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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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경업은 임진왜란 중 태어나 조선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한 무관이다.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굵직한 사건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병자호란 당시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다. 청나라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여 명나라로 망명했으나, 귀국 후 김자점의 모함으로 인해 처형당했다. 사후 복권되었으며,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소설 《임경업전》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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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무공신 - 정충신
정충신은 임진왜란 때 무관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고, 다방면에 능통했으며, 사후 충무의 시호를 받았다. - 임경업 - 임경업전
임경업전은 조선 인조 시대 무신 임경업의 생애와 활약상, 청나라 침략에 맞선 용맹, 간신 김자점의 모함으로 인한 비극적인 죽음을 다룬 고전 소설로,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섞어 영웅적 면모를 부각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민중의 염원을 담아 조선 후기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 임경업 -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는 조선 시대 임경업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숙종 때 건립된 사당으로,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서의 공을 기리며 유품과 장군 부인의 정렬비가 함께 보존되어 있다. - 군웅신 - 최영
최영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 등 국방을 굳건히 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공민왕을 보필했으나, 우왕의 요동정벌에 참여했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에 의해 처형당한 후 무민이라는 시호를 받은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무신이다. - 군웅신 - 이순신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을 지휘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순신은 뛰어난 무예와 지휘능력으로 수많은 해전에서 승리하며 조선을 지켰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조선 중기의 무장이다.
임경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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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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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임경업 |
한자 표기 | 林慶業 |
로마자 표기 | Im Gyeongeop |
별명 | 호: 고송 |
시호 | 충민공(忠愍公) |
출생 | 1594년 12월 13일 |
출생지 | 조선 충청도 충주목 남변면 달천촌 |
사망 | 1646년 8월 1일 (53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종교 | 유교(성리학) → 불교 → 유교(성리학) |
가족 관계 | |
부 | 임황 |
형제자매 | 임사업(아우) |
경력 | |
소속 | 명나라 → 조선 |
군사 복무 | 조선 육군 |
복무 기간 | 1618년 ~ 1642년 |
최종 계급 | 조선국 관군 차석조방장(朝鮮國 官軍 次席助防將) |
지휘 | 조선국 육군 조방장(朝鮮國 陸軍 助防將)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병자호란 정묘호란 |
2. 생애
임경업은 임진왜란 중 충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임황은 절충장군까지 올랐으나, 임진왜란 이후 여러 번 귀양살이 끝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임경업은 고위 관료의 후손으로, 1618년 형과 함께 무과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에 정충신 장군 휘하에서 활약하여 이괄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에 오르고 승진과 명성을 얻었으며, 첨절제사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1]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영장으로 강화에 갔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된 후였다. 1630년 평양중군으로 검산성(劒山城)과 용골성(龍骨城)을 수축하는 한편 가도(島)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 유흥치(劉興治)의 군사를 감시, 그 준동을 막았다. 1633년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명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공유덕(孔有德) 등의 무리를 토벌하여 명나라로부터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1]
1634년 의주부윤으로 청북방어사를 겸임할 때 포로를 석방했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636년 무혐의로 복직되었다.[1]
2. 1. 병자호란 이전
임경업은 어릴 적부터 기상이 활달하고 용감하여 전쟁놀이를 좋아하였다. 6세 때 진을 치고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데, 어른들이 진영을 밟고 지나가려 하자, "안됩니다. 이 곳은 대장군이 지휘하는 진영이므로 아무도 지나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또한 학문도 비상하여 글재주가 있었다.[1]임경업은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하였고,[1] 1620년 소농보권관, 1622년 중추부첨지사를 거쳤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에 응모, 출전하여 정충신 휘하에서 머무르다가 안현(鞍峴) 싸움에서 이괄의 군대를 맞아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에 올랐다.[1]
그 후 우림위장, 방답진첨절제사 등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영장으로 강화에 갔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된 후였다.[1] 1630년 평양중군으로 검산성(劒山城)과 용골성(龍骨城)을 수축하는 한편 가도(島)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 유흥치(劉興治)의 군사를 감시, 그 준동을 막았다.[1] 1633년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명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공유덕(孔有德) 등의 무리를 토벌하여 명나라로부터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1]
1634년 의주부윤으로 청북방어사를 겸임할 때 포로를 석방했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636년 무혐의로 복직되었다.[1]
2. 2. 병자호란과 백마산성 전투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의주부윤이었던 임경업은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막고 지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김자점의 방해로 인해 결국 남한산성까지 포위되었다.[1] 김자점은 왕위를 탐내던 인물로, 임경업에게 고의로 지원을 늦춰 청나라 군대가 남쪽으로 진군하도록 만들었다.병자호란 직후, 임경업은 백마산성에서 후금 군대의 기세를 꺾어 놓았다. 그러나 적군은 백마산성을 피해 서울로 바로 공격해 들어왔고, 조선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후금에 항복해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경업은 땅을 치며 크게 통곡하였다.[1]
임경업은 포위된 수도로 군대를 이동하여 청나라 장군(홍타이지의 조카 요추) 한 명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조선의 항복 소식이 먼저 전해졌다. 그는 조카를 죽인 죄로 청 황제에게 불려갔으나, 임금과 나라를 지키려 한 그의 노력(항복 사실을 몰랐다는 점도 포함)이 인정되어 풀려났다. 임경업은 2만 명의 병력이 있었다면 심양(당시 청나라 수도)을 직접 공격하여 전쟁의 결과를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2. 3. 명과의 연합 시도와 좌절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김자점의 방해로 실패하고 남한산성까지 포위되었다.[1] 병자호란 직후 여진족이 다시 침입했을 때, 백마산성에서 후금 군사들의 기세를 꺾었지만, 적이 백마산성을 피해 서울로 공격해 오면서 조선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후금에 항복했다. 임경업은 이 소식에 통곡하였다.[1]1637년 청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청하여 명나라와 싸워야 했을 때, 임경업은 명나라에 자신의 본심이 아님을 알리고 전략을 알려주어 피해를 줄이려 했다.(1637년 가도 정벌)[1] 1640년 안주목사 시절, 청나라의 명령으로 금주위에 주둔 중인 명군을 공격하러 출병했으나, 명군과 내통하여 의도적으로 선봉장을 피하고 청나라 장수 심세괴를 선봉에 서게 하여 전사하도록 만들었다.[1]
같은 해 1637년, 청나라가 명나라 공격을 위해 조선에 증원군을 요청하자, 임경업은 해군 증원군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패배를 복수하고자 명나라군에게 밀서를 보내 청나라의 작전 계획을 알리는 이중 작전을 펼쳤다. 1640년에도 증원군으로 파견되었지만, 다시 한번 승려를 통해 명나라에 밀서를 전달하며 이중 작전을 반복했다. 이로 인해 조선군은 명나라군과 실제로 전투를 벌이지 않았고, 만주군이 대부분의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가도 주둔 명군 지휘관 홍승주가 청나라에 투항하면서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체포되었다.[1] 1642년, 임경업과 관련된 명나라 장군이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임경업과 명나라의 관계가 드러났다. 청나라는 즉시 체포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임경업을 체포하고 베이징으로 압송했다. 임경업은 청으로 압송되기 전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서 탈출했고, 청 태종은 임경업을 빌미로 조선 내 반청세력에 대한 소탕령을 내렸다.[1] 조선에 더 머무르기 힘들어진 임경업은 1643년 명나라로 망명하게 된다.[1]
2. 4. 귀국과 죽음
1646년 인조는 심기원의 모반에 임경업이 연루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임경업을 심문하기 위해 청나라에 송환을 요청했고, 순치제는 이를 허락했다.[3]조선에 돌아온 임경업은 친청파 인사인 김자점의 비판과 그에게 죄를 주어야 한다는 여론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1646년 6월 17일 (인조 24년 6월 17일) 인조의 친국 과정에서 심기원과의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 밝혀지자, 임경업을 시기하던 김자점은 그가 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들어가 국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형리들을 시켜 임경업을 장살(杖殺)시켰다.[3]
3. 사후
임경업은 사후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김자점이 몰락하고, 북벌론을 주장하던 송시열, 윤휴 등이 집권하였으나 청나라의 비위를 거스를 것을 두려워하여 그의 신원과 복권 주장은 번번히 묵살되었다.[1]
3. 1. 복권과 추모
1697년(숙종 23) 복권(復官)되었으며, 충주 충렬사(忠烈祠), 선천의 충민사 등에 배향되었다.[1] 1726년(영조 2년) 호서 지방 사람들이 충렬사(忠烈社)를 세웠고, 이듬해(영조 3년) 조정에서 사액(賜額)을 내리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1] 1791년(정조 15년)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으니 “어제달천충열사비”이다.[1] 1978년 충렬사는 정부의 특별지원으로 성역화되었다.[1]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구전 소설 임경업전 등이 있다.[1] 시호는 충민이다.[1]
3. 2. 문학과 민간 신앙
임경업은 사후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김자점이 몰락하고, 송시열, 윤휴 등이 집권하였으나 청나라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의 신원과 복권 주장은 번번히 묵살되었다.[1]1697년(숙종 23) 복권되었으며, 충주 충렬사(忠烈祠), 선천의 충민사 등에 배향되었다.[1] 1726년(영조 2년) 호서 지방 사람들이 충렬사(忠烈社)를 세웠고, 이듬해(영조 3년) 조정에서 사액(賜額)을 내리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1] 1791년(정조 15년)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으니 “어제달천충열사비”이다.[1] 1978년 충렬사는 정부의 특별지원으로 성역화되었다.[1]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구전 소설 임경업전 등이 전해진다.[1] 시호는 충민이다.[1]
4. 평가와 영향
(참조할 원문 소스가 비어있으므로, 이전 결과와 동일합니다.)
5. 가계
임황
6. 대중문화 속 임경업
7. 관련 설화
임경업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민중의 보상 심리로 인해, 영웅의 죽음을 부정하고 민중의 역사 인식이 반영된 전설, 설화, 민담 등이 나타나 임경업의 영웅적인 모습과 신격화에 기여했다. 민간에서는 임경업 장군신이 잡귀를 쫓아내고 병을 낫게 하며, 무병장수와 안녕을 가져다준다고 믿으며 무당들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남자 무당(박수)은 무신도 형태로 임경업 장군신을 모시고, 여자 무당(만신)은 임경업 장군신의 상징으로 ‘고비전’이라 하여 종이를 오려 만든 것을 신당 벽에 걸기도 한다.
임경업 설화는 전국적으로 전승되고 있는데, 조선 후기 병자호란 이후 연평도를 지나던 임경업 장군이 '살'을 이용한 조기잡이 방법을 전수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4]
참조
[1]
서적
송자대전 권213, 임장군경업전
[2]
서적
지호집 권13, 임장군전
[3]
실록
시민당에 나아가 임경업을 친국하다
http://sillok.histor[...]
인조실록 47권
1646-06-17
[4]
저널
인천지역 임경업 장군 설화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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