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모노 사테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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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모노 사테히코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한반도에서의 군사 활동과 관련된 기록이 주로 나타난다. 그는 신라의 임나 침공 시 임나를 지키고 백제를 구원했으며, 고구려를 공격하여 전리품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백제가 주도한 한성 탈환전에 왜군 장군으로 참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한, 오토모노 사테히코는 《히젠 국 풍토기》와 《만엽집》에 등장하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며, 후손으로는 오토모노 무라치 씨족 등이 있다. 와카야마 시에는 오토모노 사테히코를 모시는 신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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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모노 사테히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오토모노 사테히코 |
로마자 표기 | Ōtomo no Satehiko |
일본어 표기 | 大伴 狭手彦 |
다른 이름 | 사테히코 사제히코로코 |
![]() | |
시대 | |
시기 | 고훈 시대 후기 |
가문 | |
씨족 | 오토모 씨(오토모 연) |
관직 | |
섬긴 천황 | 센카 천황 → 긴메이 천황 |
역할 | 영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오토모노 가네무라 |
형제 | 이와 사테히코 누카테코 아비호코 우지코 구이 |
기타 정보 | |
생몰년도 | 알 수 없음 |
참고 문헌 | Robert Karl Reischauer Jean Reischauer Woodrow Wilson School of Public and International Affairs Edwin A. Cranston Fujio Oda William Elliot Griffis C Pfoundes |
2. 생애
오토모노 사테히코의 태어난 해나 사망한 해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의 활동은 주로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통해 전해지는데, 대부분 6세기 중반 한반도에서의 군사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주요 활동으로는 신라의 임나 침공에 맞서 임나를 방어하고 백제를 지원한 것, 그리고 고구려를 공격한 것 등이 기록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시기와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또한 히젠국 풍토기와 만엽집에는 마쓰우라 사요히메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2. 1. 한반도에서의 군사 활동
오토모노 사테히코의 태어난 해나 사망한 해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의 활동은 주로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통해 전해지는데, 대부분 한반도에서의 군사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일본서기》 센카 천황(宣化天皇) 2년(537년?) 10월 조에는 신라가 임나를 침공하자, 사테히코가 한반도로 파견되어 임나를 방어하고 백제를 구원했다는 기록이 있다.[9][6]
또한 《일본서기》 긴메이 천황(欽明天皇) 23년(562년?) 8월 조에는 그가 대장군으로서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많은 보물을 노획하고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 사건의 시점에 대해서는 같은 책에서 긴메이 천황 11년(550년?)의 일이라는 다른 기록(一本)도 함께 전하고 있으며,[10][7] 후대의 연구를 통해 551년 백제가 주도한 한강 유역 회복 전쟁에 왜(倭)의 장군으로 참전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12][13]
이 고구려 공격과 관련하여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 조간(貞観) 3년(861년) 조에는 오타 쓰네오(大田常雄)라는 인물의 가첩(家牒, 집안 기록)을 인용하여, 사테히코가 고구려에서 포로로 잡아온 사람들이 훗날 야마시로국(山城国)에 정착한 고마비토(狛人, 고려인)의 조상이 되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11][8]
2. 1. 1. 백제와의 관계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오토모노 사테히코는 센카 천황 2년(537년?) 10월, 신라가 임나를 침공하자 한반도에 파견되어 임나를 방어하고 백제를 지원하였다고 한다.[9][6]또한 《일본서기》는 긴메이 천황 23년(562년?) 8월에 사테히코가 대장군으로서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이 기록은 긴메이 천황 11년(550년?)의 일이라는 다른 기록(一本)도 함께 전한다.[10][7] 이 고구려 공격과 관련하여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 조간 3년(861년) 조에는 사테히코가 잡아온 고구려인 포로들이 야마시로국(山城国) 고마비토(狛人, 고려인)의 시조가 되었다는 내용이 오타 쓰네오(大田常雄)의 가첩(家牒)을 인용하여 실려 있다.[11][8]
그러나 사테히코의 고구려 공격 시점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이 유력하다. 《일본서기》 긴메이 천황 23년(562년?) 기록에 보이는 "백제의 계책에 따라 고려를 깨뜨렸다"거나 "백제국과 함께 고려왕 양향(陽香)을 비진류도(比津留都)에서 쫒아내었다"는 등의 내용은, 같은 책 긴메이 천황 12년(551년) 조의 "이 해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몸소 군사 및 두 나라(신라와 임나)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하였고 또 진군하여 평양(平壤)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12]는 기록 및 《삼국사기》 진흥왕 본기와 거칠부 열전의 "(진흥왕) 12년 신미(551년)에 왕이 ...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13]는 기록과 연결된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사테히코의 고구려 공격은 562년이 아니라, 백제의 성명왕이 신라, 가야, 왜(倭) 연합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던 551년의 백제의 한성 탈환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오토모노 사테히코는 이 전쟁에 왜(倭)의 장군으로서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도와 참전했던 인물로 여겨진다.
2. 1. 2. 고구려와의 전투
《일본서기》(日本書紀) 긴메이 천황(欽明天皇) 23년(562년?) 8월 기록에 따르면, 오토모노 사테히코는 대장군으로서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많은 보물을 얻어 돌아왔다고 한다. 다만, 같은 책의 주석에는 이 사건이 긴메이 천황 11년(550년?)의 일이라는 다른 기록(일본, 一本)도 함께 언급되어 있다.[10]또한,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 조간(貞観) 3년(861년) 기사에는 오타 쓰네오(大田常雄)라는 인물의 가첩(家牒, 집안 기록)을 인용하여, 사테히코가 고구려에서 포로로 잡아온 사람들이 훗날 야마시로국(山城国)에 정착한 고마비토(狛人, 고려인)의 조상이 되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11]
그러나 《일본서기》의 해당 기록은 여러 정황상 551년(백제 성명왕 29년)에 있었던 백제의 옛 땅 회복 전쟁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꾀를 써서 고려를 깨뜨렸다"거나 "백제국과 함께 고려왕 양향(陽香)을 비진류도(比津留都)에서 쫒아내었다"는 언급이 있으며, 긴메이 천황 12년(551년) 기록에는 "이 해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몸소 군사 및 두 나라(신라와 임나)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하였고 또 진군하여 평양(平壤)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12]고 적혀 있다. 이는 《삼국사기》 진흥왕 본기, 양원왕 본기 및 거칠부 열전의 "(진흥왕) 12년 신미(551년)에 왕이 ...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13]는 기록과도 부합한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오토모노 사테히코의 고구려 공격은 기록된 562년이나 550년이 아닌 551년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그는 백제가 주도하여 신라, 가야, 그리고 왜(倭)의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을 되찾았던 전쟁에 왜군측 장군으로서 참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2. 2. 마쓰우라 사요히메 전설
히젠국 풍토기 마쓰우라 군 조와 만엽집 권5에는 오토모노 사테히코와 오토히히메코(마쓰우라 사요히메)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3. 후손
《신찬성씨록》에는 다음 씨족이 오토모노 사테히코의 후예로 기재되어 있다.
- 신별(神別) 사쿄(左京) 오토모노 무라치(大伴連) - 미치노오미노 미코토 10세 손인 사테히코(佐弖彦)의 후손.
- 신별 사쿄 에노모토노 무라치(榎本連) - 미치노오미노 미코토의 10세 손 사테히코의 후손.
오토모 씨(大伴氏)는 훗날 준나 천황의 휘(이름)를 피하기 위해 성을 도모 씨(伴氏)로 바꾸었다. 헤이안 시대 초기 인물인 도모노 사네나리伴眞成jpn는 오토모노 사테히코의 6세 손에 해당하는데,[14] 그의 딸이 스가와라노 고레요시와 혼인하여 학문의 신으로 유명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낳았다.
4. 신사
와카야마현 와카야마 시(和歌山市|와카야마 시일본어) 片岡町|가타오카 정일본어 2丁目|초메일본어 9에 있는 사타히코 신사는 오토모 씨의 시조인 미치노오미노 미코토와 오토모노 사테히코를 함께 모신다.
참조
[1]
서적
Early Japanese history, c. 40 B.C.-A.D. 1167
https://books.google[...]
P. Smith
[2]
서적
The Gem-Glistening Cup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Re-examination of the Okinoshima Ritual Sites. Part III
http://www.okinoshim[...]
Fukuoka University
2014-10-01
[4]
서적
Corea: The Hermit Nation
http://library.uoreg[...]
Charles Scribner's Sons
1894
[5]
간행물
The Loving Wife
[6]
문서
日本書紀』宣化天皇2年10月条
[7]
문서
日本書紀』欽明天皇23年8月条
[8]
문서
日本三代実録』貞観3年8月19日条
[9]
문서
日本書紀』宣化天皇2年10月条
[10]
문서
日本書紀』欽明天皇23年8月条
[11]
문서
日本三代実録』貞観3年8月19日条
[12]
문서
日本書紀』欽明天皇12年是歲条
[13]
문서
《삼국사기》권제44 열전제4 거칠부
[14]
문서
中田憲信『菅公系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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