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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발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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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옵발덴주는 스위스의 주(州)로, 니트발덴주와 함께 운터발덴주를 구성하며, 1999년 연방 헌법 개정으로 완전한 주로 승격되었다. 역사를 통틀어 정치적 상황과 독립의 정도가 다양했으며, 선사 시대부터 로마 시대, 중세 시대를 거쳐 스위스 연방의 일원으로 발전했다. 현재는 7개의 지자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제는 중소기업과 관광 산업이 주를 이룬다. 알프스 산맥의 일부인 티틀리스 산과 루체른 호수를 포함한 여러 호수가 위치해 있으며, 2020년 기준 38,108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독일어가 주요 언어이고, 로마 가톨릭교가 주된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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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옵발덴주 - 자르넨
    자르넨은 스위스 옵발덴주의 도시로, 자르넨 호수 북쪽 기슭에 위치하며, 오랜 역사를 지니고 무역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5개 구역으로 나뉘고, A8 고속도로와 브뤼닉선 철도가 주요 교통 수단이며, 2020년 기준 10,514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지역 경제 중심지 역할을 한다.
옵발덴주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옵발덴 주 지도
옵발덴 주 지도
기본 정보
공식 이름독일어: Kanton Obwalden
다른 이름Canton of Obwald
로마자 표기Kanton Obwalden
칸톤 유형칸톤
옵발덴 주 깃발
깃발
옵발덴 주 문장
문장
옵발덴 주 로고
로고
위치스위스 내 위치
수도자르넨
하위 구역 종류지방 자치체
하위 구역7개 지방 자치체
행정 수반Regierungsrat (5인)
입법 기관칸톤 의회(Kantonsrat) (55인)
ISO 코드CH-OW
가입일1291년
언어독일어
웹사이트옵발덴 주 공식 웹사이트
지리
면적490.59 km²
가장 높은 지점: 티틀리스
가장 낮은 지점: 루체른 호수
인구
총 인구37,076명
인구 조사 기준 시점2015년 12월
인구 밀도자동 계산
경제
GDP 합계CHF 25억 6천 4백만 (2020년)
1인당 GDPCHF 67,453 (2020년)

2. 역사

옵발덴은 니트발덴주와 함께 운터발덴주를 구성하는 두 계곡 중 하나이다. 1291년에서 1309년 사이에 운터발덴은 스위스 연방에 가입했다. 당시 옵발덴은 ''운터발덴 옵 뎀 케른발트''(''Unterwalden ob dem Kernwald'')로, 니트발덴은 ''운터발덴 니트 뎀 케른발트''(''Unterwalden nit dem Kernwald'')였다.[21] 동맹회의에서 운터발덴의 표는 두 계곡으로 나뉘었다. 1798년과 1803년 사이에는 발트슈테텐 칸톤의 자르넨 지역이 되었다. 1803년부터 1999년까지는 옵발덴 반주였다. 1999년에 새로운 연방 헌법은 반 칸톤 지정을 폐지하고 옵발덴을 완전한 주로 만들었지만, 여전히 주 평의회에서 대표성을 공유하고 표결권을 절반만 행사했다.[22] 옵발덴의 복잡한 역사로 인해 옵발덴, 니트발덴, 운터발덴의 역사가 겹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1291년 슈비츠, 우리와 함께 스위스 동맹을 구성하였고, 1340년 운터발덴 주는 니트발덴 주와 옵발덴 주의 반주(半州)로 분리되었다. 옵발덴과 니트발덴은 운터발덴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같은 목소리를 냈으나, 때로는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시기 헬베티아 공화국에 대한 저항 문제 등으로 니트발덴과 옵발덴은 행정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1815년 니트발덴 주가 연방 헌법을 받아들이지 않자, 옵발덴 주는 독립 지역이던 엥겔베르크 수도원 지역을 합병하여 현재 옵발덴 주의 월경지가 되었다.

2. 1. 선사시대

옵발덴에서 가장 오래된 고고학적 흔적은 기원전 8천년 경의 돌칼이며, 룽게른 인근의 브란트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4천년 경의 호르겐 문화 유적 두 곳이 이 주에서 발견되었는데, 기스빌에서는 도끼 한 개와 뼈날 두 개가, 빌렌에서는 망치 도끼가 발견되었다. 이 시기 옵발덴의 계곡에는 최소한 일시적으로 사람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농업이나 영구 정착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케른즈의 포리바흐에서 발견된 초기 청동기 시대 무덤은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1700년 사이에 주변 지역에 정착지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같은 시기에 자르넨 호수 기슭을 따라 정착촌이 있었을 수도 있다. 기원전 1500년에서 1100년 사이에는 렝그 고개의 주거지와 고개 위의 고산 목축 캠프를 비롯한 여러 다른 정착지가 있었다. 이 주의 많은 지명은 켈트족 또는 갈로로마인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2. 2. 중세 초기

옵발덴주는 니트발덴주와 함께 운터발덴주를 구성하는 두 계곡 중 하나이다. 중세 초에 옵발덴의 대부분 땅은 수도원(특히 무르바흐-루체른과 베로뮌스터 수도원)에 의해 통제되었다. 이 기간 동안 수도원은 권위와 교구를 옵발덴으로 퍼뜨리기 시작했다. 자르넨의 성 베드로 교회는 1036년에 처음 언급되었지만, 8세기 교회 위에 세워졌다.

엥겔베르크 수도원은 주요 세력이었으며 옵발덴의 교구를 통제했다.


알프나흐의 성 마리아 교회는 아마도 8세기 또는 9세기에 지어졌을 것이다. 케른스, 작셀른, 기스빌의 교회들은 모두 12세기까지 교구 교회가 되었고, 1275년에는 루르네른에 교회가 언급되었다. 14세기 동안 엥겔베르크 수도원은 옵발덴의 교구에 대한 권리를 얻기 시작했다. 1415년까지 수도원은 계곡 전체의 교구 사제 임명에 대한 사실상 통제권을 갖게 되었고, 1460년에는 계곡의 모든 교구에 대한 법적 권한을 갖게 되었다.[9]

12세기 초에 렌츠부르크 백작은 옵발덴의 상당한 토지를 베로뮌스터의 수도원에 기증했다. 13세기에는 소규모 귀족들을 위해 여러 개의 작은 성이 건설되었다. 자르넨의 켈너(주요 가문의 복종인)는 자르넨의 로어 성에 살았다. 기스빌에서는 훈빌 영주가 훈빌 성에 살았고, 미니스테리알리스(봉건 영주의 부역 기사) 가문인 기스빌의 마이어가 로젠베르크 성에 살았다. 루르네른에서는 비트링겐 영주가 성을 소유했다.

1291년 4월 16일에 독일의 루돌프 1세가 무르바흐 수도원으로부터 운터발덴(옵발덴과 니트발덴을 모두 포함)을 구매하면서, 칸톤의 귀족은 모두 제한된 권력을 가진 소규모 귀족이 되었다. 이것은 그를 계곡의 최고 토지 소유주, 백작, 그리고 황제로 만들었다. 그들의 자유를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1291년 8월 1일에 니트발덴(옵발덴은 문서 본문에 언급되지 않지만, 문서에 첨부된 봉인에는 언급되어 있음)은 우리와 슈비츠와 함께 영원한 동맹을 맺었다.[3] 이 동맹은 구 스위스 연방과 현대 스위스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2. 3. 스위스 연방 결성

옵발덴주는 니트발덴주와 함께 운터발덴주를 구성하는 두 계곡 중 하나이다. 역사를 통틀어 정치적 상황과 독립 정도는 매우 다양했다. 1291년에서 1309년 사이에 운터발덴은 신생 스위스 연방에 가입했다. 당시 옵발덴은 ''케른발트 위의 운터발덴''(Unterwalden ob dem Kernwald)으로, 니트발덴은 ''케른발트 아래의 운터발덴''(Unterwalden nit dem Kernwald)으로 알려졌다.[2] 운터발덴은 타크작쿵에서의 투표를 두 계곡으로 나누었다.

2. 4. 구 스위스 연방

옵발덴은 니트발덴주과 함께 운터발덴주를 구성하는 두 계곡 중 하나이다. 역사를 통틀어 정치적 상황과 독립 정도는 매우 다양했다. 1291년과 1309년 사이에 운터발덴은 초기 스위스 연방에 가입했다. 당시 옵발덴은 ''운터발덴 옵 뎀 케른발트''(''Unterwalden ob dem Kernwald''), 니트발덴은 ''운터발덴 니트 뎀 케른발트''(''Unterwalden nit dem Kernwald'')였다.[21] 동맹회의(Tagsatzung)에서 운터발덴의 표는 두 계곡으로 나뉘었다.

1470년의 ''Tschachtlanchronik''에서 발췌한 모르가르텐 전투


암스탈덴 사건. 그림은 뒤편 나무 아래에서 옵발덴의 지원을 받아 루체른에 반란을 일으키기 위한 공모 회의를 하고 있는 페터 암스탈덴을 보여준다.


처음에 영원 동맹은 세 칸톤 간의 상호 방위 조약이었으며, 각 칸톤은 독립적으로 통치되었다. 1304년 옵발덴과 니트발덴의 두 계곡은 백작의 같은 지역 부관 아래 통합되었다.[3] 1309년 신성 로마 황제 헨리 7세는 그의 전임자가 하사한 모든 자유를 운터발덴에 확인했지만,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3] 황제는 또한 운터발덴에 제국 직할지를 부여하여 우리, 슈비츠와 정치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3]

1314년, 바이에른 공작 루이 4세(훗날 신성 로마 황제 루이 4세)와 미남왕 프리드리히는 모두 신성 로마 황제의 왕위를 주장했다. 연방은 합스부르크가 그들의 국가를 합스부르크 영토로 합병할 것을 두려워하여 루이 4세를 지지했다. 슈비츠 연방과 합스부르크가 보호하는 아이진델른 수도원 사이의 목초지 분쟁으로 전쟁이 발발했고, 결국 슈비츠 연방은 수도원을 습격했다.[4]

동맹국을 지원하기 위해 운터발덴은 모르가르텐 전투에 연방에 합류하여 브뤼니히 고개 침공을 격퇴했다. 합스부르크에 대한 결정적인 연방의 승리 후, 운터발덴은 브루넨 조약에서 영원 동맹을 갱신했다. 14세기 동안 옵발덴의 공동체는 귀족을 희생시키면서 점점 더 강력해졌다. 한때 강력했던 자르넨의 켈너 가문은 1307년 이후 정치에서 은퇴했다. 자르넨 백서에는 이 가문의 거처인 하부 성의 정복이 언급되어 있으며, 이것이 그들이 정치를 떠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스트레틀리겐 가문과 링겐베르크 가문은 훈빌 영주와 결혼하여 가문의 결혼의 힘을 사용하여 1330년대와 40년대에 합스부르크 권력을 막연한 종주권으로 줄였지만, 합스부르크는 여전히 옵발덴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4세기 초, 훈빌 영토에 가축 농부들의 조직이 발전했다. 세기 동안 그들은 더 많은 토지를 얻고 부유해짐에 따라 정치적 권력이 커졌다. 이 조직은 결국 대체 정치 구조가 되었고, 조직과 훈빌 귀족 간의 갈등 이후, 1382년 란츠게마인데는 훈빌이 정치 또는 법정 직책을 맡는 것을 배제했다.[9] 13세기와 14세기 동안 옵발덴은 니트발덴과 약 1330년까지 공동 의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인 지방 정부를 수립했다.

14세기 동안 옵발덴은 1386년의 젬파흐 전투와 1375년의 구글러 전쟁을 포함하여 스위스 연방과의 여러 전쟁에 참여했다. 1368년에는 알프나흐를, 1378년에는 헤르기스빌을 평화적으로 획득했다. 1403년 옵발덴은 우리와 합류하여 레벤티나 지역(오늘날 티치노주에 위치)을 침공하여 치즈와 가축을 위한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그들은 1410년에 발 다 오솔라를 정복했다. 1419년 연방은 벨린초나를 매입했다. 밀라노는 3년 후 1422년 스위스 연방이 벨린초나 구매 제안을 거부한 후 도시를 공격했다. 우리와 옵발덴의 군대는 도시에서 빠르게 쫓겨났고, 나중에 1422년 6월 30일 아르베도 전투에서 패배했다.[5] 이 패배로 연방은 벨린초나, 발 다 오솔라, 레벤티나에서 쫓겨났다. 루체른주에서 루체른주로 엔틀부흐 지역을 끌어내려는 시도는 옵발덴이 지원하는 엔틀부흐 지도자 페터 암스탈덴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478년에 처형되면서 끝났다.[6] 1500년, 니트발덴, 슈비츠, 우리 주는 다시 티치노를 정복하여 1798년까지 통치했다. 옵발덴은 아르가우 (1415), 투르가우 (1460), 로카르노 (1512) 정복에 참여했으며, 발 다 오솔라의 일시적인 점령(1410–14, 1416–22, 1425–26, 1512–15)에도 참여했지만,[3] 어떤 점령 영토도 합병하거나 성장할 수 없었다.

부르고뉴 전쟁 (1474–77) 동안 운터발덴은 다른 숲 칸톤과 마찬가지로 베른에 대한 질투심으로 물러섰지만, 필요한 시기에 구출에 나섰다.[3] 부르고뉴 전쟁에서 스위스의 승리 이후, 구 스위스 연방은 도시 칸톤이 가장 많은 군대를 제공했기 때문에 수익의 몫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내부 갈등으로 거의 분열되었다. 시골 칸톤은 이에 불만을 품었고, 각 칸톤의 타그자충 또는 지도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481년 니트발덴의 슈탄스에서 만났다. 그러나 그들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전쟁은 불가피해 보였다.[7] 옵발덴 출신의 지역 은둔자인 플뤼에의 니클라우스가 이 상황에 대해 자문을 받았다.[3] 전설에 따르면 그는 그의 입장을 타그자충 회원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메시지의 내용은 오늘날까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격분을 가라앉히고 슈탄스 베르콤니의 초안을 작성하게 했다. 베르콤니의 일환으로 프리부르졸로투른이 연방에 가입했다.

2. 5. 종교 개혁

옵발덴주의 란츠게마인데는 개신교 종교 개혁에 확고히 반대했다. 방백 회의에서 개신교와 가톨릭 칸톤 간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실패하고, 1526년 바덴 논쟁이 실패하자 옵발덴은 적극적으로 친가톨릭 입장을 취했다.[9] 1528년, 옵발덴은 베른주 오버하슬리 지역에 옛 신앙을 강요하기 위해 브뤼니크 고개를 넘어 병력을 파견했다. 옵발덴의 침공과 베른의 대응은 1529년 카펠 1차 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불안의 일부였다. 카펠 1차 전쟁은 인명 피해 없이 평화 조약으로 끝났지만, 2년 후 카펠 2차 전쟁은 개혁가 울리히 츠빙글리의 죽음과 가톨릭 측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연방의 약 절반이 개신교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칸톤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을 포함한 이웃 가톨릭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기 시작했다. 옵발덴의 주요 정치 가문 대부분은 친프랑스 성향이었다.[9]

2. 6. 헬베티아 공화국 시대

1798년 프랑스의 침공 당시 옵발덴은 여전히 친프랑스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폰 플뤼에는 프랑스 용병으로 복무하면서 부유해지고 정치적으로 강력해졌다. 성직자들은 프랑스를 여전히 가톨릭 교회의 지지자로 여겼다. 1798년 4월 1일, 옵발덴은 최초의 스위스 칸톤 중 하나가 되어 헬베티아 공화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웃 국가들의 강요로 새로운 공화국을 거부하고 프랑스에 저항하게 되었다. 프랑스 군대가 반란을 진압했을 때, 옛 삼림 칸톤들은 단일 발트슈테텐 칸톤으로 병합되었다. 옵발덴은 이 새로운 칸톤에서 자르넨 구가 되었다. 새로운 구의 지도부는 헬베티 공화국과 프랑스 군대를 지지했다.

1798/99년 헬베티 공화국 (단명했던 발트슈테텐 칸톤 포함)


헬베티 공화국이 붕괴된 후, 1803년의 중재법은 발트슈테텐을 해체하고 제15조에서 운터발덴을 "숲 위"와 "숲 아래"의 반 칸톤으로 구체적으로 나누었다. 주요 "헬베티커" 또는 공화국 지지자들은 동료 시민들의 호의를 잃었다. 그러나 1798년 이전의 의원들의 상당수는 공화국 하에서 공무원이기도 했으며, 1803년 란츠게마인데에 의해 재선출되었다. 정치인들은 동일하게 유지되었지만, 반 칸톤에는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칸톤의 모든 주민들이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된 것이었는데, 이전에는 시민과 거주 외국인이 서로 다른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변화로는 투표 연령을 14세에서 20세로 올리고 20세에 군 복무를 요구하는 것이 있었다.[9]

2. 7. 연방 국가 성립 이후

옵발덴은 니트발덴주와 함께 운터발덴주를 구성하는 두 지역 중 하나였다. 1291년에서 1309년 사이에 운터발덴은 초기 스위스 연방에 가입했다. 당시 옵발덴은 ''운터발덴 옵 뎀 케른발트''(Unterwalden ob dem Kernwald)로 알려졌으며, 니트발덴은 ''운터발덴 니트 뎀 케른발트''(Unterwalden nit dem Kernwald)였다.[21] 타크작쿵에서 운터발덴의 표는 두 지역으로 나뉘었다.

1798년 프랑스의 침공 당시 옵발덴은 친 프랑스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1798년 4월 1일, 옵발덴은 헬베티 공화국을 받아들인 최초의 스위스 칸톤 중 하나가 되었지만, 이웃 국가들의 강요로 새로운 공화국을 거부하고 프랑스에 저항했다. 프랑스 군대가 반란을 진압했을 때, 옛 삼림 칸톤들은 발트슈테텐 칸톤으로 병합되었고 옵발덴은 이 새로운 칸톤에서 자르넨 지역이 되었다.

헬베티 공화국이 붕괴된 후, 1803년의 중재법은 발트슈테텐을 해체하고 운터발덴을 "숲 위"와 "숲 아래"의 반 칸톤으로 나누었다. 1815년, 엥겔베르크 수도원과 동명의 지자체가 옵발덴에 합류했다.

복고 시대 동안, 정부는 헬베티아 공화국의 많은 개혁들을 되돌리기 시작했다. 1840년,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 연합이 연방 의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여 여러 개혁을 도입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안했다. 이러한 급진적인 정부에 대응하여, 옵발덴을 포함한 가톨릭 및 보수 칸톤들은 1843년에 "존더분트"(Sonderbund)라는 별도의 동맹을 결성했다. 1847년 존더분트 전쟁이 발발했고, 옵발덴이 전쟁에 참여했지만, 존더분트 평의회는 연방군이 칸톤에 도착하기 전에 항복했다.

존더분트 전쟁 이후, 옛 정부는 자유주의 정부로 대체되었다. 1850년, 가톨릭 교회는 유일한 칸톤 종교로 인정받았다. 1867년, 칸톤 헌법은 완전히 개정되어 정부 조직이 변경되고, 개혁 교회는 자체 학교 운영권을 포함한 일부 권리를 갖게 되었다. 1902년 헌법은 시민들이 모든 법률에 대해 국민 투표를 요구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1922년에는 헌법, 법률 및 세법에 대한 비밀 투표가 도입되면서 란츠게마인데의 권한이 더욱 약화되었다.[9]

1972년에는 여성들이 처음으로 칸톤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게 되었고, 1983년에는 투표 연령이 18세로 낮아졌다.[9] 란츠게마인데는 1998년에 마침내 폐지되었다.[8] 1999년에 새로운 연방 헌법은 지정된 절반의 칸톤을 폐지하고, 옵발덴을 완전한 주로 만들었다.[22]

3. 지리

옵발덴 주는 스위스 중앙부, 알프스산맥 기슭에 위치하며, 북쪽에 루체른호가 있다. 1291년 슈비츠, 우리와 함께 스위스 동맹을 구성한 운터발덴 주의 일부였다. 운터발덴은 1340년 삼림 지역을 경계로 강 하류 지역(니트발덴주)과 상류 지역(옵발덴 주)으로 분리되었다. 두 주는 '운터발덴'이라는 이름 아래 같은 목소리를 냈으나, 때로는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시기 헬베티아 공화국에 대한 저항 문제 등으로 니트발덴과 옵발덴은 행정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1815년 니트발덴 주가 연방 헌법을 받아들이지 않자, 옵발덴 주는 엥겔베르크 수도원 지역을 합병하여 현재 월경지로 남아있다.

3. 1. 주요 지형

티틀리스 산의 빙하


최고 고도는 우리 알프스의 티틀리스 산으로 3238m이다.

옵발덴주의 호수로는 루체른 호수 (비어발트슈테터 호), 사르넨 호수 (자르너 호), 룽게른 호수 (룽게러 호), 비헬 호, 탄넨 호, 멜흐 호 등이 있다.

옵발덴주의 총 면적은 490.5km2이다. 2006년 기준으로, 전체 면적의 약 40.2%인 197.3km2가 삼림 지대이고, 약 37.9%인 185.8km2가 농업에 사용된다. 나머지 면적 중 15.8km2(3.2%)는 건물 및 도로 등으로 개발되었고, 91.6km2(18.7%)는 강, 산, 빙하 등 비생산적인 지역으로 분류된다.[9] 옵발덴주는 스위스의 거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4. 정치

2011년 연방 선거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정당은 56.9%를 얻은 옵발덴주 기독교 사회당이었다. 스위스 국민당은 43.1%를 얻었다.[10] 옵발덴주 기독교 사회당은 2007년에는 후보자도, 득표수도 없었지만 2011년에는 다수당이 되었다.[11]

1971년부터 2015년까지 연방 선거에서 주의 정당별 총 득표율[12]
정당이념197119751979198319871991199519992003200720112015
FDP.자유민주당고전적 자유주의32.5***30.4**0.0****
CVP/PDC/PPD/PCD기독교 민주주의67.097.195.791.051.795.394.20.066.432.5**
SP/PS사회 민주주의*******0.0*11.6**
SVP/UDC스위스 민족주의*******0.033.632.943.134.5
FPS/PSL우익 포퓰리즘******3.80.0****
기타 (CSP OW 포함)0.52.94.39.017.84.72.10.00.023.056.965.5
투표율 %53.721.242.330.950.926.731.90.045.759.764.359.5


  • 는 이 주에서 해당 정당이 투표용지에 없었음을 나타낸다. 선거 미실시

4. 1. 행정 구역

스위스 연방 내에서 옵발덴은 부분 칸톤이다. 이는 옵발덴에 완전 칸톤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지만, 칸톤은 주 의회에 단 한 명의 대표만 보낼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이 있다. 칸톤의 작은 규모로 인해 5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정부가 가능하다.

2010년 3월 7일에 치러진 주 의회 선거에서 중도 세력이 주 의회를 계속 장악했다. 기독교 민주당은 3석을 잃었지만 20석으로 최대 정당 자리를 지켰다. 스위스 국민당은 5석을 얻어 두 번째로 큰 정당이 되었고, 자유민주당은 10석을 유지했지만 세 번째로 큰 정당으로 떨어졌다. 사회민주당은 6석을 유지했고, 옵발덴 기독사회당은 2석을 잃어 8석을 얻었다.[13]

칸톤스라트의 정당별 변화는 다음과 같다(일부 날짜에 대해):[9]

연도CVPFDPCSP-OWDESPSVP기타FFO
197426414951
197826394651
198228445052
198625374652
19902842495055
199427415155
1998253848
20022132404855
20062333434955
20102030384455



옵발덴주의 지방 자치체


옵발덴주에는 7개의 지방 자치체가 있다: 사르넨, 케르스, 작셀른, 알프나흐, 기스빌, 룽게른, 엥겔베르크. 주도인 사르넨은 '사르넨-도르프샤프트', '캐기스빌', '슈벤디/빌렌', '라머스베르크'로 세분된다. 옵발덴주의 지방 자치체의 자율성은 상당하다. 세입의 2/3가 지방 자치체로 흘러 들어가는데, 예를 들어 주정부의 보조금 없이 교육 비용을 지불한다.

5. 경제

알프스산맥의 관광지가 발달해 있으며, 특히 엥겔베르크 지역이 유명하다.

관광은 옵발덴 주 경제의 주요 부문이다. 스위스 알프스 중앙에 위치하여 19세기부터 중요한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관광을 위해 건설된 많은 시설들이 현재 지역 산업과 주민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 필라투스와 티틀리스 산 두 개의 이 주요 명소이다. 특히 스키와 스노보드를 포함한 겨울 스포츠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한다. 주요 리조트는 엥겔베르크, 멜히제-프루트, 룽에른-쇤뷜, 뫼를리알프, 랑기스이다. 여름에는 하이킹과 등산이 주요 매력이다. 인구의 4분의 1이 관광 부문에 직간접적으로 고용되어 있다.

5. 1. 전통 산업

옵발덴 주의 경제는 중소기업이 지배적이다. 이들 중 다수는 소형 엔진, 합성물, 의료 장비 또는 나노 기술과 같은 분야의 전문가이다.

임업과 관련 사업, 농업이 특히 중요하며, 전통 산업 역시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옵발덴 주의 농업은 낙농업 및 육류 축산업을 전문으로 한다. 농장은 여전히 가족이 운영한다.

5. 2. 현대 산업

옵발덴 주의 경제는 중소기업이 지배적이다. 이들 중 다수는 소형 엔진, 합성물, 의료 장비 또는 나노 기술과 같은 분야의 전문가이다.[17]

전통 산업 역시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특히 임업과 관련 사업이 중요하며, 농업도 마찬가지이다. 옵발덴 주의 농업은 통합된 낙농업 및 육류 축산업을 전문으로 한다. 농장은 여전히 가족이 운영한다.

2007년에 옵발덴 주는 이전의 역진적 소득세(소득이 높을수록 낮은 세율)를 1.8%의 단일 소득세로 대체했는데, 이는 스위스에서 가장 낮은 세율이다.[17] 이 주세는 연방세 및 지방세에 추가된다.

2010년 기준, 옵발덴 주의 실업률은 1.5%였다. 2008년 기준, 제1차 경제 부문에는 1,871명이 고용되었으며, 이 부문에는 약 750개의 사업체가 참여했다. 제2차 부문에는 6,499명이 고용되었으며, 이 부문에는 452개의 사업체가 있었다. 제3차 부문에는 10,037명이 고용되었으며, 이 부문에는 1,380개의 사업체가 있었다.[14]

2008년 풀타임 상당 일자리의 총 수는 15,215개였다. 제1차 부문의 일자리는 1,157개였으며, 이 중 1,052개는 농업, 105개는 임업 또는 목재 생산에 종사했다. 제2차 부문의 일자리는 6,008개였으며, 이 중 3,648개(60.7%)는 제조업, 46개(0.8%)는 광업, 2,139개(35.6%)는 건설업에 종사했다. 제3차 부문의 일자리는 8,050개였다. 제3차 부문에서 1,892개(23.5%)는 자동차 판매 또는 수리, 520개(6.5%)는 물품 운송 및 보관, 1,440개(17.9%)는 호텔 또는 레스토랑, 140개(1.7%)는 정보 산업, 347개(4.3%)는 보험 또는 금융 산업, 708개(8.8%)는 기술 전문가 또는 과학자, 528개(6.6%)는 교육, 1,213개(15.1%)는 의료 서비스에 종사했다.[18]

취업 인구 중 10.7%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출근했고, 54.6%는 자가용을 이용했다.[14]

5. 3. 조세 제도

옵발덴 주는 2007년에 역진적 소득세(소득이 높을수록 낮은 세율)를 1.8%의 단일 소득세로 대체했는데, 이는 스위스에서 가장 낮은 세율이다.[17] 이 주세는 연방세 및 지방세에 추가된다.

6. 인구

2010년 현재 옵발덴 주의 인구는 35,075명이다.[14] 2010년 기준으로 인구의 12.9%가 외국인 거주자이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 동안 인구는 8.7% 증가했는데, 이민이 5.7%, 출생과 사망이 2.5%를 차지했다.[14]

2000년 기준으로 옵발덴에서 태어나 그곳에 살았던 사람은 전체 인구의 45.8%인 14,867명이다. 같은 주에서 태어난 사람은 13.5%(4,374명)이고, 스위스 다른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은 25.4%(8,228명), 스위스 외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은 12.3%(4,000명)이었다.[15] 2000년 기준, 어린이와 청소년(0~19세)은 26.7%, 성인(20~64세)은 59.3%, 노인(64세 이상)은 14.1%를 차지한다.[14]

2000년 기준으로 미혼자는 15,026명, 기혼자는 14,674명, 과부 또는 홀아비는 1,691명, 이혼자는 1,036명이었다.[15] 2000년 기준 가구당 평균 인원은 2.5명이었으며, 1인 가구는 3,835가구, 5인 이상 가구는 1,349가구였다.[14] 2009년 기준 신규 주택 건설률은 주민 1,000명당 8.8채였으며,[14] 2010년 기준 공실률은 0.8%였다.[14]

역대 인구 변화는 아래 표와 같다:[16]

연도185018801900195019702000
인구13,79915,32915,26022,12524,50932,427


6. 1. 언어

옵발덴 주의 주민은 주로 독일어를 사용한다.[14] 2000년 기준으로 인구의 92.3%가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알바니아어(1.4%)와 세르보-크로아티아어(1.2%)가 그 뒤를 잇는다. 프랑스어 사용자는 144명, 이탈리아어 사용자는 329명, 로만슈어 사용자는 32명이다.[15]

6. 2. 종교

에 따르면, 옵발덴 주민의 종교는 다음과 같다.

작센의 성 테오둘 가톨릭 교회. 옵발덴 주민의 대다수는 로마 가톨릭 신자이다.

7. 문화

옵발덴주의 전통 문화는 많은 지역 단체들에 의해 보존되어 왔다. 전통 음악, 카니발, 춤, 의상, 극장 및 축제가 있다. 또한 요제프 가로비(작곡가), 카스파 디트헬름(작곡가), 율리안 딜리에(시인), 프란츠 부허(화가), 쿠르트 지그리스트(조각가) 및 알로이스 슈피히티히(조각가)를 포함한 많은 현대 예술가들이 있다.[1]

참조

[1] 웹사이트 Bruttoinlandsprodukt (BIP) nach Grossregion und Kanton - 2008-2018 {{!}} Tabelle https://www.bfs.admi[...] 2021-01-21
[2] 문서 Nidwalden HDS
[3] 서적
[4] 문서 Battle of Morgarten HDS
[5] 문서 Bellinzona HDS
[6] 문서 Amstalden Affair HDS
[7] 문서 Stanser Verkommnis HDS
[8] 간행물 Botschaft über die Gewährleistung der geänderten Verfassungen der Kantone Zürich, Obwalden, Solothurn, Waadt und Genf http://www.admin.ch/[...] Bundesblatt 1999
[9] 문서 Obwalden HDS
[10] 웹사이트 Swiss Federal Statistical Office, Elections in Switzerland http://www.portal-st[...] 2012-01-11
[11] 웹사이트 Swiss Federal Statistical Office, ''Nationalratswahlen 2007: Stärke der Parteien und Wahlbeteiligung, nach Gemeinden/Bezirk/Canton'' 2010-05-28
[12] 보고서 Nationalratswahlen: Stärke der Parteien nach Kantonen (Schweiz = 100%) http://www.bfs.admin[...] Swiss Federal Statistical Office 2015
[13] 웹사이트 Cantonal Council of Obwalden official website http://www.ow.ch/de/[...]
[14] 웹사이트 Swiss Federal Statistical Office http://www.bfs.admin[...] 2012-03-13
[15] 웹사이트 STAT-TAB Datenwürfel für Thema 40.3 - 2000 http://www.pxweb.bfs[...] 2011-02-02
[16] 문서 Obwalden HDS
[17] 뉴스 Obwalden votes for a flat tax rate http://www.swissinfo[...] Swissinfo 2007-12-16
[18] 웹사이트 Swiss Federal Statistical Office STAT-TAB Betriebszählung: Arbeitsstätten nach Gemeinde und NOGA 2008 (Abschnitte), Sektoren 1-3 http://www.pxweb.bfs[...] 2011-01-28
[19] 웹사이트 Flüe [-Wyss], Dorothea von http://www.hls-dhs-d[...] HDS 2005-01-26
[20] 웹사이트 Ständige und nichtständige Wohnbevölkerung nach institutionellen Gliederungen, Geburtsort und Staatsangehörigkeit https://www.pxweb.bf[...] 2017-01-28
[21] 문서 Nidwalden HDS
[22] 문서 Obwalden H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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