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창군
1. 개요
완창군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덕흥대원군의 12대손이며 완성군의 양자이다. 1805년에 태어나 1830년 목릉 참봉을 거쳐, 1837년 완창군에 봉해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가자되었다. 1840년에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843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아들이 역모에 연루되어 곤경을 겪었으나, 고종 즉위 후 신원되어 덕흥대원군 사손의 지위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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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궁 주인 -
덕흥대원군
덕흥대원군은 조선 중종의 아들이자 선조의 아버지로, 덕흥군 시절 사치와 노비 문제로 탄핵을 받았지만 선조 즉위 후 대원군으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삶은 왕권과 신권의 관계 및 성리학적 이념을 보여주는 사례이고 문학적 업적도 남겼다. -
도정궁 주인 -
이해창 (조선귀족)
이해창은 조선 후기 왕족이자 대한제국 관료, 조선귀족으로, 창산군에 봉해졌으며 한일 병합 후 후작 작위를 받았으나 친일 행적으로 비판받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조선의 왕족 -
덕혜옹주
덕혜옹주는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나 불행한 삶을 살았던 대한제국의 옹주로, 일본 유학 후 결혼 생활 중 조현병 증세를 보였으며 해방 후 귀국하여 창덕궁에서 생을 마감했고, 그녀의 삶은 여러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조선의 왕족 -
흥선대원군
조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 종식 후 권력을 장악하여 개혁을 추진했으나, 쇄국정책과 독재적 통치로 비판받았고, 실각 후 재집권을 시도하다 톈진으로 압송, 명성황후 암살 의혹 등 격변기 조선의 대표적 인물로 긍정·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2. 생애
1805년(순조 5) 5월 2일에 태어나 음직으로 관직에 진출, 1830년(순조 30) 목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이해 6월 6일, 완성군 이희가 임종 직전 상소하여 본생 삼촌질(三寸姪)인 이시인을 양자로 삼아 사묘(덕흥궁) 봉사를 잇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완성군 이희가 사망한 후 도정궁을 상속받았다.
1831년(순조 31) 산송 문제로 형인 전 현감 이시학(李時學)과 함께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이 격쟁은 이해 9월 6일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군수(郡守)를 거쳐, 1837년(헌종 3) 대왕대비의 명으로 소의대부(昭義大夫) 완창군(完昌君)에 봉작받고, 중의대부(中義大夫)로 가자되었다. 선원보략(璿源譜略)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덕온공주(德溫公主) 가례청(嘉禮廳) 주혼(主婚)으로 봉무하였다.
1838년(헌종 4) 가덕대부(嘉德大夫)에 가자되고, 남단(南壇) 추향대제(秋享大祭) 때 헌관(獻官)으로 봉무하였다.
1839년(헌종 5) 흥인군 이최응(李最應)·남령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 등과 의덕대부(宜德大夫)에 가자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낙점(落點)되었다.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를 역임하였다.
1840년(헌종 6) 진위 겸 진향사(陳慰謙進香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3년(헌종 9) 3월 11일 흥록대부(興祿大夫)의 작위를 받고 향년 39세로 별세하여 양주 수락산 국내 자좌(子坐)에 묻혔다.
2.1. 가계와 초기 활동
덕흥대원군의 12대손으로, 완성군 이희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본관은 전주, 휘는 시인(時仁), 자는 덕일(德一)이다. 생부는 통덕랑 이옥이며, 생모는 진사 김낙원(金樂元)의 딸 경주 김씨(慶州 金氏)이다.
1805년(순조 5) 5월 2일에 태어났다. 음직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1830년(순조 30) 목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이해 6월 6일, 임종 직전의 완성군 이희가 상소하여 본생 삼촌질(三寸姪)인 이시인을 아들로 삼아 사묘(덕흥궁) 봉사를 잇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따라 완성군의 양자가 되었고, 완성군 이희가 사망한 후 도정궁을 상속받았다.
1831년(순조 31)에는 산송 문제로 형인 전 현감 이시학(李時學)과 함께 의금부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 격쟁은 이해 9월 6일까지 계속되었다.
2.2. 완창군 시절
1830년(순조 30) 음직으로 완성군 이희(李爔)의 조카로 구전의입되어 목릉 참봉(穆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이해 6월 6일 임종 직전의 완성군 이희가 상소하여 본생(本生) 삼촌질(三寸姪) 참봉(參奉) 이시인(李時仁)을 아들로 삼아 사묘(私廟, 덕흥궁) 봉사(祀事)하길 청하여 완성군에게 출계하여 아들이 되었다. 완성군 희는 곧 사망했고 그가 도정궁을 상속하였다.
1831년(순조 31) 산송사(山訟事) 문제로 위외(衛外)의 격쟁(擊錚)하여 친형 전(前) 현감(縣監) 이시학(李時學)과 의금부(義禁府)에 나수(拿囚)되었다가 이 격쟁(擊錚)은 이해 9월 6일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군수(郡守)를 거쳐, 1837년(헌종 3) 대왕대비(大王大妃) 명으로 승습봉(承襲封)하여 소의대부(昭義大夫) 완창군(完昌君)에 봉작받고, 이해 3월 21일 중의대부(中義大夫)로 가자되었다. 이해 5월 10일 대왕대비 명으로 사옹원 제조(司饔提調)에 제수되었고, 5월 13일 선원보략(璿源譜略) 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5월 15일 승헌대부(承憲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6월 2일 소분 정사(掃墳呈辭)로 급유마(給由馬)와 요전상(澆奠床)을 받았으며, 8월 17일 덕온공주(德溫公主) 가례청(嘉禮廳) 주혼(主婚)으로 봉무하여 안구마(鞍具馬) 1필(一匹)를 하사받고, 9월 12일 숭헌대부(崇憲大夫)에 가자되었다. 9월 15일 문안 재신(問安宰臣)으로 청나라 사신이 있는 관소(館所)로 나아가 문안(問安)하였다.
1838년(헌종 4) 가덕대부(嘉德大夫)에 가자되고, 이해 8월 7일 남단(南壇) 추향대제(秋享大祭) 때 헌관(獻官)으로 봉무하였다. 9월 13일 가토 정사(加土呈辭)로 급유마(給由馬)와 요전상(澆奠床)을 받았다.
1839년(헌종 5) 흥인군 이최응(李最應)·남령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 등과 의덕대부(宜德大夫)에 가자되고, 2월 5일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낙점(落點)되었다. 4월 17일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로 역임 중 패초(牌招)하여 추이감봉(推移監捧) 되었다가 5월 8일 서용(敍用)되고 구전부직(口傳付職)되어 다시 완창군(完昌君)에 제수되었다. 5월 25일 흥완군 이정응(李晸應)과 사옹 제조(司饔提調)에 제수되었다.
1840년(헌종 6) 진위 겸 진향사(陳慰謙進香使)로 부사(副使) 윤명규(尹命圭)와 서장관(書狀官) 한계원(韓啓源)을 대동하여 청나라에 다녀왔다. 흥록대부(興祿大夫)에 가자되고, 1843년(헌종 9) 3월 11일 향년 39세로 별세하여 양주 수락산 국내 자좌(子坐)로 예장하였다.
2.3. 사후
사후 아들 이하전의 옥사에 연좌되어 신주가 사당에서 내쳐지는 불운을 겪었다.
1862년(철종 13) 아들 이하전이 왕으로 추대받았다는 이재두(李載斗)의 무고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같은 해 윤8월 5일 아들의 죄에 연좌되어 종친부(宗親府)의 상소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손(祀孫) 지위를 박탈당하고 본가로 쫓겨났다. 밀산군(密山君) 이찬(李澯)의 9대손인 유학(幼學) 이익주(李益周, 후에 李載益)가 완성군(完城君) 이희(李爔)의 후손(後孫)으로 입적되었다.
1864년(고종 1) 8월 29일 종친부에서 덕흥대원군의 뒤를 잇는 문제를 아뢰자, 고종은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완창군이 덕흥대원군의 종손(宗孫)으로서 그 자신이 죽은 지도 이미 오래된 후에 자기의 아들에게 연루되어 신주(神主)가 사당에서 내쳐졌으니, 본디 지극히 불행한 일이다. 아들이 이미 죄를 벗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만 그대로 내쳐져 있다면 저승에서라도 억울해서 울부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완창군의 사판(祀版)을 도로 사당에 봉안하고, 이익주(李益周, 이재익)는 완성군(完城君)의 둘째 아들로 순서를 정하여 조상의 제사를 대신 받들게 하다가 손자가 생기면 이하전의 후사로 삼아서 종부(宗府)와 예조(禮曹)로 하여금 잘 알고 거행하게 하라."
1872년(고종 9) 7월 25일 덕흥대원군의 사손으로 이하전을 정하고, 고종은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이하전(李夏銓)의 일은 죄명과 누명을 벗었으니 이제는 문제되는 바가 없다. 완성군(完城君)의 차양자(次養子)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섭사손(攝祀孫)이 된 것은 그때로서는 부득이한 일이었다. 사손을 대신한 이재익(李載益)은 본가에 돌려보내고 이하전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을 종친부(宗親府)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게 하라."
3. 가족 관계
| | 이름 || 비고 | ||
|---|---|---|
| 양부 | 완성군 이희(李爔) | |
| 양모 | 남양군부인 홍씨(南陽郡夫人 洪氏) | |
| 양계모 | 전주군부인 유씨(全州郡夫人 柳氏) | |
| 양계모 | 임천군부인 조씨(林川郡夫人 趙氏) | |
| 생부 | 이옥(李𪸛) | |
| 생모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
| 부인 | 남원군부인 윤씨(南原郡夫人 尹氏) | |
| 부인 | 경주군부인 김씨(慶州郡夫人 金氏) | |
| 후실 | (이름 미상) | |
| 이복 형제 | 이시문(李時文) | |
| 이복 형제 | 이시백(李時伯) | |
| 이복 여동생 | 이씨 | 민준호(閔峻鎬)에게 출가, 민영기의 부친 |
| 친형 | 이시학(李時學) | |
| 친여동생 | 이씨 | 민치구(閔致久)에게 출가, 여흥대원비 민씨 (고종의 사친)의 모친 |
| 장남 | 이우용(李禹鎔) | 후실 소생 |
| 차남 | 증 경원군 이하전(李夏銓) | 경주군부인 김씨 소생, 헌종과 철종조에 왕위 계승 물망에 오름 |
| 조카 | 이사규(李士圭) |