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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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르한 가지는 1324년 또는 1326년에 오스만 제국의 2대 술탄으로 즉위했다. 그는 아버지 오스만 1세의 유지를 이어 부르사를 정복하고 수도로 삼았으며, 카라시 후국을 병합하여 해군력을 확보하여 발칸 반도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비잔틴 내전에 개입하고,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갈등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오스만 제국 최초의 메드레세를 설립하고 군사 제도를 정비하는 등 내치에도 힘썼다. 1362년 부르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무라드 1세가 술탄의 자리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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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한 가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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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호 | 가지 |
| 통치 기간 | 1323/4년 – 1362년 |
| 이전 통치자 | 오스만 1세 |
| 후임 통치자 | 무라드 1세 |
| 왕조 | 오스만 왕조 |
| 아버지 | 오스만 1세 |
| 어머니 | 말훈 하툰(추정) |
| 출생일 | 알 수 없음 |
| 사망일 | 1362년 3월 |
| 사망 장소 | 부르사, 오스만 베이국 |
| 매장 장소 | 오스만가지, 부르사, 튀르키예 |
| 종교 | 이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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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자 | |
| 배우자 | 아스포르차 하툰 |
| 배우자 | 닐뤼페르 하툰 |
| 배우자 | 테오도라 하툰 |
| 배우자 | 기타 (목록 참조) |
| 자녀 | |
| 아들 | 쉴레이만 파샤 |
| 아들 | 무라드 1세 |
| 아들 | 할릴 베이 |
| 자녀 | 외 다수 (자녀 목록 참조) |
| 이름 | |
| 오스만 튀르크어 | اورخان غازی |
| 튀르키예어 | Orhan Gazi |
2. 즉위와 부르사 정복
오스만 가지는 1323년 또는 1324년에 사망했고, 오르한이 그의 뒤를 이었다.[5] 오스만 전통에 따르면, 오르한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을 때, 동생인 알라에딘에게 새롭게 부상하는 제국을 함께 나누자고 제안했다. 알라에딘은 아버지(오스만 가지)가 오르한을 유일한 계승자로 지명했고, 제국을 분할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그는 단지 부르사 근처의 한 마을의 수입만을 자신의 몫으로 받았다.
오르한은 즉위 이전의 경위가 확실하지 않으며, 어머니는 "오메르 베이"라는 인물의 딸[33]이지만, 이 오메르 베이라는 인물 자체도 경력이 불분명하다. 즉위 경위 또한 "후계자 자리를 알라에틴이라는 형제와 양보한 끝에 오르한이 즉위했다(알라에틴은 소규모 마을의 영주로서 조용히 살아가는 길을 선택했다)"와 "오스만의 사후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 왕자들이 다퉜다는 것을 암시하는 이야기"라는 정반대의 내용(후자는 동로마 제국의 연대기에서 유래)이 전해지고 있으며, 오스만 제국 측의 오스만 사망 직후에 만들어진 공문서에도 왕자들의 이름이 열거되는 가운데 알라에틴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알라에틴과의 형제애 넘치는 일화는 오스만 사후 왕자들의 다툼을 덮기 위해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34]
즉위 연도에 대해서는 1324년과 1326년의 두 가지 설이 유력하며, 즉위 시기도 오스만 사망 후에 제위를 계승했다는 설 외에도 오스만이 생존해 있는 동안 이미 즉위했다는 설도 존재한다.[31]
오스만이 이끌던 집단은 수백 명 규모의 전사 집단으로, 그 지도자는 어디까지나 동료 내의 으뜸가는 사람의 입장이었으며, 지도자의 선출에는 동료인 전사들의 추대가 필요했다.[35] 오르한은 아버지의 동료들의 추대에 의해 즉위했고, 아버지의 유언인 부르사 공략을 지속했다.
1317년부터 아버지 오스만에게 군 지휘권을 위임받아,[36] 오스만 1세가 행한 부르사 포위에 장애가 되는 거점을 제압하고, Orhaneli|오르하네리영어의 성채를 파괴했다.
1326년 4월 6일에 부르사의 지배자를 꺾고 동지를 정복하여 수도로 삼아 오스만 1세를 매장했다. 천도 후에는 부하를 코자엘리 방면으로 파병하여 1331년 3월 2일에 니카이아(현 이즈니크), 1337년에 니코메디아(현 이즈미트)를 정복하여 세력을 확대한다.
3.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및 발칸 반도 진출

오르한은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에서 초기에는 군사적 확장을 추구했다. 1329년 펠레카논 전투에서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가 이끄는 비잔티움 제국 군대를 격파하고, 1331년에는 이즈니크(니케아)를, 1337년에는 니코메디아를 점령하는 등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비잔티움 제국 영토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1338년에는 위스퀴다르를 점령하여 아나톨리아 북서부 대부분을 장악했다.
1341년부터 1347년까지 이어진 비잔틴 내전은 오르한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를 지원하여 그의 즉위를 도왔고, 1346년에는 요안니스 6세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함으로써 동맹을 강화했다. 이븐 바투타의 기록에 따르면, 오르한은 이 시기에 백 개 가까운 요새를 소유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요새를 순찰하며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오르한은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를 통해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1352년부터 1353년 사이에는 요안니스 6세를 지원한 대가로 겔리볼루 인근의 침페 성을 획득했다. 1354년에는 겔리볼루 지역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도시와 성벽이 파괴되자, 오르한의 아들 쉴레이만은 이 틈을 타 겔리볼루와 주변 마르마라 해 연안 지역을 점령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지속적인 군사적 충돌과 더불어 내전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 진출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했다.
3. 1. 비잔티움 제국 내전 개입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가 사망한 후, 동로마 제국에서는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와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 사이에서 제위를 둘러싼 내전이 일어났다.[11] 요안니스 5세와 요안니스 6세는 모두 아나톨리아 반도의 군후 국가와 동맹을 맺었고, 오르한은 그 중 한 쪽인 요안니스 6세를 도와 그의 즉위를 지원했다.
1346년, 오르한은 요안니스 6세의 딸 테오도라(Theodora Maria Kantakouzene|테오도라 마리아 칸타쿠제네영어)를 아내로 맞이하여[42] 요안니스 6세와 적대하는 요안니스 5세 및 세르비아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6,000명의 병사[43]를 발칸 반도로 파견했다.[44][45] 1337년에 오스만 군은 처음으로 유럽으로 건너가 트라키아에서 약탈을 감행했다. 발칸 반도에서의 군사 작전에서는 장남 쉴레이만(Suleyman Pasha (son of Orhan)|쉴레이만 파샤영어)의 활약이 컸으며,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의 테살로니키 공격 저지, Çorlu|초를루영어 제압은 모두 쉴레이만의 공적이었다.
1352년부터 1353년 사이에, 요안니스 6세에 대한 원조의 대가로 오르한은 칼리폴리스(현 겔리볼루) 부근의 Çimpe Castle|침페 성영어)을 획득했다.[46]
1354년 3월 2일[47]에 칼리폴리스 일대가 대지진을 겪어 칼리폴리스의 도시와 성벽도 피해를 입자, 쉴레이만은 이 지진을 틈타 칼리폴리스와 테키르다, Bolayır|볼라이르영어, Malkara|말카라영어 등의 마르마라해 연안 지역을 점령했다. 요안니스 6세는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도시의 반환을 두 제국의 우호 관계에 호소하며, 또한 대금 지불을 제안했지만,[47] 오르한은 요구에 응하지 않고, 발칸 반도의 입구가 되는 거점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3. 2. 다르다넬스 해협 장악
오르한은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비잔틴 제국 영토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1321년 무다니아를 점령하여 부르사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는 항구를 확보했다. 이후 코누르 알프, 아크차 코카, 압두르라흐만 가지에게 군대를 맡겨 흑해 서안, 코자엘리 현, 마르마라 해 남동쪽 해안을 각각 점령하도록 했다. 부르사 포위전에서는 비잔틴 사령관을 설득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에브레노스 베이는 기병대 사령관이 되어 발칸 반도 진출을 이끌었다. 부르사 점령 후 오르한은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기병대를 보내 마르마라 해안의 비잔틴 도시들을 점령했으며, 니케아를 포위하기도 했다.
1329년 비잔틴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는 니케아를 구원하고 코자엘리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으나, 펠레카논 전투에서 오르한에게 패배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코자엘리 탈환을 포기하고 이후 오스만군과 야전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1331년, 3년간의 포위 끝에 이즈니크(니케아)가 함락되었고, 1337년에는 니코메디아를 점령했다. 오르한은 니코메디아 지휘권을 아들 슐레이만 파샤에게 넘겼다. 1338년 위스퀴다르 점령으로 아나톨리아 북서부 대부분이 오스만 수중에 들어갔다. 비잔틴 제국은 흑해 연안 일부 지역을 통제했지만, 오스만에게 큰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1345년, 오르한은 전략을 바꿔 비무슬림 영토 대신 투르크계 카레시 후국(현재의 발리케시르와 주변 지역)을 점령했다.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이슬람 통치 지역은 '평화의 영역', 그 외 지역은 '전쟁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카레시는 투르크 아미르가 통치하는 '평화의 영역'이었기에 정복 명분이 필요했다.
카레시에서는 통치자 사후 두 아들이 권력을 다투었고, 오르한은 평화 유지 명분으로 개입했다. 오스만군은 두 형제를 수도 베르가마로 몰아넣었고, 한 명은 사망, 다른 한 명은 체포되었다. 발리케시르 주변 영토는 오르한에게 병합되었다. 이 정복으로 오르한의 영토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차나칼레까지 확장되었다.
카레시 정복으로 아나톨리아 북서부 대부분이 오스만 베이릭에 포함되었고, 부르사, 니코메디아, 니케아, 페르가뭄은 권력 거점이 되었다. 오스만 공국은 네 개의 주로 구성되었다.[10]
카레시 획득 후 20년간 평화가 이어졌다. 오르한은 민간 및 군사 제도를 정비하고, 내부 질서를 확보했으며, 모스크와 학교를 건설하고, 앙카라를 점령했다.
펠레카논 전투 이후 오르한은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와 우호 관계를 맺고 유지했다. 1341-1347년 비잔틴 내전으로 비잔틴 제국의 자원이 고갈되면서, 투르크 공국의 지원군이 유럽에 자주 소환되었다. 1346년 황제 요한 6세 칸타쿠제누스는 오르한을 가장 강력한 투르크 군주로 인정하고, 딸 테오도라와 결혼시켰다.[11]
오르한과 테오도라의 실리브리 결혼식은 비잔틴 작가들에 의해 상세히 묘사되었다. 이듬해 오르한은 위스퀴다르에서 장인을 방문했다. 그러나 마르마라 해와 다르다넬스를 건너 트라키아를 약탈하는 투르크멘족으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븐 바투타는 오르한이 백 개 가까운 요새를 소유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요새를 순찰하며 보낸다고 기록했다.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제국은 군사 충돌이 잦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사르한 후국, 아이든 후국을 더 위험하게 여겼고[41], 두 제국은 동맹을 맺었다. 1333년 니코메디아 포위 때 오르한과 안드로니코스 3세가 처음 만났고, 카레시 후국 견제를 위해 동맹을 맺었다.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 사후, 동로마 제국에서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와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오르한은 요안니스 6세를 지원했다.
1346년 오르한은 요안니스 6세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하고[42], 6,000명의 병사를 발칸 반도로 파견했다.[43] 1337년 오스만군은 처음으로 유럽에 건너가 트라키아를 약탈했다.[44][45] 장남 쉴레이만이 발칸 반도 군사 작전에서 활약했다.
1352년부터 1353년 사이, 요안니스 6세 지원 대가로 오르한은 겔리볼루 부근의 Çimpe Castle|침페 성영어을 획득했다.[46]
1354년 3월 2일[47] 겔리볼루 일대 대지진으로 도시와 성벽이 파괴되자, 쉴레이만은 겔리볼루와 테키르다, Bolayır|볼라이르영어, Malkara|말카라영어 등 마르마라 해 연안 지역을 점령했다. 요안니스 6세는 도시 반환을 요구했지만[47] 오르한은 거부했다.
요안니스 5세는 오르한의 아들 할릴과 딸을 결혼시켜 관계 강화를 도모했다.
4. 내정
오르한은 즉위 초 동로마 제국의 행정 기구와 행정관을 계승하여 훗날 오스만 제국의 규범이 되는 제도를 구축했다.[31] 영토 확장 과정에서 정주민, 상인, 여행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통치해야 했기에 효율적인 통치 체제의 필요성을 느꼈다.[54]
체제 확립에는 동로마 인재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초빙된 이슬람 법학자(울라마)와 일 칸국 등 주변 이슬람 국가 출신 서기들의 역할이 컸다.[55] 울라마들은 이슬람 법관(카디)으로서 민정과 재판 문제를 샤리아에 따라 해결했고,[56] 문장 독해 능력과 이슬람 선진 국가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행정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57] 오르한은 1331년 이즈니크에 오스만 제국 최초의 메드레세(대학교)를 설립하여 울라마 양성에 힘썼다.[57]
행정 조직 정비와 더불어 군주 보좌 직책이 설치되었다. 알라에딘 파샤(英語版)가 행정 총괄 재상에, 장남 술레이만이 군사 총괄 베일레르베이(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오스만 군에는 지하드 전사 복장에서 유래한 민족적 모자가 도입되었다.[55] 당시 오스만 군은 투르크계, 몽골계 유목민, 수피즘 수도사, 기독교도 등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58] 오르한은 군 통솔력 강화와 효율적인 군사 활동을 위해[59][60] 기존 유목민 중심 군단을 군주 직속 상비군으로 재편성했다.
투르크계 민족에서 징모한 보병(야야)과 기병(뮈셀렘)[61]을 중심으로 군단을 재편성하여, 군 복무 기간에는 급여를 지급하고 평시에는 세금 면제와 함께 농업에 종사하도록 했다.[62][63] 그러나 이 상비군 편제는 만족스럽지 못하여 보조군으로 격하되었고, 본격적인 상비군 제도는 무라드 1세 시대에 예니체리 창설로 실현되었다.[62][64]
한편, 발칸 반도 세력 확장에 큰 역할을 한 비정규 기병(아킨지)[65]는 봉급 대신 약탈품 획득 권한을 부여받고 발칸 반도 국경 지대에 배치되었다. 아킨지의 선제공격 후 본대가 공격하는 전술은 발칸 반도 영토 확장에 효과적이었다.[66]
히지라력 727년(1326년 - 1327년)[67], 오스만 제국은 고유 화폐인 Akçe|악체영어 은화[68]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악체 은화에는 "알라여, 오스만의 아들 오르한의 나라를 영원하게 하소서"[70]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으며, 17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기본 통화 단위로 사용되었다.[69] 오르한이 점령한 부르사는 아나톨리아의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고, 제노바와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란산 비단과 자국 모직물을 교환하기 위해 부르사를 찾았다.[71]
4. 1. 행정 및 군사 제도 정비
오르한은 즉위 초 동로마 제국의 행정 기구와 행정관을 계승하여, 훗날 오스만 제국의 규범이 되는 제도를 구축했다.[31] 오스만 제국은 지배 영역을 확장했지만, 그 과정에서 정주민, 상인, 여행자 등 기존 유목민과는 다른 사람들을 통치해야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오르한은 통치 체제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54]체제 확립에는 동로마 인재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초빙된 이슬람 법학자(울라마)와 일 칸국 등 주변 이슬람 국가에서 유입된 서기들의 힘이 필요했다.[55] 초빙된 울라마들은 이슬람 법관(카디)으로서 민정과 재판 문제를 샤리아에 따라 해결했다.[56] 이들은 샤리아 외에도 문장 독해, 이슬람 선진 국가 지식을 갖추고 있어 행정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57] 오르한은 울라마 양성을 위해 1331년 이즈니크에 오스만 제국 최초의 메드레세(대학교)를 창설했다.[57]
법관 정비와 함께 군주 보좌 직책이 설치되었다. 행정 총괄 재상에는 알라에딘 파샤(英語版)가, 군사 총괄 베일레르베이(사령관)에는 장남 술레이만이 임명되었다.
오르한 시대에는 오스만 군 군복에 지하드 전사 의복을 본뜬 민족적 모자가 도입되었다.[55] 당시 오스만 군 병력은 투르크계, 몽골계 유목민, 수피즘 수도사, 기독교도인 에브레노스 가문과 미할 가문 등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58] 오스만 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59] 효율적인 군사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60] 기존 유목민 중심 군단에서 군주 직속 상비군으로 재편성이 이루어졌다.
투르크계 민족에서 징모한 보병(야야)과 기병(뮈셀렘)[61]으로 군단을 재편성했다. 이들은 군역 중에는 급여를 현금으로 받고, 평시에는 세금을 부과받지 않고 농업에 종사했다.[62][63]
그러나 상비군 편성은 만족스럽지 못했고, 보조군 일부로 격하되었다. 상비군 제도의 실현은 노예 군인으로 구성된 예니체리가 창설되는 무라드 1세 시기까지 기다려야 했다.[62][64]
동시대에 편성된 비정규 기병(아킨지)[65]는 발칸 반도 세력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봉급이 지급되지 않는 대신 약탈품 획득 권리를 가졌으며, 발칸 반도 국경 지대에 배치되었다. 기동성이 뛰어난 아킨지가 적국 침입을 반복한 후 본대가 공격하는 전법은 발칸 반도 영토 확장에 유효했다.[66]
오스트리아 역사학자 파울 비테크|Paul Wittekde는 오스만 제국 군사 조직 발전에서 비이슬람 세계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전사적 가지 정신의 영향을 지적했다.[65]
일부 학자들은 오스만 제국이 룸 셀주크의 봉신처럼 행동하는 것을 중단한 것은 알라딘 시대에 그의 조언에 의해서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술탄 초상을 새긴 화폐 주조, 공적 기도에서 술탄 이름 사용을 중단했다. 이러한 변화는 오스만 1세의 업적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동양 작가들은 알라딘이 제국 신민 복장 법률 도입, 정규군 상비군 창설 및 자금 지원 공로를 인정한다. 예니체리 군단 형성은 그의 조언과 당시 터키 정치가 조언에 의한 것이며, 이 제도는 유럽 작가들이 무라드 1세 업적으로 잘못 돌렸다.[6]
알라딘은 군사 입법을 통해 오스만 왕조 승리를 조직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프랑스 샤를 7세가 상설 기병대를 설립하기 한 세기 전에 오스만 베이국을 위해 정기 급여, 훈련받은 보병, 기병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조직했다. 이는 최초의 현대적 상비군으로 간주된다.[7]
오르한 전임자 에르투룰, 오스만 1세는 무장 봉신, 자원병을 이끌고 전쟁을 벌였다. 이 군대는 원정 때 기병을 타고 왕자 깃발에 합류했고, 원정 후 해산되었다. 알라딘은 지속적 복무를 위한 유급 보병 부대(야야 또는 피야데)를 구성하여 미래 성공을 보장하고자 했다.[8] 이들은 지휘관과 함께 10명, 100명, 1000명으로 나뉘었다. 급여는 높았고,[6] 자부심은 군주에게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오르한은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동생 알라딘, 카라 할릴 찬다를리와 상의했다. 찬다를리는 주군과 재상에게 계획을 제시했다. 이로부터 잔혹한 발칸 반도와 중앙 유럽 재앙으로 여겨지다가 1826년 술탄 마흐무트 2세에 의해 폐지된 예니체리 부대가 생겨났다.[9]
찬다를리는 정복 지역 아이들로만 구성된 예니체리 군단 창설을 제안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정복된 자들은 정복자의 책임이며, 그는 그들의 땅, 재산, 아내, 아이들의 합법적인 통치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할 권리가 있으며, 제가 제안하는 처우는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자선적입니다. 그들을 군대 계급에 등록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이 교육을 받고 더 나은 생활 조건을 얻게 되므로 그들의 현세적, 영원한 이익을 모두 고려합니다."
그는 정복민 아이들 편입이 다른 사람들의 입대를 유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친구와 친척들이 자원하여 오스만 군에 합류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조언에 따라 오르한은 정복된 기독교 가정에서 가장 훌륭한 소년 1000명을 선발했다. 신병들은 개별 능력에 따라 훈련받았고, 전문 군인에서 대재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위에 배치되었다. 이 관행은 술탄 메흐메트 4세 통치 시대까지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4. 2. 군제 개혁 시도
알라딘은 오스만 왕조의 군사 입법을 통해 승리를 조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프랑스의 샤를 7세보다 1세기 앞서 정기적으로 급여를 받고 훈련받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조직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최초의 현대적 상비군으로 간주된다.[7]오르한의 전임자인 에르투룰과 오스만 1세는 무장한 봉신과 자원병을 이끌고 전쟁을 벌였다. 이들은 원정이 끝나면 해산되었다. 알라딘은 지속적인 복무를 위해 항상 준비되어 있는 유급 보병 부대를 구성하여 미래의 성공을 보장하기로 결정했다. 이 군대는 야야 또는 피야데라고 불렸다.[8] 그들은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나뉘었고, 급여는 높았다.[6]
오르한은 동생 알라딘과 카라 할릴 찬다를리와 상의하여 예니체리 군단을 만들었다. 찬다를리는 정복된 지역의 아이들로만 구성된 군대인 예니체리 군단을 만들 것을 제안하며, 정복된 자들은 정복자의 책임이며, 그들을 군대에 등록하도록 강요함으로써 그들이 교육을 받고 더 나은 생활 조건을 얻게 되므로 그들의 현세적, 영원한 이익을 모두 고려한다고 주장했다.[9]
이 조언에 따라 오르한은 정복된 기독교 가정에서 가장 훌륭한 소년 1000명을 선발했다. 신병들은 훈련을 받았고, 전문 군인에서 대재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위에 배치되었다. 이 관행은 메흐메트 4세의 통치 시대까지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오르한 시대에는 오스만 군에 지하드 전사 복장을 본뜬 민족적인 모자가 도입되었다.[55] 당시 오스만 군은 투르크계, 몽골계 유목민, 수피즘 신봉 수도사, 기독교도 등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58] 오스만 군은 기존 유목민 중심 군단에서 군주 직속 상비군으로 재편성되었다.[59][60]
투르크계 민족에서 징모한 보병(야야)과 기병(뮈셀렘)[61]으로 군단을 재편성하고, 군역 중에는 급여를 현금으로 받고, 평시에는 세금을 부과받지 않고 농업에 종사했다.[62][63]
하지만 상비군 편성은 만족스럽지 못했고, 둘 다 보조군으로 격하되었으며, 상비군 제도는 예니체리가 창설되는 무라드 1세 시대를 기다려야 했다.[62][64]
한편, 동시대에 편성된 비정규 기병(아킨지)[65]는 발칸 반도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 그들은 봉급이 지급되지 않는 대신 약탈품 획득 권리를 가지며, 발칸 반도 국경 지대에 배치되었다. 아킨지가 적국 침입을 반복한 후 본대가 공격하는 전법은 발칸 반도 영토 확장에 유효했다.[66]
4. 3. 경제 발전
오르한은 아버지 오스만 1세의 유언에 따라 부르사 공략을 지속했다. 1317년부터 아버지에게 군 지휘권을 위임받아[36] 부르사 포위에 방해가 되는 거점을 제압하고, Orhaneli|오르하네리영어의 성채를 파괴했다. 1326년 4월 6일 부르사 지배자를 꺾고 부르사를 정복하여 수도로 삼고, 오스만 1세를 매장했다. 이후 코자엘리 방면으로 부하를 파병하여 1331년 3월 2일 니카이아(현 이즈니크), 1337년 니코메디아(현 이즈미트)를 정복하여 세력을 확대했다.1329년 Battle of Pelekanon|페레카논 전투영어에서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을 격파하여, 변경의 군사 집단에서 하나의 후국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38] 1335년부터 1345년 사이에는 발리케시르의 Karasids|카라시 후국영어을 병합하여[28] 카라시의 해군을 얻어 발칸 반도 진출의 수단을 획득했다.[37]
히지라력 727년(1326년 - 1327년)[67]에는 오스만 제국 고유의 화폐인 Akçe|악체영어 은화[68]가 처음 주조되었다. 이 동전에는 "''알라여, 오스만의 아들 오르한의 나라를 영원하게 하소서''"[70]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고, 17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기본 통화 단위로 사용되었다.[69]
오르한이 획득한 부르사는 아나톨리아의 상업 거점으로 발전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란의 비단 제품과 자국의 모직물을 교환하기 위해 부르사를 방문했다.[71]
4. 4. 문화 발전
오르한의 통치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은 영토를 확장했지만, 정복 지역 주민, 상인, 여행자 등 유목민과 다른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한 정치 기구가 필요했다.[54] 오르한은 부르사의 동로마 제국 행정 기구와 행정관을 계승하여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 후대 오스만 제국의 규범이 되는 제도를 구축했다.[31] 체제 확립에는 동로마 인재 외에도 외부에서 초빙된 이슬람 법학자(울라마)와 카라만, 일 칸국 등 주변 이슬람 국가에서 유입된 서기들의 힘도 필요했다.[55] 초빙된 울라마들은 이슬람 법관(카디)으로서 민정과 재판 문제를 이슬람 법(샤리아)에 따라 해결했다.[56]울라마들은 샤리아 외에도 문장 독해, 이슬람 선진 국가 지식을 갖추고 있어 행정 분야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다.[57] 오르한은 울라마를 양성하기 위해 1331년에 이즈니크에 오스만 제국 최초의 메드레세(대학교)를 창설했다.[57]
법관 정비와 함께 군주 보좌 직책이 설치되어, 행정 총괄 재상에는 알라에딘 파샤(英語版)를, 군사 총괄 베일레르베이(사령관)에는 장남 술레이만을 임명했다.
오르한이 획득한 부르사는 아나톨리아의 상업 거점으로 발전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란에서 유입된 비단 제품과 자국의 모직물을 교환하기 위해 부르사를 방문했다.[71] 1330년대에 부르사의 성 엘리아스 교회를 모스크로 개조하고,[72] 아버지 오스만을 모스크의 묘에 매장했다. 모스크는 화재와 지진으로 여러 번 손상되었지만, 수리 및 재건되어 현재도 부르사 중심부에 남아 있다.
튀르키예 공화국 국정 교과서에서는 그의 성실한 인격과 신앙심을 칭찬하고 있다.[51] 정복 직후 이즈니크에 모스크, 마드라사(이슬람 학교)와 함께 세운 구빈원 개원식 때 직접 수프를 배급하고, 밤에는 부싯깃을 피웠다는 일화가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븐 바투타의 『대여행기』에는 오르한이 수도에 한 달도 머무르지 않고 국내를 순회하며, 때로는 이교도와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73]
5. 만년과 사망
오르한은 훗날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되는 인물들 중 가장 장수했고, 재위 기간도 가장 길었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말년에 국가 권력의 대부분을 둘째 아들 무라드에게 넘기고 부르사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1356년, 오르한과 테오도라의 아들인 할릴이 이즈미트 만 어딘가에서 납치되었다. 상업 활동과 함께 해적 행위를 하던 제노바 상선 선장이 어린 왕자를 납치하여 제노바의 지배를 받던 에게 해의 포키아로 데려갔다. 오르한은 이 납치 사건으로 매우 분개하여 매형이자 당시 비잔틴 제국의 단독 황제였던 요한 5세 팔레올로고스와 협상을 벌였다. 협정에 따라 요한 5세는 비잔틴 해군 함대를 이끌고 포키아로 가서 10만 히페르피라의 몸값을 지불하고 할릴을 오스만 영토로 데려왔다.
1357년, 오르한의 장남이자 가장 경험이 풍부했던 아들이자 유력한 후계자였던 쉴레이만 파샤가 마르마라 해 연안의 볼라예르 근처에서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49] 쉴레이만이 떨어진 말은 그와 함께 묻혔으며, 오늘날에도 그들의 무덤을 볼 수 있다. 오르한은 아들의 죽음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오르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사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의 죽음이 그의 건강에 부담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르한은 1362년, 부르사에서 80세의 나이로 36년간의 재위 기간을 마치고 사망했다. 그는 부인과 자녀들과 함께 부르사의 'Gümüşlü Kumbet'(은빛 돔)라고 불리는 튀르베 (묘)에 묻혔다.
오르한의 사망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1359년부터 1362년 사이로 추정된다.
유능한 장군으로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장남 쉴레이만은 1357년[49] 혹은 1362년[50]에 매사냥 중 사고로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그 때문에, 발칸 반도 방면의 오스만 제국의 군사 활동은 일시적으로 정체되었다.[51]
남겨진 왕자로는 할릴과 무라트 두 사람의 이름이 전해지지만, 왕위 계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불분명하며, 쉴레이만의 사망 후 무라트 즉위까지 이야기가 건너뛰는 (오르한이 사망했다는 설명이 없는) 연대기까지 있을 정도이다. 이는 후세의 연대기 편찬자가 이 부분을 삭제한 결과로 생각되며,[52] 아마도 오르한의 사망 후에 아들들 사이에서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53], 계승전에서 승리한 차남 무라트가 제위를 계승했다.
6. 가족 관계
오르한은 최소 7명의 후궁을 두었다.[16][17][18][19]
| 부인 | 출신 및 비고 |
|---|---|
| 바얄룬 하툰 | 빌레지크의 테크푸르의 딸일 가능성이 있음. 1299년 오스만 제국이 아버지의 요새를 공격할 때 납치되어 오르한의 첩이 됨. 1331년 이븐 바투타를 부르사에서 맞이함.[21][20][17][18] |
| 에펜디제 하툰 | 오스만 1세의 형제인 아크바슬르 군두즈 베이의 딸로, 오르한의 사촌. 오르한의 장남이자 총애를 받던 아들 쉴레이만 파샤의 어머니.[18][22][21][25] |
| 아스포르차 하툰 | 그리스계 비잔틴 귀족 출신. 오르한의 첫 번째 합법적인 아내. 슬하에 2남 2녀를 둠. |
| 멜렉 하툰 | 오스만 1세의 아들인 멜리크 베이의 딸로, 오르한의 조카. 술탄 하툰의 어머니.[22] |
| 닐뤼페르 하툰 | 그리스 출신의 기독교 노예. 오르한의 후계자 무라드 1세의 어머니. |
| 테오도라 칸타쿠제네 | 요한 6세 칸타쿠제노스의 딸이자 오르한의 두 번째 합법적인 아내. 1346년 오르한과 결혼 후에도 기독교 신앙을 유지. 할릴 베이의 어머니. |
| 테오도라 우로쉬 | 스테판 4세 두샨과 불가리아의 헬레나의 딸. 1351년경 70세의 오르한과 12세의 나이로 결혼. 1352/1354년 사망.[17] |
오르한은 최소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16][17][18][19][23]
| 아들 | 생몰년 및 비고 |
|---|---|
| 쉴레이만 파샤 | 1306년[18]-1357년. 에펜디제 하툰 소생.[21][24][25] 오르한이 가장 아끼던 아들로, 트라키아와 루멜리아 확장 전쟁을 이끌었으나, 말에서 떨어져 입은 부상으로 사망. |
| 이브라힘 베이 | 1310년-1362년. 아스포르차 하툰 소생. 에스키셰히르의 총독이었으며, 이복 형제인 무라드 1세의 명령으로 처형. |
| 세레풀라 베이 | 아스포르차 하툰 소생. |
| 카심 베이 | ?-1346년. |
| 무라드 1세 | 1326년-1389년. 닐뤼페르 하툰 소생.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됨. |
| 할릴 베이 | 1347년-1362년. 테오도라 칸타쿠제네 소생. 어린 시절 제노바 해적에게 납치되었다가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의 도움으로 몸값을 받고 풀려남. 요안니스 5세의 딸 이레네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으나, 아버지 사후 이복 형제 무라드 1세에 의해 처형. |
오르한은 적어도 네 명의 딸을 두었다.[16][17][18][19]
| 딸 | 비고 |
|---|---|
| 하티제 하툰 | 사루 바투 사브지 베이의 아들이자 오르한의 사촌인 쉴레이만 베이와 결혼. 슬하에 2남 2녀를 둠. |
| 셀추크 하툰 | 아스포르차 하툰 소생. 아이딘의 메흐메드의 아들 쉴레이만 베이와 결혼. |
| 파트마 하툰 | 아스포르차 하툰 소생. 부르사에 있는 아버지의 묘에 묻힘. |
| 퓔라네 술탄 하툰 | 1324년-1347년. 멜레크 하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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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ガーズィー」とは、イスラーム世界の辺境を守り、異教徒との戦争に従事する「信仰の戦士」という意味である。(小山皓一郎「ガージー」『新イスラム事典』収録(平凡社、2002年3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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