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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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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왕은 백제의 제26대 왕으로, 523년 무령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즉위 초 남조, 왜와의 외교를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했으며, 538년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여 왕권 강화와 국가 정체성 확립을 꾀했다. 또한 불교를 장려하여 528년 국교로 공인하고, 왜에 불교를 전파하는 등 문화 발전에 힘썼다. 551년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회복했으나, 553년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했으며,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 의해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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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백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구세관음상
구세관음상은 성왕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칭호국왕, 어라하
본명부여명농 (扶餘明禯)
다른 이름성명(聖明)
출생일504년? (음력)
출생지웅진
사망일554년 7월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 혹은 12월 (일본서기 기록) (50세?) (음력)
사망지옥천 관산성(현,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 은행리 말동산 서남쪽)
매장지능산리 중하총 (추정)
가문부여씨(扶餘氏)
재위 정보
왕조백제
연호건흥(建興)
재위 기간523년 5월 ~ 554년 7월 혹은 12월 (음력)
전임자무령왕
후임자위덕왕
제26대 백제 국왕목록
가족 관계
부왕무령왕
모후대부인
형제자매순타태자, 사아군
자녀위덕왕, 혜왕, 임성태자, 매형공주, 소비(比召) 부여씨(扶餘氏)
왕비미상
종교 및 기타
종교불교
시호성(聖)
묘호없음
이름
한글성왕
한자聖王, 明王, 聖明王
로마자 표기Seong-wang, Myeong-wang, Seongmyeong-wang
출생 시 한글명농
출생 시 한자明襛
출생 시 로마자 표기Myeongnong

2. 생애

백제 25대 무령왕과 그의 후궁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명농(明穠)이다. 이복 형제로 순타태자와 사아군이 있었다. 그의 생년월일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신찬성씨록에 등장하지 않지만, 일본서기 케이타이 14년조에 의하면 이때 성왕의 장남 의 나이가 29세였다는 언급이 있다.

538년 봄에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였다.[25] 540년 9월에 장군 연회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패배하였다.[26] 541년에 사신을 양 (남조)(梁)에 보내 조공하고,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涅槃) 등의 경서 및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을 청하여 양나라의 명을 받았다.[27]

548년 정월, 고구려 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한강 북쪽의 독산성을 공격해오자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진흥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28] 549년 10월, 양나라의 건강(建康)에 후경의 난이 있었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가 사신들이 반란군에게 붙잡혀 억류되기도 하였다.[29]

불교를 진흥했으며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여 왜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했다. 550년 정월,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3월에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30] 551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31]

553년 음력 7월, 고구려로부터 회복한 한강 유역의 대부분을 신라에 빼앗기고,[33][34] 신라에 포위되었다.[35] 음력 10월에 왕녀를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다.[36]

554년 왜, 가야에서 병사를 모으는 한편, 아들인 창(昌)과 함께 세 나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격에 나섰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2. 1. 즉위와 초기 통치

523년 음력 5월에 무령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그해 음력 8월 패수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으로 하여금 막아내었다.[19] 524년 양나라 고조(高祖)와 국교를 강화하여 양 고조로부터 "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持節都督 百濟諸軍事 綏東將軍 百濟王)"에 책봉되었다.[20] 525년 음력 2월, 신라와 사신을 교환하여 수교하였고,[21] 526년 음력 10월 웅진성을 수리하였다.[22]

529년 음력 10월, 고구려 안장왕이 군사를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혈성이 함락되었다. 성왕은 좌평 연모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3만을 이끌고 싸우게 했지만, 오곡원 전투에서 패하여 2천여 명의 병사들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23] 이후 신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에 대항하였으며, 534년 3월에 사신을 보내 양 (남조)조공하였다.

2. 2. 사비 천도와 남부여 개칭

538년 봄, 성왕은 수도를 웅진(지금의 공주시)에서 사비(지금의 부여군)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다.[25] 이는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튼튼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성왕은 귀족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에 맞서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국가 행정 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또한 국호를 부여와의 연관성을 강조하고자 남부여[3]로 변경했다.

2. 3. 대외 관계

양나라와 활발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하였다. 524년 양나라 고조로부터 "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에 책봉되었다.[20] 534년541년에 양나라에 사절단을 보냈는데, 특히 541년에는 장인, 불교 서적, 스승 등을 요청했고, 중국 기록에 따르면 모두 수락되었다.[27] 549년에는 양나라 수도 건강에 후경의 난이 일어난 것을 모르고 사신을 보냈다가, 사신들이 반란군에게 붙잡혀 억류되기도 하였다.[29]

541년의 조공에 대해 『양서』는 "거듭 사신을 보내 만물을 헌상하고, 아울러 열반 등의 경의, 모시 박사, 아울러 공장, 화가 등을 청했다. 칙령을 내려 모두 이를 하사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9] 이는 불교, 유교를 비롯한 남조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목적이었다.[9]

불교를 전파한 것도 성왕 때의 일이다. 538년 노리사치계일본에 파견하여 석가모니 상과 여러 경전을 일본 조정에 전달하였다.[40][41] 는 내용의 상표문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학자와 기술자들을 비롯하여 의사, 음악가까지도 파견하였다.[43]

2. 4. 관산성 전투와 죽음

551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회복하였으나, 553년 음력 7월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다.[33][34] 554년 왜, 가야에서 병사를 모으는 한편, 아들인 창(昌)과 함께 세 나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관산성(현,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 은행리 말동산 서남쪽)에서 신라군의 복병에 의해 전사하였다.[37]

성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차이가 있다.

  • 삼국사기》는 성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습격하다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37]
  • 일본서기》는 전장에 있던 아들 위덕왕을 위로하러 가던 중 신라군에 사로잡혀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32년(554년)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 현재의 옥천)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伏兵)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7] 신라본기에는 "명농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 대한민국 옥천 일대)을 공격해 왔다. 군주(軍主)였던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于都刀)가 백제왕(곧, 聖王)을 급히 쳐서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6백 명의 목을 베었고 단 한 마리의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38] 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성왕이 한강을 빼앗긴 것을 분하게 여겨 밤에 몰래 신라를 기습하려다 사망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 보면 554년 음력 12월 아들인 창(昌)신라로 쳐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를 쌓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전장에서 침식도 잊고 지내던 아들을 안쓰럽게 여긴 성왕은 이를 위로하러 관산성으로 향했다. 한편 성왕이 온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신라군은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성왕에 대한 기습을 감행했고, 불과 50명밖에 데리고 있지 않았던 성왕은 신라의 고도(苦都)가 이끄는 군사에 사로잡혔다. 고도는 성왕에게 "왕의 목을 베게 해주시오."라고 청하고, 성왕은 "왕의 목을 천한 종의 손에 넘길 수 없다"며 거절했으나 고도는 "우리 국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긴 자는 왕이라 해도 종의 손에 죽소."라며 잘라 말했다. 이에 성왕은 "과인은 지금껏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안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하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때 성왕의 목은 신라 왕궁 북청의 계단 밑에 묻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히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고, 나머지 몸은 백제로 반환되었다. 관산성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에 있었으며, 지금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9-3번지 부근은 성왕사절지(聖王死節地), 즉 성왕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성왕이 데리고 갔던 군사가 불과 50명에 불과했다는 기록을 볼 때 《삼국사기》의 내용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39] 관산성 전투 이후, 성왕은 전후 수습을 위해 측근들을 데리고 관산성으로 가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3. 불교 진흥과 문화 발전

성왕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백제의 불교 문화를 발전시켰다. 많은 사찰을 건립하고 인도에서 직접 불교 경전을 가져오는 승려들을 환영했다.[40] 528년, 백제는 공식적으로 불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538년에는 노리사치계일본에 파견하여 석가모니 상과 여러 경전을 일본 조정에 전달하였다.[41] 이는 일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사건으로 여겨진다.[43]

541년에는 양 (남조)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모시박사와 열반 등의 경서,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을 청하여 양나라의 허락을 받았다.[27] 549년에는 양나라의 수도 건강(建康)에서 후경의 난이 일어난 것을 모르고 사신을 보냈다가, 사신들이 후경에게 붙잡히는 일도 있었다.[29]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학자와 기술자들을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도 일본에 파견하였다.[43] 성왕은 이처럼 왜에 불교를 전파했을 뿐 아니라, 의박사,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교대로 파견하여 왜의 발전을 도와주었다.

4. 가계



성왕무령왕의 아들로, 왕비와 자녀들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왕비미상
장남위덕왕
차남혜왕
3남임성태자 (일본에 건너가 초기 일본 국가 형성에 기여)
소비 부여씨 (신라 진흥왕의 후궁)[36]
기타아좌태자, 효순, 목도왕의 아버지(이름 미상)


4. 1. 자녀

참조

[1] 문서 聖冏抄 ... 故威德王恋慕父王状所造顕之尊像 即救世観音像是也
[2] 서적 The arts of Korea: an illustrated history C. E. Tuttle Co. 1962
[3] 서적 Samguk Yusa: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 Silk Pagoda 2006
[4] 간행물 Transactions of the Asiatic Society of Japan Asiatic Society of Japan 1986
[5] 서적 Epochs of Chinese and Japanese Art: An Outline History of East Asiatic Design Heinemann 1912
[6]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7] 문서 日本書紀』巻十九・欽明天皇二年(541年)夏四月条
[8] 문서 日本書紀』巻十九・欽明天皇四年(543年)秋九月条
[9] 논문 東アジアにおける仏教の伝来と受容 : 日本仏教の伝来とその史的前提 https://hdl.handle.n[...] 関西大学東西学術研究所 1989
[10] 웹사이트 http://www.ibulgyo.c[...]
[11] 문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
[12] 문서 일본서기 기록
[13] 웹사이트 위덕왕의 생년으로 역산한 출생연도다. https://baekjemuseum[...]
[14] 서적 삼국사기
[15] 서적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16] 서적 일본서기
[17] 서적 미륵불광사 사적(彌勒佛光寺事蹟)
[18] 서적 고대로부터의 통신 붉은역사
[19] 서적 삼국사기
[20] 서적 삼국사기
[21] 서적 삼국사기
[22] 서적 삼국사기
[23] 서적 삼국사기
[24] 서적 삼국사기
[25] 서적 삼국사기
[26] 서적 삼국사기
[27] 서적 삼국사기
[28] 서적 삼국사기
[29] 서적 삼국사기
[30] 서적 삼국사기
[31]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32] 문서 진흥왕 순수비
[33] 서적 삼국사기
[34] 서적 삼국사기
[35]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36] 서적 삼국사기
[37] 서적 삼국사기
[38] 서적 삼국사기
[39] 서적 전쟁의 발견
[40] 서적 조선명인전 일빛
[41] 서적 일본서기
[42] 서적 구수한 큰맛 다할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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