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히데마로
1. 개요
와타나베 히데마로는 1924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고쿠가쿠인 대학을 졸업한 후 주고쿠 전력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1954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월드컵 예선과 아시안 게임에 출전했으며, 2경기에 출전했다. 은퇴 후에는 니시마 중학교에서 축구 지도를 시작했고, 산요 고등학교의 감독을 맡아 전국 고교 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에이 다이 산업 축구부 창단에 협력했으며, 히로시마현 축구 협회 중진 간부로 활동했다. 2011년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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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남자 축구 선수 -
교토쿠 고지
교토쿠 고지는 일본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다양한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지휘하며, 2008년 부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남아시아 축구 연맹컵 준결승 진출, 2003년 시미즈 에스펄스 감독으로 J리그컵 준결승과 천황배 준결승 진출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
일본의 남자 축구 선수 -
스가마타 데쓰오
스가마타 데쓰오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로, 수비수로 활약하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23경기에 출전했고, 히타치 제작소 축구부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1980년과 1982년 일본 사커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등 다양한 국제 대회에 출전했다. -
2011년 사망 -
엘리자베스 슬레이든
엘리자베스 슬레이든은 잉글랜드 배우로, BBC SF 드라마 《닥터 후》에서 사라 제인 스미스 역을 맡아 세 번째, 네 번째 닥터의 컴패니언으로 출연했으며, 이후 스핀오프 드라마 《사라 제인 어드벤처》에서 주연을 맡았다. -
2011년 사망 -
한기춘
한기춘은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한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연세대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한국은행 고문,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유신정우회 국회의원과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으로 활동했으나, 유신정권 참여 경력은 비판받는다. -
1924년 출생 -
윌리엄 렌퀴스트
윌리엄 렌퀴스트는 미국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며, 보수주의 성향으로 미국 수정헌법 제14조에 대한 좁은 해석, 연방 정부 권한 축소 및 주 정부 권한 확대를 주장했으며, `부시 대 고어` 사건과 빌 클린턴 탄핵 재판에 관여했다. -
1924년 출생 -
조반니 사르토리
조반니 사르토리는 이탈리아의 정치학자이며, 특히 의미있는 정당 개념을 통해 정치학계에 기여했으며, 다양한 저서를 통해 민주주의 이론, 정치 제도 디자인 등에 대해 논의했다.
2. 선수 경력
히로시마 니노시마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지역 청년단 팀이나 전(全)히로시마 선발팀에서 꾸준히 축구를 하여 일본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전 히로시마 팀은 도요 공업 선수들이 주축이 된 강팀이었으며, 1951년 방일한 스웨덴 프로팀 헬싱보리 IF와 경기를 치렀을 때 와타나베도 출전했다.
그는 좋은 체격과 안정적인 플레이로 명골키퍼로 평가받았으나, 시력이 나빠 안경을 쓰고 경기에 나섰다. 그의 본가가 히로시마의 니호히메 신사였기 때문에, 당시 팀 내 별명은 "신주"였다고 한다.
2.1. 클럽 경력
고쿠가쿠인 대학을 졸업한 후 주고쿠 전력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2.2. 국가대표팀 경력
1954년 3월, 와타나베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1954년 FIFA 월드컵 예선에 참가했다. 이 예선 중 3월 14일에 열린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같은 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1954년 아시안 게임에도 출전했다. 1954년 일본 대표팀에서 총 2경기에 출전했다.
3. 지도자 경력
와타나베는 선수 은퇴 후 지도자로서도 활동했다. 히로시마 니시마 중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며 친동생 사다히코와 함께 축구부 지도를 시작했다.
이후 주고쿠 전력에 근무하던 중, 지인의 아들이 산요 고등학교 축구부에 있었던 것을 계기로 코치를 맡게 되었다. 이것이 발전하여 1955년, 산요 고등학교의 한문 교사가 되어 축구부 부장 겸 감독으로 정식 부임했다. 그는 본가인 니호히메 신사의 신주 일과 교사직을 겸했으며, 경기가 끝나면 바로 의관장속을 갖추고 신사로 달려가기도 했다.
와타나베는 엄격한 지도 방식으로 유명했는데, 학생들 사이에서는 "신을 섬기는 신주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친 법사나 텐구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이러한 지도 아래 산요 고등학교는 광대 부속 고등학교, 코쿠타이지 고등학교, 수도 고등학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히로시마 고교 축구의 강호로 성장했다. 1955년 팀의 전국 고등학교 축구 선수권 대회 첫 출전을 이끌었고, 마침내 1967년에는 감독으로서 팀에 전국 고교 선수권 첫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그의 지도 아래 오이시 노부유키, 미야모토 데루키, 가미히사오, 쿠니에다 츠요시, 고노 가즈히사 등 많은 제자들이 훗날 일본 대표팀 선수로 성장했다. 제자들이 야하타 제철 축구부로 많이 진학했는데, 이는 야하타 제철의 감독이었던 데라니시 타다나리가 와타나베의 히로시마 제1중학교 1년 후배였던 인연 덕분이었다.
산요 고등학교 감독 이후에도 올 주고쿠 고교 선발팀 감독 등을 맡았으며, 히로시마현 축구 협회의 중진 간부로서 지역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1972년에는 에이 다이 산업의 후카오 시게 사장 제안으로 야마구치현헤이세이 정에 창단된 에이 다이 산업 축구부의 팀 만들기에 협력했다. 당시 일본 사커 리그(JSL) 소속이었던 나고야 소고 은행 축구부의 히로시마 출신 선수들의 후견인 역할을 하던 관계를 통해, 활동을 중단한 나고야 소고 은행 선수들이 에이 다이 산업으로 대거 이적하는 것을 주선했다. 이는 당시 신문에도 크게 보도될 정도였다. 오쿠보 켄 감독을 비롯한 나고야 소고 은행 선수들의 합류로 에이 다이 산업은 창단 첫해 JSL 2부 리그 진입, 2년 차에는 1부 리그 승격이라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후 영입된 브라질 선수들의 활약까지 더해져 1974년에는 창단 3년 만에 천황배 결승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만년에는 모교인 히로시마코쿠타이지 고등학교 축구부 OB회인 리조 축구단 회장을 맡아, 모교 축구부 창단 100주년 기념 사업 등을 추진했다.
4. 신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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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히데마로의 본가는 히로시마시 고잔에 위치한 니호히메 신사이다. 그가 고쿠가쿠인 대학을 졸업한 것은 본가가 신사이고 그가 신주이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에는 본가인 니호히메 신사에서 신주 일을 했다.
산요 고등학교 교사 시절에는 신주와 교사 두 직업을 겸했는데, 경기가 끝나면 바로 의관장속을 갖추고 신사로 달려가기도 했다. 그의 엄격한 지도 스타일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신을 섬기는 신주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친 법사나 텐구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말년에는 본가인 니호히메 신사의 궁사(宮司) 일에 전념했다. 니호히메 신사는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에도 견뎌낸 피폭 건물로 알려졌으나, 2007년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2010년에 재건되었다.
5. 개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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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히데마로의 본가는 히로시마시 고잔에 위치한 니호히메 신사이다. 그는 신사의 신주 집안 출신으로, 고쿠가쿠인 대학을 졸업한 이력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의 아버지 역시 교사였으며, 나카조 가즈오가 히로시마 제1중학교 재학 시절 담임이었다. 히데마로의 동생 사다히코는 나카조와 동급생이었다. 히데마로 자신도 1943년 히로시마 제1중학교를 졸업했으며, 동기 졸업생으로는 히라타 가조(히로시마 대학 명예 교수), 쇼노 나오미(히로시마 여학원 대학 명예 교수) 등이 있다.
1944년 고쿠가쿠인 대학에 진학했으나 같은 해 9월 일본군에 입대했다. 다음 해인 1945년 7월까지 히로시마에서 훈련을 받은 후, 갑종 간부 후보생으로 선발되어 중부군관구 교육대가 있던 교토부 후쿠치야마시로 이동했다. 이 덕분에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피할 수 있었다.
전후 복학하여 고쿠가쿠인 대학을 졸업하고, 본가인 니호히메 신사에서 신주로 일했다. 동시에 히로시마 니노시마 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동생 사다히코와 함께 축구부를 지도했다.
니노시마 중학교 교사 시절, 30대 전후의 나이에 일본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이는 지역 청년단 팀이나 '전 히로시마'와 같은 선발팀에서 꾸준히 축구를 해왔기 때문이다. '전 히로시마'는 시모무라 유키오, 고바타 미노루, 젠무라 겐지 등 도요 공업 선수들과 후쿠하라 레이조 등이 참여한 강팀이었다. 1951년 일본을 방문한 스웨덴 프로팀 헬싱보리 IF와의 경기에도 출전했다. 비록 헬싱보리와 일본 대표팀 간의 공식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대표팀 명단에는 이름을 올렸다. 1954년 FIFA 월드컵 스위스 대회 예선과 제2회 아시안 게임(마닐라)에서 무라오카 히로토와 주전 경쟁을 하며 각각 국제 A매치 1경기씩 출전했다. 그는 좋은 체격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플레이를 선보여 명골키퍼로 평가받았으며, 시력이 나빠 안경을 쓰고 경기에 임했다. 당시 팀 내 별명은 그의 배경 때문에 "신주"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주고쿠 전력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주고쿠 전력 재직 중, 회사 지인의 아들이 산요 고등학교 축구부에 소속된 것을 계기로 해당 학교의 코치를 맡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55년, 산요 고등학교의 한문 교사로 부임하며 축구부 부장 겸 감독을 맡았다. 신주와 교사직을 겸임했기에, 경기가 끝나면 바로 의관 정속을 갖추고 신사로 달려가기도 했다. 엄격한 지도 방식으로 학생들 사이에서는 "신을 모시는 신주라고는 믿기 힘든, 거친 법사나 텐구 같다"는 평이 돌기도 했다. 이러한 지도 아래 산요 고등학교는 광대 부속 고등학교, 코쿠타이지 고등학교, 수도 고등학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히로시마 고교 축구 강호로 성장했다. 1955년 전국 고교 선수권에 처음 출전했으며, 1967년에는 감독으로서 팀을 전국 고교 선수권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시 제자였던 오이시 노부유키, 미야모토 데루키, 가미히사오, 쿠니에다 츠요시, 고노 가즈히사 등은 훗날 일본 대표팀 선수로 활약했다. 그의 제자들이 다수 야하타 제철 축구부로 진학했는데, 이는 야하타 제철의 감독 데라니시 타다나리가 와타나베의 히로시마 제1중학교 1년 후배였던 인연 덕분이었다.
1972년, 에이 다이 산업 후카오 시게 사장의 제안으로 야마구치현 헤이세이 정에 창단된 에이 다이 산업 축구부의 팀 구성에 협력했다. 당시 일본 축구 리그(JSL) 소속이었던 나고야 소고 은행 축구부의 히로시마 출신 선수들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인연으로, 활동을 중단한 나고야 소고 은행 선수들의 에이 다이 산업으로의 대규모 이적을 주선했다. 이는 당시 신문에도 크게 보도될 정도였다. 오쿠보 켄 감독을 비롯한 나고야 소고 은행 선수들의 합류로 에이 다이 산업은 전력이 크게 강화되어, 창단 첫해 JSL 2부 리그 진입, 2년 차에는 1부 리그 승격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영입된 브라질인 선수들의 활약에 힘입어 1974년, 창단 3년 만에 천황배 결승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 후에는 본가인 니호히메 신사의 궁사직에 전념했다. 이 신사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도 견뎌낸 피폭 건물로 알려졌으나, 2007년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2010년에 재건되었다. 말년에는 모교인 히로시마코쿠타이지 고등학교 축구부 OB회인 리조 축구단 회장을 맡아 축구부 창설 100주년 기념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2011년 10월 12일 오전 2시 8분, 췌장암으로 히로시마 시내 병원에서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6. 사망
만년에는 모교 히로시마코쿠타이지 고등학교 축구부 OB회인 리조 축구단 회장을 맡아, 동 축구부 창부 100주년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2011년 10월 12일 오전 2시 08분, 췌장암으로 히로시마 시내 병원에서 사망하였다。향년 87세였다。
7. 통계
* 국제 A매치 2경기 0득점 (1954)
7.1. 국가대표팀
1954년 3월, 와타나베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1954년 FIFA 월드컵 예선에 참가했다. 이 예선에서 3월 14일, 그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데뷔했다. 그는 또한 1954년 아시안 게임에도 출전했다. 그는 1954년 일본 대표팀 소속으로 총 2경기에 출전했으나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통산 기록 | ||
|---|---|---|
| 연도 | 출전 | 득점 |
| 1954 | 2 | 0 |
| 합계 | 2 | 0 |
7.2. 국가대표팀 경기
1954년 3월, 와타나베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1954년 FIFA 월드컵 예선에 참가했다. 이 예선에서 3월 14일, 도쿄의 메이지 진구 가이엔 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의 경기를 통해 A매치 데뷔를 하였다. 그는 또한 1954년 마닐라 아시안 게임에도 출전하여 5월 3일 인도와의 경기에 나섰다. 그는 1954년 한 해 동안 일본 대표팀 소속으로 총 2경기에 출전했으나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 연도별 A매치 출전 기록 | ||
|---|---|---|
| 연도 | 출전 | 골 |
| 1954 | 2 | 0 |
| |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