즉시 군세를 이끌고 평양으로 향했다. 이렇게 제1차 평양성 전투가 발발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까지 벌어지는 일본군과 명나라 군대 간의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4. 1. 조선의 피해와 전략적 후퇴

조선의 국왕 선조는 녕변으로 도망쳤다가 함흥도의 경성으로 피난하려 했으나, 이항웅 등의 반대로 요동으로의 퇴로를 확보할 수 있는 의주로 피신했다. 음력 6월 21일, 선조는 류성룡 등과 함께 의주에 도착하여 명나라에 원군 파견을 요청했다. 그 사이, 조선의 사신 이덕형은 명나라 요동부총병 조승훈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제1차 평양성 전투가 발발했고,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때까지 이어지는 일본군과 명나라 군대 간 전투의 시작이었다. 고니시 등 제1부대는 평양성을 함락시킨 후 평양성 개축 등을 실시하며 진격을 멈췄고, 제3부대인 구로다 나가마사는 평양성 개축을 마치고 담당 방어 구역인 황해도 방면으로 귀환했다.

4. 2. 일본군의 전략적 이점 확보

일본군 제1부대는 평양성을 함락시킨 후 평양성을 개축하며 진격을 멈췄다. 제3부대인 구로다 나가마사는 평양성 개축을 마치고 담당 방어 구역인 황해도 방면으로 귀환했다.

녕변으로 도망쳤던 조선 국왕 선조는 함흥도의 경성으로 피난하려 했다. 그러나 이항웅 등은 함흥도로 가면 일본군이 쳐들어올 경우 도망갈 길이 없다고 간언했고, 요동으로의 퇴로를 확보할 수 있는 의주로의 피난을 권유했다. 선조는 음력 6월 21일 의주로 피신하여 명나라의 원군을 기다렸다. 조선의 사신 이덕형은 명나라 요동부총병 조승훈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승낙을 얻었다. 조승훈은 즉시 군세를 이끌고 평양으로 향했다.

4. 3. 명나라의 참전

명나라 장군 조승훈은 1592년 8월 23일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에 도착했다. 小西(こにし) 등 일본군 제1부대는 평양성을 함락시킨 후 성을 개축하며 진격을 멈췄고, 제3부대인 구로다 나가마사는 평양성 개축을 마치고 담당 방어 구역인 황해도 방면으로 귀환했다.

녕변으로 피신했던 조선 국왕 선조는 함흥도의 경성으로 다시 피난하려 했으나, 이항웅 등의 반대로 요동으로 가는 길을 확보할 수 있는 의주로 피난했다. 음력 6월 21일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류성룡 등과 함께 나라에 원군 파견을 요청하며 지원군을 기다렸다. 그 사이 조선의 사신 이덕형은 명나라 요동부총병 조승훈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승낙을 얻었다. 조승훈은 즉시 군세를 이끌고 평양으로 향했고, 이는 제1차 평양성 전투의 발발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때까지 이어지는 일본군과 명나라 군대 간 전투의 시작이었다.

5. 평가

5. 1. 군사적 관점

5. 2. 정치적 관점

참조

[1] 웹사이트 평양전투(平壤戰鬪) https://encykorea.ak[...] 2023-06-04
[2] 서적 日本戦史・朝鮮役 偕行社 大正13年
[3] 서적 懲毖録
[4] 서적 日本戦史・朝鮮役
[5] 서적 日本戦史・朝鮮役
[6] 서적 懲毖録
[7] 서적 日本戦史・朝鮮役
[8] 서적 懲毖録
[9] 서적 懲毖録
[10] 실록 朝鮮王朝実録・宣祖修正実録
[11] 지식백과 평양성전투(1차) 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2002
[12] 서적 조일전쟁 진명출판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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