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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목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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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목황후(太穆皇后)는 선비족 출신으로, 당 고조 이연의 부인이자 당 태종 이세민의 어머니이다. 북주 무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남편 이연에게 정치적 조언을 하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는 등 현명한 여성으로 평가받았다. 이연과의 결혼을 통해 이건성, 이세민, 이현패, 이원길, 평양소공주를 낳았다. 탁군에서 45세로 사망했으며,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한 후 목황후로 추존되었고, 이후 태목황후, 태목순성황후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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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목황후
기본 정보
청나라 시대의 컬렉션 "백미신영도전(百美新咏图传)"에 수록된 두씨 부인의 초상화
작위당나라 공작부인
재위 기간581년? – 613년?
사후 작호태목황후(太穆皇后)
배우자이연
자녀이건성
이세민
이현패
이원길
평양공주
아버지두의
어머니양양공주 우문씨
상세 정보
출생569년?
사망613년?

2. 생애

두씨는 선비족 귀족 출신으로, 아버지는 북주에서 정주 총관을 지낸 두의(竇毅)이고, 어머니는 북주 문제의 딸인 양양장공주(襄陽長公主)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외삼촌인 북주 무제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두의는 재능과 용모를 겸비한 딸에게 걸맞은 현명한 남편을 찾아주고자 했다. 그는 대문에 두 마리의 공작 그림을 걸어두고, 구혼자들에게 화살 두 대로 공작의 눈을 맞히는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했다. 수십 명의 구혼자들이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이연이 마지막으로 활을 쏘아 두 눈을 모두 맞혀 두씨와 혼인하게 되었다.

수나라의 상서 장손치는 두씨의 명성을 듣고 동생 장손성에게 당나라 가문과 사돈을 맺을 것을 권했다. 장손성은 자신의 딸 장손씨를 두씨의 아들 이세민과 혼인시켰다. 장손씨는 훗날 당 태종의 황후가 되었으며, 두씨와도 원만한 고부 관계를 유지했다.

두씨는 남편 이연이 부풍군 태수로 있을 때 많은 준마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양제에게 바칠 것을 권했다. "상께서는 말을 좋아하십니다. 어찌 바치지 않으십니까? 함부로 머물러 두기만 해도 죄를 얻을 뿐, 무익할 것입니다"라고 조언했지만, 이연은 듣지 않았고 결국 견책을 받았다. 훗날 이연은 두씨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양제에게 매와 개 등 진귀한 동물들을 헌상하여 장군으로 발탁되었다. 이연은 "빨리 너희 어머니의 말씀을 들었더라면, 더 오랫동안 이 관직에 있었을 것을"이라며 탄식했다.

두씨는 탁군에서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연은 즉위 후 두씨에게 목(穆)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다시 황후를 세우지 않았다.

2. 1. 어린 시절

두씨는 선비족 귀족 출신으로 아버지는 북주에서 정주 총관을 지낸 두의(竇毅)이고, 어머니는 북주 문제의 딸이자 북주 무제의 누나인 양양장공주(襄陽長公主)였다. 어린 시절을 북주의 황궁에서 보내며 외숙부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여계』, 『열녀전』 등을 읽고 한 번 읽으면 잊지 않았다고 한다.

무제는 정략결혼으로 돌궐의 아사나 황후를 아내로 맞이하고도 소홀히 대했는데, 두씨는 "중국은 아직 통일되지 않았고 돌궐의 힘은 막강합니다. 그러니 외삼촌께서는 황후께 잘 대해주셔야 합니다. 돌궐의 도움이 있어야 강남과 북제에 맞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무제는 어린 조카의 충고를 받아들였다고 한다.[18]

581년 양견이 북주를 멸하고 수나라를 건국하자 두씨는 외숙부를 구할 수 없는 것을 한탄하며 자신이 남자가 아닌 것을 분개했다.[19]

2. 2. 결혼

선비족 귀족 출신인 두씨는 북주 정주 총관을 지낸 두의(竇毅)와 북주 문제의 딸이자 북주 무제의 누이인 양양장공주(襄陽長公主)의 딸이었다. 두씨의 부모는 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걸맞은 신랑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대문에 두 마리의 공작을 그린 그림을 걸어두고, 화살로 공작의 눈을 정확히 맞추는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고 했다.[20] 수십 명이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이연만이 유일하게 성공하여 두씨와 혼인하였다.[20]

두씨와 이연은 깊이 사랑했으며, 어디든 함께 했다. 궁궐에서 자란 두씨는 정치와 역사 책에 익숙했다. 그녀는 남편의 학업을 도왔고, 자녀들을 키웠다. 이연과의 사이에서 이건성, 이세민, 이현패, 이원길, 평양공주 4남 1녀를 두었다.[20]

두씨는 남편에게 정치적인 조언을 하며 훌륭한 조력자 역할을 했다.[20] 수나라 상서 장손치는 두씨의 현명함을 전해 듣고, 동생 장손성에게 당나라 가문과 혼인 동맹을 맺도록 설득했다. 장손성은 자신의 딸 장손씨를 두씨의 아들 이세민과 혼인시켰다.[20] 장손씨는 훗날 당 태종의 황후가 되었다.

2. 3. 시어머니와의 관계

이연의 어머니 독고 부인(원정황후)은 성격이 까다로워 병이 들었을 때 이씨 가문의 다른 며느리들은 모두 간병을 꺼렸다.[1] 독고 부인은 명망 있는 장군 독고신의 딸이자, 독고황후와 독고가라의 자매로, 이연의 아버지 이빙이 일찍 죽은 후 이씨 가문을 맡아 관리했다.[1] 독고 부인은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두씨는 시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관리하고 효성으로 독고 부인을 섬기며 옷도 갈아입지 않고 곁을 지켰다.[1] 한번은 독고 부인이 심하게 앓았는데, 무모하고 완고한 성격 때문에 다른 며느리들은 돕기를 거부했지만, 두씨만이 독고 부인을 간호하여 한 달 만에 회복시켰다.[1] 독고 부인은 이에 고마워하며 두씨를 매우 아꼈다.[1]

2. 4. 죽음과 추존

두씨는 남편 이연이 제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동아시아 나이로 45세에 사망했다.[13] 이연은 당나라를 건국하기 전인 618년 1월 8일에 두씨에게 목(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13] 수나라를 무너뜨리고 당나라를 건국한 후인 618년 7월 3일에는 두씨를 목황후(穆皇后)로 추존했다.[14]

이연은 즉위 후 새로운 황후를 세우지 않았다. 이후 두씨의 아들 이세민이 황위에 오른 후 635년 12월 12일에 태목황후(太穆皇后)로 추존했고,[15] 749년 7월 22일에는 태목순성황후(太穆順聖皇后)로 다시 추존했다.[16][17]

3. 가계

두씨는 선비족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북주에서 정주 총관을 지낸 두의이며, 어머니는 북주 문제 우문태의 딸이자 북주 무제 우문옹의 누이인 양양공주이다.[18]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기억력이 좋아 외숙부인 무제의 총애를 받으며 북주 황궁에서 자랐다.[18]

581년 양견이 북주를 멸하고 수나라를 건국하자, 두씨는 자신이 남자가 아니라 외숙부를 구할 수 없음을 한탄했다.[19] 두씨의 부모는 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신랑감을 신중하게 골랐다. 대문에 두 마리의 공작 그림을 걸고, 화살로 공작의 눈을 정확히 맞추는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고 했는데, 당 고조 이연이 유일하게 성공하여 혼인하게 되었다.[20]

두씨는 이연과의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었으며, 남편에게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20] 훗날 수나라 상서 장손치는 동생 장손성에게 두씨와 사돈을 맺을 것을 권유했고, 장손성은 딸 장손씨를 두씨의 아들 이세민과 혼인시켰다.[20]

두(竇)씨는 오르도스 지방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흉노계 비야터우 집단의 지도자였던 아버지 두의(竇毅)와 서위의 집정(執政) 우문태(북주의 문제)의 다섯째 딸인 양양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3. 1. 부모

선비족 귀족 출신인 아버지 두의북주에서 정주 총관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북주 문제의 딸이자 북주 무제의 누나인 양양공주였다.[18] 두씨는 어린 시절 북주 황궁에서 외숙부 무제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18]

두의는 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좋은 신랑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대문에 공작 두 마리를 그린 그림을 걸고, 화살로 공작 눈을 맞추는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고 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도전했지만 실패했고, 이연만이 성공하여 두씨와 결혼하게 되었다.[20]

두씨는 장손성에게 당나라 가문과 혼인 동맹을 맺도록 설득했다. 장손성의 아들 장손무기는 훗날 관료가 되었고, 딸 장손씨는 두씨의 며느리가 되었다.[20]

두(竇)씨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아버지두의 (竇毅)북주의 상주국(上柱國), 신무공 (神武公)
어머니양양공주 (襄陽公主)우문태(북주의 문제)의 다섯째 딸
오빠두현
사촌 오빠두강


3. 2. 배우자와 자녀

당 고조 이연(566년 4월 7일 ~ 635년 6월 25일)과의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었다.

이름작위비고
이건성(589년 ~ 626년)은태자
이세민(598년 ~ 649년)당 태종
이현패(599년 ~ 614년)위회왕
이원길(603년 ~ 626년)초자왕
평양소공주(? ~ 623년)채소(? ~ 638년)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다.



두씨는 남편 이연에게 자주 조언을 하며 정치 고문 역할을 했다.[20] 수나라의 상서 장손치는 동생 장손성에게 "그런 여인이 낳은 아이는 범상치 않을 테니 사돈을 맺도록 하라."고 충고했다. 장손성은 자신의 딸 장손씨를 두씨의 아들 이세민과 혼인시켜 사돈을 맺었다.[20]

4. 평가

두씨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남편 이연의 정치적 조력자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20] 특히, 북주 무제에게 돌궐과의 화친을 권유한 것은 당시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한 현명한 판단이었다.[18] 훗날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20] 이세민의 어머니로서도 존경받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두씨는 외숙부인 북주 무제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당시 북주는 돌궐과 정략결혼을 통해 아사나 황후를 맞이했지만, 무제는 그녀를 소홀히 대했다. 이를 본 두씨는 무제에게 "중국은 아직 통일되지 않았고 돌궐의 힘은 막강합니다. 그러니 외삼촌께서는 황후 마마께 잘 대해주셔야 합니다. 돌궐의 도움이 있어야 강남과 북제에 맞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조언했고, 무제는 이를 받아들였다.[18]

581년, 양견이 북주를 멸망시키고 수나라를 건국하자 두씨는 "내가 남자가 아닌 것이 한스럽다. 숙부님의 집안의 재앙을 구원하지 못하다니"라며 한탄했다.

두씨는 남편 이연이 수나라 양제에게 좋은 말을 바치지 않아 견책을 당했을 때, "상께서는 말을 좋아하십니다. 어찌 바치지 않으십니까? 함부로 머물러 두기만 해도 죄를 얻을 뿐, 무익할 것입니다"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훗날 이연은 두씨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 양제에게 매와 개를 헌상했고, 장군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두씨는 시어머니 독고씨를 정성껏 모셨다. 독고씨는 성격이 까다로워 다른 며느리들이 꺼렸지만, 두씨는 곁에서 간호하며 효를 다했다.

청나라의 『백미신영도전』에서는 중국 역대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미인 백 명에 두씨를 선정하기도 했다.

참조

[1] 서적 Sui Shu
[2] 서적 Tangwen Shiyi
[3] 서적 Jiu Tang Shu
[4] 서적 Zhou Shu
[5] 서적 Book of Zhou
[6] 서적 Xin Tang Shu
[7]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Medieval China, Historical Dictionaries of Ancient Civilizations and Historical Eras, No. 19 The Scarecrow Press 2009
[8] 서적 Zhou Shu
[9] 서적 Jiu Tang Shu
[10] 서적 Zhou Shu
[11] 서적 Modern Chinese Edition of Zizhi Tongjian Yuan-Liou Publishing Co. Ltd
[12] 문서
[13] 서적 Zizhi Tongjian
[14] 서적 New Book of Tang
[15] 서적 Jiu Tang Shu
[16] 서적 The Poetics of Sovereignty: On Emperor Taizong of the Tang Dynasty
[17] 서적 Jiu Tang Shu
[18] 서적 정관의 치 에버리치홀딩스 2008
[19] 서적 구당서
[20] 서적 정관의 치 에버리치홀딩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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