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진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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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진황후는 당나라 대종의 첩실이자 당 덕종의 어머니이다. 오흥 출신으로, 아버지 심이지는 비서감을 지냈다. 현종 시대에 태자 이형의 아들 이초에게 시집갔으며, 742년에 덕종을 낳았다. 안록산의 난으로 실종되었으며, 대종은 황후 자리를 비워두고 찾았으나 실패했다. 덕종 즉위 후 황태후로 추존되었으며, 여러 가짜 심진주 사건이 있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헌종 때 사망으로 선언되고 덕종의 사당에 봉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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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휘 | 심진주(沈珍珠) |
추존 시호 | 예진황후(睿眞皇后) |
신상 정보 | |
출생일 | 알 수 없음 |
출생지 | 오흥(吳興) |
사망일 | 759년 실종, 805년 경 사망으로 공식 선언 |
아버지 | 심역직(沈易直), 비서감 증 태사 |
배우자 | 당 대종(唐代宗) |
자녀 | 당 덕종(唐德宗) |
경력 | |
황후 | 806년 (추존) |
황태후 | 779년 (추존) |
능묘 | 원릉(元陵) |
2. 생애
예진황후의 출생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녀의 가문은 오흥(吳興, 오늘날의 후저우, 저장성) 출신으로 그 지역의 유력 가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심이지(沈易直)는 황실 정부에서 대리의 부사령관인 대리정을 지냈고, 이후 비서감(궁중 도서관의 관장)으로 칭송받았다. 현종의 개원 시대(713-741) 말기, 명망 있는 가문의 딸로서 현종의 아들이자 황태자인 이형의 궁궐에 선택되어, 이형의 장남인 이초 광평왕에게 주어졌다. 그녀는 이초의 정실 부인으로 지정되지 않았으며, 다른 후궁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장 저명한 후궁은 최씨(崔氏)였는데, 최씨의 어머니는 양귀비의 여동생이라는 지위 덕분에 궁정에서 매우 존경받는 여인이었다.[4] 예진황후는 742년 5월에 이초의 장남인 이괄을 낳았다.
2. 1. 당 대종 시절
762년 광평군왕이 당나라 제8대 황제 당 대종으로 즉위한 후, 황후 자리를 계속 비워두고 심진주를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1] 당 대종이 총애하던 후궁 귀비 독고씨(貴妃 獨孤氏)도 살아 생전에는 황후가 되지 못하고 죽은 뒤에야 정의황후(貞懿皇后)로 추존되었을 정도로, 장남 당 덕종의 친모 심진주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1]2. 2. 당 덕종 시절
당 대종이 승하하고 779년 당 대종과 심진주의 장남 당 덕종이 당나라 제9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 덕종은 친모 심진주(沈珍珠)를 예정황태후(睿貞皇太后)로 추존하고 아버지에 뒤이어 어머니를 찾아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13][14] 가짜 심진주 사건도 여러 번 있었다.당 덕종은 외조부 심역직(沈易直)을 태사(太師)에, 외숙부 심진(沈震)을 태위(太尉)에 추증하였다.[13][14]
2. 3. 당 순종, 헌종 시절
당 덕종이 승하하고 805년 장남 당 순종이 당나라 제10대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할머니 예정황태후 심진주(睿貞皇太后 沈珍珠)를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15]당 순종이 병으로 805년 장남 당 헌종에게 양위하여 당 헌종이 당나라 제11대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증조할머니 예정황태후 심진주를 찾는 것을 중단하고 806년 예진황후(睿眞皇后)로 추존하였다. 그리고 예진황후 심씨(睿眞皇后 沈氏)의 의관묘(가짜묘)를 만들어 당 대종의 원릉(元陵)에 합장하였다.[15]
3.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6대조 | 심협 | 북주 상서좌복야, 북주 무제의 후비 심황후의 아버지 |
고조부 | 심림 | 수나라 대리경 |
증조부 | 심사형 | 당나라 합주사마 |
조부 | 심개복 | 당나라 장안현령 |
숙부 | 심종도 | 당나라 기주자사 |
숙부 | 심역종 | |
아버지 | 심역직 | 당나라 당 대종의 국구, 당나라 비서감 증 태사 |
시아버지 | 당나라 당 숙종 | |
남편 | 당나라 당 대종 | |
아들 | 당나라 당 덕종 | |
며느리 | 소덕황후 왕씨 | |
손자 | 당나라 당 순종 | |
손자며느리 | 장헌황후 왕씨 | |
증손자 | 당나라 당 헌종 | |
남동생 | 심제 | |
조카 | 심화 | 당나라 전중감 |
당질 | 심휘 | 당나라 당 순종의 부마, 서하공주(西河公主)의 남편 |
남동생 | 심진 | 당나라 비서소감 증 태위 |
조카 | 심방 | 당나라 태상소경 겸 어사중승, 금오장군 |
4. 안사의 난과 실종
762년 당 대종이 즉위했으나, 심진주는 여전히 실종 상태였다.[1] 대종은 황후 자리를 비워둔 채 심진주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총애하던 귀비 독고씨(貴妃 獨孤氏)조차 황후가 되지 못하고, 사후에야 정의황후(貞懿皇后)로 추존될 정도로 심진주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1]
4. 1. 안사의 난 발발 (755년)
755년 안록산이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황제를 자칭하고 낙양을 수도로 하는 연을 세웠다.[1] 756년 당 현종(唐玄宗)이 안록산에 쫓겨 도성을 버리고 피난가자 광평군왕의 아버지 당 숙종(唐肅宗)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1]4. 2. 낙양 재회와 재이별 (757년-759년)
755년 안록산의 난으로 광평군왕과 헤어지게 되었다. 광평군왕의 할아버지 당 현종이 안록산에 쫓겨 도성을 버리고 피난가자 그 틈을 타 756년 광평군왕의 아버지 당 숙종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757년 낙양을 되찾자 심진주와 광평군왕은 재회하게 된다.[1] 758년 광평군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지만 759년 사사명이 다시 낙양을 함락하게 되자 심진주는 행방이 묘연하게 된다.[1] 761년 낙양이 재차 수복되었지만 심진주는 찾지 못한다.[1]755년, 장군 안록산이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곧 남쪽으로 진격하여 황제를 자칭하고 낙양을 수도로 하는 새로운 연을 세웠다. 756년 여름, 연군은 당의 수도 장안에 접근했고, 당 현종은 성도로 피난을 가야 했다. 이형은 현종을 따라 성도로 가지 않고 영무로 피신하여 황제로 즉위했다(당 숙종). 이초 또한 그의 아버지를 따라 영무로 갔다. 심씨는 장안에 남겨졌고, 연군에게 붙잡혀 낙양으로 끌려가 궁궐 감옥에 갇혔다. 757년,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가 안록산을 암살하고 황위를 계승한 후, 이초가 지휘하는 당과 회흘 연합군이 장안을 탈환하고 낙양을 되찾았다. 이초는 낙양에서 심씨와 재회했지만, 당시 안경서의 잔여 세력에 대한 작전을 계획하느라 심씨를 장안으로 호송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758년, 안록산과 안경서의 전 부장이었던 사사명은 잠시 당에 항복했지만, 당의 권위에 반기를 들고 남쪽으로 진격했다. 759년, 그는 황제를 칭하고 (연을 세우며) 낙양을 다시 점령했다. 그 후 이초는 심씨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762년, 당과 회흘 연합군이 사사명의 아들인 계승자 사조의에 대항하여 낙양을 다시 탈환했을 때, (이때 이초의 이름은 이예로 바뀌어 당 대종이 되었다) 심씨는 어디에도 없었다.[1]
4. 3. 실종 이후의 노력
762년 당 대종이 황제로 즉위한 뒤에도 황후 자리를 비워두고 심진주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13][14] 779년 당 대종이 승하하고 아들 당 덕종이 즉위한 후에도 심진주를 예정황태후(睿貞皇太后)로 추존하고 계속 찾았으나 역시 실패했다.[15]당 덕종은 심진주를 찾기 위해 제국 전역에 사신을 여러 번 보냈지만 찾을 수 없었다. 765년에는 광징(廣澄)이라는 비구니가 자신이 심진주라고 주장했지만, 심문 결과 당 대종의 유모였음이 밝혀져 채찍으로 맞아 죽었다.[5]
780년, 당 덕종은 관료 고참(高參)의 제안으로 관리를 보내 심진주를 다시 찾게 했다. 동생인 목왕 이술(李述)에게 이 일을 맡기고, 교림을 부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심씨 가문 4명에게 환관들을 도와 심진주를 찾도록 했다.
781년, 시녀 이진일(李真一)이 권력 있는 환관 고력사의 양녀를 인터뷰했는데, 그녀가 심진주와 닮았다고 생각하여 당 덕종에게 보고했다. 그녀는 처음에 부인했지만, 환관들에 의해 강제로 상양궁(上陽宮)으로 옮겨졌고, 결국 자신이 심진주라고 주장했다. 당 덕종은 기뻐하며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했지만, 그녀의 양 오빠 고승열(高承悅)이 편지를 보내 그녀의 진짜 신분을 밝혔다. 당 덕종은 고력사의 양손자 판경초(樊景超)를 보내 그녀를 확인하게 했고, 판경초는 그녀가 가짜임을 밝혀냈다. 당 덕종은 그녀를 처벌하지 않고 "내 어머니를 찾을 수 있다면 100번 속아도 괜찮다"라고 말했다.
이후에도 심진주를 사칭하는 사건이 네 차례 더 있었지만, 모두 가짜로 판명되었다.
당 덕종은 어머니를 찾지 못했지만, 외가인 심씨 가문을 크게 우대하여 많은 이들에게 작위를 내렸다. 805년 당 덕종이 승하하고, 당 순종을 거쳐 당 헌종이 즉위하자 심진주를 찾는 것을 중단하고 806년 예진황후(睿眞皇后)로 추존했다. 그리고 예진황후 심씨의 의관묘(가짜묘)를 만들어 당 대종의 원릉(元陵)에 합장했다.[15]
5. 가짜 심진주 사건
779년 당 대종이 승하하고 당 대종과 심진주의 장남 당 덕종이 당나라 제9대 황제로 즉위하자, 당 덕종은 자신의 친모 심진주(沈珍珠)를 예정황태후(睿貞皇太后)로 추존하고 아버지에 뒤이어 어머니를 찾아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가짜 심진주 사건이 여러 번 있었다.[6]
당 덕종은 자신의 외조부 심역직(沈易直)을 태사(太師)에, 외숙부 심진(沈震)을 태위(太尉)에 추증했다.[13][14]
5. 1. 광징(廣澄) 사건 (765년)
765년, 비구니 광징(廣澄)이 자신이 신비(예진황후)라고 주장했으나, 심문 결과 이괄의 유모였음이 밝혀졌다. 대종은 그녀를 채찍으로 때려 죽였다.[5]5. 2. 고씨 부인 사건 (781년)
779년 당 대종이 승하하고 당 덕종이 즉위한 후, 친모 심진주를 예정황태후(睿貞皇太后)로 추존하고 어머니를 찾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지만, 여러 차례 가짜 심진주 사건이 발생했다.[6]781년, 고씨 부인이 태후 신씨로 여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권력 있는 환관 고력사의 양녀였던 시녀 이진일(李真一)은 고씨 부인이 태후 신씨일지도 모른다고 덕종 황제에게 보고했다. 당시 고씨 부인이 진짜 태후 신씨인지 확인할 수 있는 신씨 가문의 어른은 남아있지 않았고, 그녀를 만난 환관과 시녀들은 모두 그녀가 태후 신씨라고 생각했다.[6]
고씨 부인은 처음에는 자신이 태후 신씨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환관들의 강요로 상양궁(上陽宮)으로 옮겨져 태후를 위한 물품을 제공받았다. 결국 고씨 부인은 자신이 태후 신씨라고 주장하게 되었고, 덕종 황제는 매우 기뻐하며 그녀를 정식으로 맞이할 준비를 했다.[6]
그러나 고씨 부인의 양 오빠 고승열(高承悅)은 그녀가 발각될 경우 가문에 닥칠 재앙을 두려워하여 덕종 황제에게 그녀의 내력을 상세히 적은 편지를 보냈다. 이에 덕종 황제는 고력사의 양손자 판경초(樊景超)를 보내 그녀를 만나게 했다. 판경초는 그녀를 보자마자 진짜 태후가 아님을 알아보고, 그녀의 시종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6]
고씨 부인은 판경초에게 자신이 억지로 태후 신씨라고 주장해야 했다고 항변했다. 덕종 황제는 그녀를 처벌하면 다른 사람들이 태후 신씨를 찾는 것을 꺼릴까 봐 처벌하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내 어머니를 찾을 수 있다면 100번 속아도 괜찮다"라고 말했다. 고씨 부인 사건 이후에도 여러 차례 가짜 태후 사건이 있었지만, 진짜 태후 신씨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6]
5. 3. 기타 사칭 사건
765년, 광징(廣澄)이라는 비구니가 자신이 신비(예진황후)라고 주장했지만, 심문을 통해 그녀는 황태자 이괄의 유모였음이 밝혀졌다. 대종은 그녀를 채찍으로 때려 죽였다.[5]781년, 시녀 이진일(李真一)이 권력 있는 환관 고력사의 양녀를 인터뷰했는데, 그녀가 태후 신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덕종에게 보고했다. 그녀는 처음에 부인했지만, 환관들의 강요로 상양궁(上陽宮)으로 호송되었고, 결국 자신이 태후 신씨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덕종은 매우 기뻐했지만, 고씨 부인의 양 오빠 고승열(高承悅)이 그녀의 내력을 밝히는 편지를 보내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고력사의 양손자 판경초(樊景超)가 그녀를 만나 진실을 밝혀냈고, 덕종은 그녀를 처벌하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내 어머니를 찾을 수 있다면 100번 속아도 괜찮다"라고 말했다.
고씨 부인 사건 이후, 다른 네 차례의 사건에서 여성들이 태후 신씨를 사칭했지만,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실제 태후 신씨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6]
6. 현대의 재조명
2017년 베이징 위성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드라마 大唐荣耀|대당영요중국어에서 징톈(만리장성)은 심진주 역을, 런자룬은 그녀의 남편 역을 맡았다.[9][10]
6. 1. 드라마 "대당영요(大唐榮耀)" (2017)
2017년 1월부터 베이징 위성 텔레비전에서 드라마 ''대당영요''가 방영되었다. 징톈은 심진주 역을, 런자룬은 심진주의 남편 역을 맡았다.[9][10]참조
[1]
문서
[2]
문서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Old Book of Tang
http://www.sidneyluo[...]
2008-09-21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Zizhi Tongjian
[7]
서적
Jiu Tang Shu
[8]
서적
Jiu Tang Shu
[9]
뉴스
TV Series ‘The Glory of Tang Dynasty’ on Chinese Queen Big Hit
http://www.womenofch[...]
All China Women’s Federation
2017-02-22
[10]
웹사이트
The Glory of Tang Dynasty
https://www.imdb.com[...]
2017-07-23
[11]
문서
《오흥심씨술조덕기(吳興沈氏述祖德記)》
[12]
문서
심역종 묘지 비문(沈易從 墓志 碑文)
[13]
문서
《원화성찬(元和姓纂)》
[14]
문서
《책부원구(册府元龟)》
[15]
문서
대당영요(大唐荣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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