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구라 마사쓰네
1. 개요
오구라 마사쓰네는 일본의 기업인이자 정치인으로, 1875년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 태어나 1961년 사망했다. 도쿄 제국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내무성에서 근무하다가, 1899년 스미토모에 입사하여 스미토모 재벌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 1933년 귀족원 의원이 되었으며, 제2차 및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 국무대신과 대장대신을 역임했다. 전시 금융 금고 초대 총재를 지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후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추방 해제 후에는 도덕 부흥 운동에 힘썼으며, 아시아・아프리카 도서관 건설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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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대학 동문 -
미시마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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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대학 동문 -
김상협
김상협은 삼양그룹 창업주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의 조카로, 도쿄대 졸업 후 고려대 교수와 총장, 문교부 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교육자이며, 친일 행적 논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요구된다. -
1875년 출생 -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해방 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독재적 통치와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도 받으며 4·19 혁명 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서거하였다. -
1875년 출생 -
길버트 뉴턴 루이스
길버트 뉴턴 루이스는 열역학, 화학 결합, 산-염기 반응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미국의 물리화학자이다. -
일본의 기업인 -
안토니오 이노키
안토니오 이노키는 일본 프로레슬링의 황금기를 이끈 프로레슬러이자 정치인, 격투기 프로모터로, 역도산의 제자로 프로레슬링에 입문하여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설립하고 무하마드 알리와의 격투기 이벤트, 스포츠 평화당 창당 및 참의원 당선 등의 활동을 펼치며 프로레슬링계에 큰 공헌을 남겼다. -
일본의 기업인 -
아소 다로
아소 다로는 기업인이자 정치인으로, 아소 시멘트 사장을 역임하고 1979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여러 요직을 거쳐 제92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현재 자유민주당 부총재 및 최고 고문이다.
2. 생애와 경력
오구라 마사쓰네는 1875년(메이지 8년) 마에다 도시이에의 가로 가문이었던 구 가나자와 번사이자 재판관이었던 오구라 마사미치의 장남으로 이시카와현가나자와시에서 태어났다.
제4고등학교를 거쳐, 1897년(메이지 30년) 도쿄 제국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내무성(현총무성)에 입성. 토목감독서 사무관이 된다. 야마구치현 참사관 시절, 대학 선배이자 농상무성 출신인 스즈키 마사야 (후의 스미토모 총이사장)의 권유로, 1899년(메이지 32년) 퇴관. 6명과 함께 스미토모를 일으켜 입사한다(『나의 생활 신조』에서).
스미토모 총이사장인 이바 사다타케와 일본 은행 이사에서 스미토모로 전진한 가와카미 킨이치의 눈에 띄게 된다. 다이쇼 7년 (1918년) 스미토모 본점 이사장. 다이쇼 10년(1921년) 스미토모 본점을 합자회사로 개편하여, 상무 이사가 된다. 쇼와 5년(1930년) 스미토모 합자회사 총이사장으로 취임, 스미토모 재벌의 최고 경영자가 된다. 이후 10년간, 스미토모 재벌의 총수로서 스미토모의 기업 경영을 철저하게 합리화한다. 쇼와 12년(1937년) 본사의 주식회사화를 실현한 것을 시작으로, 그룹 각사의 주식회사화를 단행해 나갔다.
이 사이, 쇼와 8년(1933년) 12월 5일, 귀족원 의원으로 칙선된다。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무임소 국무대신,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 대장 대신으로 입각하고 있다. 오구라는 자유 경제를 신념으로 삼았고, 통제 경제에는 반대했지만, 전시 경제로의 이행을 불가피하게 된다. 1942년에 전시 금융 금고 초대 총재. 1946년(쇼와 21년) 3월 20일, 귀족원 의원을 사임했다。쇼와 26년(1951년)에 추방 해제되었지만, 제일선에는 복귀하지 않았다.
전후의 도덕 붕괴를 한탄하며, 세키몬 신가쿠 회장, 수양단 후원회 회장으로서 일본인의 도덕 부흥을 목표로 했고, 개인적으로도 검선일치의 정신 수양에 힘썼다. 다이쇼 5년(1916년)에 스즈키 마사야를 수행하여 방중한 이후, 중국의 사적을 방문하고, 다양한 인사들과 교류했으며, 료센 세이간의 한시집을 교열하거나, 자신도 『소절유기』를 쇼와 4년(1929년)에 저술했다. 흥아원푸젠성샤먼 연락 부장관. 샤먼 일본인 자선회 등에 관여하여, 일본 및 중국 국내의 재산을 양도하는 등 했다. 방지 경제 사절단.
도쿄도미타카시의 아시아・아프리카 도서관 (구 아시아 문화 도서관) 건설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전 세계 각국과의 문화 교류 사업에 진력했다. 쇼와 36년(1961년) 사망. 86세. 묘소는 아오야마 령원(1로16-9).
2.1. 초기 생애
오구라 마사쓰네는 1875년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 구 가나자와 번 무사이자 재판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7년 도쿄 제국대학 영법률학과를 졸업한 후 내무성에 들어갔다가, 1899년 퇴직하고 스미토모에 입사했다.
야마구치현 참사관 시절, 대학 선배이자 농상무성 출신인 스즈키 마사야의 권유로 스미토모에 들어가게 되었다. 스미토모 총이사장인 이바 사다타케와 일본 은행 이사에서 스미토모로 전직한 가와카미 킨이치의 눈에 띄게 되었다.
1930년 스미토모 합자 회사 총 이사가 되어, 스미토모 재벌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 1937년 귀족원 의원에 칙선되었으며,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국무대신,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 대장대신을 지냈다. 그는 자유 경제를 지향해 통제 경제에 반대했으나, 전시 경제에의 이행을 막지 못했다.
1951년 추방 해제되었으나 제일선에선 물러났으며, 1961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2. 관료 경력
오구라 마사쓰네는 1875년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 구 가나자와 번 무사이자 재판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7년 도쿄 제국대학 영법률학과를 졸업한 후 내무성에 들어갔다가, 1899년 내무성에서 나와 스미토모에 입사했다.
야마구치현 참사관 시절, 대학 선배이자 농상무성 출신인 스즈키 마사야의 권유로 스미토모에 들어갔으며, 스미토모 총이사장인 이바 사다타케와 일본 은행 이사에서 스미토모로 전진한 가와카미 킨이치의 눈에 띄게 되었다. 1918년 스미토모 본점 이사장이 되었고, 1921년 스미토모 본점을 합자회사로 개편하면서 상무 이사가 되었다. 1930년 스미토모 합자 회사 총 이사가 되어, 스미토모 재벌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스미토모 재벌의 총수로서 스미토모의 기업 경영을 철저하게 합리화했으며, 1937년 본사의 주식회사화를 실현하고 그룹 각사의 주식회사화를 단행했다.
1933년 12월 5일 귀족원 의원으로 칙선되었으며,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국무대신,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 대장 대신을 지냈다. 그는 자유 경제를 지향해 통제 경제에 반대했으나, 전시 경제로의 이행을 막지 못했다. 1942년 전시 금융 금고 초대 총재를 맡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1951년 추방 해제되었으나 제일선에선 물러났으며, 1961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아오야마 령원(1로16-9)이다.
2.3. 스미토모 재벌
오구라 마사쓰네는 1875년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 구 가나자와 번 무사·재판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7년 도쿄 제국대학 영법률학과를 졸업하고 내무성에 들어갔다가, 1899년 퇴직 후 스미토모에 입사했다.
스미토모 재벌의 최고 경영자가 된 것은 1930년 스미토모 합자 회사 총 이사가 되면서 부터이다. 이후 10년간 스미토모 재벌의 총수로서 스미토모의 기업 경영을 철저하게 합리화하였다. 1937년 본사의 주식회사화를 실현하고, 그룹 각사의 주식회사화를 단행해 나갔다.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국무대신,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 대장대신을 지냈다. 그는 자유 경제를 지향해 통제 경제에 반대했으나, 전시 경제에의 이행을 막지 못했다. 일본 전시 내각에서 전시금융공고 총재를 맡은 것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1951년 추방 해제되었으나 제일선에선 물러났으며, 1961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4. 정치 경력
1875년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 구 가나자와 번 무사·재판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7년 도쿄 제국대학 영법률학과를 졸업한 후, 내무성에 들어갔다. 1899년 내무성에서 나와, 스즈키 마사야의 권유로 스미토모에 들어갔다.
이바 사다타케와 가와카미 킨이치의 눈에 띄게되어, 1918년 스미토모 본점 이사장이 되었다. 1921년 스미토모 본점을 합자회사로 개편하여, 상무 이사가 되었다. 1930년 스미토모 합자 회사 총 이사가 되어, 스미토모 재벌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스미토모 재벌의 총수로서 스미토모의 기업 경영을 철저하게 합리화했다. 1937년 본사의 주식회사화를 실현한 것을 시작으로, 그룹 각사의 주식회사화를 단행해 나갔다.
1933년 귀족원 의원에 칙선되었으며,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국무대신,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 대장대신을 지냈다. 그는 자유 경제를 지향해 통제 경제에 반대했으나, 전시 경제에의 이행을 막지 못했다. 1942년에 전시 금융 금고 초대 총재를 맡았다. 1946년 귀족원 의원을 사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1951년 추방 해제되었으나 제일선에선 물러났으며, 1961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5. 전후 활동
오구라 마사쓰네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전시 금융 금고 총재를 맡은 것으로 인해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1951년 추방이 해제되었으나, 제일선에서는 물러났다.
전후 도덕 붕괴를 한탄하며, 세키몬 신가쿠 회장, 수양단 후원회 회장으로서 일본인의 도덕 부흥을 목표로 했고, 개인적으로도 검선일치의 정신 수양에 힘썼다. 도쿄도미타카시의 아시아・아프리카 도서관 (구 아시아 문화 도서관) 건설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전 세계 각국과의 문화 교류 사업에 진력했다.
1961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묘소는 아오야마 령원(1로16-9)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