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 (일제강점기)
1. 개요
이진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이왕세자 이은과 일본 황족 마사코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1921년 도쿄에서 태어나 1922년 조선 방문 중 9개월 만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사망했다. 일선융합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급성 소화불량으로 사망했다는 발표와 달리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숭인원으로 조성되어 영휘원 내에 안장되었으며, 현재 사적 제361호로 지정되어 있다.
| 이름 | 이진 |
|---|---|
| 한자 표기 | 李晉 |
| 로마자 표기 | I Jin (2000년식) |
| 로마자 표기(매큔-라이샤워) | I Chin |
| 일본어 표기 | り しん |
| 한국어 표기 | 이 진 |
| 출생일 | 1921년 8월 18일 |
| 출생지 | 일본 제국 도쿄부 |
| 사망일 | 1922년 5월 11일 |
| 사망지 | 일본 제국 조선 경성부 덕수궁 석조전 (병사, 단순 병사인지 독살인지 불명확한 의문사) |
| 매장일 | 1922년 5월 17일 |
| 매장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숭인원 |
| 가문 | 대한제국 이왕가 |
| 신분 | 왕공족 |
| 경칭 | 전하 |
| 양부 | 이왕 |
|---|---|
| 생부 | 이은 공 |
| 양모 | 순정황후 해평 윤씨 |
| 양적모 | 순명황후 여흥 민씨 |
| 생모 | 이왕세제비 마사코 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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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사람 -
김종익 (1918년)
김종익(1918년)은 충청남도 부여 출신의 대한민국 정치인으로,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7대, 8대, 9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민주공화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과 민족중흥동지회 활동을 했다. -
일제 강점기 사람 -
이재설
이재설은 서울대 의대 출신으로 경제학을 전공한 후 재무부, 경제기획원 등에서 차관을 역임하고 한일회담 전문위원, 아주개발은행 설립 전권대표 등으로 활동하며 주인도네시아 대사, 체신부 장관, 농수산부 장관 등을 지낸 경제관료이자 정치인이다. -
의민황태자 -
이방자
이방자는 일본 왕족 출신으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가 되어 이은과 결혼 후 한국으로 귀국하여 장애인 복지 사업에 헌신하였으며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
의민황태자 -
의민태자
의민태자는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난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로, 영친왕 책봉 후 황태자가 되었으나 일본 유학 및 군 복무, 일본 황족과의 정략결혼, 광복 후 국적 미인정으로 일본에서 생활하다 귀국 후 영원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의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일본계 한국인 -
이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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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계 한국인 -
신중현
신중현은 1957년 데뷔하여 한국 최초 록 밴드 결성, 펄 시스터즈, 김추자 음반 프로듀싱 등 한국 록 음악의 기반을 다지고 '미인', '아름다운 강산' 등 히트곡 발표와 다양한 장르 도입으로 '한국 록의 대부'로 불리는 대한민국의 록 음악가, 기타리스트, 싱어송라이터, 음악 프로듀서이다.
2. 생애
1921년 일본 도쿄부에서 태어난 이진은 1922년 5월 11일, 조선 방문 중 덕수궁 석조전에서 9개월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평소 소화불량 증세를 보였고, 사망 직전 초콜릿색 덩어리를 토해냈다. 공식 사인은 급성 소화불량이었으나, 독살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사망 후 원손의 예에 따라 묘가 조성되었고, 묘는 원(園)으로 높여 숭인원(崇仁園)이라 불렀다. 순헌황귀비 엄씨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으며,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204-2 영휘원 내에 있다. 영휘원과 함께 사적 제361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후 이방자는 이은의 위로를 받으며 슬픔을 극복하고, 아들을 추모하는 와카(和歌)를 지었다. 부부는 5월 20일 도쿄로 돌아갔고, 이진의 유품은 8월에 도쿄부 내 이왕세자 저택에 마련된 신사(神祠)에 보관되었다.
2.1. 출생과 유년기
1921년 8월 18일 오전 2시 35분, 이왕세자 이은과 그의 비 마사코 여왕 (方子女王) 사이에서 첫 아이로 태어났다. 사가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는 그의 고조부였다. 출생을 맞아 황족과 같은 예우를 받고, 존칭에 "전하(殿下)"를 사용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는 당시 아직 왕공가궤범이 제정되지 않아 왕공족의 자녀 신분이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왕족과 일본 황족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일선융합"의 상징으로 주목받았다. 같은 달 24일에 "진(晋)"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태어난 직후에는 유모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 마사코 여왕이 직접 모유를 먹였다.
2.2. 조선 방문과 의문의 죽음
1921년 8월 18일 오전 2시 35분, 이은과 이방자 사이의 첫 아들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1922년 4월 23일, 이왕세자 부부는 생후 8개월 된 이진을 데리고 조선을 방문했다. 이는 이진과 순종과의 만남 등이 목적이었다. 4월 26일 오전 8시 45분, 세 사람은 부산항에 도착했다.
일본 귀국 전날인 5월 8일 밤, 창덕궁 인정전에서 이별 만찬회가 열렸다. 만찬회를 마친 이진은 덕수궁 석조전에 도착한 직후 급병을 알렸다. 만찬회 직전까지 웃던 이진이 갑자기 고통스러운 숨소리와 함께 청록색 액체를 토하기 시작했다. 응급 처치를 했지만, 아침이 되어도 갈색 고형물을 토하며 상태는 악화되었다. 5월 11일 15시 12분, 이진은 사망했다.
이진의 죽음은 급성 소화불량으로 발표되었으나, 독살설 등 여러 소문이 돌았다. 이방자는 아들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꼈다.
5월 17일, 조선식 장례가 경성에서 거행되었고, 경기도 양주군 청량리(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매장되었다. 이진의 묘는 숭인원으로, 영휘원과 함께 사적 제361호로 지정되어 있다.
2.3. 사인 논란과 독살설
이진은 1922년 5월 11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생후 9개월도 채 되지 않아 의문사하였다. 평소 소화불량 증세를 보였고, 사망 직전에는 초콜릿색 덩어리를 계속 토해냈다고 한다. 이진의 사인은 급성 소화불량으로 발표되었으나, 단순 병사인지 독살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본 귀국 전날인 5월 8일 밤, 창덕궁 인정전에서 열린 이별 만찬회를 마치고 석조전으로 돌아온 직후, 이진은 고통스러운 숨소리와 함께 청록색 액체를 토하기 시작했다.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아침까지 갈색 고형물을 토하며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사망했다.
이진의 죽음을 두고, 이왕조의 순혈에 일본인의 피가 섞이는 것을 꺼린 조선인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당시 경성에서는 "보도할 자유가 없는" 내용의 소문, 즉 독살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2.4. 장례와 묘소
1922년 5월 11일 이진은 덕수궁 석조전에서 의문사하였다. 사인은 급성 소화불량으로 발표되었으나,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이진은 생전에 소화불량에 시달렸고, 죽기 직전에는 초콜릿색을 띤 덩어리를 계속 토해냈다고 한다.
같은 달 17일, 어머니인 이방자는 참석하지 못한 채 조선식 장례가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거행되었고, 경기도 양주군 청량리(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매장되었다. 묘는 원손의 예로 원(園)으로 조성하여 숭인원(崇仁園)이라 하였다. 숭인원은 현재 영휘원 내에 있으며, 영휘원과 같이 사적 제361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